일본의 엇갈린 판결, 소록도 한센인 보상청구소송
본문
한센인의 소망, 사람들과 어울려 인간답게 사는 것
한센병은 흔히 나병 또는 문둥병이라고 불리는 병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센병을 천형이라고 부를 만큼 한센병에 걸린 사람은 철저히 소외되고 억눌린 삶을 강요당해 왔다. 심지어 일제시대에 소록도에 강제로 끌려들어간 이후로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수 십 년 동안 한번도 육지에 나와 보지 못한 한센인도 있을 정도다.
사실 한센병은 그저 병일 따름이다.
단지 경우에 따라 신체의 일부 부위가 변형되는 특이한 병일뿐이다. 게다가 전염력이 거의 없고,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센병은 이미 정복된 지 오래된 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 심어진 한센병에 대한 무지와 편견은 오랜 세월 한센인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이들의 인권을 짓밟아왔다.
과거에는 한센병이 전염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한센인이 빵을 사러 가게에 가면 가게 주인은 한센인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는 빵을 멀리 던져 줬다고 한다. 그리고 한센인이 준 돈은 햇볕에 쬐어 이른바 ‘살균’한다는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도 한센인에 대한 이러한 무지와 편견은 달라지지 않아서 이른바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이와 관련하여 한센인들이 개구리소년들을 데려가 잡아먹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문까지 나돌아 한센인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한센인은 한센병에 걸린 것을 아는 순간부터 마치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평생 숨어서 살아야 했고 가족과도 생이별한 채로 외롭게 살아야 했다.
지금도 한센인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어떤 나쁜 영향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자신들의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게다가 그나마 자식이라도 있어서 이러한 걱정이라도 하는 한센인들 뒤에는 강제로 단종 당해, 늙어서도 가족 하나 없이, 귀여운 손자들의 재롱도 보지 못한 채 그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외롭게 하루하루 연명해나가고 있는 한센인들이 있다. 이들은 그야말로 고통 그 자체인 삶을 살아온 것이다.
한센인들의 소망은 간단하다.
이제라도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인간답게 사는 것,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전부이다.
평생 소록도에 갇혀 살던 분들이 단체로 제주도 여행을 가면서 감격에 겨워했다는 어느 신문보도를 보면 가슴 한 켠이 아프고 찡할 뿐이다.
그 첫걸음으로 소록도한센병보상청구소송 시작
그런데 지난 2003년, 이러한 한센인들의 한을 풀어 보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바로 일본에서의 소록도한센병보상청구소송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일본은 1907년부터 1996년까지 90여년 동안 ‘나예방법’을 유지하면서 한센인에 대한 강제격리정책을 펴왔다.
그러다 1996년 ‘나예방법’이 폐지되자 일본의 한센인들은 “그간 일본정부가 취해온 한센인에 대한 강제격리정책이 의학적 근거가 없는 인권침해로서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고, 일본 구마모토지방재판소는 2001년 5월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일본 한센인들에 대한 강제격리정책이 한센인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위헌이므로, 정부는 입소기간에 따라 1인당 800만원-1400만엔에 이르는 손해배상을 하라”는 것이 당시 구마모토지방재판소의 판결이었다.
이에 고이즈미 총리가 한센인들에게 사죄하면서 만들어진 법이 ‘한센인특별보상법’이다.
바로 이 법에 근거해서 우리는 소록도 한센병보상청구소송을 시작했다.
첫 단계로 우리는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시기에 소록도갱생원에 강제수용당한 것이기 때문에 소록도의 한센인들도 위 특별법에 따라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소록도 갱생원은 일본 국내에 설치된 수용소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우리는 2004년 8월부터 한국의 한센인 117명과 함께 일본정부를 상대로 보상거부처분취소소송을 동경지방재판소에 제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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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25일과 27일 각각 소록도병원(좌)과 종묘공원(우)에서는 일본에서 내려진 차별적 판결을 규탄하는 항의 집회가 열렸다. |
엇갈린 판결은 민족적 차별
그러나 지난 10월 25일 동경지방재판소는 동일한 소송을 함께 제기했던 대만과 한국 사이에 극히 모순된 판결을 내놓았다.
한국의 소록도 한센인들에 대해서는 일제시대의 격리정책으로 이들이 가혹한 인권 침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후생성 고시 규정이 소록도를 보상 대상에 포함시켰다고 해석할 만한 근거가 없다”며 기각해놓고 대만의 한센인데 대해서는 “(한센인특별보상법이) 넓게 볼 때 한센병의 구호, 요양시설에 입소하고 있었던 사람을 구제하고자 하는 특별 입법”이기 때문에 “대만에 있다는 이유로, 그곳의 입소자를 보상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평등취급의 원칙상 바람직하지 않다”고 정반대로 판결한 것이다.
한국의 판결을 맡은 민사 3부와 대만의 판결을 맡은 민사38부는 같은날 겨우 30분 차이를 두고 이렇게 다른 판결을 내놓았다.
일본 동경지방재판소의 엇갈린 판결은 한국의 한센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이나 다름없다. 이에 한국의 한센인들은 즉시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는 한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연일 항의집회를 열고 있다.
최근 일본정부는 소록도 한센인에 대해서도 보상방침을 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조차도 즉각 보상이 아니라 항소심에서의 화해를 통해 보상문제를 해결하겠단다.
원고들은 평균연령이 이미 81세를 넘은 고령으로 언제 사망할지 모르는 상태다.
일본정부는 시간을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인류보편적인 평등과 인권의 이념에 비추어 즉각 평등보상에 응해야 한다.
한센인들의 한맺힌 삶은 몇 푼의 보상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한센인 인권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함께 고민할 차례다.
사실 이번 소송은 일본의 한센인 손해배상소송을 이끌었던 일본변호인단의 제안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기회를 빌어 일본변호단의 헌신적인 활동에 감사드리며, 이번 소송을 계기로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 간 연대를 통해 한일관계가 새롭게 정립될 수 있기를 바란다.
글 이영기 변호사(소록도 한센인 보상청구소송 한국 변호단)
사진제공 한빛복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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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소록도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후 일제는 1935년 "조선나예방령"을 근거로 전국 부랑 한센병환자에 대한 강제모집을 실시하여 소록도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강제모집 과정에서 환자들에 대한 정당한 법적 절차가 무시된 것은 물론 의사의 진단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소록도 원장에게는 "조선총독부나요양소환자징계검속규정"에 따라 입원환제에 대한 막강한 징계검속권이 법적으로 부여돼 있어 견책, 30일 이내의 근신, 7일 이내 주·부식의 1/2감식, 그리고 30일 이내 감금 등을 할 수 있었고, 특별히 상황이 중대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총독의 인가를 얻어 60일까지 감금을 연장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일제강점기의 소록도는 감옥과 다를 바 없었던 셈이다 1935년 소록도에 건립되어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는 검시실 건물을 보면 당시의 실상이 잘 드러난다. 검시실 또는 해부실로 불리는 이 건물은 두 칸으로 나뉘어져있다. 입구의 방은 주로 사망환자의 검시를 위한 해부실로 사용되었고, 안쪽은 영안실로 사용되었으며 이곳에서는 정관수술이 집행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모든 사망환자는 본인 및 가족의 뜻과 상관없이 이곳에서 사망원인에 대한 해부절차를 마친 뒤 간단한 장례식을 치렀다. 그 후 섬 내의 화장장에서 화장된 후 납골당에 유골로 안치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소록도 환자들은 3번 죽는다"고 했다는 데, "첫 번째는 한센병 발병으로, 두 번째는 죽은 후 시체 해부로, 세 번쨰는 장례 후 화장으로 죽는다"고 했다고. 정관수술은 한센병 환자의 근절을 위해 1927년 일본 생리학회에서 한센병 연구 의학자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병원 당국에서는 1916년 개원 이래 남녀 환자 별거제를 실시하였으며 1936년부터는 정관수술을 조건으로 부부 동거를 허용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일제시대에는 병원규정을 어겨 감금실에 수감되었다가 출감하는 환자들에 대해서도 그 벌칙의 하나로 정관수술이 행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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