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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호 특별기획 (4)| 다시 들춰보는 함께걸음 역대기자들의 취재수첩 ①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농성장에서 새우잠 잤던 그때

본문

89년 6~7월, ‘전주 이리 혜화학교 사건’

▲89년 6~7월 밀착취재로 양미숙 기자가 쓴 "민주화
바람이 몰고온 허"에 실린 혜화학교 사건 진술장면

1988년 5월 20일 배낭 하나 메고 장항선 기차에 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전라도 땅을 밟아보는 매력도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은 무거웠다.
함께걸음 기자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전북 이리 혜화 학교(정신지체학교)’사건이었다. 당시 3박 4일간 이 사건에 매달려 학교, 농성 장(이리시 평민당사)등을 오가면서 취재하기에 바빴다.
사건은(함께걸음 1988년 6,7월호 34페이지에 있음) 김 교장이 공금횡령을 했다, 학생들을 성폭행 및 암매장, 교사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켰다는 혐의로 구속이 된 내용이다. 교사들을 만나고, 김 교장의 아들을 만나면서 취재의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농성 장에서 밤샘을 하면서 새우잠을 잤던 기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도 그 사건을 뒤돌아보면 서로의 이권이 개입된 개인주의가 불러온 바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장애우에 대한 복지는 전무한 상태여서 장애우 복지 법안 통과냐, 아니냐가 이슈였다. ‘장애자’에서 ‘장애우’로 고쳐 쓰는 인식변화를 요구하는 시기라, 어찌 보면 땅속 저 밑에 숨어 있던 싹이 막 고개를 드는 초봄이랄까? 혼돈의 혼돈은 거듭되고 장애 우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함께걸음’을 통해 일파만파로 퍼져가고 있을 때였다.
이 사건도 1988년 5월 17일자 전북 이리 한겨레신문사 장 기자의 기사가 시발점이 되었다. 신문에 실린 기사만 보면 누구나 교장 ‘죽일 놈’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 기자의 미흡한 취재는 정확성이 떨어진 채 이리를 들끓게 했다.
취재 결과 어느 한 사람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장애우들을 대변하는 교사들조차 제자들에게 떳떳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김 교장의 죄목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구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의사표현을 잘 못하는 정신지체 학생을 놓고 학교 측과 교사들 간에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일들이 종종 신문지면 한 구석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결국은 이런 사건을 들여다보면 장애우들을 위한 것 보다 개인의 사심과 기관의 이득을 위해 장애우들을 앞으로 내세우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당시 이리 혜화 학교 사건은 취재하면서도 답답했었다. 분명 문제점이 많았다. 낙후된 시설, 교사들이 공립화를 내세우고 마치 학생들을 위한다며 목소리 키우는 일, 교장의 주먹구구식의 행정, 시민단체들의 이득 챙기기, 등등 무엇 하나 개운한 게 없었다. 문제는 진정 장애우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받아들여 이들을 대변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깨에 카메라 메고 수첩 들고 온몸에 매달 것은 다 매달고 농성장에서 다시 학교로 왔다갔다 취재하면서도 피곤한 줄도 몰랐던 때였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나왔는지 절로 웃음이 난다.
그 당시 연구소는 임원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경비로  운영되었기에 아주 열악했다. 취재며 편집, 사진촬영, 표지선정까지 책 만들기의 모든 일을 혼자 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원고가 늦거나 인쇄소 사정 등등으로 두 달을 묶어서 낼 때도 가끔 있었다.
당시 무가지 형태는 ‘함께 걸음’하나였기에 장애우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장이었기도 했다.

매달 환골탈태 하시길…
돌이켜보면 연구소가 처음에 역삼동에서 시작해 용산 문배동으로, 또다시 성산 회관 옆 한의원 건물로 이사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고비가 있었다. 혼자만의 고민이었지만 당장 ‘함께걸음’과 연결되는 문제라 연구소 임원들의 적극적인 후원이 없었더라면 아마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용산으로 연구소가 이사했을 때는 인쇄소와 같은 건물에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하자면 시끄러운 시장 같았다.
그래서 원고가 잘 써지지 않는 날도 많았다. 더구나 연구소와 ‘함께 걸음’이 같은 공간에서 있었기 때문에 연구소 손님들이 많이 오는 날은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일이 진행되었던 것은 ‘함께걸음’자문위원들 덕분이다. 이 분들이 원고 청탁부터 객원기자까지 무엇이든지 도움의 손길을 뻗으면 반갑게 응해 주었기에 ‘함께 걸음’이 지속되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전국에 있는 장애우들의 열성이 ‘함께 걸음’과 같이 하며 채찍과 질타를 서슴지 않았다. 기사에 오자 하나까지 꼭꼭 집어 편지로 보내주기도 했을 정도니까.
과거를 돌이켜보니 나의 젊은 시절은 많은 장애우들과 함께 보낸 것 같다. 특히 그 시절에 만난 이인숙 씨(중증장애 때문에 누워서 시를 썼으며 당시 미아리 산꼭대기 골목길 모퉁이 집에 살았었다.)는 지금도 만나 담소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知友 중에 한 분이다.
지금 이 현실에도 열심히 살고 있지만 ‘함께 걸음’과 함께 한 나의 한 시절은 장애우들에게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던 또 다른 나의 학문의 장이었다.
2005년 ‘함께걸음’은 換骨奪胎(환골탈태)한 모습으로 매달 전해진다. 참 고맙다. ‘함께걸음’에 계신 모든 분들이 열심히 발로 뛴 결과 200호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에 새삼 감사드린다.그리고 언제나 변함없이 장애우들의 오른 팔 역할을 해 주길 바란다.


글 양미숙
저는 1988년부터 89년까지 함께걸음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도자기 분야 쪽에서 일을 하고 있지요. 한 10여년 됐나봅니다. 인사동에서 해마다 전시도 하지요. 잠깐, 오는 10월 12일에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답니다. 한 번 오세요.

 

작성자양미숙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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