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2세 환우회 고(故) 김형율 회장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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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까운 지인들을 많이도 떠나보냈다. 슬픔에 잠겨 있던 나에게 장애운동을 하는 한 선배는 "네가 아직 젊은 나이지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런 일은 계속 있을 거야"라고 무덤덤하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철들면서부터 장애와 질병 때문에 짧은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과 구체적 인연을 맺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장애" 때문이라 하더라도, 사회적 타살로 밖에 정의할 수 없는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하는지, 나에겐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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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의김형율씨 |
"나는 단지 아프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고(故) 김형율(35세).
5월 29일 오전, 그이도 흙으로 돌아갔다.
비록 원폭에 대한 실체와 원폭피해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인식한 지 불과 4~5년에 지나지 않지만, 일반인의 30%에 해당하는 폐활량을 갖고 있어 걷는 것,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힘겨워하면서도 지난 60년간 일본과 미국 정부가 원폭에 대한 유전 문제를 왜곡, 은폐하며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현실에 온 몸을 바쳐 싸웠던 그였다.
노점을 하면서도 3남2녀의 자식을 훌륭히 키워내신 부모님이 그이 곁에 있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학교보다 병원이 친숙했던 그이의 병원비는 한번 입원에 기백만 원이 지출되었고, 그로 인해 가족의 생활은 언제나 궁핍했다.
아픈 몸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했고, 컴퓨터를 전공한 탓에 쉽게 취업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쉬 피로해지는 그의 몸을 인정하는 회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30살이 넘어서도 가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방황을 하다가,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을 무렵 그의 시선은 "원자폭탄"에 머물렀다. 그의 어머니가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피해자로 한 평생을 피부병과 종양으로 고생하셨고, 자신 또한 원인모를 "선청성면역글로블린 결핍증"이란 희귀난치병을 진단받고 나서였다. "내가 왜 이런 질병에 시달려야 하며, 그로 인해 삶을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스스로의 물음에 매달리자, 아픈 한국 사회의 근대사와 과거를 부정하는 미국과 일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거의 독학으로 원폭과 원폭피해자에 대한 관련 서적과 자료를 찾아 읽어갔고, 일어 자원활동가를 구해 자료들을 번역해 갔다.
그는 언제 삶을 마감할지 모르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온 몸을 내던지며 싸웠던 백혈병 환우회의 투쟁을 보며,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 때문에 아픈 사람들이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쓰러져 가는 것은 폭력이며 인권의 문제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원폭피해자의 가족이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지 못했다. 취업과 결혼, 모든 인간관계에서의 부당한 편견과 차별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자신이 아픈 것은 비단 개인의 질병 문제가 아닌 역사적?사회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하고 있다"
하지만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해서 였을까? 호흡기 장애로 숨을 헐떡이고, 고령의 아버지가 큰 배낭 속에 온갖 자료를 짊어지고 때로는 그까지 안고 이동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주저함 없이 원폭2세환우 문제에 진상규명과 지원조치를 주장하며, 원폭과 관련된 "한국의 히로시마" "핵의 아이들" "그날 이후"란 책들을 들고, 아픈 몸을 하고서도 서울, 합천, 일본 등을 마다않고 뛰어다녔다.
그렇지만 사회는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원폭2세들과 원폭피해자단체로부터 "왜 치부를 들춰내는가, 조용히 있어라. 구걸하지 마라!" 등등의 모욕적인 언사는 다반사였고, 같은 처지에 놓여져 있는 동지(?)라고 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제발 튀지 말고 가만 있어라"는 어이없는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이가 스스로 "원폭2세 환우"라는 자기정체성을 드러낸 것은 일종의 커밍아웃으로, 또 용기 있는 행동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이가 아니었다면 올 해 2월 국가인권위에서 원폭피해자와 2세의 관계성에 대한 실태조사 자료라는 것은 땅 속 깊이 파묻혀질 한국 사회의 어두운 역사였을 것이다.
인권?시민단체와 공대위라는 연대의 틀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이의 열정적 발품과 땀흘려가며 외쳤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자폭탄피해자진상규명과지원에관한특별법"이라는 것이 논의되고 있는 현 상황을 이끈 것도 그의 피나는 노력에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그 외로움 속에서도, 질병에 의한 고통 속에서도, 하루가 멀다하게 이메일로 소식과 자료들을 보내며, 하나하나 동지를 만들어가고, 또 작지만 일말의 성과를 만들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3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한국 사회에 원폭피해자 문제를 다시금 제기하고 사회적으로 풀어갈 기반을 다질 수 없을 것이라고 난 확신한다.
지난해 그이가 녹색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고 있을 때 나에게 전화를 걸어 사진기를 들고 찾아와 달라고 했다. 당시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하고 있다"는 무언의 눈빛을 그에게 확인하고는 전율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작은 체구에 몇 마디 말을 하다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잇는 그는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고 했고, 원폭1세 부모님과 장애가 있는 2세 자녀들, 그 가족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며, 나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했었다. 그러마라고 대답을 한지 벌써 몇 개월이 흘러…, 이젠 죽은 자와의 약속이 되어 버렸다.
"한·미·일 정부는 원폭2세 환우들에 대한 "선지원 후규명"으로 생존권을 보장하라."
장례식장에서 만난 그의 아버지 점퍼에는 그가 고통스러워하며 쏟아낸 객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피를 토하며 정신을 잃은 채 아버지 품에 안겨 있던 그가 보이는 것 같아 괴로웠지만, "내 아들을 이렇게 고통 속에 죽어가게 한 놈들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아버지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운을 차리고 그이와의 약속을 실천하는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일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언젠가 그이는 말했었다.
"단지, 아프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그러나, 아파도…, 미쳐 돌아가는 세상 때문에 아파도, 우리의 조국(?)은 오늘도 여전히 아픈 국민에게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하며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 "만" 하고 있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가 보낸 메일의 서명 칸에는 항상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한?미?일 정부는 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에 대한 "선지원 후규명"으로 생존권을 보장하라."
얼마 전 일본에서 일본인 피폭자와 시민단체 사람들에게 "그날 이후"라는 사진집을 돌리며 이를 주장했지만, 그곳에서도 같은 한국인이 내뱉은 "조용히 있어라, 구걸하지 마라" 라는 말을 듣고 깊은 상처에 몇 날 며칠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이는 5월 25일 밤, 특별법 제정에 대한 2세 환우회의 입장이라는 글을 보내며, 다시 한번 전의를 불태우기도 했었다.
그는 원폭피해자인 부모님과 그 2세들의 삶이 몹쓸 원자폭탄으로 갈갈이 찢겨져 나간 차별적 상황은 역사적, 사회적 문제라고 인식하고 당당히 발언했던 당사자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핵을 반대하는 일에는 목소리를 높였어도, 그 참혹한 피해의 당사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신경했다.
더구나 국가와 사회는 진정한 반성과 참회로 그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지독한 뻔뻔함으로 일관하며 냉대와 멸시의 눈초리로 응대했다.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한국 사회의 이 오만함을 도대체 어찌해야 할까.
우린 그동안 한사람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게 했었다. 그것도 가장 몸이 힘든 당사자에게.
어쩌면 언제까지나 당사자가 아니면 "힘들고 바쁘다"는 핑계로 살아가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그도 떠났으니, 이제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 볼 때가 된 것 같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시 우리를 보자.
글 홍여준민 객원기자
사진 함께걸음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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