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현준 열사 추모제
본문
형, 오늘 할 일이 무척 많은데, 어제의 숙취가 풀리지 않아 몸이 많이 괴로워요. 튼튼한 위장을 갖고 있던 나였는데, 이제는 나이 먹어서 인가? 속도 쓰리~하네요.뭐, 내가 하루 이틀 이런 것도 아니니까, 이런 투정하면 형은 “그래, 좋았어? 근데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했겠죠. 그런데요, ‘형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에 아마 이 글을 쓰는 걸 겁니다. 형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 형을 떠올리며 한 잔 했거든요. 사람들이 술 먹는 핑계도 참 다양하죠? 그래도 이해하세요. 어제 사람들은 형 때문에 울다가, 웃다가, 심각하다가, 행복해하다가…, 그야말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모두 한 자리에서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요, 맞아요. 어제는 아주 좋았어요. 처음에는 무겁고 우울했지만 나중에는 좋았어요. 물론 술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 자리에서 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많이 생각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내가 알지 못했던 형의 자잘한 일상과 살아온 이야기를 형과 함께 해 온 사람들로부터 듣는 것은 즐거움이었습니다. 내가 형을 떠올릴 때 가끔은 피씩 웃을 수 있는 내용도 있었거든요. 특히 한 달에 한번 고도리 치는 모임을 가졌다는 것, 하하 형이 도박에 심취해 있었다는 건 어제 처음 알았거든요. 공부를 너무 잘했고, 집에서도 혼자 노트에 빽빽이 적어가면서 공부한 정치사회학, 철학, 문학, 예술 분야의 내용들, 썰렁한 농담의 대부라는 것과 장애 때문에 우아하게 밥과 국, 반찬을 떠먹는 당연한 것조차도 인정되지 않아, 비빔밥을 제일 싫어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형과 같은 장애를 갖고 있던 중증장애를 가진 분들이, 그 몸으로 자립을 외치고 실천했던 형을 통해 많은 깨달음과 희망을 가졌다는 것도 재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놈의 ‘잠’이 형에게는 얼마나 치열한 싸움의 대상이었는지도 다시 확인되더군요. 편안한 휴식의 시간이 되어야 할 밤이, 오히려 혼자 있음으로 인해 얼마나 더 고통스러웠는지….
그래서 정하가 그러더군요. 형에 대한 흩어진 이야기들이 모자이크가 되어 떠돌다가 이제야 조각을 맞춰나가는 것 같다구요. 어제는 그런 자리였으니, 그래서 술에 취해 비틀거렸으니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바래요.
49제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은 있지만 그 의미를 잘 알지는 못했어요. 불교적인 의식이라는 것 뿐, 무슨 의미로 왜 하는지는 잘 몰랐죠. 돌아와 의미를 찾아보니, 불교와 유교가 결합된 형태의 제례의식인데, 불교에서는 그 사람의 살아 생전 업보는 그 누구도 끼어 들 수 없는 그 사람만의 몫으로 여기지만, 유교에서는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해 49일 동안 정성스럽게 재를 올리면 후예들의 공덕에 힘입어 보다 좋은 세상으로 갈 수 있고, 그 후예들에게도 복이 내린다고 해서 올리는 제례의식이라네요. 어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동안 하루도 형을 잊은 적이 없다”고 이야기했고, 어머님은 “극락왕생이 결정되는 날이 오늘이라는데, 주변에서 이렇게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제 홀로 갔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다. 내 피 같고 분신 같은 아들이었는데, 뭘 원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도 몰랐다”하시며, 뭔가 안심하시는 눈치셨죠. 그래서 어제의 자리는 우리 곁을 떠난 형이나 남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함께 길을 가는 동지들끼리 형을 핑계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다시 한번 ‘장애해방’을 위한 힘과 용기 그리고 구체적 고민을 나눌 수 있었으니까요.
어제 있었던 일들은 형도 와서 잘 보았죠? 사람들의 모습.
여전히 경석이형은 “투쟁으로 말하리!”라고 했죠. 형과 있었던 경험에서도 그이답게 투쟁현장에서의 모습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더군요. 지난 해 420투쟁 때 용산 육교투쟁 현장으로 한걸음에 달려왔고 형이 경찰에 연행되는 걸 보면서, 이현준이란 사람이 경찰서에서 제대로 잘 지낼 수 있다면, 활동보조 제대로 한다면 장애해방은 가능할꺼라고 생각했다나요? 수배중인 몸이지만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은 여전하더라구요.
노래공장의 혜규씨는 ‘들불의 노래’를 불러주었어요. 맨 마지막 가사였던 ‘~캄캄한 어둠의 질곡 속에 불꽃으로 타올라라~ / ~해방의 찬란한 길목에서 불꽃으로 타오르라~’는 우리 모두가 하고 싶었던 말이지만, 역시 그 불꽃을 지키고 일어서게 하는 건 여기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가수 이지상 선배도 왔어요. 얼마 전 아주 길게 술을 마실 자리가 있었는데, 한빛맹학교 학생들과 8년을 함께 한 경험이 있더군요. 장애문제가 무엇인지 너무나 상세히 알고 있었어요. 형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형의 떠남이 저항의 불꽃, 차별철폐의 불꽃, 평화, 생명, 사람됨의 불꽃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리고나서 부른 노래가 뭔지 알아요? 형이 그렇게 좋아했던 ‘철길’이었어요. ‘혼자 가는 길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리, 앞서거나 뒷 서지도 말고 이렇게~’내가 이지상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형이 몇 해전 음반을 CD로 구워 선물해줬쟎아요.(지상선배는 불법음반이라고 싫어할지 모르지만^^) 그 때 형이 나에게, 철길이라는 노래가 맘에 든다며 몇 번이고 컴퓨터로 들려줬죠. 형과 음악적 코드가 비슷해, 난 가끔 형 컴퓨터 공유에 들어가 음악을 듣곤 했는데…. 여하튼 나중에 지상 선배에게 “사람들에게 혹시 이 노래부탁을 받았냐”고 물었더니, 글쎄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부르고 싶어 선곡했다고. 아니, 이렇게 마음이 통할 수 있는 거예요? 혹시 형이 지상선배에게 미리 신호를 보낸 거 아니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도 와 달라고…. 문득 형이 우리들이 어제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함께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어제도 있었고, 내일도, 그 다음에도, 언제나, 늘, 항상 있을꺼란 확신도 가졌구요. 내가 틀린 거 아니죠? 그렇게 할꺼죠? … 그렇게 믿습니다.
어제 사람들은 형을 두고 꿈꾸는 혁명가였다고 말하기도 하고, 욕심이 많지만 꼭 실천으로 옮기는 실천가라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고집불통이었다면서 웃더군요. 자상한 삼촌이었고, 사람 좋아하는 해맑은 청년이었다고 했습니다. 영철이형은 형을 끝까지 보내기 싫다는 속내를 감추지 못했고, 주현이는 형이 떠나기 바로 전 자신에게 한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엉엉 울기까지 했습니다. 그 녀석, 제가 형이 서 있거나 카메라 가방을 든 채 큰 목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이 상상된다고 하니까, 누군가 49개의 계단을 오르는 거라고 49제를 설명했는데, 자신은 그곳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그 민감함 감수성에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용기 씨는 중증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이제는 혼자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도록 투쟁하겠다 하더군요. 독립생활운동을 하는 당사자로서 이제 동지들을 그렇게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도 하고, 지수언니는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제발 이제는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형이 그리도 원했던 평화로운 잠 말이예요. 윤두선 씨가 보내온 편지에는 형의 일상과 꿈, 차별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꼭 대화하는 것 같아 잠시 멍해지기도 했었어요.
‘형의 떠남’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형, 이야기하지 않아도 잘 알겠죠? 부디 그 마음을 잊지 말고 땅에 발 딛고 살아가도록, 언제나 함께 지혜와 용기를 주세요.
어제 추모제에서 마지막에 정하가 그러더군요. 형을 보내던 날 이 노래가 너무 부르고 싶었다고요. ‘장애해방가’.
자, 이제 형이 그렇게도 갈망했던 장애해방 그 날을 위해 우린 어깨 걸고 나아갑니다. 형을 위해서라기보다, 형이 그토록 갈망했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이상 형처럼 사람들을 어이없게 보내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자유롭게 가세요.
차별의 늪에서 나와 그 어떤 장벽도 없는 해방 세상으로요.
후배 준민이가
글 여준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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