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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을 통해서 본 장애우 역사 ⑫ - 1999년 (마지막 회)

굿바이! 장애우의 20세기

본문

세기 말 만들어지고 고쳐졌던 법률들
99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장애인직업재활법(이하 직재법)이다. 이 법은 당시 장애우들과 정부 관계부처, 그리고 관련된 국회상임위에서까지 뜨거운 감자였다.
직재법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98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기존의 「장애인고용촉진등에관한법률」이  경증장애우 고용 중심에,  전달체계 자체가 복지적 사고보다는 기업위주의 사고를 하는 노동부 하에 있었으며,  전문적인 직업재활체계가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노동부는 장애우에 대한 특별한 정책 없이 비장애우와 동일시해 단순히 취업처만 소개해 주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이 과

 
 
정에서 배제된 중증장애우의 고용과 직업재활을 복지부가 복지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중증장애우의 전문적인 직업재활과 고용의 효율성을 증대해야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인식에 따라 98년 9월 결성된 당시 새정치국민회의의 장애인직업정책기획단에 의해 장애인직업재활법이라는 새로운 법률안이 탄생했다. 이 법률안은 복지와 직업보장이 일원화된 체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장애우 직업정책 담당부서를 노동부에서 복지부로 이관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갈등이 시작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입장을 달리하던 지체장애인협회 등이 ‘복지부는 시혜적인 이미지가 강한 부서이기 때문에 복지부가 장애우 직업정책을 담당하면 장애우 직업정책이 시혜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성명서를 제출하기 시작했고, 노동부와 환경노동위원회도 반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99년 정기국회를 마감할 무렵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장애인고용촉진등에관한개정법률안을, 보건복지위원회에서는 장애인직업재활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극도의 대립양상으로 치달았다. 이로써 두 법의 법제사법위원회 상정으로 정책은 표류하게 되었고 결정은 계속 미뤄졌다.
이 법률안이 속도를 붙이며 진행된 것은 개정과정의 주요참여자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이 8월 대규모 집회를 연 이후부터다. 당시 <함께걸음>에 따르면 이 집회는 장애유형을 초월해서 공동이슈를 가지고 연 첫 집회로 무려 6천여명이 참여했는데, 이 집회 이후 대통령이 장애우 정책에 대한 개혁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후에도 비교적 소규모지만 장애우일할권리찾기운동연합의 단식농성 집회 등이 이어졌다. 대통령의 의지표명은 2000년에 실시될 "총선"을 염두에 둔 것으로 평가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99년 12월 4일 당정협의회를 통해 법의 주무부처는 노동부로 하되 장애인직업재활법의 내용을 받아 기금의 1/3을 복지부가 쓰고 사업의 계획을 복지부장관과 협의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결국 1998년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99년 노동부와 복지부 그리고 장애계 사이에서 오랜 진통을 겪은 끝에 탄생한 ‘장애인고용촉진및직업재활법’은 갈등 대립에 있었던 참여자들의 모든 요구를 모두 담은 덧붙이기식, 취합식의 방법을 취함으로써 정치권의 힘에 의해 갈등이 봉합된 결과물인 셈이다.
1999년은 89년 심신장애자복지법개정 이후 10년 만의 전면 개정이 있었던 해다.
이에 기존의 지체, 시각, 청각, 언어장애, 정신지체의 5종의 장애 외에 정신질환, 신장질환, 심장질환 등이 새롭게 장애범주에 포함됐다. 그리고 기존의 생계수당이 장애수당으로 바뀌었으며, 장애아동부양수당, 보호수당 등이 추가 되었다.
또한 국무총리 소속인 장애인복지조정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시청각 장애우등 정보 접근이 어려운 장애우를 위해 방송 프로그램에 수화통역과 자막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장애우의 선거권 확보를 위해 선거장소에 장애우 편의시설 등을 설치하도록 했다. 
그리고 장애인노인임산부등의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장애우 주차장에 일반 차량이 주차할 경우 부과하는 과태료 부과를 대통령령으로 했으며,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양팔장애우의 면허 취득도 가능해졌다.

시설의 수준이 바로 공무원들의 수준
99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김홍신 의원이 폭로한 장애우 시설의 강제불임 사건이다.
당시 김 의원의 ‘장애인 불법, 강제 불임수술 실태와 대책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은, 1차 조사를 통해 확인된 경우만 8개 시설 총 75명의 장애우가 83년부터 98년까지 15년에 걸쳐 강제 불임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때까지 장애계 내에서 소문만 무성했던 장애우 시설내 강제불임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면서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강제불임수술의 근거가 된 것은 지난 73년 공포 시행된 「모자보건법」제 9조.
당시 이 조항에는 ‘의사가 유전 또는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불임시술을 행하는 것이 공익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중략)…불임시술을 명령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무엇보다 강제불임수술 과정에 행정기관과의 협의가 있었음이 밝혀져 더욱 충격적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보건소와 가족계획협회의 실적에 따른 포상 등 적극적인 독려가 있었다.
실제로 이 법에 근거해 75년 충남 보령군에 있던 정심원이라는 시설의 요청으로 최초의 강제불임 수술이 이루어진 예가 있다.
이 법은 98년 2월 법 개정 이후, 엄연한 불법이다.
99년 폭로된 시설 장애우에 대한 강제불임수술 사건은 정신지체장애우들의 성과 결혼 등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를 고민케 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시설 장애우들의 인권이 짓밟히고 있는 상황에서 전주에서는 전주시 사회복지 수용시설 운영에 대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특위는 98년 11월초 동암재활원 직원의 원생성폭행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직된 것으로써 이러한 의회의 활동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위의 이재천 위원장은 “조사활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대상은 시설의 현실에 같이 매몰되어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공무원”이었다며 “시설의 수준이 바로 공무원들의 수준”이라고 밝혔다.

지장협 장기철 회장 퇴진 요구 전국에서 일어나
99년 1월. 서울 남영동에 있던 한국지체장애인연합(이하 지장협) 사무실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지장협의 장기철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러 온 30여명이 중앙회 사무실에 나온 비장애우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지장협의 포천지회 부지회장이 이들을 향해 가스총을 발사하기 까지 했다.
당시 지장협 포천시 지회 회원들은 지회장에게 협조적이지 않은 장애우는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운영하고 있는 사업장의 장부를 한 번도 감사한 적이 없으며 이러한 것들을 중앙회가 비호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전 경북지부 사무국장은 “중앙회 자체회관을 짓는데 모금하라고 해서, 94년도와 95년 전국적으로 1억원이 넘는 돈을 모금했다는데 자체 회관은 건립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회관 건립을 빙자해서 돈을 모은 것”이라며 장 회장을 고소했다.
그리고 안동지회장이었던 권 씨는 지장협이 전 내무부 장관인 백남치 의원의 힘으로 북부장애인복지관을 위탁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장 회장에 대한 지장협 내부에서의 사퇴 요구는 지난 91년 앵벌이 사태부터 계속 되어왔다.  97년 장 회장이 국고를 유용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3백만원의 벌금형을 선고 받으면서 이러한 요구들이 다시 쏟아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 회장이 구 여권 국회의원들의 선거운동을 지원했다는 친필 메모가 제보되면서 장 회장과 구 여권정치인 사이의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굶어죽기 싫어 지뢰밭 개간한 거요
1999년도는 97년 캐나가 오타와에서 세계대인지뢰금지운동(ICBL)이 주축이 되어 성립시킨 ‘오타와 조약’(지뢰금지협약)이 발효되는 해였다.
이에 함께걸음에서는 연중캠페인으로 ‘한반도에서 대인지뢰를 추방하자’를 연재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는 90년대 후반 대인지뢰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피해자를 찾았고, 이와 관련 함께걸음 97년 10월호에 기사가 나가기도 했었다.
97년 창립된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KCBL)은 연구소로부터 발굴된 명단을 받아 실태조사를 벌였다.
한 사례로 강원도 철원읍 대마리와 김화읍 생창리가 소개되었는데, 이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정부 때문이었다.
60년대 박정희 정부는 비무장지대 인근의 지뢰밭을 개간할 욕심에 민간인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민간인들이 지뢰밭을 개간하는 데에 따르는 위험을 익히 알고 있던 정부는 민간인들에게 지뢰사고가 나도 정부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고.
당시 지독한 가난으로 주민들은 굶어 죽으나, 지뢰 밟아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그러다 혹시 살아남으면 내 땅 한 편이라도 가질 수 있다는 기대로 각서를 써주면서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그 지역 대인지뢰 피해자들은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혹시 쫓겨 나가기라도 하면, 그동안 목숨 걸고 개간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어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정부의 개간 후 분양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땅의 원래 소유주들이 문서를 들고 나타나 소유권을 주장했던 것. 정부는 “자본주의국가에서 문서상 소유자가 소유권을 주장하니 다른 방법이 없다. 그들로부터 땅을 사던가, 소작을 부치던가 하라”는 대답만 되풀이 했다.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는 대인지뢰 피해자중 대인지뢰를 밟아 발목이 잘린 백춘옥 할머니를 대신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했다.

1999년을 마지막으로 그동안 기획연재했던 ‘함께걸음을 통해서 본 장애우 운동사(1988년~1999년)’를 마친다.
88년부터 99년까지 〈함께걸음〉을 정리하면서 지난 세기 장애우들의 암울한 고통과 상실, 그리고 좌절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장애우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기자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가?”
이 질문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언제나 다시 출발할 것이다.

글 조은영, 최희정 기자 / 사진 함께걸음 자료사진


 

작성자조은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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