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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쟁점화 되고 있는 노숙인 문제

사람 죽이는 ‘편견’이 무섭다

본문

50대 남자, 검은바지, 등산가방은 노숙자 차림?

 

지난 1월 22일 서울역에서는 노숙인들의 소요와 난동으로 표현되는 충돌사태가 발생했다.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3백여명 가까운 노숙 동료들이 집결해 있었던 원인은 철저히 파묻히고, 청결 이미지와 대비시켜 더럽고 추한 모습의 공공역사 일부에서 보이는 노숙인들의 일상에만 카메라를 들이대고 악성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답답하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악순환의 굴레에서 또 다시 사회로부터 쥐죽은 듯 격리되어 가야 하는 노숙인들에게 삽시간에 달아올라 “죄다 총살을 시켜야 한다” “인간 쓰레기 들이다” “영원히 사회로 나올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아래로 내리는 사람들이 무섭다.
편견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닌지…라고 이야기 할 틈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 집단으로, 방화범, 정신질환자, 알코올 중독자, 시민의 일상을 방해하고 세금을 축내는 이방인들로 내몰고 있는 일등시민, 정상시민들의 태도를 보며 마치 “그들에게 죽음을!” 이라고 외치는 로마시대 검투사들을 향한 로마시민의 모습이 떠올려 진다면 과장인가.
서울 시민을 위한 쾌적한 환경 조성과 환경 도시 서울을 위해 청계천 철거가 진행 될 때 공무원들 앞에서, 투입된 용역 조폭들 보다 더 앞에서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노점상들의 분노를 막아서야 했던 그 현장에 맨 몸뚱아리로 투입되었던 사람들이 노숙인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폐지를 수집하고, 지하철 바닥에 붙은 껌딱지를 뜯어내고 오물과 가래 묻은 재활용품을 분리하는 공공근로에도, 그 험하다는 전국 곳곳의 산골오지에서 숲가꾸기 공공근로를 하며 대한민국의 산림을 가꾸는 현장에도 투입되어 일등시민의 환경과 깨끗함을 유지해 주고 있는 그 현장에 노숙인들의 노동이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1·22 충돌사태 이후,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주거와 의료 등, 기본적 권리도 보장되지 않은 채 권리라는 말조차 어색할 정도로 언제 권리가 있었는지 끊임없이 배제된 삶을 살아 온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여론몰이를 지켜보며 지난 1월 3일 있었던 지하철 7호선 방화사건이 금방 떠올려 진다.
“50대 남자, 검은 바지, 등산 가방”
단박에 확신에 찬 모습으로 범인 검거를 알리는 경찰이 제시한 결정적 단서치고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것 이였다.
거기에 덧붙여 최초 불이 난 차량에 탑승한 목격자들은 다 놓치고 유일한 목격자라는 한사람이 증언한 “노숙자 차림의…”라는 진술마저도 도대체 노숙자 차림이라는 규정이 무엇인지, 50대이고 등산가방을 메고 있으면 죄다 노숙자인지, 어찌 그런 진술과 단서만으로 하루 만에 사건 발생일과 가까운 시일에 공공역사 근처에서 불을 피우다 적발된 노숙생활자를 방화범으로 검거해 그렇게 자신 있게 발표하는지, 경찰의 그런 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그 어처구니없음에 할말을 잃었다.
더구나 혐의자로 체포된 0씨를 놓고 언론은 때를 놓치지 않고, “치안의 사각지대, 노숙인 관리 허술” “정신질환, 알코올 중독자 많아” “시민의 목숨을 위협” 등의 보도를 마구 쏟아 내며 모든 노숙인의 범죄로 덧 씌워버리는 여론몰이를 계속했다.
그러한 공범행위는 검찰이 증거부족과 혐의 없다며 석방한 이후에도 사과 한번 없이 그대로 계속되었다.
도대체 이러한 야만성은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인가.
오래전에 TV 프로그램에서 비장애우와 정신장애우를 두고 첫인상 및 친숙감을 측정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실제 장애우를 비장애우로, 의사를 정신장애우로 해서 속인 정보를 주었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실험하기 위해 처음에는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고 실험을 했는데 첫인상에는 차이가 없다가, 다시 의사를 정신장애우라고 하고, 실제 정신장애우를 비장애우라고 속인 정보를 주자 친숙감에서는 비장애우로 소개된(실제로는 정신장애우)사람에게 더 우호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실험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이러한 결과를 두고 생각해 볼 여지는 무엇일까. 즉,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라는 것이 그 질환에 대한 정보만으로도 정신장애에 대한 선입관 혹은 편견을 너무나 쉽게 가지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편견이 부르는 사회적 죽음

 
 
정신장애우의 실험에서도 나타나듯 너무나 쉽게 사람들은 선입관을 가지고 하나의 계기만 주어져도 부정적 인식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골 깊은 편견으로 작용해 이성적 태도를 멀리하게 하게 한다.
문제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쉽게 왜곡되어 너무 쉽게 범죄와 연결지어져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격리의 대상으로 당연시 되고, 그런 잘못된 편견이 집단적으로 표출될 때 그로인해 여론에 떠밀린 정책당국자들에 의해 엉뚱한 대책과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데 있다. 그로인해 영원히 낙인찍히고 특정집단으로 고립되는 당사자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약자와 배제된 사람들을 위한 제도와 사회안전망이 얼마나 갖춰져 있는가. 이러한 현실에서 최소한의 권리조차 누릴 수 없는 조건에서 사회의 이류 열등시민으로 고립되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 대해 집단적 편견이 초래하는 결과는 이미 우리사회 곳곳의 반인권적 법 제도와 정책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사회로부터의 영구적인 격리 정책인 사회보호법과 같은 보호감호제도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을 용인하게 되고, 이번 서울역 충돌사태에서처럼 ‘강제수용을 위한 제도적 보완 검토’라는 대책이 단 하루 만에 특단의 대책으로 발표되어 버리는 현실이 바로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경찰이 7호선 방화사건이 발생했을 때 노숙자 차림이라는 매우 주관적인 정보에 의존하고 편견에 갇혀있지 않았다면 초동수사 단계에서 화재가 난 전동차량에 탑승하고 있던 10여명의 목격자와 객관적인 자료 확보를 통해 범인 검거의 수순을 밟을 수 있지 않았을까. 뒤늦게 경찰이 10여명의 탐승객을 찾는 소동을 벌이는 걸 보면 그리 틀리지 않은 지적일 것 같다.
결국 편견은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다. 내안에는 객관적인 판단근거도 없이,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려는 노력도 없이 쌓이는 한쪽으로 치우 친 편견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아니 많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경찰과 언론이 편견을 만드는데 협력하고, 그러한 흐름에 현상만 가지고 내모는 악순환의 반복에 들어갈 틈을 찾지 못하는 무기력에 가슴을 친다. 그리고 나의 편견, 우리의 편견, 사회의 편견이 너무나 무섭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글 문헌준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표)

작성자문헌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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