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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특집]2004 장애계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

장애우 운동, 이제는 자기 결정권이다

본문

 
올해처럼 장애계가 바빴던 때가 과거에 또 있었을까?
장애인교육차별철폐를 위한 전국순회투쟁, 이동보장법률 제정을 시위와 집회, 정립회관 문제, 고용장려금 삭감에 따른 항의. 최근의 LPG 연료 사용 제한에 따른 항의, 집회에 이르기까지 올해 장애계는 무척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잇따른 농성에도 정립회관처럼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사안이 있는가 하면 부모들의 교육권 투쟁처럼 일정부분 성과를 얻어낸 싸움도 있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올해 활발하게 진행된 장애우 운동이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특징들을 지니고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특징은 크게 주체, 투쟁 사안, 그리고 연대양식의 측면에서 예전과는 다른 특징들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면 올 한 해 장애우 운동은 무엇을 고민했고, 그 고민들에 어떻게 대응했으며 운동을 펼친 당사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운동을 했을까? 장애계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올 한 해 있은 장애우 운동과 운동의 변화된 흐름을 짚어보았다.
그리고 올 한 해는 장애우 문제 중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성과 관련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한 해 이기도 하다. 아직 장애우의 성에 대한 담론이 명확하게 형성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담론의 기초를 구축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장애우의 성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예전에도 장애우의 성과 관련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장애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이나 성추행과 관련된 방어적 측면, 혹은 보호적 측면의 논의가 주를 이룬 것에 비해 현재의 흐름은 완연하게 다르다.
현재 장애우 성과 관련해 이뤄지는 논의의 중심은 장애우가 성적 주체로서 성을 향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모아지고 있는데 그 변화의 흐름도 아울러서 살펴보았다.

단체가 아닌 장애우당사자가 운동의 주체로 나서다
“이동권을 가지고 싸움을 하는 동안에 투쟁의 현장에 나오는 장애우층이 두터워졌다. 이제 중증장애우들이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투쟁을 하는 방식을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여기에는 그 동안 자립생활 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활성화 된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긴 싸움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거라고 본다. 게다가 장애계를 넘어 시민단체와 노동운동이 장애우 운동과 함께 하면서 운동이 힘을 받고 있는 측면이 있다.”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이하 이동권연대) 박영희 공동대표의 말이다.
현재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는 새로운 장애우 운동이 이동권 투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장애계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중증장애우들을 중심으로 한 이동권 투쟁은 최근 3~4년간 운동의 흐름을 이끌면서 그 영역을 점차 넓혀가고 있기도 하다.
“이제까지는 차별을 받았던 경험들이 투쟁으로 표출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이동권 투쟁의 경험이 쌓이면서 달라졌어요. 장애우들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물러서지 않고 싸우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동권 연대 정책부장 김도현씨의 말이다.
올해 진행되는 새로운 장애우 운동의 또 다른 주체로서 자리매김한 것은 교육권 확보를 매개로 한 부모운동이다. 그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한 부모 역시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나와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중증장애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식은 아직 그렇게 자신의 권리를 외칠 수 없는데…,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그럼 내가 싸우자, 하는 마음으로 나왔죠. 그리고 싸우면서 나도 ‘싸우면 되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어요.”
새로운 장애우 운동에서 주체의 변화를 이야기하면 흔히 얘기되는 게 경증장애우에서 중증장애우로의 변화다. 그러나 그 외에도 운동의 중심주체가 단체에서 장애우 당사자로 변화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지금은 장애우 당사자의 실질적인 참여를 통한 투쟁이 일어나고 있어요. 아무도 나의 싸움을 대리하지 않아요. 장애우들이 내 문제를 가지고 내가 직접 싸우기 때문에 비타협적이고 직접적인 운동이 되는 거죠.” 김도현 씨의 말이다.
장애인단체총연맹의 김동범 사무국장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했다. “예전에는 소수 단체장에 의한 타율적인 농성이 많았던 반면, 지금은 장애우들이 자율적 의지를 가지고 모여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율적 의지가 아니라면 치열하게 싸우는 게 어렵다. 그러한 점에서 최근의 운동 흐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단체가 아닌 장애우 당사자가 운동의 중심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집회나 농성 현장에서 더 확실하게 느껴진다. 예전 같으면 농성을 벌이다가 합의 테이블이 마련되면 대표만 그 자리에 참석하고 농성하던 장애우들은 자리를 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합의가 되었는지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합의하러 간 대표를 기다린다. 단체가 아니라 장애우 당사자 한사람 한사람이 실질적인 주체가 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주체의 변화에 따라 장애우들이 요구하는 사안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정열 소장은 “90년대 초반에는 사회적 여건상 싸움을 하러 나올 수 있는 경증장애우들이 장애우 전체의 문제를 가지고 싸웠다. 당시의 의제들은 장애우 전체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일정정도 타협이 가능하고 빗겨서기가 가능했다. 그러나 전동휠체어를 탄 중증장애우들이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운동 여건이 조성되었고 이에 따라 당시에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장애우들이 거리로 나와 그들이 당면한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 지금은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당사자가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타협의 지점은 없다. 비록 몇 백명에 지나지 않지만 중증장애우들이 의제를 선점해서 이끌어가고 있고, 의제의 내용자체가 비타협적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정리했다.

또 하나의 흐름, 지역이 뜬다
올해의 장애우 운동이 이제까지의 운동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 중 하나는 지역에서 벌어

 
진 활발한 운동이다. 이전 같으면 중앙(서울)을 중심으로 싸움을 벌였지만 올해는 달랐다.
박영희 대표는 “장애우와 관련된 중요한 법률제정이라면 당연히 전국적인 수준에서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이동보장법률 제정을 위한 저상버스전국순회투쟁을 시작했다. 이 순회투쟁을 통해 사람들이 장애의 문제를 인권의 문제이자 지역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지역의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부모들이 중심이 된 장애인교육권연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경남장애인학부모회장이자 장애인교육권연대의 공동대표인 윤종술씨는 지역의 조직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역의 문제를 지역에서 모아내어 중앙으로 결집해야 한다. 교육권연대의 경우 작년부터 순회투쟁을 벌이면서 지역 조직을 만들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지금은 벌써 지역에 13개의 조직체가 결성되어 있고 3개의 지역이 조직을 만들려고 준비중이다. 모두 투쟁의 과정에서 생긴 단체들이다. 중앙운동의 문제는 문제제기는 활발히 이뤄지지만 지도부에 의해 끝까지 관철되지 않은 채 끝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인데 지역운동은 이 점에서 중앙에서 벌어지는 운동과 다르다.”
실제 올 한 해 장애인교육권연대는 어느 곳보다 활발한 지역운동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한 지역 한 지역씩 투쟁이 성공할 때마다 서로서로 힘을 받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기존의 장애우운동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모습이었다.
이렇게 장애우의 욕구분출이 지역으로 확산된 것은 변해 가는 사회구조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예전에는 중앙집중식의 정책이 이루어졌으니 중앙에서 힘을 모아 싸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지방분권화 시대를 맞아 모든 것이 지방으로 이양되고 있다. 얼마 전엔 예산도 지방으로 넘어가고, 이젠 장애우들이 지방에 요구할 것들이 생긴 것이다.” 재활협회 이인영 대리의 말이다.
실제로 올해 장애인교육권연대가 각 시·도의 교육청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 것도 이러한 정부의 정책 변화에 따라 투쟁의 지점이 달라진 측면이 있고, 이동보장법률의 경우도 지역 순회투쟁에 들어간 것은 막상 관련법이 제정되면 지자제 예산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필요성에 기인한 측면이 있다. 즉 정부의 정책방향 변화라는 큰 흐름이 장애계의 운동 형태를 바꾸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농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그리고 올 한해 장애 운동은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유달리 많은 집회와 농성이 벌어졌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이러한 집회와 농성에 대해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농성은 운동의 한 방식일 뿐인데 지금은 농성이 곧 운동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농성 자체의 한계도 있는데, 농성문화가 상당히 남성 지향적이라는 것, 그리고 나와 남, 장애와 비장애를 구별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다는 것이다.” 이인영 씨의 말이다. 이러한 이인영 씨의 지적에 박영희 대표도 공감을 나타냈다.
“농성이 남성 문화적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문제는 농성이 장애우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거다. 비장애우의 경우엔 농성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마지막 카드인데, 장애우의 경우엔 농성 이외에 자신의 요구를 나타낼 다양한 수단을 갖지 못한 상황이다.”라고 농성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했다.
“아직은 농성이 힘을 받고 있는 중이라 농성이라는 운동방식에 대한 문제제기 보다는 속도의 문제 정도가 존재하는 것 같다. 투쟁이 많아지고 빠르게 진행되다보니 안정감 있게 보조를 맞추는 것도 어렵고 피로감이 약간씩 누적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김도현 씨의 말이다. 장총의 김동범 사무국장은 다른 면에서 문제제기를 했다. “이어지고 있는 농성이 새로운 이슈를 끊임없이 창출하긴 하지만 문제는 그 우선순위를 가리기 힘들게 되었다는 데 있다. 지금처럼 농성의 강도와 파장으로 운동의 우선순위가 결정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장애계 내부적으로 우선순위를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는게 김두범씨의 의견이다.

장애를 넘어 성적 주체성 획득하기
장애우들의 성 문제에 대한 관심은 아마도 지난해 5월쯤 스위스의 성 서비스 관련 기사가 일간지에 보도된 이후부터일 것이다. 그러면 올해 왜 장애우에 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으며, 과연 그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까?
“옛날이라고 성이 중요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예전에 장애우는 온전한 인간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생존권조차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 문제를 논하는 것은 한마디로 사치였다. 장애계로서는 지금처럼 성 권리까지 말할 수 있다는 건 장애우 운동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DPI 안형진 간사의 말이다. 장애우의 성에 대한 논의가 획기적으로 변화되는 데에는, 변화된 사회 환경의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연예인 누드가 판을 치면서 성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지점이 바뀐 게 아닐까요?” 한 장애남성 활동가의 말이다.
이처럼 사회가 누드에 보인 반응은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성에 대한 사회의 태도와 인식이 바뀐 만큼 장애우의 성을 논의하는 지점도 바뀌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직도 장애우는 생존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이러한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제 장애우의 고민 지점이 다양해질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논의의 시작인만큼 장애우의 성은 담론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딜레마에 빠져있다. 장애여성이 성적 주체로서 인정받으려는 과정에서, 장애우가 성을 향유할 권리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정신지체장애우의 성적 권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제각기 다른 딜레마에 처해 있으며 이러한 딜레마의 해결점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겹의 차별을 관통하기
지난 10월 장애계에서 주목받은 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이선희(지체1급, 하반신마비로 휠체어 이용)씨의 누드가 공개된 것이다. 이씨의 누드는 장애계를 넘어 사회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그리고 이씨의 누드 공개와 관련된 논쟁은 한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그런데 세상의 뜨거운 반응과는 달리 장애계와 여성계 단체들은 조용했다. 공식적인 성명서를 낸 것은 장애여성 공감 (이하 공감) 단 한 단체뿐이었다.
“누드를 찍는 것은 자기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이씨의 장애여성 누드는 무성의 벽을 넘어 성적 존재성을 인정받는 방식이 남성 중심적 시선이 요구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성적 존재로서의 인정은 그런 차원의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며 공감의 박영희 대표는 장애여성의 성적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억압된 신체를 드러낸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시도가 갖는 한계성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결국 오가는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이씨의 누드 공개는 장애여성 운동의 어려움 즉, 장애와 여성에 대한 두 겹의 차별을 동시에 넘어서야 한다는 운동적 차원의 난해함을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게다가 현재의 여성이 누리는 성은 눈앞에 그 실체가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지만, 여성이 받는 차별을 넘어선 성의 경우에는 아직 그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운동을 하면서 목표지점을 설정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성 문제는 단계적으로 넘어야 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장애여성계의 중론이었다.
“수많은 여성들 속에 장애여성을 위치 지으면서 우리가 당면한 억압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리고 장애여성을 둘러싼 장애와 여성의 벽은 단계적으로 넘을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관통해 나가야하는 문제다. 그리고 그 해법은 당연히 장애여성 당사자로부터 나와야 한다.” 장애우 계간지 보이스 김효진 편집장의 말이다. 그는 이어 “장애여성 누드는 장애여성 당사자들이 이 시도를 통해 어떻게 느꼈는지를 차분히 표현하는 과정에서 정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문제는 장애여성이 이러한 표현을 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기자가 만난 몇몇의 장애여성들은 이씨의 누드에 당황스러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당황스러움은 낯설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괴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획 의도대로였다면 장애여성이 누드에 나타난 몸에 친근감을 느껴야 하고 같이 해방감과 동지애를 느낄 수 있어야 했는데 장애여성이라는 설명이 없이는 장애가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 것을 느끼기 어려웠다.” 한 장애여성의 말이다.
또 다른 장애여성은 비슷한 맥락에서 “이번 누드를 보면서 혹시나 장애우가 성적 존재로 인정되는 과정에서 또다시 장애우 중에서도 정상에 가까운 몸만 인정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효진 씨의 말처럼 이씨의 누드 공개로 인해 일단 장애여성의 문제는 풀어 헤쳐진 상황이다. 그리고 장애여성의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장애와 여성의 두 겹의 벽을 동시에 관통하여 꿰뚫는 경우보다는 그 사이의 어느 지점에 놓이게 되는 시도들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성 서비스 논란, 과연 가능한가?
장애우의 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 지는 만큼 우려의 목소리도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여성장애인연합(이하 여장연)의 조옥 사무국장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장애우의 성적 권리와 관련된 논의들은 섹스 혹은 성기 중심적인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 같다. 이러한 남성 중심적 사고가 장애우의 성적 권리와 관련된 논의의 주류가 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성기중심, 섹스중심의 논의만 이뤄지면 자연스럽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이 만나기 어렵게 되요. 요즘 성치료, 성서비스가 논의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성기중심, 섹스중심의 논의 속에서 나온 거라고 봐요. 논의가 더 필요해요. 성치료, 성서비스라고 하면 결국 이러한 제도는 그 성과를 판단해서 평가하게 되어 있잖아요. 그 과정에서 장애우의 성은 또다시 동정적 시혜적 대상이 될 수 있어요. 즉, 성조차 복지의 대상이 되는 거죠.” 박영희 씨 말이다.
그러나 막상 장애우 성 문제를 해결 할 것인가의 문제로 가면 다시 치료 혹은 서비스의 차원의 논의로 되돌아간다. 그러지 않고서는 성에 대한 접근기회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정신지체 장애우와 함께 생활하는 유찬호 신부가 지난해 6월 본지의 한 좌담에서 “성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기회조차 없는 장애우들에게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합법적인 창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데는 그만큼 현장에서 직면한 실질적 어려움이 배경에 깔려있는 것이다.
김효진 씨는 “성 서비스에 대해 바람직하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논하기 이전에, 어떤 주장이 있다면 그에 따른 이유가 있는 법이니 그 이유를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두 사람이 동등한 관계로 자연스러운 생활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성행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분명히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 자위조차 할 수 없는 중증의 장애우에게 참아, 기다려 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장애우 성 서비스의 문제는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문제와 실질적 필요를 넘어선 또 다른 딜레마가 있다는 것이다.
“성 치료, 성 서비스를 기획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그 것을 시행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결국 공창제와 마찬가지가 될 수 있다.” 박영희 씨는 장애우들의 성을 논의할 때 현재 사회의 성문화에 대한 비판을 하고, 그 문화 속에서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신지체인 성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 바 있는 인천여성의전화 배임숙일 회장도 “장애우의 성적 권리를 인정하라는 요구 자체는 정당하지만 그것이 또 다른 반인권적 억압구조를 생산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작년 위드뉴스에서 마련한 토론에서 성서비스에 찬성했던 안형진씨도 “처음 논의가 시작될 때에는 성 생활에서 억압당하고 차별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성 서비스에 찬성했다. 그러나 성매매특별법 논란이 있고 나서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장애인의 성문제는 사회적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이지만 다른 사람의 권리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는 공창제나 성서비스가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여성계는 이미 분명하게 공창제를 반대하고 성매매방지법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박지주씨의 의견처럼 장애우의 성이 사회적인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맞더라도 성 서비스의 문제는 또 다른 억압구조를 생산해내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딜레마에 직면해서 논의가 쉽게 정리되지 않을 전망이다.

누리는 성인가 아니면 길들여진 성인가
올 해, 장애우의 성 문제에서 또 다른 한줄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정신지체장애우의 성 문제이다. 장애의 영역에서 유달리 정신지체장애우의 성이 따로 논의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논의되는 지점만 보더라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체장애우의 경우 성적 주체로서 성을 향유할 권리로 논의의 지점이 분명하게 옮겨간 이 시점에 정신지체장애우의 경우는 아직도 성폭력의 문제에 머물러 있다. 물론 방향의 측면에서는 정신지체장애우의 경우도 피해자의 성만이 아니라 향유하는 성의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여타 다른 장애 영역과의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정신지체장애우의 성은 아직도 대리자의 입장에 머물러 있다. 언제나 부모와 선생님 등 그를 보호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얘기가 되고 있다. 결국 정신지체장애우의 성 문제 역시 이렇게 보호하는 입장에 선 사람들을 통해 논의가 이뤄지기 때문에 성이 차단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향유하는 측면이 아니라 보호하는 측면에서 권리가 논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정신지체장애우들의 성폭력 문제를 상담했던 한 활동가의 말이다.
결국 정신지체장애우의 경우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주체로 서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의 문제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여타의 장애영역과 다른 지점에서 논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매우 복잡한 딜레마가 자리잡고 있다.
“현재 정신지체장애우의 성 문제에서 딜레마는 길들여진 성과 누리는 성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데 있다.” 여장연의 조옥씨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옥씨의 지적은 많은 장애여성계 활동가들이 동감하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현실에서 이러한 딜레마에 처한 사건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폭력을 행하는 남성들은 대개 정신지체장애여성을 평소에는 무시하고 차별하지만, 성폭력을 행사하려고 다가갈 때는 평소와는 달리 친절하게 대하고 예쁘다는 칭찬을 늘어놓기 때문에 정신지체장애 여성은 이러한 폭력에 길들여지기 쉽다. 그리고 그러한 남성들의 논리에 따라 일단 그것을 사랑을 표현하는 한 방식이라고 이해해 버리면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 재인식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정신지체장애우가 성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들을 하는 활동가 대부분이 보호에 급급한 부모의 절박성이 이해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난 10월 말 국회에서 열린 정신지체장애우 성문제 관련 심포지엄은 대리자의 입장에서 약간 물러나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 그리고 성을 향유할 권리의 차원으로 정신지체장애우의 성 논의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논의의 장이었다.
정신지체 장애우의 성 문제를 비롯해서 장애우의 성에 대한 논의는 이제 겨우 시작 단계를 밟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인간의 문제인 만큼 인권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게 장애계 관계자들의 결론이다.

글 조은영 기자
사진 함께걸음 자료사진


 

작성자조은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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