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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함께걸음>을 통해서 본 장애우 역사 ⑧ - 1995년

장애우들이여 세상의 ‘빗장’을 열어라

본문

거꾸로 돌아가는 노동부 시계

 
 
장애계가 완전한 참여와 평등을 외칠 때, 노동부 장애우 분리고용을 기본 정책으로 삼다
95년 한 해는 노동부가 실질적인 법적 보호 대상이 되어야 할 중증장애우에 대한 지원책이라며 도입한 연계고용제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이루어진 한해였다.
연계고용제도는 직업재활시설에 생산시설, 원료, 기술 등을 제공해 제품을 생산, 판매하거나 재활시설에 도급을 주는 기업도 장애우를 고용한 것으로 인정해 장애우 고용 부담금을 감면해 주는 제도이다.
당시 장애계는 이 제도가 결국은 장애우의 일반고용을 포기한 채 분리·보호고용을 조장하게 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95년 7월 결국 개정안은 통과되었다. 당시 개정안에는 연계고용제뿐만 아니라, 기업이 장애 정도가 심한 중증장애우를 신규 채용할 경우 그 장애우에게 지급되는 임금의 범위 안에서 정부가 고용부담금을 지급토록 하는 방안, 고용부담금 신고 납부일은 60일에서 90일로 연장하고, 장애우 고용기획서 제출의무를 위반하거나 단순 조사거부 또는 기피 기업에 대한 형사처벌과 과태료 완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 전반적으로 장애우 고용에 대한 기업주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장애계의 비난을 받았다.
함께걸음은 이 개정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장애우 근로자들이 단순히 일반 사업장과 분리된 상태에서 어거지로 고용율 수치만 높일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통합을 고려한 장애우 고용 대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계속 이에 관한 논의를 이끌어 나갔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노동부는 95년 6월에 장애우복지공장 지원안도 내놓았다. 함께걸음 7월호는 이에 대해 “한시적인 정책으로 장애우복지공장 지원안이 나왔다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장애우고용정책에서 분리고용을 노동부의 기본 정책방향으로 삼는 이번 안은 완전한 참여와 평등이라는 대전제에 역행한다”고 지적했다.
또, 9월호에서는 이러한 노동부의 정책에 대해 한신대 재활학과 오길승 교수가 우리나라 직업재활체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이라는 글을 통해 “장애우복지공장의 설립을 통해 장애우들에게 제공될 대다수의 일자리는 조립, 제조 위주의 단순생산직으로 오랜기간 종사해도 기술 축적을 통한 임금향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한마디로 발전성이 없는 직종”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방안은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거의 채택되거나 시도되지 않는 저급한 방법으로 장애우의 장래와 입장에 대한 심사숙고 없이 그간 장애우의무고용제의 미진한 실적을 미봉하기 위해 졸속히 마련된 고육지책”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비장애우들의 평생 고용기구’라는 비판을 받았던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의 낙하산 인사
함께걸음은 이러한 일이 계속 발생하고 장애인고용촉진공단(아래 공단)에 대한 우려가 장애계를 넘어 사회적으로 확산되자, 95년 4월호에 공단이 당면한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지적하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의 내용은 주로 공단의 낙하산 인사 문제와 저조한 취업실적에 관한 것이었다.
함께걸음의 이 특집기사는 실명을 직접 거론하며 당시의 공단 인력을 자세히 분석해 놓았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의 공단 직원들은 민주산악회 출신, 공채, 장애우 그리고 노동부 퇴직 공무원 등 대략 네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민주산악회 출신은 적지만 모두 간부인 반면 “장애우 직원은 공단 전체(246명)를 통털어 20여명이 약간 넘는데 공단 내 위상은 중간 관리자급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극히 취약하다”며 장애우 채용이 여론에 떠밀려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공단이 만들어 질 때, 이러한 인사상의 문제를 장애계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안 내용을 놓고 국회와 장애우단체 간 막바지 진통을 겪을 무렵, 당시 ‘장애관련야업안제정을위한공동대책위원회(아래 공대위)’는 공단 인력이 정치적인 입김에 의해 낙하산 인사와 퇴직 공무원들의 안식처로 변질 될 것을 우려해 ‘공단 임원과 직원을 채용할 때는 정당인과 군인, 그리고 공무원은 퇴직 3년이 지나지 않으면 채용할 수 없다’는 조항을 넣을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국회의 난색 표명으로 이 조항이 최종법안에서 삭제된 것. 기사는 이때의 우려가 5년이 지난 지금 현실로 드러났다며 “장애우들의 평생 고용이 아니라 비장애우들의 평생고용기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이러한 인사구조는 장애우 취업과 관련해 전문성과 적극성 어느 것도 담보해내지 못한 채 저조한 취업률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함께걸음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장애우 취업문제로 공단을 출입한 장애계 관계자의 말을 통해 “공단이 장애우 취업에 있어서 수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공단에서 장애우 취업을 위해 발로 뛰어다니는 적극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공단 예산 역시 비판의 타겟이 되었다. 당시 기사는 “공단 예산이 비효율적으로 집행되고 있다는 지적은 공단 예산이 장애우 고용촉진 사업비보다는 공단 운영비와 인건비로 더 많이 지출되고 있다는 데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며 “장애우 고용을 위해 재투자되어야 할 부담금이 이렇듯 과도한 시설 신축비와 인건비 지출로 사용된다면 기업이 부담금을 내게 하는 설득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언론과 장애계의 강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함께걸음 5월호에는 또다시 공단의 낙하산 인사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공단측은 5월 8일자로 12명의 경력직원을 특별 채용하면서 해군 대령 출신을 1급인 교육훈련부장으로 발령하고 노동부 퇴직 공무원 출신을 채용하는 등 전문성, 형평성이 결여된 인사를 단행했던 것. 공단 노조측이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으나 공단측은 “노조가 인사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월권행위”라고 비난하며 대화자체를 거부하다 문제가 시끄러워지자 “경력직 직원채용에 있어서 합리적인 인사가 되도록 최대한 노력한다”는 것을 주내용으로 하는 합의서를 작성함으로써 농성사태를 무마했다고 한다. 그러나 함께걸음은 이에 대해 공단이 자력으로 낙하산 인사를 막기에는 정치권과 노동부의 입김을 배제할 만큼 힘을 가지지 못했다며 앞으로도 이러한 낙하산 인사가 이어질 가능성 있다며 이에 대해 우려를 떨어내지 못했다.

장애우 특례입학제도, 수업 받으려면 극기훈련(?)을 해야

▲장애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함께한 어깨동무 놀이 한마당
94년 도입된 장애우 특례입학제도는 대학의 노골적인 입학거부 조치를 막고 장애우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 이로써 94년 120명의 장애우가 서강대, 대구대 등 6개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함께걸음 95년 9월호는 “이들이 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편의시설 부족으로 막상 제대로 된 학습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지적은 6월부터 3개월간 특례입학을 실시하거나 실시예정인 대학들을 실태조사 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함께걸음은 이러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장애우는 실력으로 합격을 한다고 해도 계단으로만 되어있는 강의실을 옮겨 다니며 극기훈련을 해야 하는 실정”이라며 “장애우특례입학제도 시행에 앞서 편의시설 설치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통합교육의 바람이 불다
95년 4월 15일 서울 재동국민학교에서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이 함께한 ‘어깨동무 놀이 한마당’ 행사가 열렸다. 함께걸음 5월호는 이 행사를 계기로 행사소식과 함께 통합교육의 의의와 가능성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이 특집을 통해 통합교육을 위한 국내 교육환경을 점검하는 좌담과 뜻있는 교육종사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던 국내외 통합교육 현장을 찾아 소개했으며 7월부터는 남다른 결심으로 자녀를 일반학교에 보낸 어머니들의 어려움과 보람을 담은 ‘통합교육 부모 수기’를 연재해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통합교육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부모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필요할 만큼 열악한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약 4천여개의 특수학급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양적 면에서는 통합교육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 특수학습의 속을 들여다보면 장애아의 통합교육이 아니라 학습부진아의 진도 보충 성격이 짙어 그 평가가 부정적”이라는 것이 당시 특수교육 관계자의 말이다. 그래서 특수학급은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아닌 공부 못하는 말썽꾸러기 아이들이 가는 반으로 인식됐다. 따라서 당시 장애아동을 둔 부모는 장애아동 인식부족으로 특수학교에 가라고 종용하는 선생님과 학교의 편의시설 부족 등의 문제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초등학교는 통합교육을 받더라도 중학교의 경우 특수학급이 설치되어 있는 학교의 숫자가 턱없이 줄어들고 운이 좋아 중학교를 통합교육을 받더라도 고등학교에는 특수학급이 설치된 학교가 없어서 결국 특수학교로 돌아와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문가들은 “결국 입시위주의 교육 풍토와 과밀학급, 편의시설 미설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상당기간동안은 통합교육이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최근 실시되고 있는 특례입학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특수학교에 아이를 보내면 당분간은 편하지만 장래를 생각했을 때 아이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어려움은 있지만 아이를 과감하게 일반학교에 입학시키라”고 조언했다. 또 통합교육이 가능하려면 교육대학만이 아닌 사범대학에서도 특수교육을 전공 필수로 집어넣어야 일반 교사의 장애 학생에 대한 이해가 증진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전했다.

정신지체학교에서 청각장애학교로 전보된 어느 교사의 부임 첫 인사, “나는 여태까지 자격교사였는데 이제는 무자격교사가 되었다”
함께 걸음 5월호는 특수교육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어이없는 사건을 전하고 있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특수교육교사들의 순환보직제를 도입했는데 어이없이 장애유형별 전공에 상관없이 무작위로 시행한 것. 3월 1일 있었던 인사이동에 따라 정신지체학교에서 청각장애학교로 전보된 어느 교사는 부임 첫 인사에서 “나는 여태까지 자격교사였는데 이제는 무자격교사가 되었다”고 밝혀 이 인사조치의 부당함을 강변하기도 했다. 부산 MBC에서 개최한 공개토론회에서도 특수교육 관계자들은 “우리가 특수교육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이 같은 처사는 발전이 아니라 특수교육에 대한 무지이거나 퇴보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교육청은 이러한 항의들은 묵살한 채 전보조치를 예정대로 강행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드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교육청에서는 장애영역을 무시하고 예정대로 인사를 단행하면서도 한해 전인 94년에 있었던 교사임용시험에서는 시각장애를 전공한 장애우가 응시하자 그 지원생에게는 정신지체 장애영역을 선발한다면서 면접에서 탈락시킨 것. 함께걸음은 이 사건에 대해 “특수학교의 독특한 교육적 요구를 묵살하고 특수학교 교사의 전문성을 침해한 조치”라며,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 장애아의 입장에서 사고할 것을 촉구했다.

여성장애우, 세상의 ‘빗장’을 열다.

▲북경에서 열린 제 4차 세계여성대회.
처음으로 장애우 분과가 채택되었으나, 장애우 편의시설이 마련되지
않은채 열려 참석한 여성장애우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
여성장애우에 대한 차별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장애우에 대한 차별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곱해진 것
여성장애우에게 95년은 의미 있는 한 해였다. 94년 세모(歲暮)에 국내 처음으로 다양한 장애영역의 여성장애우들이 한데 모여 ‘빗장을 여는 사람들’(아래 빗장)을 열고 95년을 활발하게 보냈기 때문. 92년 6월 성폭력특별법 제정 당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여성단체와 연대 활동을 벌이면서 여성장애우의 성폭행에 대한 가중처벌 조항을 삽입하는 성과를 얻어낸 것은 빗장이 열린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다. 이후 한국여성NGO위원회 주최로 열린 ‘동아시아 여성 포럼 보고대회’에서 95년 9월에 열릴 제4차 ‘세계여성NGO포럼’에 처음으로 장애우 분과를 채택하고, 이 분과에 여성장애우들이 참여해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이 ‘빗장’이 열린 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빗장은 95년 활발하게 활동했다. 빗장은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장애우의 문제를 사회에 알려내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선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연구모임으로 활동했으며, 여성계와의 연대도 활발히 진행했다. 특히, 95년 빗장의 회원인 김미연씨가 북경 세계여성대회에 참가한 것은 빗장의 활동을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빗장은 “여성장애우 문제의 심각성에 동의하면서도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해결책을 제시할 기초자료가 빈약한 형편”이라며 설문조사도 직접 실시함으로써 스스로 대안을 찾아 정책에 반영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함께걸음은 95년 한 해 동안 이러한 빗장의 활동들을 자세히 보도하면서 여성계 사람들과의 인터뷰 대담 공청회 등의 소식을 전했는데, 5월호에 실린 공청회 소식에는 “여성장애우에 대한 차별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장애우에 대한 차별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곱해진 것”이라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여성장애우들이 집단을 형성해 조직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만 한다”는 한국여성의전화 신혜수 대표의 의미 깊은 말이 실리기도 했다.

지방자치시대 장애우복지
무엇보다 95년의 가장 색다른 점이라면 지방자치제도(아래 지자제)의 실시였다. 함께걸음 4월호에는 지방자치제도와 장애우복지에 대한 토론회, 공청회 등의 다양한 기사가 실려 당시 장애계가 지자제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벌어졌던 토론회 내용을 살펴보면 장애계가 지자제를 준비하며 어떠한 생각들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요약하면  국민의 최저생활은 중앙정부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고 장애우의 사회복귀, 사회적 기능향상과 같은 구체적 서비스는 지자체에 위임할 것(나동석, 당시 청주대 사회복지학 교수)  지자체의 실시에 따른 장애우복지서비스의 제약조건이 될 수 있는 지역주민의 낮은 연대수준, 서비스의 수요와 공급의 큰 차이, 부족한 재정확보·인력확보문제, 전달체계의 미정비 등에 관심을 갖고 대안을 마련할 것(곽재복, 당시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지자체에 대비하여 지자체의 제정과 행정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압력단체 구성할 것(한덕연, 사회복지정보원 대표) 등 이었다. 그밖에도 당시 중앙대 사회복지학 강사였던 정병오씨는 “지자제는 정책대상에만 머물러있던 지역주민을 정책과정에 참여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주민들간의 갈등과 사회운동을 무마시키고 재정문제 등을 지역적 차원으로 환원 분산시켜 기존의 정치경제 제도를 안정적으로 재생산 하는데 사용된다”며 지자제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분권화와 기능의 분배 재정의 균형이 전재되어야 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토론회들을 거쳐 장애계는 지자제에 공동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국장애인복지공동대책협의회(아래 공대협)는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장애우복지정책 부문별 45대 과제를 내놓았을 뿐 아니라 지역별로 장애우복지 정책을 내놓았다. 함께걸음 5월호에 실린 지역별 장애우복지의 과제를 살펴보면 가장 공통적인 것은 장애계의 의견을 모으고 정책을 제안, 논의하는 중심기구인 장애인복지위원회의 구성이다. 장애우복지법 제6조에 시도지사 자문기관으로 이러한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당시에는 서울, 충북, 제주 등만 구성되어있고 그나마도 모임을 가진 적이 없거나 형식적 자문기구의 역할만을 해왔기 때문에 이를 상설화하고 장애우에 대한 장, 단기적 계획 및 정책을 논의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공대협이 지자제와 관련하여 한 또다른 운동은 95년 6월에 열리는 지자제 선거와 관련된 것이다. 공대협은 95년 4월 11일 기자회견을 열어 각 정당이 후보를 공천할 때 장애우를 10% 공천할 것과 비례 대표제에 장애우를 적극 공천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공대협은 함께걸음을 통해 “이것이 장애우와 관련된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고 시행하는 과정에 장애우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각 영역과 부문에 걸쳐 효과적이고도 참다운 장애우복지를 실현할 것으로 확신하다”고 밝혔다. 이후 함께걸음에는 4월 21일에는 조일묵, 민군식, 장기철, 김성재 등 공대협 4인 대표들이 당시 민주당의 총재였던 이기택씨를 만나 이러한 장애계의 요구를 전했다는 기사도 실렸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날의 만남에서 민주당은 “지금은 단계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였고, 공대협 측에서도 장애계가 합의된 후보명단을 가지고 있지 않아 후보 공천에 대해서는 당위성 보다는 신중성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 장애계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러한 장애우 공천요구는 92년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장애우 10대과제 중 하나로 2%장애우 공천을 요구했다. 당시 이러한 요구는 여성계, 환경계 등이 직능별 공천을 요구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17대 국회에서 장애당사자 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을 보여준다.
그밖에도 95년은 장애계에 많은 일이 일어난 한해였다.
92년 박승학씨에 이어 95년 3월에도 노점상을 하며 단속반에 쫓기는 삶을 살던 최정환씨가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당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중증장애우에 문제 해결을 위한 장애우 단체들의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또, 94년 함께걸음이 연중기획으로 ‘접근권’ 문제를 다룬 이후, 95년부터는 직접 개선효과를 얻기 위해 7월부터 교보문고와 세종문화회관을 휠체어 장애우가 직접 방문하고 이용에 불편이 있는 부분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함께걸음은 이 운동을 통해 교보문고에서는 책 판매대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고 안내판의 높이가 낮아졌으며 장애우용 주차장도 확보되었고, 세종문화회관으로부터도 장애우 편의시설을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과정을 매월 자세히 보도했다.
그리고 5월 4일에는 ‘서울시 공공시설 내의 신문, 복권판매대, 매점 및 자동판매기 설치계약에 관한 조례안’이 통과되어 장애우들이 먹고 살 길이 조금이나마 열렸으며, 8월에는 장애우 운동사에서는 처음으로 한·일 장애우교류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93년 7월 장애자녀를 시설에 맡길 때 부모에게 시설측이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진 친권포기각서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충격을 줬던 해인원 문제는 공금횡령의 노조원에 대한 부당 해고와 관련서류를 확보하려는 노조원을 절도죄로 고소하는 사태로 비화돼 장기화된 바 있었는데 사건이 95년에 종결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이후 사회복지노조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글 조은영 기자 /  자료사진 함께걸음


 

작성자조은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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