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방]간질장애우들의 용기 있는 수다
본문
우리 사회에서 간질 장애만큼 애칭(?)이 많은 장애도 드물 것이다.
‘귀신병, 유전병, 지랄병…’ 이렇게 어마어마한 편견 앞에서 간질 장애우들은 숨조차 죽이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들에게 ‘천형’이었던 것은 장애가 아니라, 이러한 ‘사회적 편견’이었다.
간질은 귀신이 씌인 것도 아니고, 유전의 가능성도 매우 드물며, 정신장애를 초래하는 것도 아니다.
간질은 그 어원이 ‘epilambanein(그리스어-갑작스런 습격)’에서 유래됐을 정도로 갑자기 발병하는 뇌의 적절치 못한 전기 활동일 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2003년 7월 2차로 장애범주가 확대되면서 간질이 ‘장애’로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장애라기보다는 ‘몹쓸 병’으로 인식되어 있다. 2003년 11월 간질 장애로 등록한 장애우들의 수는 겨우 3천이 조금 넘는다. 이는 간질에 대한 ‘사회적 천형’이 여전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함께 수다 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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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챙이(48) : 그녀는 자신의 장애를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시작을 할 수 있다고 전한다. |
▶ 신동춘(32) : 간질 장애 때문에 생기는
차별과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 꿈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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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1 ; 어느 날 갑자기 내 삶 속으로 들어온 간질 장애
진행 :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분들은 온오프라인으로 간질장애와 관련한 활동을 하고 있는 간질 장애우 분들인데요. 사실 우리 나라에서는 간질 장애에 대한 아주 잘못된 사회적 편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장애를 드러내기조차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수다방’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질 장애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먼저 본인의 장애에 관한 얘기부터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인기 :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발병했어요. 특별한 원인은 없었어요. 단지 원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어렸을 때 낭떠러지에서 떨졌던 것과 교통사고를 두 번 당했다는 것 정도죠. 크게 다치진 않았는데, 심하게 놀랬죠. 그래서 생긴 거 아닌가 추측하는 거죠. 뭐.
딱따구리 : 저는 중학교 때 수업 받다가 친구들 말에 의하면 ‘갑자기 나무처럼’ 쓰러졌어요. 간질이라는 것이 예측불허예요. 실은 그 뒤로 저는 ‘간질’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놓지 않았어요. 그런데 ‘장미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간질’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놓을 수가 있게 됐죠. 하지만, 아직도 저는 ‘간질’이란 말보다는 다른 말로 표현하고 싶어요. ‘간질’이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부정적인 편견이 제 사고방식까지 지배할 것 같거든요. 저는 두려워서라기보다는 긍정적으로 살고 싶어서 다른 표현을 쓰고 있어요. 예를 들어 ‘그 놈’어때요. 친근감 있고 귀엽잖아요? ‘발작’이라는 단어보다도 ‘사고’라는 말이 훨씬 긍정적으로 들리지 않나요?
‘사고’가 나면 엄마가 많이 도와주셨죠. 엄마가 “으이구 또 하네, 또 하네, 어쩔까나”하고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들리면, 이상하게 정신이 확 들고, 발작이 멈춰요. 그리고 가족이 저를 만져주거나, 손을 흔들어 준다거나, 쓰다듬어 주면, 그런 따스한 느낌이 들면 발작이 사그러들어요.
동춘 : 저는 열일곱 살에 갑자기 생겼어요. 그 뒤로 한 2년은 집 밖에 거의 못나갔어요. 발작할까봐 너무 두려웠거든요. 사람들 많은 곳에서 발작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하는 생각뿐이었죠. 간질이 처음 왔을 때, 너무 두렵고 혼란스러웠어요. 당시에는 늘 악몽에 시달렸죠. 발작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발작하는 꿈을 꾸는 거예요. 발작하고 나면 너무 아프니까. 하지만, 꿈에서 느끼는 고통조차 너무 괴로워요. 저는 왼쪽 다리부터 마비가 오거든요. 5~10분 정도 발작을 하면, 30분에서 1시간은 기절하죠. 육체적인 고통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기절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님께 다리를 자르겠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다리를 자르면 발작을 안 할까 싶어서. 2년 뒤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그 말을 어머님께 했다는 것이 너무나 죄스러워요. 아직도 후회 많이 돼요.
올챙이 : 마치 블랙홀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죠. 그 느낌은 정말 두려워요. 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엄마 얘기로는, 내가 열 살 때였대요. 엄마랑 둘이 자던 어는 날 도둑이 들었는데, 도둑이 전축을 들고 나가려는 순간 엄마가 기척을 느끼고 잠을 깼대요. 그래서 도둑이랑 엄마랑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은 도둑이 도망갔다는데. 우리 엄마 대단하죠? 아무튼 그때 내가 너무 놀라서 발병한 거 아닌가 추측할 뿐이죠. 저는 발작을 자주 하지 않아요. 6~7년에 한 번 정도? 그래서 큰 병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다가, 병원에 가게 된 것이 스무살 때였죠. 제가 간질 장애우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때고요.
진행 : 동춘 씨께서 육체적으로 도저히 고통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기절을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기절할 정도의 고통이라니… 마음이 아프네요. 그런데 간질장애가 생긴 이후 집 밖에 나서기가 두렵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간질 장애를 일컫는 나쁜 말들도 많고, 편견도 심하잖아요. 그래서 마음의 고통 또한 컸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춘 : 사실, 간질에서 오는 육체적인 고통이 아무리 심해도, 대략 2~3년 안에 그 고통에 대해 적응하게 됩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약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고통에 순응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하지만 주위의 편견 때문에 받은 고통은 몸 아팠던 것에 비할 수가 없을 정도로 더 큰 고통이었어요. 내 몸이 아프고 괴로운 것은 혼자 극복하면 돼요. 그렇지만 그것을 견딘다고 해도 주위 시선을 극복하는 것이 더 힘들어요. 간질이 발병한 후에 실은 자살 시도를 몇 번 했는데,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주위의 시선 때문이었어요.
고민 2 ; 상대방에게 말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진행 : 혹시 간질 장애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상처받은 경험이 있으신가요?
딱따구리 : 저는 남동생이 한 명 있지요. 그런데 장애가 없는 남동생을 보면서 열등감을 가지게 됐어요. 그 열등감은 사회에 나와서 동생에게 뒤지면 어쩌나. 장애 때문에 동생보다 돈을 못 벌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형편없이 낮다거나하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이었죠. 아, 지금 생각나는데, 어렸을 때 동생이 저를 위협(?)한 적이 있었지요. 장난이었겠지만, 형 자꾸 그러면 동네 형들에게 다 말해버린다라는 식으로. 제 장애를 퍼뜨리겠다는 말이죠. 처음 들었을 때는 엄청 기분 나쁘더라고요.
인기 : 저는 5남매 중에서 넷째인데..지금은 직장이 없으니까, 늘 집에 있죠. 셋째 형도 집에서 같이 사는데, 형이 잔소리를 많이 해요. “넌 돈 안 벌어도 되니까, 집에서 잘 챙겨 먹고, 운동 많이 하고…”라고 하죠. 뭐 거기까지는 좋은데, 형이 좀 깔끔해서 형 퇴근할 때 쯤이면 청소해 놔야 하고… 좀 짜증이 나죠. 아버지가 칠순이 넘으셨는데 아직도 일을 하시거든요. 제게 장애가 없었더라면 제가 일하고 아버지는 쉬셨을텐데… 장성한 아들은 놀고, 늙은 아버님은 일하시니까 맘이 아프죠.
진행 : 직장 생활 하시는 분도 있다고 들었는데, 회사 측에서는 장애를 알고 있나요?
동춘 : 저는 한 달에 세 번 정도 다리에 마비가 와요. 그러고 나면 짧으면 반나절, 길면 하루동안은 다리를 못 움직여요. 그러다보니 여러 곳에 취직해 봤지만, 한 달을 넘기기가 어렵더군요. 밝히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금방 드러나니까, 또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아예 첨부터 알리자라는 생각이에요.
딱따구리 : 아뇨. 그래도 밝히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장애우로써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장애우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는 솔직하면 손해예요. 간질 장애가 있다는 것을 밝히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해요. 연애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저는 아예 ‘간질’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려고 해요.
동춘 : 스물일곱 살 때 결혼 할 뻔(?)했던 사람이 있었죠. 1년 반 정도 사귄 사람이었는데,결혼 얘기가 오갈 즈음에 고민하다가 결국은 고백했죠. 속이고 결혼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녀가 이해해주길 정말 바랬지만, 그녀는 끝내 제가 아닌 주위 시선을 선택하더군요. 간질에 대한 두려움을 선택한거죠. 맘이 많이 아팠죠. 그렇지만, 아직도 전 속이고 살기는 싫어요. 저를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올챙이 : 저는 학교나 동네에서는 간질 장애 때문에 차별 받은 기억은 거의 없어요. 학교 친구들은 매일 약을 먹는 저를 늘 챙겨줬고, 동네 사람들은 뭐 뒤에서 수군거리기는 했겠지만, 그것 때문에 저를 못살게 굴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사회에 나오니 상황이 정말 다르더군요. 직장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발작도 더 자주하게 되고. 실은 간질 장애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입사를 했죠. 어떨 때는 발작을 할 것 같은 조짐이 있어서 화장실에 혼자 가서 발작하고 난 뒤, 정신 차리고 툭툭 털고 나온 적도 있어요. 그런데 자재 가지러 지하에 내려가다가 저도 모르게 쓰러져 회사에서 알게 됐죠. 그런데 알고 보니 사장님이 간질 장애우들을 후원하고 계시는 분이었어요. 전 그 회사에서만 20년을 근무할 수 있었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운이 좋았던 거죠.
그렇게 사회 생활하면서 저는 장애를 “상대방에게 말할 것인가,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을 접하게 됐죠. 그러면서 제 장애를 알린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게 되었는데요. 결론은 ‘상황에 맞게 하는 선택이다’라는 거였어요. 동료와 산행을 같이 가거나 할 때는, 발작시에는 이런 저런 조치를 하면 된다는 것 까지 알려주지만, 모임에서 모든 구성원들에게 미리 제 상태를 말할 필요는 없다라는 거예요. 그러니 밝히고, 밝히지 않는 것은 상황에 따른 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고민 3 ; 간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진행 : 동춘 씨는 최근 여행을 다녀오셨다고 하던데, 어느 곳을 둘러보고 오셨나요?
동춘 : 인도, 중국 네팔, 파키스탄 등을 여행했죠. 한 6개월 정도 혼자 배낭여행 한거예요.
올챙이 : 동춘 씨는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에요. 간질 장애가 있으면 이런 마음먹기 정말 쉽지 않은데, 게다가 실천까지.
진행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동춘 씨는 간질 장애가 생긴 후 집 밖에 나오기가 두려웠다고 할 정도였는데, 해외여행까지 다녀오다니. 더구나 혼자 배낭하나 메고 장기간 해외를 여행한다는 것은 비장애우들도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거잖아요. 결심하고 실천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마음을 다잡으셨나요?
동춘 : 출국하기 전 날 걱정이 되서 잠을 거의 못 잤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정말 두려웠거든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저는 간질이 마음의 병이라고 생각해요. 육체적인 원인이 50%라면, 심리적인 원인이 50%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이 그렇듯이 간질도 마음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간질이 발병하고 나서 2년간은 집 밖 출입도 못했어요. 사람들 있는 곳에서 발작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은 육체적인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 더 힘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발작할 건데, 그래, 긍정적으로 살자. 사람 있는 곳에서 발작하려면 하고, 아니면 말고. 발작하면 툭툭 털고 일어나지 뭐.’ 그렇게 맘을 먹으니 오히려 편해지던데요. 어차피 발작하는 건데 긍정적으로 살자고 맘 먹으니, 신경 안정제도 끊게 되더라고요. 약도 줄이게 되고. 그러면서 간질이 심리적인 것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딱따구리: 맞아요. 창피를 안 당할려고 애쓰다보니까 더 힘들고 공포스러운 거예요. 저도 29살까지는 발작에 대한 두려움에 맘 졸이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 이상하게 보든지 말든지 너네 맘대로 해라, 어쩔 건데’하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저는 간질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지하철에서 나 이런 사람이다라고 적은 종이를 들고 다니면서 크게 발표하고 다녔던 경험도 있어요. 제 자신에게 자신감을 주고 싶었거든요. 첨에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욕할까봐 엄청 두려웠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더라고요. 장애는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아요.
진행 : 동춘 씨 혼자서 해외여행을 무사히 다녀오고 나니까, 어땠어요?
동춘 : 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니던데요.
진행 : 와, 멋있다. 동춘 씨. 그럼, 여행하면서 기억에 남는 얘기들을 좀 해줄래요?
동춘 :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간질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안 좋잖아요. 인도 여행할 때 노르웨이 친구를 만났는데, 한국에서는 간질 장애우들을 귀신병, 유전병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더니, 이 친구가 너무나 깜짝 놀라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노르웨이는 복지시스템도 잘 되어 있고, 또한 간질이 있다고 취업을 거부할 수도 없고 해고를 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제 얘기를 믿지 못하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사회 인식의 차이가 사람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정말 뼈저리게 느꼈죠.
동춘 : 제 꿈은 간질에서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그리고 돈 모아서 세계일주도 할 계획인데, 여행은 저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주는 역할을 할 거예요.
올챙이 : 간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라고? 나는 아냐. 나는 간질을 사랑하기로 했어.
동춘 : 아니, 누나 내 말 뜻은 그게 아니고요. 제가 ‘간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했던 뜻은 간질로부터 시작되는 억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미였어요. 삶에서 장애를 가지게 된다는 것은 곤혹스런 사건이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주어지는 편견과 억압이에요. 진행자에게는 간질 장애가 없다고 해도, 맘 속에는 두려워하는 것이 있을 거예요. 한 번 두려워하면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죠. 하지만, 벗어나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할 수 만 있다면, 반을 해결되는 겁니다. 하지만 장애 문제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니, 쉽지 않은 문제죠.
그래서 ; 간질은 간질이고, 사람은 사람인거죠!
진행 : 지난 몇 달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 중에서 연쇄살인 사건에 관한 얘기를 해볼까합니다. 뜬금없이 뭔 소린가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연쇄살인범 유영철 씨가 잡히면서 헤드라인을 차지했던 것은 유 씨를 포함해 아버지와 형도 간질이 있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오보였음이 밝혀졌지만, 어쨌든 유 씨가 구속되면서부터 그의 간질과 정신상태는 언론에서 유 씨의 범죄와 맞먹는 비중으로 보도되곤 했습니다. 대구지하철 참사 때에도 방화범이 정신장애가 있니, 정신과 치료를 받았느니 하면서 마치 장애 때문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언론이 몰아갔는데요. 이번에도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어떻게들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인기 : 그 때 언론들은 간질을 가졌기 때문에 살인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다는 식이였어요. 정말 화가 나요.
올챙이 : 속이 많이 상했죠. 계속 간질에 대한 것이 헤드라인으로 보도됐고, 아버지와 형도 간질이 있다고 보도했죠. 간질이 유전인 경우는 정말 드물어요. 저는 정말 그 보도를 한 기자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간질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지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고 썼는지. 그 기자들이 간질 장애가 뭔지나 알고 썼을까요. 간질장애 관련 단체와 모임들이 간질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자 몇 십 년 동안 정말 얼마나 힘들게 노력해왔는지 그들은 알기나 할까요. 전혀 모르겠죠. 저희는 다시 제자리로 던져졌어요. 이건 후퇴나 마찬가지죠.
동춘 : 우리 사회에서 간질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지 정말 명확하게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었어요. 한마디로 말해서 딱 걸렸다, 이거였죠.
올챙이 : 간질 장애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극복하고 잘 사는 사람 얼마나 많은데, 이들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사회는 우리들을 더 곤란하게만 만들었어요. 동춘 씨의 말대로‘맞아, 딱 걸렸어’라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였다면, 사건의 본질보다 범죄자와 그의 가족이 간질이 있다며 그렇게 확인도 없이 급하게 보도했을까요?
나중에야 간질이 아니네 어쩌네 하고 다시 보도가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면 정정보도하면서 사과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간질 장애라고 떠들었던 방송사, 언론사 그렇게 많은데 왜 미안하다는 말 아무도 안하죠?
진행 : 단체 차원에서 소송을 하는 것은 어때요?
올챙이 : 우리도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슈화할까 생각을 해보기도 했죠. 그런데 간질 장애를 우리 사회에서 드러낼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과연 가능할까요. 간질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 가족들이 계속 버텨낼 수 있을까요.
인기 : 인식을 바꾼 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따기에요.
딱따구리 : 간질 장애우에 대한 선입견들이 너무 심해서… 생각해보세요. 팔에 조그만 화상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은 것이 사람 맘인데… 그런 본인의 심중을 헤아리기는커녕, 오히려 말도 안되는 편견들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잖아요. 간질과 사람은 별개잖아요. 간질은 간질이고, 사람은 사람인거죠.
인기 : 예전보다 간질에 대한 인식이 나아지기는 했겠죠. 하지만, 여전히 간질 장애우들은 불치병, 유전병, 지랄병이라는 손가락질 많이 받죠. 그러나 이런 것들에 연연해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동춘 : 그래요. 주위 사람들 신경 쓰지 맙시다. 그런 잘못된 시선 의식할 필요 없잖아요. 어차피 내 인생인데.
올챙이 :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누구든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 간질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느 날 불쑥 찾아왔듯이, 또 누구에게 장애가 갑자기 생길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장애가 있다고 해도 장애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회라면 ‘장애’가 정말 장애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간질 장애우들에게 정말 힘든 것은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 인식이니까요.
진행 : 동춘 씨와 올챙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에요. 여러분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장애가 찾아왔듯이, 누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죠. 어쩌면 이미 진행 중인지도 모르고요. 이번 수다방이 간질 장애우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길 마음 깊이 바래봅니다. 여러분 뜻깊은 시간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진행 최희정 기자/삽화 이상윤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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