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걸음〉을 통해서 본 장애우 역사 ④-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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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두 마리, 50명의 식사 거뜬히 해결(?)
수용 시설에서 자행되는 비리와 인권유린에 대한 문제의식은 〈함께걸음〉이 창간 이후 놓지 않는 주제다. 그리고 시설에서 운영하는 장애우 자립작업장 또한 각종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운영자는 원생들에게 ‘온다는 사람 많으니 일하기 싫으면 나가라’라는 식으로 철야근무는 물론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과 비인간적인 근로환경을 강요한 예가 많았다.
91년에 장애 관계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에덴하우스’ 사건이 그 단적인 사례다. 83년 말 전 국가대표 유도선수였던 정덕환 씨(당시 45세)가 세운 에덴하우스는, 여타의 신앙공동체가 밟은 절차대로, 방송을 타면서 성장을 거듭한다. 기사에 따르면 에덴하우스는 후원자가 방문하면 다른 단체에서 장애우들을 빌려(?)오는 소동도 벌였단다. 또한 오십여명의 원생들이 한끼 식사를 닭 두 마리로 해결(?)했고, 20∼30여명의 장애우들이 한방에서 생활했는데 한 명이 화장실을 가려면 방 안 모두가 잠을 깨서 비켜야 했으며, 하나 뿐인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새벽 4시부터 줄을 서야 했다고. 또한 전자테스터기 등을 하청을 받아 조립했는데, 납땜을 주로 했던 작업장은 환풍기가 두 대뿐인 반지하 건물이었다. 당시 정 씨는 70만원의 월급을 받았지만, 작업장 원생들은 전체 평균 2∼3만원의 월급이 고작이었다. 그러고도 정 씨는 “나는 사업가다. 이익을 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름대로의 철학(?)을 폈다나.
‘복지시설의 성폭행 백서’라는 기획 기사(4월호)에서는 88년 이후 드러난 시설의 인권유린 사건 중에서, 특히 ‘저항’조차 불가능한 (장애)여성이나 장애아동에 대한 성폭행을 취재해 그 참상을 고발하고 있다.
그 중 몇 건을 돌이켜보면, 경기도 하남시에 있던 성광학교(정신지체 특수학교) 정신지체 여학생이 같은 건물에 있던 기독교예술신학대학교 남학생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학교 측은 “정신박약아가 말한 것을 어떻게 믿냐”며 오히려 부모를 무고죄로 고발하겠다고 협박했다.
또한 전북 고창군에 있던 무장애육원 김절준 이사장은 여자 원생들에게 안마를 강요하고 성폭행했다. 또한 김 씨는 발설을 이유로 한 여자 원생을 이가 부러지도록 구타한 것도 밝혀졌다. 김 씨는 법정에서 “간음은 시인하나 피해자와 합의한 것이므로 강간은 아니다.”라고 주장해 수사관들을 실소케 했다고.
서울 은평구에 있는 은평아동복지천사원에서는 이미 시설에서 (18세가 되면 원생들은 보육시설에서 나가야한다) 퇴소한 원생들이 천사원의 여섯 살에서 열한살에 이르는 어린 아동들을 성폭행한 것이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퇴원생들은 고아원의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아이들을 성폭행 했고, 이에 항의하는 보육사들까지도 위협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사건을 폭로한 보육사가 이유없이 갑자기 퇴직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장애여성 성폭행 사건이 생기면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는 화간이니, 정신지체라서 신빙성이 없다니 하면서 당사자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십여년이 지나도록 변치 않는 것이 있을까, 답답할 뿐이다.
당시 보사부가 발표한 ‘91 장애우복지사업지침’에 의하면 전국 139개의 장애수용시설에 1만 5천여명의 장애우가 수용됐다. 아동복지시설도 340여개에 달하며 3만7천여명의 원생들이 있었다. 〈함께걸음〉은 “이들 시설은 인건비의 90%와 운영비의 80%를 정부로부터 보조받으면서도 수용자들의 인격까지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시설장의 사유화 의식’과 직원들의 ‘무사안일주의’, 그리고 관리 감독관의 ‘묵인과 방조’의 절묘한 조화(?)가 시설 안에서 성폭행이라는 독버섯을 키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업과 사회복지의 갈림길에서
90년대 초,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는 정립회관 사태와 재활협회 노조 와해 사태다. 90년에는 정립회관 직원들이 관장 및 이사장의 횡령 및 유용 의혹, 족벌체제의 비민주적 운영 등의 문제제기를 하며 단식농성을 했다. 91년에는 재활협회의 박순국 관장과 이청자 실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협회의 노조원들이 130여일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노조는 관장과 이사장의 퇴진을 담보로 해체한다. 이 과정에서 재활협회는 노조원과 비노조원 사이에 씻지 못할 불신과 앙금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91년말 신문판매대 운영권을 둘러싸고 재활협회와 재활재단의 또한번 대립각을 세우는 불씨로 남게 된다.
홀트 아동복지회 노조 사태 또한 ‘사회복지 기관으로써 거듭나기’를 주장하는 노조와 ‘수익’을 우선시 하는 사용자측과의 시각 차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홀트 아동복지회 측은 대표적인 해외 입양기관으로 명성을 날리며 1천억이 넘는 자산규모를 가진 큰 단체였다. 김한규 회장은 자의적으로 임기연장을 해가며 8년간이나 회장을 맡았으며 1억원이 넘는 돈을 유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계속되는 복지시설 관련 농성사태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지는 복지노조에 대해서 이성재(당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는 “일부 시설이나 단체의 장들이 복지 노조에 대해서 엄청나게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와해시키고 있다.”며 이들의 각성과 퇴진을 촉구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
1990년 1월 충남 교육위원회는 천안 지역내에 정신지체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를 91년 3월에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설립인가가 났던 91년 10월까지 기간은 당시 우리 사회가 장애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애우 시설 수난사’가 됐다.
사건 개요를 간략하게 되집어보자. 위원회는 설립 발표 9개월 후에야 폐교된 천안 목천초등학교를 선정한다. 오지라 폐교된 학교니 만큼 학부모들의 반대는 뻔한 것이었다. 이후로 땅값이 비싸다며 이리저리 시간을 끌다가 천원군 성거읍으로 결정을 했다. 그러나 대로변 근처인 그곳은 주민들이 땅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던 노른자위(?)였다.
주민들은‘앞날을 기대하고 만든 직선도로에 뜻하지 않게 장애자(정신박약자)시설이 설립되면 오히려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중략)…그들의 정신수양과 개발을 위해서는 조용하고 신선한 적지에 선정해야 할 것이다…(중략)… 이와 같은 시설은 주민에 도움이 될 일이 한가지도 없다’며 민자당 의원까지 합세해 반대한다.
이 상황이 방송을 타면서 장애계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며 충남 장애인부모회, 한국장애인총연맹, 한국DPI,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주축으로 공대위를 꾸려 대응하기에 이른다. 자료에 의하면 전국 102개 특수학교에 19,947명이 장애 학생이 다녔다. 그리고 3,181개의 특수 학급 다니는 장애아동의 수도 3만여명. 그러나 충남에는 특수학교가 단 2곳뿐이었다. 그런 곳에서 주민들의 반대로 개교에 이르기까지 3여년이 소요된 이 사태는 그야말로 장애우 시설 수난사다.(현재 인애 학교는 충남 천안시 성거읍 소우리에 자리잡아 93년 5월에 개교해, 27개 학급 5백여명의 장애 학생의 배움터가 됐다.)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치열하게
91년 3월 용산구에서 반신불수의 중도 장애를 입은 장씨가 물탱크에 목을 매 자살했다. 장씨는 여기저기 빚을 대서 간신히 마련한 포장마차를 반속 반원들에게 빼앗겨 삶을 포기했다. 그리고 인천에서는 심한 우울증을 앓던 선천성 편마비 장애우가 계속 시도한 면접에서 탈락하고, 날이 궂어 행상도 못나가 찬장에 양념이 하나도 없는 등의 생활고를 비관해 빨랫줄로 목을 맸다.
〈함께걸음〉에 의하면 1980년대 후반 장애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장애 판에서는 ‘장애우 문제는 곧 가난한 장애우 문제이다.’라는 주장이 강하다. 이 말은 장애우 문제 역시계급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당시 ‘장애 해방은 궁극적으로는 가난한 장애우들의 해방’이라는 의식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가난한 기층 장애우들의 실상은 잘 파악되지 못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산업화되고 있는 대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 숨겨졌기 때문이다. 이에 〈함께걸음〉에서는 이런 기층 장애우들의 삶을 알려내기 위해서, 구조적인 가난 때문에 생존마저 위태로운 장애우들을 직접 발로 찾았다. 빈곤지역에서도 장애우들은 가장 절대적인 가난에 시달렸으며, 생계에 매달려야 하는 부모의 형편 때문에 거의 방치되거나 심지어는 아예 이웃도 모르게 숨겨져 있는 상태였다. 당시 많은 기층 장애우들은 구걸이나 노점으로 근근히 연명하는 상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걸, 행상 장애우들이 폭력 조직에 갈취 당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는 지체장애자협회(이하 지장협) 장기철 회장의 근거 없는 폭로는 기층 장애우를 분노케 했다. 장 회장의 발언은 겉잡을 수 없는 파문을 불러왔다. 게다가 장 회장은 증거도 대지 못한채 ‘가출 청소년을 꾀어 멀쩡한 사지를 꽁꽁 묶어 다리를 잘라 불구를 만든 뒤 앵벌이를 시킨다’며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또한 시민들에게 장애우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남겨 그나마 구걸과 행상에 생존을 걸고 있던 장애우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았다.
이에 행상 장애우들은 구걸 행상 장애우들의 생계 대책을 강구할 것을 국회에 요구하고, 장기철의 지장협 실적 공개와 정정보도 등을 요구하며 지장협 사무실 점거농성에 돌입한다. 그러나 지장협은 “우리는 폭력 조직을 잡아들이랬지, 구걸하는 장애우 잡으란 소리는 아니었다”며 “걸인 장애우 단속 및 보호를 지장협에게 공식적으로 위탁할 경우 이들의 생계 보호에 만전을 기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장애우로만 구성된 비영리 단체이므로 장애우들의 불신을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함께걸음〉은 지장협이 일으킨 사태는 단순히 폭력조직에 갈취 당하는 장애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력을 키워 이권을 따내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었음을 고발하고 있다. 당시 〈함께걸음〉에 투서된 편지와 공문에 따르면 ‘이미 1990년도부터 장 회장은 지하철 신문 가판대와 간이 매점의 이권을 따내기 위해 지하철 공사를 들락거리고 있었으며 노태우 등의 정치인이 뒤를 봐준다고 공사 직원을 협박하기도 했다.’고 고발했다.
〈함께걸음〉은 당시 지장협의 행태에 분노한 기층 장애우들의 점거 농성 등을 ‘장애우 운동 역사상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치열하게 솟구친 뜨거운 몸짓’이라고 평가했다.
기억하시나요? 직업병 양성소‘원진레이온’
‘원진레이온’은 빠른 속도로 산업화되던 80년대 한국 사회의 참혹한 노동 현실을 대표했던 단어다. 일본에서도 문제였던 인견사 제조기계(제조과정에서 ‘이황화탄소’라는 맹독성 가스를 발산하는)를 아무런 안전 대책 없이 수입했고, 노동자들은 20여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들의 몸에 나타났던 이상 징후들이 가스중독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81년에 이황화탄소 중독증이 발생된 이후,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이황화탄소로 인한 직업병을 인정받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됐다.
〈함께걸음〉은 1990년(10월호)과 91년도(4월호)에 걸쳐 원진레이온 관련 피해자들을 취재했다. 특히 91년도에는 이황화탄소 중독 판정여부로 투쟁하다가 사망한 고 김봉환(당시 53세)씨의 영결식을 취재했다. 김 씨는 회사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다가 마침내 요양신청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어, 통보받던 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또한 영결식 날조차 회사는 전경들을 방패로 삼아 폭력을 휘둘렀다.
93년 11월 누적된 적자와 직업병 문제로 ‘직업병 양성소’라고 불리던 원진레이온은 문을 닫았다. 천4백여명에 대한 대규모 역학조사까지 벌였던 원진레이온 파문은 대규모 실업 문제와 직업병 판정, 보상 문제로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
장애우의 목숨 값, ‘비장애우의 10%?’
장애계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장애인복지법과 고용총진법의 제·개정을 이뤄냈다. 이는 미약하지만 한줄기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런 장애계의 바램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판결이 나와, 또한번 장애계를 분노케했다.
1989년 8월 인천시 성동 농아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던 서용덕(당시12세)군이 마주 오던 트럭에 치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서 군의 아버지가 보험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인천지방법원 이진영 판사는 ‘국가배상법시행령 제 2조 1항 별표2에 의해서 서 군에 대한 피해보상은 89년 성인 남성의 하루 임금 8,150원의 10분의 1인 815원으로 계산하면… 55세까지의 손해배상 금액은 2백67만580원’이라고 판결내 충격을 주었다. 이 판사는 서 군의 노동상실율은 비장애남성의 90%에 이른다는 규정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서 군은 폐렴을 앓은 후 청력을 잃었지만, 당시에는 보청기를 착용하면 대화가 가능할 정도였다.
장애우는 이미 태어나면서 비장애 남성의 10% 밖에 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 〈함께걸음〉은 ‘장애우에 대한 이 사회의 차별이 인간을 오로지 ‘노동력(결국은 일을 얼마나 시킬 수 있느냐는)’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기준에 따른 것임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유행어였던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라는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장애우는 차별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모순에 놓였던 것이다. 또한 이 사건에 성명서조차 못내고 있는 장애계에 대해서도 ‘장애우 단체의 분열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 밖에 1980년대 후반부터 정치권의 주요 현안이었던 지방자치제도는 1991년도에 이르러 정기 국회를 통과했다.(그러나 단체장 선거 없는 반쪽짜리였다. 이후 지자체 관련 법안은 95년 6월 지방단체장과 의회의원들을 선출하면서 제 모습을 갖춘다.) 장애계에서도 지방자치는 지역복지 차원에서 복지 향상과 직결되기 때문에 대응방법을 모색했다. 당시 재활협회 한덕연 씨는 지난 복지행정을 분석 평가해, 한 발 앞서 바람직한 복지정책을 내야 할 것이며,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정책 결정의 재량권이 누구에게 있으며, 어떻게 결정되는냐 하는 구조를 잘 파악해 효과적으로 공략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8월에는 한국맹인복지연맹(초대회장 박근수)가 출범했는데, 이는 90년대 초부터 장애 운동을 세력화하고 이끌어갈, 통합된 장애운동 단체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장애유형별로 연합조직 형태로 통합되는 장애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9월에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주최했던 제1기 장애우 대학이 열렸다. 80년대 후반부터 장애우 운동이 활성화 됐지만, 이를 뒷받침할 이론과 조직의 부족은 당시 장애계의 갈증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 문제는 개인의 불행으로만 여겨졌던 터라, 장애에 관한 올바른 인식 개선을 위해서도 장애우 대학은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장애우 대학은 현재 24기, 약 1천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글 최희정 기자
사진 1991년 함께걸음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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