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정신건강 정책 들여다보기
본문
![]() |
| 국립 블랙스태드 정신병원 1층에 마련된 학습실 |
바이킹과 노벨평화상.
북유럽에 위치한 노르웨이의 역사를 살펴보면 만날 수 있는 말들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바이킹은 서기 800년 무렵부터 비옥한 토지를 찾아 국외로 진출하면서 다른 나라를 침범했던 노르웨이인들을 일컫는다.
반면, 노벨평화상은 침략의 역사인 바이킹과는 상대적으로 대비된다. 바이킹의 역사가 폭력의 역사였다면, 노벨평화상이 상징하는 것은 평화를 지향하는 현재다. 즉, 노르웨이는 과거의 폭력의 역사를 딛고, 평화의 역사를 빚어가고 있는 나라다. 여기에 더해 노르웨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복지다. 이는 "개인의 성공여부와 관계없는 생활안정"이란 슬로건이 한 마디로 잘 표현해 준다.
국가인권위원회 "정신질환자 보호 및 국제인권동향 연구 실무연수단"(이하 연수단)이 3박4일간의 네덜란드 방문 일정을 마치고 노르웨이에 도착한 날은 2003년 9월 26일 금요일 밤이었다. 연수단이 노르웨이를 방문한 목적은 노르웨이 사회가 국민들의 정신건강에 대해 어떻게 보호하고 어떤 정책을 펼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대표적인 복지국가로 알려진 노르웨이가 정신질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때는 1996년쯤이었다. 당시 의회에 제출된 한 보고서는 "그동안 실시한 정신건강 진단 체계가 모든 분야에서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그에 따라 서비스의 지방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서비스 체계 강화, 환자의 권한 강화 등을 목표로 8년에 걸쳐 3조 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병원, 치료뿐만 아니라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
연수단이 첫 번째로 방문한 현장은 국립 블랙스태드 정신병원이었다. 연수단은 병원 관계자들이 마련한 정성이 돋보이는 점심 식사 대접과 약 한 시간 남짓한 브리핑을 받고는, 곧바로 3개 팀으로 나눠 병동 현장을 방문했다. 병동은 그 주변 환경부터 깊은 인상을 주었다. 10여 채의 2층짜리 병동은 야트막한 산자락 곳곳에 자리했다. 병동 사이에는 텃밭이 있고 사과나무 등 유실수도 자라고 있었다. 호수가 내다보이고 야트막한 산은 산책길로도 손색이 없었다. 병원측은 이런 환경이 국립병원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치료에도 적절히 활용된다고 했다. 환자들은 틈틈이 텃밭을 가꾸며, 산책로도 이용한다.
병동 내부는 조금 더 잘 정비돼 있었다. 청소년 정신질환자들이 입원한 병동은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1층에는 주방과 학습실, 휴게실이, 2층엔 환자들의 숙소가 있다. 1인 1실로 운영되는 숙소는 1인용 침대 한 개를 더 놓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현장을 둘러보던 한 연수단원이 "이 정도 시설이라면 집에 돌아갈 마음이 사라지겠다"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마침 휴게실에 있던 두 명의 청소년 환자들은 연수단을 보고도 아무런 부담없이 체스를 즐겼다. 병원을 치료의 공간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 즉 퇴원환자, 환자 가족, 의료진들의 교육 장소로 인식하고 있는 노르웨이 사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병원 관계자에 의하면, 병원비는 전액 국가부담이며, 환자 3명을 돌보는데 의사 1명에 간호사가 약 4명 정도 배정된다고 했다. 당시 병원에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가장 많이 입원 했고,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환자들이 그 다음을 이었다. 이들 중 50% 정도는 경찰이나 가족 등에 의해 강제 입원됐다. 환자들의 퇴원은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윤리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아울러 환자를 응급, 장기 입원환자, 65세 이상 노인 정신질환자(치매환자 포함), 정신착란 환자 등으로 분류하여 담당하고 있다.
이 밖에도 블랙스태드 병원은 학교를 방문하여 마약투입이나 자살 등의 정신질환을 예방하는 홍보와 치료를 병행한다. 또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이동들의 정신질환을 연구하기도 하는데, 연구결과 노르웨이 사회에서 아동들이 정신질환에 빠지는 원인은 첫째가 부모의 이혼이었고, 가정불화, 이사(전출), 이성(고민), 부모 등에 의한 지나친 기대 등으로 나타났다.
동정 아닌 품질로 승부하는 재활센터 수공예품
연수단이 두 번째로 방문한 현장은 정신지체 장애인 재활센터인 발더 텍스틸이었다. 오슬로 시내에 위치한 이곳은 언뜻 보면 일반 수공예품 상점과 다르지 않았다. 진열장에는 천으로 만든 시장가방을 비롯하여, 장갑, 모자, 식탁보, 발닦이 등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어떤 물건은 색상에 이끌려 손을 내밀 법도 했고, 실용적인 면에서 지갑을 꺼내기도 할 법했다.
1986년에 설립된 발더 텍스틸은 초기엔 노인들이나 장애인들의 쉼터였다. 이후 1997년 노동부에서 허가해 오슬로에서는 유일하게 수공예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업체로 거듭났다. 장애를 가진 이에게 일 할 기회를 제공하고, 재활치료와 더불어 자립심을 갖게 하자는 취지였다. 현재는 21명의 직원들이 근무하는데, 이들 중 50% 정도는 다운증후군 환자들이며 나머지는 일반 장애인들이다. 아울러 직원들 중에서 학생은 학교 교육과 재활교육을 병행하고 있으며, 치료가 필요한 직원들은 치료 후 출근하여 근무하고 있다.
이곳의 작업은 철저히 분업화로 진행됐다. 2층의 한 창가 근처에서는 다운증후군 환자 두 명이 천을 길고 가늘게 찢었다. 천을 짜는 일은 1층에 놓인 베틀에서 이뤄졌다. 한 직원은 재봉틀을 이용해 천과 천을 이어 꿰매기도 했다. 각자 작업 공간은 비교적 널찍했고, 독립적인 공간도 유지됐다.
"노르웨이는 인건비가 비싸 갈수록 전통을 이어갈 수공예품 생산이 줄고 있다. 따라서 이곳 수공예품은 전통을 잇는 물건이다. 그렇게 때문에 품질을 허투루 관리하지 않는다. 이 작업대에서는 전문가가 만든 디자인 도안을 바탕으로 무늬를 구상하고 재단작업을 한다."
관리인은 장애인들이 만들기 때문에 구입한다는 "동정고객"이 아닌 물건의 질을 보고 선택할 수 있는 "품질고객"을 맞이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노르웨이에 있는 이런 재활센터는 국가나 자치단체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다. 발더 텍스틸 수입금은 재료구입과 직원 급여로 사용한다. 국가가 장애인에 대한 모든 지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급여는 용돈인 셈이다. 관리인은 "현재 이런 재활센터에 취직하고자 하는 장애인들이 많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직원들이 수입 자체보다는 급료 봉투를 받는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다양한 그룹이 참여하는 정신건강협회
연수단은 노르웨이 사회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의 수준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연수단이 느낀 부러운 시선과 달리 노르웨이의 관련 단체들은 노르웨이가 천국다워지기 위해서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토로했다.
정신건강협회는 그런 단체들 중의 하나다. 1985년에 설립된 이 협회는 정치인들이 정신질환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5년엔 "복지국가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해 정신질환에 대한 정치인들의 인식 확대를 꾀했다. 1994년부터 발행하는 "정신건강"이라는 유료 격월간지는, 9월 현재 1만 2천여명의 독자들에게 협회 활동과 정신질환에 대한 지식 등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정신건강협회에는 환자와 가족 등으로 구성된 5개 그룹, 의사 등 전문가 단체 6개 그룹, 대학협회 4개 그룹, 인도주의 단체 5개 그룹 등 총 20개 그룹이 참여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온 첫 손님"인 연수단을 반갑게 맞이했던 이 협회는, 브리핑을 통해 노르웨이 사회가 당면한 정신질환 관련 문제를 몇 가지로 요약했다.
"병원시설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많다. 우선 병원이 환자들을 너무 빨리 퇴원조치하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입원하기 위해 대기중인데,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대기가 장기화되고 있다. 연금혜택이 없는 정신질환자들의 생활환경 문제도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이 밖에도 많은 환자들이 환자의 동의 없이 입원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정신건강협회는 내년엔 인간의 권리에 관한 TV광고를 계획하고 있다.
국립병원의 한 관계자 역시 노르웨이 사회가 좀더 나은 정신질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국가의 책임과 의무가 뒤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국가는 국민의 정신건강을 위해 지속적인 관심과 정신건강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또한 정신건강에 대한 교육·홍보를 통해 정신질환자에 대한 이웃의 편견을 해소하고 더불어 사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노르웨이의 각 단체나 기관에서 정부에 요구하는 목소리는 "사회복지의 천국"을 부정하는 의미까지는 아니다. 이미 정부의 각종 정책이 정신건강을 지켜내기 위한 마지노선을 그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건강사회국이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노르웨이는 건강사회복지분야에 연간 GNP의 19.3%를 지출하고 있다. 또한 전 인구의 25%정도가 질병보조, 사회복귀 보조, 폐질환자 수당 등의 각종 국가보험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다. 자치시 당국에서는 노인들과 계속적인 치료와 사회복귀가 필요한 병원퇴원자 등을 상대로 한 각종 지원사업에도 시 예산의 약 25%를 사용한다.
아울러 1999년에 제정된, 필수적이고 전문적인 지원이 필요한 환자들에 대한 국가의 의무 규정, 환자들의 인사관리와 편의를 보장하는 법, 지방자치구가 관내의 주민과 임시 체류자 등 모든 사람들에 대한 건강지원 의무를 갖게 하는 법 등에 의해 제도적 뒷받침도 이뤄져 있다. 현재 노르웨이는 장애인과 같이 사회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의 후생복지를 위한 방안을 여러 가지로 검토하고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국회에서 보건부, 노동부, 사회복지부, 자치단체 등 각자의 다양한 복지기능의 업무형태를 하나로 묶어서 운영·관리하는 통합 운영방안이다.
사회복지 배경엔 "느린 삶의 속도"가 있다
이틀간의 현장 방문 기간 동안 보고 느낀 노르웨이 사회의 정신건강에 대한 투자는 단지 1인당 국민소득 3만7천달러(2001년 기준)라는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오슬로의 지하철 1구간이 우리나라의 지하철 요금보다 서너 배 높은 점을 비하면 소득만큼 지출되는 비용 역시 적지 않을 듯싶다.)
오슬로 공항을 떠나면서 생각한 그 "무엇"의 일단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 고용 문제는 주요한 사회문제이다. 그러나 고용문제가 워낙 큰 일이다보니 고용 다음의 상황은 소홀해지는 경우가 있다. 장애인 고용은 단순히 고용만으로 끝나지 않는 문제다. 지금과 같이 바삐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고용된 장애인은 자칫 그 속도에 밀려 튕겨 나갈 여지가 많다. 일부에서는 여전히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장애인에게 비장애인과 동일한 시간 내에 동일한 결과를 내놓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함께 해야 할 고민은 속도 중심의 삶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르웨이의 정신건강을 위한 사회복지 활동은 노르웨이의 문화와 자연을 닮았다.
가이드의 말처럼 노르웨이는 심심한 나라였다. 숙소가 있는 오슬로 시내는 저녁 6시만 되어도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드물었다. 술도 알코올 도수에 따라 파는 가게가 다르다보니, 술집을 찾는 불편함도 만만치 않을 듯 했다. 심심함은 도심을 벗어나 펼쳐진 전원 마을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집들은 주로 양을 치는 목초지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숲 사이로 지붕만 내민 집들은 그 자체가 고독이었다. 독서량과 신문구독률이 높다는 통계는 심심함을 무엇으로 대체하는지 짐작케 했다.
그러나 이 심심함의 이면에는, 삶의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이해로 이어졌다. 배려와 이해는 경쟁보다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한다. 어쩌면 정작 노르웨이로부터 배울 점은 바로 그런 삶의 철학이 아닐까 싶다.
* 이 글은 월간 「인권」에 실린 글을 부분적으로 보완한 글임을 밝힙니다.
글 사진 노정환(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관)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