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구산동 폐결핵 환자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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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그곳’을 가다
맑은 날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그러고도 한참을 올라갔다. 처음 가는길이라 그런지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을하늘과 맑은 공기가 아니었다면 짜증과 지루함을 동시에 느꼈을 지도 모른다.
10년 전, 그러니까 1993년 5월 <함께걸음>은 이곳 구산동을 찾아갔었다. [우리이웃-결핵환자촌의 건강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아프고 가난하지만 서로 따스한 등을 기대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개했었다. 기사를 읽어보니 신아길, 봉원초, 한춘숙이란 이름이 눈에 띈다. 함께걸음 인터뷰에 응했던 분들이다. 지금 그 분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잘 지내고 계신가? 혹시 이사를 가셨을까? 마을자치회장을 맡고 있는 김상길씨는 “그 분들 모두 돌아가셨어요. 벌써 3-4년 전입니다”라며, 이제 그 분들은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10년만에 다시 찾아본 구산동 산동네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을 들여다보자.
〈구산동 산동네 모습〉
드디어 나의 목적지를 뜻하는 것처럼 보이는 뭔가의 표시가 나타났다. 「산동네 입구 -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 산 61번지 -」
‘폐결핵 환자촌’이라고도 불리어지는 이곳을 사람들은 ‘구산동 산동네’라 부른다.
‘산’61번지라는 이정표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은 ‘산동네’였다. 가파른 산기슭에 판자로 떼어다 붙여 만든 낮은 집들로 산 하나를 다 뒤덮은 모습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묘한 조화를 이뤘다.
마을이 들어 선 것은 1960년대 초다. 당시‘개발제한구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건축물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개집을 짓고 개를 기르는 것처럼 하다가 구청의 감시망을 피하면서 개집을 개조해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는 가구 수도 늘어났을 뿐더러 가족도 없이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특수성이 인정되어 구청에서도 함부로 철거나 강제퇴거조치 하지 못한다. 주거환경만 살펴보면, 그 열악함은 빈민지역이라기보다 극빈지역이라는 말에 더 가까울 것 같다. OECD 가입 어쩌구저쩌구 하지만 아직 공중 화장실과 공동 세탁장, 공동 수도, 연탄창고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참, 산동네에서 유일하게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마을 중간에 하나 있다. 바로 공중화장실이다. 92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이곳을 방문했는데 허름한 간이 화장실을 보고 “아니 화장실이 왜 이래?”한마디 하자 구청에서 곧바로 지었단다. 볼일이라도 편하게 보라는 대통령 후보의 선처였을까.
마을에서는 이웃사랑회와 너른사랑(대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자원활동을 하고 있다)의 지원으로 반찬도 판매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 반찬까지 하게 되면 부식비 등이 많이 지출되니까 각 자 집에서는 밥만 하고 반찬을 아주 싼 가격에 공급한다.
〈구산동 산동네 사람들〉
현재 187세대 266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 중 57%인 106세대가 결핵환자 가정이다. 하지만 대부분 독거인이라 가정을 이뤄 산다고 볼 수도 없다. 이 중에서도 약 70%는 결핵 후유증과 합병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다. 가족도 재산도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둥아리 뿐이다. 하지만 결핵과 그에 따른 후유증, 합병증은 일거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게 만든다. 대부분 국가보조금으로 살아가는 수급자 신세다. 그나마 올 7월부터 호흡기 장애가 장애범주에 포함되어 등록한 주민의 수가 약 1/3 정도 된다고 한다. 결핵환자라고 모두 장애 등록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결핵의 후유증으로 신체 기능이 약화되거나 합병증으로 호흡기 질환 같은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민의 2/3가 결핵을 앓지만 모두가 장애등록을 할 수는 없었다. 혜택이 미비해도 장애등록으로 받는 시책이 도움이 되는지 너도나도 “장애등록 해달라”는 통에 마을 옆 서대문시립병원 의사들이 잠시 곤혹을 치르기도 했단다. 이 마을에는 호흡기 장애를 갖고 계신 분 중 14명이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기도 하다.
이 마을에 들어온 지 20여 년이 넘었다는 김승주 할머니(83세). 마을에선 그나마 집이 시멘트로 지어져 튼튼해 보였다. 몇 해전 화재가 나 사위가 지어준 집이란다. 하지만 거의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고 오가는 길은 어설프게 만들어진 계단과 좁은 흙 길 투성이라 만일 눈, 비라도 오게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고, 그러다 다쳐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짐을 던져 줄까봐 외출할 욕심을 내지 않으신단다. “그래도 잠깐잠깐 나와 앉아 햇빛도 쐬고 가끔 교회 사람들이나 딸이 오면 부축을 받아 나가기도 하지”라고 말씀하시는 김승주 할머니. 전기세 아까워 TV도 제대로 안 켜시고 후원으로 받은 휴지 등도 나중에 딸 준다며 꼭꼭 싸메 놓고 아끼신다. 나가는 우리들을 배웅하시며 가만히 집 앞 의자에 앉아 꽃과 고추농사 이야기를 하신다. “올해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건진 게 없어. 그래도 꽃이란 놈은 오래도 피어있네.” 할머니가 소통하는 유일한 친구 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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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엔 언제나…〉
마을 주민 대부분이 종교를 갖고 있는 것도 색다른 점이다. 자원활동으로 시작해 이제는 마을 방문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된 김고은씨(25세)는 “아마 종교단체를 통한 지원이 많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베데스다 교회(일명 사랑의 보금자리)가 예배 출석을 근거로 차등 지원한다는 것은 잘 이해가 안돼요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다른 교회나 후원자들이 그 교회를 지원할 때는 그 분들 지원 잘하라고 주는 거 아닌가요? 대신 잘 나눠주라고…”라고 말하며 “베데스다 교회는 순수한 나눔의 정신을 갖고 선교활동을 하지 않고 마을 주민들을 통제(?)하려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교회는 새벽예배 출석에 따라 한 달에 5-10만원, 많게는 20만원씩의 후원금을 주고 있었다.
지난 4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 취재팀은 이곳 대표인 이정재 장로가 후원금을 착복하고 재개발 될 것을 눈치채고 산동네 땅을 구입하려한다는 제보를 받고 이를 취재했었다. 그러나 2번에 걸친 가처분 신청에 의해 결국 이정재 장로의 명예를 훼손할 여지가 많다고 받아들여져 방송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을자치회는 구청과 만나는 과정에서 이 장로가 뭔가 의도를 갖고 땅을 구입하려고 했던 사실을 알아냈다. 또 사람들을 부추겨 재개발을 추진하려는 것을 보고 강하게 항의했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 장로는 “마을자치회 김상길 회장이 자신을 폭행했다”며 오히려 고소하는 바람에 현재 항소심이 진행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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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걸고 지킨 구산동에 온 위기〉
88년 마을 바로 앞에 있는 구산연립 사람들이 산동네 사람들과 같이 못살겠다고 구청에 민원을 넣어 철거 위기에 놓여졌었다. 당시 주민들은 모든 것을 팽개치고 온몸으로 막아 철거를 철회시키기도 했다. 지금 구산연립은 마을과 상관없이 10여 층의 고층아파트로 탈바꿈하는 재건축을 진행중이다. 한꺼번에 재개발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구산연립 주민들과 구청 측은 재건축을 먼저 진행하면서 서서히 그 일대 생활환경을 바꿔보겠다는 것이다. 이제 아파트가 건설되면 산동네의 높이와 아파트 높이는 거의 같아진다. 아마 고층아파트와 산동네의 판자촌은 더욱더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될 것이다.
지난 십 수년에 걸쳐 이곳 구산동 산동네는 재개발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지난 95년 7월에도 주택공사에서 철거를 시도한 적 있는데 주민들은 가스통을 들고 각혈을 하면서 온 몸으로 강제철거에 맞섰다. 용역을 동원해서라도 과감히(?) 철거할 것은 철거한다는 주택공사나 건설업체도 이곳만은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구청 또한 일반 빈민지역과는 다른 특수한 문제가 존재하는 등 총체적 문제점을 안고 있는 마을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매번 소문이 무성했어도 소문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아 철거는 양치기 소년의 외침으로 끝나고 말았다. 주민들 또한 “우리는 다른 도시빈민들과 다른데 아프고 병든 사람들만 모여있는 우리를 누가 함부로 건드리겠느냐!”며 재개발 소문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들 또한 이곳이 더 이상 대안 없는 최후의 보루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지난 6월 13일 은평구 천사원에서는 마을 주민 2백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은평구청이 주최한 ‘구산주거환경개선계획 주민설명회’가 개최되었다. 소문만 무성하던 재개발에 대해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모여 구체적으로 대화를 시작한 첫 번째 공식 자리였다. 그러나 당시 설명회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이주비, 임시거주시설, 적절한 보상비를 전혀 보장하지도 않은데다 “자진 이전을 하지 않고 협의가 잘 안되면 영장발부를 통한 강제철거가 불가피하다”이라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1천만 원의 보상으로는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는 처지다. 임대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한 보증금도 없거니와 수입이 없으니 관리비를 제대로 내리란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이 정도 보상으론 어디서도 살 수 없으니 차라리 여기서 한 평생 살겠다”는 처절한 마을 주민들의 외침이다. 너른사랑에서 활동했던 유정(28세, 시민의신문 간사)씨는 “차선에 만족하며 살던 사람들이다. 마을 안에서도 판자 집이 자기 소유인 사람, 2-3백만원 정도의 전세로 사는 사람, 월 10만원 이하의 월세를 내고 사는 사람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갈등과 편차가 존재한다. 재개발이 될 경우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이 때문에 주민갈등은 전보다 훨씬 심각해 졌다”고 말한다. 고립되어 있으나 상대적 박탈감에서 해방되고자 모인 사람들에게 결국 그 안에서의 빈부격차는 다시 주민들 사이에 경계를 만들어낸다. 구산동 산동네 또한 자본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곳이었다. 마을자치회의 김상길 회장은 “앞으로 재개발은 될 것 같다. 이렇게 구청나 도시개발공사, 주택공사 등에서 구체적으로 나오는 걸 보면 멀지 않은 건 확실하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갈 곳이 없다. 현실적 대책이 나올 때까지 목숨 걸고 투쟁할 수밖에 없다”고 결의를 다지며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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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처럼 민들레처럼〉
93년 5월호 함께걸음에서는 구산동 산동네를 ‘진달래 처럼, 민들레 처럼’우리를 비춰주는 ‘또 하나의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밟혀도 끈질기게 일어설 수밖에 없는 ‘생명’의 원초적 본성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결핵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결핵 사망률 또한 29개 OECD 회원국 중 최고로 미국(0.5명) 영국(0.8명) 일본(2.3명)은 물론 싱가포르(3.4명) 중국(4.9명)보다도 높다. ‘2만 불 시대를 위하여’라는 구호아래 옆 사람의 고민도 외면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무작정 뛰어가는 우리들에게 구산동 산동네는 우리가 어떤 현실 에 직면해 있는지 새삼 일깨워준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무리 주거환경이 열악해도 마음은 편안한 자기들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집집마다 들여다보면, TV와 오디오, 컴퓨터 같은 세간살이들이 유난히 크고 좋은 것들임이 눈에 띈다. 유정 씨는 “TV는 그나마 마을 사람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매개체다”라며 사회와 단절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을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 계기야 서로 다르겠지만 가족들에게서, 자본에게서 외면 당한 외로움에 밀려들어 온 것임에는 틀림없다. 마을 사람들에게 ‘구산동 산동네’는 일종의 도피처였다. 하지만 2-30년 마을이 나름의 공동체를 형성해가면서 이곳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욕심과 욕망으로부터 해방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후원과 지원에 민감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그것이 한계라는 것을 알고 그 선에서 욕심을 버렸다. 너른사랑에서 활동하는 김고은 씨는 “주민들이 가장 못 견뎌 하는 것은 소외예요. 마을을 나왔을 때 일반 사회에서 또다시 손가락질 받고 눈총 받을까봐, 오히려 재개발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살기를 원하시죠.”라고 말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져 있어 별다른 희망을 품을 수 없다는 것일까?
이 마을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집집마다 혹은 마을길에 피어있는 빛깔 좋은 꽃들이다. 이제는 보기 드문 맨드라미, 코스모스, 채송화, 봉숭아, 백일홍 등 우리 고유의 꽃들이다. 어둑하고 침침한, 어설프고 위험하게 보이기도 하는 이 동네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었다.
‘구산동 산동네’가 서울특별시 특별구역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강남공화국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맑게 살아있는 마을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폭풍전야처럼 너무나 고요하다. 아프고 가난해 ‘새로운’것 보다는 ‘오래된’것과 친숙해 있어 별다른 변화를 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소문만 무성했던 재개발이 점차 현실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주택개선사업’이란 미명하에 우리의 공동체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글·사진 홍여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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