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장차법을 제정하자 (9) 전문가들이여, 연대세력이 되자 > 기획 연재


기획 연재

[기획]장차법을 제정하자 (9) 전문가들이여, 연대세력이 되자

본문

난감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전문가주의를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필자에게 "전문가의 역할"이라는 주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원고청탁을 받고 바로 답을 주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개인적인 친분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나약함 때문에 원고청탁을 수락하는 또 한번의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어차피 삶이란 연속되는 실수와 우연찮은 정석의 과정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장애우에 관한 정책의 생산과 서비스의 제공 과정에는 전문가들이 많은 역할을 해왔다. 장애우들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였고, 장애우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가 전문가들에 의해 고민되었다. 서비스의 종류나 양과 기간을 정하는 것도 언제나 전문가들의 몫이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이와 같은 전문가주의와 결별하기 위한 기본법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인권법 영역에 속하고, 인권의 주체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고민할 때는 전문가의 역할이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의 역할이 핵심적 고리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경향은 세계 최초의 「장애인차별금지법」(ADA)제정 국가인 미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ADA 제정을 주도했던 가장 핵심적인 세력은 전문가들이 아니라 장애우 당사자들인 독립생활운동가들이었다. 이와 같은 흐름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 그렇다면 전문가들은 이제 뒷전으로 물러앉아야 되는가? 그렇다.
그.러.나, 뒷짐을 지고 물러앉는 것이 아니라 연대세력 또는 지원세력으로 물러앉아야 한다.

해결의 주체는 당사자
당사자들의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적 모델을 주창했던 올리버의 견해에서도 그렇고 독립생활운동 사례들을 집대성했던 드종의 견해에서도 나타난다. 장애우 당사자의 역할을 핵심적인 위치로 격상시킨 것은 문제의 핵심을 사회적인 것으로 보고 이를 해결할 주체는 결국 당사자들의 자조운동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들도 실패한 부분이 있다. 장애우 당사자를 핵심적인 주체로 등장시킨 반면 현실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연대세력 또는 지원세력으로서의 전문가들의 활동을 분석에서 배제시켰다는 것이다. 당사자를 핵심적인 주체로 등장시킨 것은 시대적인 요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장애우들이 배제되어 단순히 대상화되고 마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고발인 셈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우 당사자들은 주체로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장애우 당사자들의 자기권한이 증가할 것이며 굴절되지 않은 선명한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 배제는 하나의 오류
그러나 현실적인 정책형성 및 집행과정에 결합해 있는 전문가들을 철저하게 배제시킨 것은 또 하나의 오류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장애우 당사자를 배제시켰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은 전문가를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경험을 보건대 복지국가에 대한 재정압박 속에서 정책을 조절하고 프로그램을 재배치하는 과정에 전문가들의 역할은 분명히 존재했었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법적인 지원을 하는 많은 전문가들이 존재했었다.

그렇다면 전문가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가? 한 마디로 말해 지원세력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변화의 주된 힘은 전문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며 전문가들은 당사자들의 굴절된 힘을 복원시키고 그들의 권한에 의해 스스로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당사자들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사고해야 한다.

같은 문제가 사회복지서비스의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서구에서 진행되어 온 20세기의 장애우복지서비스의 발전은 크게 세 가지의 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1970년대 중반까지에 해당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시설화, 의존, 분리 등의 용어로 표현되는 시기이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병자" 또는 "취약한 사람"으로 묘사되는 의료적 관점이 주도하는 시기이다.

두 번째는 80년대 중반까지의 기간이며, 장애인이 성장, 발전하며,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문화된 훈련 서비스의 제공이 강조된 시기이다.

세 번째는 1987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을 포함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지역사회 구성원(community membership)이라는 관점을 강조하는 시기로서, 지역사회에서의 통합, 자립, 삶의 질, 개별화 등을 위한 기능적 지원(functional supports)을 강조하는 시기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전문가들이 장애인의 재활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세 번째 단계에서는 장애우의 지역사회 삶을 지원하는 역할로 변하게 된다.

전문가는 지원세력
그렇다면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전문가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가? 장애우 당사자들이 법을 쟁취하고 차별에 대항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영역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문가는 법률가들이다.

미국을 비롯해 서구에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법률적 쟁송이었으며 이 과정에 많은 법률가와 단체들이 지원을 했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수많은 법률단체에서 이들 소송을 대리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법률가들이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에 참여해 법률적 지식과 이론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기독변호사회에서는 단체의 이름으로 이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계가 분명해 보인다.

 몇 몇 양심적인 법률가들의 개인적인 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법률가들의 모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모임은 당분간 느슨한 학습 또는 간헐적 지원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는 시기를 즈음하여 독립적인 법무법인이나 합동법률사무소의 형태로 조직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차별금지법」과 관련된 소송만을 담당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장애인차별소송이라고 했을 때 대표적으로 각인되는 조직이 되어야 하며, 이 단체에 대해서는 소송 지원에 따른 국가적 보조가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문가 추동 위한 당사자 힘 필요한 때〉
또 다른 전문가를 생각해 본다면 학자와 서비스 전문가들이 될 것이다. 이들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철학과 가치를 보다 분명히 개발하고 장애우복지정책 전반에 걸쳐 당사자 중심의 철학이 반영될 수 있도록 장애우복지정책과 서비스를 재구조화할 수 있는 밑그림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한 작업도 지난한 것이다. 이 또한 개별적인 작업으로는 많은 한계에 부닥칠 것이다.

따라서 학자와 전문가들이 결합해서 이를 집중적으로 고민하는 모임이 있어야 한다. 현재 서울의 장애인복지연구회가 이 기능을 맡아줄 수도 있을 것이며, 또 다른 모임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인력의 풀을 고려한다면 장애인복지연구회가 이 기능을 맡아주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은가 생각된다. 물론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추동하는 힘은 아마도 장애우 당사자로부터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법률단체와 연구회는 유기적인 연대와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며, 이것을 시작하는 힘 또한 장애우 당사자들로부터 나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아마도 당사자와 전문가는 서로 핵심과 연대의 관계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성자유동철 (동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