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이젠 그들도 편하게 거리로 나서야 한다 "13cm의 외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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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실제 그 입장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배부르고 풍족한 자들에게 허기짐의 고통을 아무리 떠들어 댄 들 귓가에 담겨질 게 있을까? 주린 배를 움켜잡아 본 사람만이 헐벗은 이들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이다. 몇 푼도 안 되는 차비가 없어서 직접 걸어가 본 사람만이 무심코 지나쳤던 그 거리의 길이를 실감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모든 일은 당사자가 되어야 정확한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제삼자인 관찰자는 주관적으로 관찰한 만큼만 알고, 막연한 방관자는 방관한 만큼 자기만의 삶을 그대로 이어간다. 참여하고 직접 움직인 사람들만이 이해와 사고의 폭을 넓히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의사도 자기가 아파 봐야 환자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 않았던가. 주관으로 평가내린 세상은 전체 세상의 극히 일부분임을 잊어선 안 될 일이다.

〈생활이 곧 장애와의 싸움이라는 것〉
살아가면서 직접 발걸음을 옮기는 공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업무 때문에, 주거 환경 때문에, 기타 이유 때문에 우리가 다니는 길은 늘상 거기에서 거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주 특별한 약속이나 여행 일정이 잡히지 않는 한, 생활 반경은 별반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늘 걷던 길들을 전혀 다른 느낌으로 걸어야 하는 색다른 경험을 계속하고 있다. 가장 단순한 일로 인해 아주 많은 걸 뒤집어 보게 됐던 것이다.
가장 단순한 "일"이라는 건 바로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것이다. 이제 돌을 맞이하는 아기를 태우고 생활 안에 익숙해진 길목을 자주 오고간다. 그런데 그 길들은 내가 걷던 길이 아니었다는 걸 이내 깨닫게 된다. 가장 안정감 있게 아기가 타야 할 유모차를 민다는 게 이렇게 민감해져야 할 일이었던가? 혼자 걸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두 다 장애물인 셈이었다. 계속 심하게 덜컹거리는 게 무서운지, 아기는 유모차만 타면 아무 말도 없이 뾰로통한 얼굴로 변하고, 조금 더 지나면 꾹 다문 입술과 함께 눈물을 흘린다. 싫다는 표시가 너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보도블록이 이 정도로 울퉁불퉁했었구나. 아파트 입구 계단 옆에 설치된 경사로가 이렇게 형식뿐인 날림공사였구나.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이 이렇게 고역이었다니! 지하철을 타고자 계단을 내려가고 개찰구를 지나는 게 이렇게 큰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니 등.
요즘의 내 생활은 길바닥의 상태를 살피며 걷는 새로운 버릇이 추가된 셈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기를 품에 안고 유모차를 접어 어깨에 걸거나, 휴대하던 짐을 올려놓는 운반 수단으로 끌고 다닌다. 사람들이 걷는 인도(人道)가 아기 입장에선 눈물을 흘려야 할만치의 굴곡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기가 땅바닥의 생리에 익숙해지고, 얼마간의 자포자기를 해준다면 당연한 듯이 익숙해지겠지만 말이다.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밀며 가까운 전철역으로 나간다. 일단 집을 나서자마자 아파트 엘리베이터부터 장애물이다. 평소엔 생각지도 않았던 엘리베이터와 출입구 사이의 작은 틈이 유모차를 한 차례 흔들어놓는다. 경비실 입구의 가파른 경사로는 아기의 몸을 앞으로 쏠리게 만들고, 속도를 내며 오가는 차들을 피해 숨바꼭질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유모차 바퀴에 전해지는 길 표면은 어른의 손목이 뻐근해질 만큼 요철(凹凸)밭이다. 끝마무리가 엉망인 인도와 횡단보도 사이의 경계를 재주껏 통과하고, 길을 지나 전철역 입구에 도착하면 일차적인 준비운동은 마무리된다.

본 경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른이 둘이라면 앞뒤에서 들어야 하고, 혼자라면 아기를 안은 채로 유모차를 접어들어야 한다. 무심하게 지나치던 지하철 계단 숫자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 또한 지하철이 땅 속 저 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헤아리는 동안 개찰구에 이르면 유모차는 단순한 짐으로 취급된다. 요령껏 유모차를 기울여서 통과해야 한다. 처음에는 꽤 난감했는데 이젠 조금이나마 익숙해졌다. 아기가 다치지 않게 개찰구의 구조물을 통과하는 건, 나름대로 해본 사람끼리 알 만한 기술로 공유되는 것이다.
지하철에 오른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어른들의 여정과 거의 비슷하다. 아기한테 말을 거는 아줌마, 할머니, 아저씨, 할아버지 들의 모습, 또한 여학생들의 웃음 섞인 장난이 이어진다. 문제는 목적지에 내리는 순간부터 그 모든 일을 역순으로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혼 전에는 유모차를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아기 엄마들을 볼 때마다 답답하다는 생각을 자주했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한심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유모차 하나 제대로 밀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이젠 그 시절 내 눈에 띄었던 모든 엄마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올려야만 하게 됐다. 직접 해보니까 보통의 노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기 엄마나 친구들과 이런 주제의 대화를 나누다 보면, 꼭 이어지는 화두가 한 가지 있다. 상대적으로 무게와 부피가 가볍고 작은 유모차가 이 정도인데, 자기 힘으로 나아가야 하는 휠체어의 경우는 얼마나 애로사항이 클까 하는 점이다. 몸이 불편해서 타는 게 휠체어인데, 이 땅의 표면 구조는 휠체어의 나아감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카메라를 들고 여러 지하철역과 일반 거리를 직접 기록해 봤다. 렌즈의 눈높이를 바닥에 놓고 찍은 차도와 인도의 경계는 거의 담벼락 수준이었다. 전철과 플랫폼 사이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찍으려고 카메라를 낮춰 잡았는데, 그 공간 사이로 카메라가 쉽게 통과되어버렸다. 가로 넓이 13cm인 카메라가 빠질 정도라면 휠체어의 앞바퀴는 그 거리감 앞에 속수무책이다. 265 사이즈의 운동화마저 빠져버리는 역까지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며 해결하라는 말인가.
사람 중심이 아닌 차량 중심의 도시 설계가 낳은 대표적인 흉물은 바로 육교라는 것이다. 차가 사람을 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차를 피해 지상과 지하로 발길을 옮겨야 하는 풍경은 너무나 익숙해진 우리네 삶이다. 이동하는 데에 장애가 있다면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메시지가 그만큼 거리 곳곳에 버젓이 심어져 있는 것이다.
차량 진입을 막겠다고 인도 한복판에 당당하게 설치한 기둥들은 시각장애를 가진 이들에겐 아주 위험한 불법 설치물이다. 인도 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들의 경적 소리는 청각장애를 가진 이들에겐 무용지물이다. 주객이 전도된 상태가 된 것이다. 살고 싶으면 알아서 비켜야 하고, 다치든 말든 상관없다는 오토바이 질주는 인도마저 사람이 피해야 하는 길로 바꿔놓았다.
뒤늦게나마 여러 곳에서 공사가 진행되는 모습이 보인다. 육교를 철거하고 횡단보도를 만들며, 지하철역 한쪽을 막아놓고 엘리베이터 설치 작업이 한창이다. 역과 건물 등지의 계단 옆에 경사로를 설치하는 공사 또한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제야 상대적 약자에 대한 이동권을 고려한다는 뜻이겠지만,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했더라면 불필요한 재공사의 비용은 절감했을 일이 남발되고 있는 것이다. 늦게나마 배려해 준다는 점에 대해 고마움이라도 느끼고 전해야 할 일일까?
스티븐 호킹 박사 같은 저명인사들이 이 나라 이 땅에서 태어났다면, 엉뚱한 인생을 살았을 거라는 우스개 소리가 얼마간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 뛰어난 재능을 펼쳐갈 사회의 문이 닫혀 있는데, 어디서 교육을 받고, 어디서 실험을 하며, 어디에 그 결과를 발표할 수 있을까. 우리 곁 어딘가에는 불치병을 치료하고 우주과학 자체를 뒤바꿀 두뇌와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장애라는 이유로 햇살 없는 방안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이 도로가 정말 고속도로가 맞느냐?"고 물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어느 외국인의 눈빛이 떠오른다. 빠른 속도로 달리기 위한 기본 조건은 고르게 정돈된 지표면임은 일반상식 같은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의 고속도로는 거의 전 구간에서 뜯어내고 다시 덧입힌 공사의 역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소한 1cm의 높이 차이라 해도, 고속으로 달리는 차에 입히는 충격은 상당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부분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당연시했는데, 그 외국인의 눈에는 공포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세상의 장벽은 마음의 장벽을 쌓게 만든다. 거기에 "시간"이라는 체념이 덧붙여지면, 그 장벽의 높이와 두께는 허물어질 방법 없는 철옹성으로 변해가는 법이다. 10cm와 20cm 정도의 틈새나 턱이 있다 해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은 정말 위험한 고정관념이다. 단 5cm의 장애물에도 힘겨움을 느껴야 하는 이들에게 그 정도의 수치는 생사의 문제로 닥쳐 있는 현실인 것이다.
움직임에 불편을 느끼는 이들에게 우리가 다가가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더욱 절실한 부분은 그들이 세상 모두에게 다가설 수 있는 환경과 마음이 갖춰져야 한다는 점이다. 생활의 불편을 느끼는 이들이 편하게 거리로 나설 만큼의 체계가 마련된다면, 정말 그게 완비된다면 그야말로 "장애우"나 "비장애인"이라는 용어는 먼 기억 속에서나 떠올릴 "너무나 인간적인" 세상이 완성되는 게 아닐까?
글 채지민(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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