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정부의 희귀병 환자 지원 제도 마련 절실
본문
최근 희귀병을 앓는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사연과 정부가 고시한 약값을 수용할 수 없다는 거대 자본 제약회사와 자본의 논리로 인간의 생명을 재단하려는 움직임을 거부한 만성백혈병 환자들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희귀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희귀병은 전체 환자 수가 2만 명 미만인 질환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이다. 그러나 44개 질환을 희귀병으로 선정해 정부차원에서 관리하는 일본에 비해, 우리 나라는 아직 질환별 환자 수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백혈병과 윌슨병을 중심으로 우리 나라의 희귀병 실태와 정책을 알아보았다.
백혈병, 의료보험 적용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아 치료에 어려움 겪어
한국만성백혈병환우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김상덕 간사는 그 자신이 백혈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십삼만 명중의 한 사람이 걸린다는 백혈병, 그 중 이십오 퍼센트만이 골수이식수술을 받을 수 있고, 그 중 오십 퍼센트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 지난한 길을 지나온 그를 서울 여의도 만성백혈병환우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우리 나라의 백혈병 환자 수는 약 삼천 명에서 사천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저도 백혈병 판정을 받아 5년 전에 골수이식수술을 받았지요. 골수이식수술은 제 몸에 있는 골수를 모두 죽이고, 다른 사람의 골수를 몸에 넣는 거에요. 정맥을 열고 피를 만들 새로운 골수를 넣어주는 거죠. 골수이식수술을 하고 나면 혈액형도 바뀌고 성격도 바뀐다고 해요. 신생아처럼 비씨지, 소아마비 같은 예방접종을 다시 해야 하고요.”
보통 일년 이상 걸리는 항암 치료와 골수이식수술을 받는 동안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렵고, 회복된다 하더라도 백혈병에 걸리기 이전처럼 활동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도 수술 후 숨이 가빠 백 미터를 걷는 동안 두세 번은 쉬어야 한단다.
“사람들이 저에게 한센병 환자냐고 물어요. 골수이식수술 후 온 몸의 피부가 검게 변하다가 백반증처럼 하얗게 일어나 각질로 벗겨지기 시작했거든요.” 수천 만원 이상 드는 수술비용도 큰 부담이지만, 자신의 경우처럼 수술 후 나타나는 후유증이나 부작용도 문제라고 김상덕 간사는 나지막이 말한다.
“골수이식수술은 보험 적용이 되더라도 비용이 삼천 만원에서 사천 만원 가량 듭니다. 그런데 오십 세가 넘어 백혈병에 걸리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요. 백혈병과 더불어 다른 병이 하나 더 있어도 치료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의료보험 적용대상에서 제외되고요. 그렇게 되면 팔천 만원에서 일억 원 정도의 수술비용이 듭니다. 게다가 재발될 경우의 치료비 전액도 비보험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정을 책임지는 성인들은 막대한 치료비에 대한 부담과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이중고를 감내해야 하지요.”
글리벡 약값을 둘러싼 거대 제약 자본의 횡포
이러한 만성백혈병 환자들에게 백혈병 신약 글리벡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이천 년 사월. 그러나 만성기(백혈병은 만성기가속기급성기로 진행된다)에 복용하면 무려 칠십칠 퍼센트에 달하는 반응율을 보인다는 이 기적의 신약을 만든 곳이 다국적 거대 제약회사인 노바티스사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천일년 십일월, 노바티스사가 정부가 고시한 약값인 한 알에 17,862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발표하면서부터 글리벡 약값을 둘러싼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노바티스사의 주장대로 글리벡 한 알의 가격이 23,045원으로 정해지면, 의료보험 적용이 되더라도 환자는 한 달에 백오십만 원을 약값으로 부담해야 합니다. 의료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오십세 이상의 환자나 재발 환자는 삼백만 원이 넘는 돈을 약값으로 부담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한 거대 제약 자본의 욕망을 들으니 소름이 돋기까지 한다. “한편 노바티스사는 이윤의 십 퍼센트를 백혈병 환자들을 위한 기금으로 내놓겠다고 하더군요. 그럴 거면 차라리 약값을 십 퍼센트 인하하라는 것이 저희 주장입니다. 약은 한 제약회사가 만든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의 노력이 선행된 공공재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생명과 관계 있고요.”
정부 역시 거대 자본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 하다. “정부도 약값을 고시했지만 제약회사가 거부하면 그것을 강제할 행정법령이 없다는 이유로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OECD 7개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약값을 결정했다고 하지만, 일본은 만성기 환자들에게도 보험 적용이 되고, 영국처럼 본인부담금이 없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 나라만 전체 백혈병 환자 의료보험이라는 애초의 원칙을 뒤엎고, 만성백혈병 환자의 칠십 퍼센트에 이르는 만성기 환자들을 의료보험 적용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백혈병 등 희귀병, 장애범주에 포함돼야
“항암치료와 골수이식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백혈병은 장애범주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암을 장애로 인정하기를 권고하고, 미국의 경우 장애범주에 혈액질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혈병 등의 희귀병도 장애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법적으로는 삼십 퍼센트로 정해져 있지만 실제로는 오십 퍼센트 이상인 환자의 본인부담금을 조사해, 일정 한도 이상의 초과분을 국가가 지원하는 본인부담금 상한제제도 도입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 제도는 서구에서 오래 전부터 시행되고 있고, 질병 치료에 대한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만성백혈병환우회의 활동 계획을 이야기하는 김상덕 간사의 표정에 생기가 돈다.
8월 5일 글리벡 약값의 최종 결정을 앞둔 지금, 거대 제약 자본과 정부에게 환자 자신의 권리를 온몸으로 당당히 요구하는 이들의 싸움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올해 초 결성된‘글리벡 문제해결과 의약품의 공공성 확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 많은 보건의료단체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힘을 더하고 있어, 이들의 걸음은 어느 때 보다 힘차다.
가족들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의료서비스 및 사회보험의 지원 있어야
윌슨병은 간과 뇌에 중금속인 구리가 과도하게 축적되어 생기는 유전질환이다. 삼만오천 명 중 한 명 당 발생하는 윌슨병의 국내 환자 수는 천여 명 정도. 의학전문가들은 윌슨병은 열성유전을 하기 때문에 3대에 걸쳐 발병하지 않고 시력을 상실하는 경우도 드물다며, 광주 희귀병 부자의 질병은 윌슨병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말한다(박스 기사 참조).
아들(7)과 딸(5)에게 간염 예방접종을 시키려 병원을 찾았다가 둘 다 원인 모를 병에 걸렸다는 뜻밖의 진단을 받은 최영호 윌슨사랑회 회장은 자녀들의 정확한 병명을 알기까지 육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뒤지던 최 씨는 윌슨병환우회 사이트(www.stopwilson.org)를 발견했고, 그곳에서 전문병원, 전문의 등의 정보와 다른 환자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인터넷 가족모임을 오프라인으로 옮겨 만든 윌슨사랑회에는 현재 50여명의 환자와 가족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최 씨는 의료보험 급여 일수를 삼백육십오일로 제한한다는 의료보험공단의 최근 발표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의료보험 급여 일수를 제한하면, 일년 내내 약을 먹어야 하는 우리 아이들은 감기나 다른 질병에 대해서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며, “가족들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줄 수 있도록 의료서비스 및 사회보험의 지원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제도는 뒷걸음질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걸음마 단계인 정부의 희귀병 관련 정책
국내의 희귀병 환자와 가족들은 사이버 상에서 모임을 만들어 질병에 대한 정보를 찾아 나누고, 아픔과 희망을 나눈다.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해 병원을 전전하며 시간을 허비했던 경험을 다른 이들은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환자와 가족들이 직접 만든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양한 정보들을 교환한다.
환자와 가족들의 활발한 움직임과는 달리, 희귀병 환자들에 대한 정부 정책은 걸음마 단계이다. 정부가 진료비를 지원하는 희귀병은 만성신부전증(투석), 근육병, 고셔병, 혈우병 등 네 종류에 불과하며, 그나마 작년부터 지원되기 시작했다.
보건복지부는 올해부터 일종의 면역이상 질환으로 심한 경우 눈의 포도막에 염증을 일으켜 시각장애와 신경장애를 일으키는 베체트병과 소장, 맹장, 항문 등 소화기에 만성적인 염증을 나타내는 질환인 크론병 환자의 본인부담금, 식대, 지정진료비(특진료) 등을 지원한다고 7월 2일 발표했다. 국내 베체트병 환자는 330여 명, 크론병 환자는 60여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희귀병 환자와 가족들은 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를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고 있으며, 그나마 전문의와 전문약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희귀병의 진단과 치료를 개인적인 문제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모든 시민의 건강권을 확보하기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어야 하며, 무엇보다 정부가 솔선수범해 희귀병 환자들을 의료서비스와 사회보험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글 이수지 기자(soo3881@naver.com)
|
아들아!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거라! 희귀병 앓는 아들의 부탁 받고 살해 지난 7월 1일, 광주 남구 방림동에 사는 김 모씨(59)가 자신의 집에서, 갖고 다니던 트레이닝복 고무줄로 아들(27)을 목 졸라 숨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당일 오후 3시, 케이블TV 뉴스를 듣던 김 씨는 집안을 진동하는 악취냄새를 맡았다. 시력을 잃고 하반신이 마비된 김 씨가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기어서 아들이 있던 건넌방에 갔을 때, 방안은 이미 인분 투성이였다. 1급 시각·지체장애우인 김 씨가 8년 전 발병해 자신과 비슷한 증상을 갖고 있는 막내아들의 대소변을 치우고 방을 세제로 닦는데 걸린 시간은 세 시간 남짓. 함께 목욕을 하고 방안에 들어와 아버지에게 몸을 기대고 누워 있던 아들은 자신을 죽여달라고 간청했다. ‘가족의 짐이 되기 싫다. 차라리 나가 죽겠다’며 한밤중에 마당으로 기어나가 온 몸을 시멘트 바닥에 부리기도 했던 아들이었다. 아들의 간청을 들은 김 씨는 광주의 한 장애우시설에서 4년 동안 생활하다가 5월 24일 가족과 함께 있겠다며 집으로 온, 아들의 목에 자신이 죽으려고 가지고 다니던 끈을 감았다. 아들을 품에 안은 김 씨는 잠이 들었고 얼마가 지났을까. 잠에서 깬 김 씨는 아들의 옷을 입힌 후 119로 전화를 했고, 촉탁살해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그 때가 저녁 7시 23분이었다. 윌슨병으로 보도되었지만, 정확한 진단조차 받은 적 없어 김 씨 가족에게 알 수 없는 병마가 찾아온 것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씨의 어머니는 김 씨와 비슷한 증상으로 70세에 세상을 떠났고, 김 씨의 여동생도 10여 년 동안 비슷한 증상을 앓다가 지난 해 사망했다. 여동생의 딸도 5-6년 동안 투병하다 4년 전 자살했다. 김 씨의 2남 1녀 중 큰아들만 빼고 두 자녀가 비슷한 증세를 보였으며, 딸은 3년 째 목포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과일장수, 책 수금 외판원을 하던 김 씨도 10여 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어렵사리 마련한 직후 쓰러져 거의 거동을 하지 못했다. 김 씨가 쓰러진 후 부인이 시장에서 과일행상을 해 가족을 부양하던 터라, 김 씨는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들도 장애우시설에 생활할 때, 광주의 대학병원에서 1주일 동안 종합검진을 받았지만, 담당 의사는 ‘윌슨병 추정’,‘유전으로 인한, 이름 모를 병’이라는 두 가지 진단을 내리면서, “이런 병은 처음이다. 치료방법이 없으니 잘 먹이고, 운동을 시켜라”고 말했다고 김 씨의 부인은 전했다. 또 “아들이 텔레비전에서 본 윌슨병 환자의 증상이 자신과 비슷하다며, 자신의 병이 윌슨병이라고 여겨 그런 줄 알았다”고 했다. 김 씨의 부인은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다”며, 한약 몇 첩 달여 먹인 것 말고는 아들에게 해 준 것이 없다고 고개를 떨구었다. 김 씨는 7월 3일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후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7월 8일 광주교도소로 송치되었다. 현장검증이 실시되기 전인 7월 4일 오전, 김 씨는 면회 온 부인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되풀이했다. “‘아버지, 우리 그래도 이렇게 하지 말고 그냥 삽시다’라고 한마디만 했더라도…. 아들을 죽은 죄인인 내가 차라리 그때 같이 죽을 것을….” 7월 17일 광주지검은 김 씨를 불구속 기소하기로 하고 귀가 조치했다. 검찰은 김 씨가 아들의 부탁을 받고 목을 졸라야만 했던 정황과 장기간 구속될 경우 병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이와 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김 씨 가족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대상자에서도 제외되어 어떠한 의료서비스나 사회복지서비스를 받지 못한 채, 부인 혼자서 희귀병을 앓는 세 명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김 씨가 발병하기 전 마련한 조그만 집 한 채가 있었기 때문이다. 융통성 없는 사회복지정책의 집행으로 김 씨 가족과 같은 상황에 처한 많은 이들이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서 힘겨운 생을 이어가고 있다.
|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