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법을 왜 바꿔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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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참정권 확보를 위한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개정이라… 너무 거창하다.
그동안 장애우라고 선거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 아닌데… 저번 선거당시에도 장애우 몇 사람이 투표를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럴 리가 없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들은 필자와 함께 잠시 엘리스가 되어 환상의 세계로 떠나 보자. 그래도 현행법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그 누군가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 이제 출발!
환상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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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법개정안에대한장애우입장 |
제일 먼저 첫 번째 문을 통과했더니… 나는 검정색 안경을 끼고 있어 앞이 안 보인다.
매일 즐겨 보던 T.V도 소리밖에 들을 수 없다. 근데 지금 방송에서는 국회의원을 뽑는다고 난리가 났다. 나도 선거를 해야 하는데 우리 동네 국회의원으로 누가 출마했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후보자들이 어떠한 비전을 갖고 있는지, 경력은 어떠한지, 나는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그래 참자… 검정 안경을 써서 앞이 안 보이는 내가 잘못이니까… 그래 그냥 내가 좋아하는 기호에 투표하면 되겠지, 설마 내 한 표가 대세에 영향을 주겠어? 그건 아니니까‥난 참여하는 데에 만족하자.
드디어 투표 날, 난 힘들게 힘들게 투표장소에 갔다. 얼마 전에 기표소 안에는 투표보조용구라는 것이 있어서 혼자 투표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가족 없이 혼자 들어갔는데, 난 그 사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 그 사용법을 모른 내 잘못이겠지. 선관위에서 투표보조용구사용법에 대한 안내서도 보냈다고 하는데. 그 안내서를 숙지 못한 내 잘못이 크겠지. 투표소에 들어가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냥 나갈까? 아님 누구에게 대신 기표해 달라고 할까? 내가 또 여러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구나… 그래서 난 마치 투표를 한 것처럼 투표용지를 반으로 접어서 나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다음에는 결코 투표하지 않겠다고…
이제 두 번째 문을 들어섰더니...
커다란 귀마개가 내 귀를 감싸고 있어서 나는 들을 수가 없다. 근데 지금 대통령을 뽑는다고 난리도 아니다. 그래도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까 벽보를 볼 수도 있고, 선관위에서 보내주는 선거공보물도 읽을 수 있어서 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근데 후보자들끼리 무슨 토론회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그 시간에 맞추어 T.V 앞에 앉았다. 근데 난 도대체 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다. 후보자들이 입을 벙긋거리는 모습만 보다가 난 잠이 들었다. 그래 인상 좋은 후보를 찍으면 되겠지 뭐…내 한 표가 큰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닐텐데 너무 신경쓰지 말자…
다시 세 번째 문을 들어서자, 나는 휠체어를 타고 있다. 내 의지대로 몸을 움직이고 싶은데, 도대체 내 몸은 꿈쩍도 안 한다. 물론 여기도 지방의회의원을 뽑는다고 분주하다. 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후보를 찍을 수도 있다. 얼마나 행복한가? 나의 이런 불편한 생활에 좀더 관심을 가져주는 후보를 선택해야지,
드디어 투표 날… 열심히 열심히 투표소로 향했다. 그런데 난 너무 황당했다. 투표소가 2층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난 얼른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내가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래 휠체어를 타고 있기 때문에 계단을 올라가지 못한 내 잘못이지… 난 결심했다. 내가 원하는 후보를 찍는 것은 욕심인 거야, 그냥 주어진 대로 살자.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 다니기에도 좁은 이 세상에 휠체어를 타고 나올 생각을 한 내가 멍청한 거겠지 뭐…
이제 마지막 문을 열었더니… 당신은 어떤 장애우시설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다른 좋은 시설도 있다는데, 여기는 왠지 원장님이 너무 무섭다. 그래도 난 행복하다. 가끔씩 자원봉사자 형들이 와서 놀아주니까… 그런데 어느 날 그 형이 나에게 물었다. 너 어느 후보 찍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난 지금 선거를 하고 있는 것도 몰랐는데 누굴 찍어요? 헉, 근데 지금은 보궐선거를 하고 있었고 난 부재자투표를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 원장님이 나의 권리 확보를 위해 거소투표신청을 해 주시고 급기야 기표까지 대신해서 보냈단다. 고마운 원장님, 내가 해야할 선거까지 해 주시다니…
현실로 돌아오면
위 이야기가 과연 이상한 나라 엘리스의 이야기일까? 그건 절대 아니다. 각종 선거에서 우리 장애인들이 겪어야 했던 현실이었고 이에 대항하여 각 장애우단체들이 힘겹게 싸우고 있는 현재 사회의 벽인 것이다. 그 현실을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혹시 모르고 있을 독자들을 위해서…
97년도 대선 이전에는 T.V. 토론회에서 수화, 자막방송이 실시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시각장애인단체가 방송3사를 상대로 한 수화자막방송실시를 위한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하였고, 다행히 법원에서 이를 받아들여 주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청각장애인들이 후보자들의 토론진행상황을 지켜보고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장애인의 실질적인 참정권확보를 위한 활동으로서는 처음으로 가시화된 것이라 하겠다.
2000년도 총선 당시에는 투표소가 2층에 설치되어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우 서승연 씨가 투표를 못하게 된 사건이 접수되었다.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장소에 도착한 서승연 씨가 2층에 설치된 투표소에 올라가질 못해 선거하지 못했던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그 당사자 및 관련단체들이 관할 선거관리위원회를 고발하고, 이어 비슷한 상황을 겪은 장애우들이 원고가 되어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현 상황에서 과연 인정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제기한 소송에서 정말 신바람 나는 판결이 선고되었다. 변호사의 명쾌한 논리와 담당 판사님의 합리적인 판단이 어우러진 멋진 판결이 나왔던 것이다. 장애인참정권에 있어 다른 이론이 필요없는 명판결이기에, 법조계에 발을 담고 있는 필자는 얼굴도 모르는 장준현 판사께 무한한 존경심을 보낸다.
장애인의 선거권행사와 관련한 법규정에 의하면, 장애인을 포함한 만 20세 이상의 모든 국민은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권을 가지고, 국가인 피고는 선거권자가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야 하며, 장애인의 선거권 행사의 편의를 편의시설, 설비의 설치, 선거권 행사에 관한 홍보, 선거용 보조기구의 개발, 보급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바, 위 관련법규정의 내용에 비추어 피고는 장애인 선거권자의 선거권 행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고 그 정도는 비장애인의 선거권행사가 보장되는 것과 같은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선관위가 이에 항소를 하고, 항소부에서는 원고인단 중 실제 투표장에 갔다가 투표를 하지 못한 서승연씨에 대한 위자료청구만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원고에 대하여는 투표를 했다거나 또는 투표장소조차 가지 않았다는 사유 등으로 청구를 기각하고 말았다. 물론 이에 대하여는 담당변호사인 김진 변호사가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이다. 어떠한 결과가 나올 지는 지켜보아야겠지만, 원칙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 본다.
2000년도 보궐선거 당시 대전한마음요양원이라는 장애우수용시설에서는 원장이 시설에서 생활하던 장애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재자신고를 하고 이어 거소투표까지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시설장애우의 참정권 침해로서 그 당시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사안이었음에도, 막상 검찰에서는 원장의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위반의 점은 인정되나. 원장은 지역사회에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일뿐 아니라 위 사건이 장애우의 참정권을 확보해 주려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기소유예처분이 내려졌다. 과연 시설을 운영하기만 하면 좋은 일을 하는 것일까? 시설의 장이 시설 내에서 일종의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안에서의 인권확보는 누가 보장할 수 있는 것일까? 검찰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이 사건을 취재했던 세계일보 기자들에게는 한국엠네스티에서 주는 언론인권상이 수여되었다는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선거법 개정안의 내용
그럼 이제는 선거법 개정안의 내용을 한 번 살펴보자. 그 내용은 결코 무겁거나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환상의 세계에서나 있어야 할 제도들을 상식이 통하는 것들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시각장애우를 위해서는 점자 또는 녹음테이프로 제작된 선거공보물이 제작 발송되어야 하며 투표소에 있는 투표보조용구는 단순히 비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법이 사전에 설명되어 실질적으로 이용될 수 있어야 한다. 청각장애선거인을 위해서는 T.V 토론회나 합동연설회에서 수화통역 또는 자막방송이 의무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거동이 불편한 장애우를 위해서는 여러 확인절차를 거쳐야 하는 현행의 부재자, 거소투표제도를 간소화하여야 하고, 반드시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건물에 투표소를 설치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시설 내에 있는 장애우의 선거권 침해방지를 위해서는 일정규모 이상의 다수인시설의 경우 부재자투표소를 설치하도록 하고, 그 시설의 장이 그 직위를 남용하여 사위투표 등의 죄를 범할 경우에는 가중처벌하자는 내용으로 개정안이 구성되어 있다.
위 개정안이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공청회에 참석한 선거관리위원회 담당자는 우리는 다른 어떤 부서보다 장애우대책을 마련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비용 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 개선되지 못한 점이 있는 것 뿐이다 라는 말을 한다. 물론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공청회 이전에 이미 부재자투표제도의 간소화와 관련된 입법안을 제출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장애우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의 개정안을 마련한 점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다만 우리가 아쉬워하는 것은 아직도 그 관점이 시혜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애우의 선거권은 당연한 권리이고,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장애우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함에 있어 현실적인 핑계를 대는 것은 아직도 국가가 자신의 의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선거관리위원회를 포함한 국가에게 강조하고 싶다. 당신들이 장애우 정책을 만드는 것은 무슨 자선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고, 우리 장애우들에게는 당신들을 감독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기본이고 원칙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
투표소의 편의시설 부재로 투표를 하지 못하거나 선거나 후보자에 대한 정보접근의 어려움으로 선거일조차 모르고 방식도 모르는 장애우가 있을 정도로 방치되었던 상황이 여러 사건들을 거치면서 개선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각 장애우단체에서 필요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당당한 권리자로서 행동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또 하나는 장애우만이 아니라 일반인의 의식도 개선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예을 들자.
디딤돌출판사 중학교 2학년 사회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다.
아무개씨는 1급 지체장애인으로, 현재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몇 차례의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없는 경우에도 선거권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2000년 4월 13일에도 가족과 함께 투표장을 찾았으나 투표장은 2층에 마련되어 있었고, 장애인들이 휠체어로 다닐 수 있는 통로도 없었다. 그래서 가족 중 한 사람이 산거관리위원회측에 조치를 취해 달라고 하자, 선거관리위원들은 대안을 마련해 주기는커녕 장애인을 위해 들판에 설치해야 합니까?라면서 1층으로 내려와 보지도 않았다…위와 같은 사례가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보자. 위와 같은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도개선과 의식개혁의 측면에서 각 어떠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지 생각해보자.
어떤 경위로 위 내용이 교과서에 실렸는지는 모르지만, 이 교과서의 저자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선거권 개정과 관련하여 운동을 해 온 간사들이 이 교과서를 복사해서 여기저기 붙이고 다닐 만큼 굉장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이 세상의 중심이 되었을 때는 장애인문제가 특별하지 않은 아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우리들은 그 날을 위해 좀더 힘을 내서 목소리를 내자. 우리 모두 함께 갈 수 있는 내일을 위해.
마치며
이 글을 쓰는 중간에 여성장애우 최옥란 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지금 라디오에서는 장애우단체의 시위 때문에 출근 길이 막히므로 길을 우회하라는 교통정보를 주고 있다.
이 시간에 영문도 모른 채 차가 막히는 현상만으로 시위자들을 욕하는 운전자 및 승객들은 얼마나 많을까? 한 중증여성장애우가 자신의 문제를 위해 온몸으로 싸우다가 사망했고, 관련장애우단체들이 그 여성을 추모하고자 노제를 드리기 위해 밖으로 나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최옥란 씨를 한 번 만난 사실이 있다. 내가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 때문에 난 지금 몸이 너무 아프다. 경험이 없고 다른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댄 내 자신이 밉기 때문에 난 그 분의 장례식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최옥란씨... 정말 미안합니다. 편히 가십시오.
글 안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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