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장애우 자살 무엇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나?
본문
한 장애우가 자살로 생을 마쳤다. 중증뇌성마비장애우였던 이헌규 씨, 살아있다면 올해 스물아홉살인 그는 삶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비극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무엇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어 죽음으로 몰아 갔을까, 그런데 망자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만 그의 죽음을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취업 실패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 갔다는 주장도 있고, 취업 실패와 상관없이 개인적인 이유로 자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과연 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은 무엇일까? 이유야 어찌됐든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사회는 중증장애우가 살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사회라는 것이다. 따라서 야만적인 이 사회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그래서 사회적인 타살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장애계에 충격을 준 이헌규 씨의 자살과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추적해 보았다.
고용촉진의 달을 앞두고 한 장애우 자살
지난 8월 31일자 일간신문 사회면에는 ‘29살 장애우 취업거부 당하자 자살’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내 아들은 이 사회가 죽인 겁니다.”
31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전농2동 성바오로 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이헌규(29)씨의 빈소를 지키고 있던 이씨의 가족 10여명은 이렇게 말하며 오열했다.
소아마비와 뇌성마비 1급 장애우인 이 씨는 30일 오후 10시쯤 동대문구 장안동 장안평역에서 전동휠체어를 탄 상태로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이 씨의 가족들은 “헌규가 최근 면접까지 통과해 곧 취직한다고 좋아했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첫 출근 때 입고 나갈 깨끗한 정장과 구두를 새로 장만하기도 했다. 하지만 왼손만 겨우 쓸 수 있는 이 씨는 결국 출근할 수 없었다. 이 씨는 회사로부터 “약간 곤란할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고, 가족들은 이 씨에게 “왜 출근 않느냐”고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이 씨 가족들은 “헌규가 컴퓨터 실력이 뛰어난데도 장애우라는 이유로 번번이 취직에 실패하는 현실 앞에 절망했었다”며 “장애우가 살기에는 지옥보다 못한 사회가 헌규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말했다.
다시 한 번 신문에 보도된 이헌규 씨의 죽음과 관련된 기사를 간단하게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 컴퓨터 실력이 뛰어난 한 중증 뇌성마비 장애우가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 취업을 시도했지만 장애우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리고 자살을 하기 얼마 전 결정적으로 한 회사가 면접까지 통과한 그를 역시 중증장애우라는 이유를 내세워 취업을 거부했다. 이를 비관한 이헌규 씨는 중증장애우가 설 곳이 없는 사회를 원망하며 자살로 생을 마쳤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연인지 몰라도 이헌규 씨가 자살한 이틀 후인 9월은 노동부가 정한 장애우고용촉진의 달이었다. 그런데 장애우고용촉진의달을 앞두고 한 장애우가 취업할 수 없는 현실을 비관해 자살했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막말로 정부가 장애우 고용촉진의 달을 만들고 켐페인을 펼친다 어쩐다 법석을 떨면 뭐하나, 중증장애우는 전혀 취업할 수 없는데. 나아가 취업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장애우가 생기는 판에 많은 돈을 들여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장애우 고용촉진을 위한 행사는 도대체 뭐하러 여는가. 고백하자면 많은 장애우들이 품었을 법한 이같은 불신과 울분을 기자도 똑같이 공유했다. 그리고 그 울분을 바탕으로 기자가 마음먹은 것은 취재를 통해 이헌규 씨의 29살 삶을 복원해 내자는 것이었다.
이 땅에서 중증장애우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살아서는 숱한 차별과 냉대를 겪어야 했고 결국 혼자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차별의 벽에 막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야만적인 사회를 고발한 이헌규 씨의 사례를 통해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사회에 경종을 울리자고 마음먹었다.
“헌규를 가슴에 묻었다” 부모 취재 거부
그런 마음을 먹은 기자가 취재에 들어가면서 맨 처음 한 일은 이헌규 씨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병원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기자는 병원에 부모 연락처를 물었다. 그랬는데 엉뚱하게 병원에서 알려준 연락처는 이헌규 씨 사촌형 이헌상 씨 핸드폰 번호였다. 할 수 없이 기자는 이헌상 씨 에게 전화해 취재에 협조해줄 것을 부탁하고 부모 연락처를 물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겨우 알아낸 전화번호가 이헌규 씨 부친 핸드폰 번호였다. 기자는 부친 연락처를 알게 되자 이제 이헌규 씨의 죽음에 얽힌 구체적인 내용을 들을 수 있게 됐구나 라고 생각했고, 바로 청주에 산다는 부친에게 전화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이헌규 씨 부친은 긴 얘기를 하지 않았다.
부친은 “헌규를 가슴에 묻었다. 이미 헌규 사진도 다 태워버렸다. 다시는 헌규를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 전화하지 말라”라고 얘기한 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기자는 솔직히 당황했다. 하지만 부친의 말속에 숨어 있는, 자식의 자살로 받은 충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기에 별 수 없이 부모를 상대로 한 취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남은 유일한 취재원은 이헌규 씨 사촌형 이헌상 씨였다.
기자는 바쁘다는 그를 졸라 9월 22일 겨우 그를 대면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한 경찰서 수사계에서 일하고 있는 현직 형사였다.
그가 형사였기에 의문 하나는 쉽게 풀렸다. 기자는 이헌규 씨가 자살한 게 아니고 혹시 안전사고로 사망한 게 아닐까 라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의혹에 대해 물어 보자 그는 “가족 입장에서 내가 직접 조사해본 결과 자살이 분명하다”고 대답했다. 이어 이헌상 씨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망자와 관련된 내용을 두서없이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헌규가 컴퓨터를 처음 시작한 것은 초창기인 85년부터이다. 실력이 뛰어나서 홈페이지도 몇 개 만들었는데, 그중에는 시각장애우를 위해 음성이 지원되는 홈페이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모는 청주에 살고 있고 부친이 서울에 올라오면 가끔 만나 술 한 잔 한다. 헌규는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장애가 심해서 왼손 중 손가락 두 개 밖에 사용 못한다. 죽기 전에는 정덕균이라는 아는 동생과 함께 천호동에서 자취했다. 그리고 회사 입장에서는 같은 조건이라면 장애우보다는 비장애우를 채용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회사의 입장을 나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헌규의 취업을 거부한 회사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다…….”
이쯤에서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다. 기자가 이헌규 씨 관련 취재에 들어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다름아닌 헌규 씨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면접까지 합격한 헌규 씨 취업을 막판에 거부한 회사 상호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 회사에 찾아가서 취업 거부에 대한 회사측 변명을 듣는 과정은 이번 취재에 뺄 수 없는 중요한 취재 일정이라고 기자는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론을 얘기하자면 헌규 씨 취업을 거부한 회사가 사라져버렸다.
사촌형 이헌상 씨는 회사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기자의 이어진 몇 차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내 알려주기를 거부했다. 그건 이헌상 씨에게서 소개받은 정덕균 씨도 마찬가지였다. 헌규 씨와 올초부터 같이 생활해 누구보다 헌규 씨를 잘 알고 있을 덕균 씨도 “일산에 있는 회사인데 회사 이름은 모른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번 취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별 수 없었다. 회사 이름은 나중에 알아내기로 하고 우선 헌규 씨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삶에 초점을 맞춰 취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정덕균(27세) 씨를 만났다. 한 손을 쓰지 못하는 장애우인 그는 몇 해 전 국립재활원에 있을 때 처음 헌규 씨를 만났다고 했다. 이후 형 동생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로 발전했고 헌규 씨가 작년 말 청주에서 올라와 자취생활을 시작했을 때, 선뜻 헌규 씨와 함께 하며 동고동락한 헌규 씨의 살아생전 유일한 지인이었다.
기자는 헌규 씨의 마지막 시절을 함께 지낸 그의 증언을 통해 비로소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이헌규라는 인물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다음은 정덕균 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헌규 씨 평소 성격이 어땠나.
“굉장히 활발한 성격이었어요. 전동휠체어 타고 안 다니는 데가 없었어요. 웬만한 장애우들은 꿈도 못 꿀텐데, 학원에 다니기 위해 휠체어 타고 천호동에서 역삼동까지 먼 거리를 매일 다녔어요.”
- 어떤 학원이었나.
“컴퓨터학원이요. 웹디자인을 배우러 다녔어요.”
- 헌규 씨가 왜 서울에 올라왔나.
“그전부터 헌규 형이 서울에 올라가야 되겠다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취업문제도 있고. 집에만 있자니 할 일도 없고 뒤쳐지는 것 같다면서 서울 올라가서 학원도 다니고 취업도 알아봐야겠다고 했고, 그래서 올라왔죠.”
- 가정형편은 어땠는지.
“잘 사는 편이예요. 부유하다고 봐야죠.”
- 헌규 씨 가족관계는.
“장남이었어요. 누나 하나 있고, 남동생 있고.”
- 헌규 씨가 이전에 다른 곳에 취업을 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형이 청주에 있을 때 차림이라는 회사에서 공공근로를 했다고 들었어요.”
- 자살하기 전 상황은 어땠나.
“형이 취업될 것 같다고 굉장히 좋아했어요. 마치 취업된 것처럼 부모님에게 취업되었다고 전화도 하고…….”
- 그 회사 이름을 알고 싶은데.
“일산 어디에 있는 컴퓨터 관련 회사라고 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 그 회사는 어떻게 알게 됐는지.
“형이 컴퓨터 통신 하이텔에서 동호회 할동을 했어요. 자원봉사 동호회라고 있는데 그 동호회 회원이 소개시켜 줬다고 들었어요.”
- 면접까지 봤다고 하던데.
“면접보고 와서 취업될 것 같다고 얘기하더라구요. 그런데 회사에서 연락이 없었어요. 형이 굉장히 실망하더라구요. 나중에 형이 연락을 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채용 계획이 전혀 없는 것처럼 얘기를 한다고…….”
- 그래서 죽고 싶다는 얘기를 했나.
“아니요. 그냥 학원을 계속 다녔어요. 학원에서 포트폴리오만 만
들면 어디 취업시켜 준다고 했다고, 그런 얘기만 했어요.”
- 전혀 눈치를 못챘나.
“형이 죽기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하루는 집에 안 들어오더라구요. 굉장히 걱정을 했죠. 그런데 술집에서 전화가 왔어요. 영등포에 있는 술집이었는데 갔더니 형이 혼자 술을 먹고 있더라구요, 탁자에 염산이 있고, 그거 먹고 죽는다고 그랬어요.”
- 왜 죽겠다고 그랬나.
“너무 힘들다는 말만 했어요.”
- 그 뒤로 다른 일은 없었나.
“저녁에 집에 와보면 형이 술 먹고 앉아 있었어요. 술 취한 형을 자리에 눕혀주고 저도 볼일 좀 보다가 자고, 제가 아침에 일찍 출근해야 되니까 형을 씻겨주고 나갔다 오면 또 형이 술 취해 있었는데, 낮 시간에 형이 뭘 하며 지냈는지는 모르겠어요.”
- 그 동안 헌규 씨가 취업을 위해 많은 애를 썼다고 하는데.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도 가봤대요. 갔다 왔는데, 취업이 힘들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며 실망했어요.”
- 헌규 씨는 평소 꿈을 뭐라고 얘기했나.
“컴퓨터 분야에서 최고 실력자가 되고 싶다고, 반드시 꿈을 이룰거라고 얘기했어요.”
- 평소에 장애를 비관하진 않았나.
“형이 하던 말이 있어요. 장애우들이 많이 나와서 돌아다녀야 한다고, 대다수 장애우들은 사회가 바뀌길 원하잖아요. 그런데 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장애우들이 사회로 많이 나가야지 사회가 바뀐다 이렇게 말했어요. 장애우들이 돌아다니면서 자꾸 보여 줘야지 편의시설도 더 많이 생긴다고, 그러니까 장애우들이 불평만 하지 말고 자꾸 나오라고 얘기한 형이었어요. 이런 형은 결코 장애를 비관하지 않았어요.”
- 헌규 씨가 시설 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는데
“연세 주몽 국립재활원 순으로 알고 있어요. 마지막에는 논산에 있는 성모의마을에서 2년 동안 생활했는데, 거기서 정식직원으로 채용을 해준다고 해놓고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채용이 안됐어요. 거기서 나와서 청주 집에 있으면서 공공근로 하다가 서울 온 거죠.”
-평소에 부모님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나.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형은 집에서 못 올라가게 말리는 것을 우겨서 올라 왔기 때문에 취업도 하지 못하고 내려갈 수는 없다며 평소에 부모님에게 부담을 가지기는 했어요.”
사는 게 버거워요. 우울한 고백
이상 정덕균 씨의 헌규 씨에 대한 증언을 거칠게 정리하면 이렇다.
생전에 헌규 씨는 중증장애우의 전형적인 삶을 산 것으로 파악된다. 어려서는 연세재활원에 들어갔고 청소년기는 주몽재활원에서 지냈다. 성인이 되서는 국립재활원에서, 그것도 모자라 논산 성모의마을이라는 시설에서 2년을 더 살았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중증장애우가 갈 곳은 시설밖에 없다는 것을 헌규 씨 사례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지나친 추측일지 모르지만 시설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생활을 하던 헌규 씨가 붙잡고자 애쓴 유일한 구원의 여신상은 바로 컴퓨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컴퓨터에 매달려, 실력을 쌓아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자 발버둥친 흔적은 굳이 덕균 씨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컴퓨터는 헌규 씨가 세상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헌규 씨가 생전에 오프라인 보다는 온라인에서 더 활발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은 무척 당연해 보인다.
lhg71, 피씨통신 하이텔 자원봉사 동호회에서 활동한 이헌규 씨의 생전 아이디다.
기자는 헌규 씨의 취업을 거부한 회사를 동호회 회원이 소개해 줬다는 덕균 씨 증언을 근거로, 헌규 씨를 자살로 내몬 회사 상호를 알기 위해 이 동호회에 접속했다. 정말 고백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하나였다. 그래서 생전에 헌규 씨를 알고 있던 분은 연락해 달라고, 시삽에게 메일을 보내고 회원으로 가입해 게시판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은 여러 개 올라와 있었지만 생전에 동호회 소식지 편집부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헌규 씨를 안다고 기자에게 연락해온 회원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연락이 오지 않는 상태에서 대신 기자가 본 것은 엉뚱하게도 헌규 씨 육성이었다. 그것도 부모와의 갈등을 토로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그의 육성, 그가 생전에 게시판에 남긴 글들을 보며 기자는 어쩔 수 없이 헌규 씨 자살이 취업거부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했다.
이런 기자의 판단이 섣부른 예단인지 모르지만, 그가 남긴 글들에는 자살을 앞두고 괴로워한 부분이 매우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어서 좀처럼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판단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지금부터 헌규 씨 육성을 들어보기로 한다.
99년 8월 2일, “며칠동안, 아니, 늘 생각해 왔지만 이제 저에 대한 자신감이 자꾸 사라지네요. 제가 가지고 있던 목표, 꿈, 사랑 등을 위해서 너무나 많이 내 딴에는 안간힘을 써서 해보려 했는데, 요즘 자꾸 그런 것들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요. 모두 포기하고 부모님 뜻대로 요양원 같은 데나 들어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약 10여년 동안 부모님과 전쟁 아닌 전쟁을 치루다시피 하니 이젠 힘이 다 빠지네요. 부모님은 저보고 너무나 많은 것을 자제하라고 하시죠. 그 덕에 사랑하는 여인과도 몇 번을 헤어졌죠. 부모님은 저에게 늘 그러시죠. 결혼, 술, 담배, 외출 등을 하지 말라구요. 여기서 뭘 더 참으라고 하시는 것은 저에겐 너무나 힘든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아요. 모든 걸 양보하고 부모님 뜻에 따르려고 애를 써보지만 저에겐 너무나 힘든 일이네요. 물론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에요. 다 절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란 걸 누구보다 전 잘 알아요. 하지만, 한번의 기회를 줘 보지도 않으시고 무조건 ‘그건 아냐…. 그거 네가 할 수 있니’ 라는 말씀이 먼저 나오시죠. 그런 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전 많은 노력과 설득을 해 보았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생각은 바뀌시지가 않아요. 그저 지금도 그냥 평생 편안히 있을 곳(요양원 같은 곳)을 찾아보라고 하시기만 하시죠. 얼마 안 되는 재산이지만 그거 물려받아서(그것도 명의는 동생 명의로 한데요) 평생 사람 써 가면서 살길 바라시죠. 근데 전 그게 싫거든요. 아직은 내가 할 일들이 많은데, 그 모든 걸 포기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지치네요. 그냥 부모님 뜻에 따라서 살고 싶은 생각도 드네요.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께 여러 가지 도움을 요청하면 전 아무 할 말이 없어지죠. 그래서 정말로 요즘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그냥 부모님께 모든 걸 맡기고 살아가고 싶네요. 하지만 부모님은 평생 제 곁에 계시지 못할 확률이 많기 때문에 아직은 포기하지 못하고 어떡하든 살아보려구 안간힘을 써 보지만, 앞으로 어찌될진 저도 모르겠어요. 정말로 모든 걸 버리고 떠날지도, 아님 다시 힘을 얻어서 이 난국을 해쳐 나갈지는 저도 미지수네요…….
99년 9월 26일, “요즘 들어 장애우로 사는 게 너무 버겁군요. 이런 생각은 거의 안 했는데, 나 조차 이런 생각이 드니 다른 장애우들은 더욱 힘들어하겠죠. 사회, 가정, 나 자신과의 싸움 이런 것들이 이젠 마치 무거운 쇳덩어리가 나를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게만 느껴지네요. 사회와의 싸움은 그래도 자신 있습니다. 또한 나 자신과의 싸움도 웬만큼은 자신이 있어요. 그러나 부모님의 벽, 그 벽을 깨뜨리기가 너무 힘들군요. 나에게 상처주는 것은 모르시고, 내가 조금만 내 주장을 내세우면 그건 부모님께 상처주는 것이라며, ‘우리 집안에서 왜 너만 그렇게 말을 안듣냐고’ 화를 내곤 하시죠. 처음에는 부모님 설득시키려 노력도 많이 했고, 별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실패였습니다. 그래서 요즘엔 할 수 없이 저도 강경책으로 나가지만 그때마다 제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제일 용기를 주셔야 할 분들한테 제일 인정을 못 받고 정말 장애우가 되네요. 안 그래도 다른 것들과 싸울 힘도 부족해서 때론 포기하고 싶은데 거기다 부모님까지 저의 기를 꺾어 놓으시니 정말 이젠 다 포기하고 어디론가 가서 조용히 살고 싶네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요.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건 언젠가 제가 올린 글 중에 이런 말을 썼을 거예요. 나를 믿고 내 길을 선택한 장애우가 한 두명이 아니기 때문에 난 포기할 수도, 쓰러질 수도 없다. 이 글을 생각하면 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요. 그 다음에 내가 홀로 선 모습을 당당하게 부모님께 보여드려야겠죠. 그리고 사회에다 외칠 거예요. 이 세상엔 장애우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장애우도 비장애우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보란 듯이 크게 외칠 거예요……. 그리고 제가 계획한 목표가 결코 이상이 아니란 걸 꼭 보여 주고 말 거예요. 난 했다 라고 크게 외칠 수 있는 그날이 올 때까지 난 어떤 응석이나 아프다고 하지 않을 거예요……. ”
2000년 7월 5일,(헌규 씨가 게시판에 올린 마지막 글이다.) “매일 와서 글만 몰래 보고 나가니 혹시 저를 잊어버리신 건 아니겠죠. 글을 올린다 하면서도 제가 요즘 최악의 생활을 하고 있어요. 제일 죄송스러운 건 열린방(통신동호회에서 이헌규 씨가 운영하는 방)에 많이 신경을 못써서 마음이 아프군요. 그러나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이틀에 한번은 학원 다니구요, 취업준비하고 잘못하면 소송까지 들어갈지 몰라 요즘 제가 사는 건지, 아니면 살아줘 가는 건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네요. 그래도 희망과 사랑은 버리지 말고 열심히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하며 또 즐기며 살아가기로 하죠. 그럼 사랑하는 님들 평안하소서.”
중증장애우가 살 수 없는 세상에 절망
한달 여를 매달렸지만 이것뿐 헌규 씨 관련 취재는 더 이상 진척이 이뤄지지 않았다. 기대했던 동호회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고, 그래서 더 이상 만날 사람도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 불쑥 기자 머리에 떠오른 곳이 헌규 씨가 올해 초부터 다녔다는 컴퓨터학원이었다. 그래 마지막으로 헌규 씨가 다녔던 컴퓨터학원 강사를 만나자, 만나서 헌규 씨의 컴퓨터 실력이 출중했다는 증언을 듣자, 그러면 실력은 있지만 이 사회가 중증장애우의 취업을 거부해서 헌규 씨가 자살했다는 결론은 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헌규 씨는 생전에 서울 역삼동에 있는 학원을 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기자는 역삼동을 샅샅이 뒤지기로 했다. 그런 마음을 먹고 사무실을 나서기 전 기자는 혹시나 해서 덕균 씨에게 전화했다. 학원 상호를 묻자 뜻밖에도 덕균 씨는 취재 당시에는 모른다고 했던 학원 이름을 순순히 알려줬다. 역삼동 그린컴퓨터 학원에 헌규 씨가 다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과정을 통해 알아낸 학원에서 기자는 자살을 앞둔 헌규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강사가 아닌 상담교사의 증언을 통해 헌규 씨가 왜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지 결정적인 이유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학원에서 만난 상담교사 하선정 씨, 그는 헌규 씨가 생전에 무엇 때문에 고민했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헌규 씨와는 어떤 관계였나.
“학원을 찾아온 헌규 씨를 상담하고, 등록을 시키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제가 관리를 했어요.”
- 자살이 믿어지지 않겠다.
“정말 믿어지질 않아요. 헌규 씨가 돌아가시기 전날도 저와 통화했는데…”
- 무슨 얘기를 나눴나
“헌규 씨가 카드 빚이 있었어요. 한 6백만 원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전화로 빚을 갚지 못해서 재판을 받게 됐다고 하길래 그러면 재판 받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일단 재판을 받아봐야 알겠다면서 오늘은 학원에 못 가고, 모레 오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럼 모레 오시라고 했어요. 그랬는데, 그 날 그러니까 오기로 한 날 아침에 전화를 받은 거죠. 기자라는 분이 이헌규씨 아시죠? 라고 묻는 거예요. 제 수강생인데 무슨 일 때문이냐고 했더니 돌아가셨대요. 그래서 전 믿어지지가 않는 거죠.”
- 헌규 씨가 학원에서 어떤 분야를 전공했나.
“웹디자인 쪽을 공부했어요. 그리고 나중에 컴퓨터 언어도 배우려고 하셨고, 배우고 싶은 것은 많았는데, 조건이 잘 안 따라준 경우죠.”
- 장애를 말하는가.
“장애도 그렇고, 돈도 없었어요.”
- 헌규 씨 집이 부자인데, 그런 이야기 못 들었나.
“처음 듣는 얘기예요. 저는 헌규 씨 집 사정이 안 좋은 줄로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헌규 씨가 처음에는 대치동에 살다가 역삼동으로 이사왔어요. 집이라고 볼 수 없는 빌딩 지하에 살았는데 빌딩 주인이 바뀌어서 거기서 쫓겨났어요. 그것도 그냥 쫓겨난 게 아니라 빚을 지고 쫓겨났다고 했어요. 한 2백만 원 정도. 빌딩 주인이 그 돈을 달라고 채근했대요. 그래서 상황이 굉장히 안 좋아졌죠. 결국 살 곳이 없어서 먼 곳인 천호동으로 옮기신 거예요.”.
- 헌규 씨의 컴퓨터 실력이 취업이 가능한 수준이었나.
“헌규 씨는 머리가 좋으신 분이셨어요. 몸이 좀 안 따라 줘서 진도가 늦긴 했지만 충분히 취업이 가능한 수준의 컴퓨터 실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 그러면 취업 상담을 했을 텐데.
“본인이 취업을 한다고 했고, 그 때 취업이 됐다고 들었어요.”
- 어떤 회사인지 상호를 말해달라.
“회사 상호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느 회사라고 말은 안 했고, 일산에 있는 회사라는 얘기는 했는데, 프로그램 짜는 회사라고 했어요.”
-그 때가 언제였나.
“돌아가시기 2주 전 쯤이었어요. 제가 일산은 너무 먼데 어떻게 다니려고 하느냐, 차라리 조금 기다렸다가 내가 소개해 주는 회사에 취업해라 그랬지만 일단 경제적으로 쪼들리다보니 취업하겠다고 하더라구요. 제 입장에서는 아쉬웠죠.”
- 알려진 것은 헌규 씨가 면접까지 봐서 취업이 확정 됐는데 갑자기 회사에서 취업을 거부해서 비관자살을 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 건으로 비관했다면 제게 전화를 하지도 않았죠.”
- 취업이 됐는데 왜 안 출근 안 하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나.
“아니죠. 그때 다닌다는 이야길 한 것이 아니라 다니기로 되어 있다, 라고만 이야길 했어요. 언제 출근할 거라는 이야기는 안 하셨어요.”
- 학원은 계속 나왔나.
“예. 계속 나왔어요. 꾸준히 마지막에만 안 나오셨고.”
- 취업이 되었는데도 학원에 나왔다는 얘기인가.
“원래 헌규 씨가 취업을 원했던 분야는 웹디자인 분야였어요. 그리고 제가 또 말했거든요.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원하는 분야에 취업 시켜 주겠다고.”
- 그러면 왜 자살했다고 생각하나 빚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죠. 내 맘대로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제가 굳이 얘길 하자면 일단은 카드 빚 때문에 많이 괴로워했어요.”
- 헌규 씨가 카드 빚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것은 어떻게 아나.
“생전에 저 한테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상의 하셨어요. 심지어는 선을 본 이야기까지 저한테 다 했어요.”
- 그럼 마지막엔 거의 카드빚 얘기를 많이 했나.
“그 얘기도 하셨고, 집에서도 아실 텐데…. 또 있어요. 빌딩 주인이 2백만 원 빚을 갚으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도 많이 괴로워 했어요.”
- 예정대로라면 헌규 씨는 언제 취업이 예정돼 있었나.
“10월초 정도는 취업을 시킬 예정이었어요.”
- 헌규 씨는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취업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우리 학원 수강생들은 90%이상이 취업이 가능해요. 사실상 95%정도 되죠. 당장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형태로 취업이 가능하니까. 헌규 씨 경우는 실력도 있고, 본인이 열심히 하고, 또 설사 좀 뒤쳐지는 부분이 있더라도 재수강으로 보충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취업을 할 수 있었다고 저는 보고 있었어요.”
이제 조심스럽지만 결론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글/ 김경희 이태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