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시서 유순자씨 구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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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장애우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편을 숨지게 해서 법정에 선 유순자(39) 씨. 유순자 씨는 왜 평소 끔찍이 아끼던 남편을 살해해야 했을까, 그리고 살인사건이 명백함에도 여성과 장애우 단체들은 왜 그녀의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마흔 나이지만 130㎝의 작은 키에 몸무게 35㎏, 거기다 자궁암에 걸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이 작은 장애 여인이 살아온 굴곡 많았던 삶이 사람들을 울리고 있다. 유순자 씨는 그 동안 여성장애우로서 철저하게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밑바닥 삶을 이어와야 했다. 이런 그녀에게 과연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전무한 여성 장애우 정책으로 인해 피해자가 된 유순자 씨 사건의 전 과정을 알아보았다
구걸로 생계 이어가야 했던 유순자 씨
3월 24일 수원지방 법정, 남편 최갑석(사망 당시 44세)씨를 칼로 찔러 숨지게 한 유순자 씨의 첫 공판이 열렸다. 이 날 유순자 씨는 검찰측 사실인정심문이 끝난 뒤이어진 변호사의 반대심문에서 주목할만한 대답을 했다. 변호사가 “남편이 평소 상습적인 구타를 가해서 이웃 주민들이 헤어지라고 권했지만 자신을 처음으로 사랑해준 남편을 버릴 수는 없었지요?” 라고 묻자 고개를 숙이며 “예…”라고 짧게 대답한 것이다.
이런 유순자 씨의 대답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렇다. 숨진 최갑석 씨가 평소 유순자 씨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과 그 폭력이 지나쳐 이웃 주민들까지 나서서 최갑석 씨와 헤어지라고 권했지만 그럼에도 유순자 씨는 최갑석 씨를 떠날 수 없었다는 것, 그 이유를 변호사는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러나 취재 결과 남편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그녀로 하여금 지긋지긋한 폭력을 견디게 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면 유순자 씨가 최갑석 씨의 폭력으로 인해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던 끔찍한 나날들을 보내면서도 최갑석 씨를 떠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뭘까.
한 마디로 유순자 씨가 여성장애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업이 없어 밑바닥 생활을 해야 했던 처지 때문에, 그녀는 질긴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도 최갑석 씨를 떠날 수 없었다. 그녀가 힘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비록 폭력으로 화답했지만 어쨌든 남편이라는 존재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되풀이되는 지나친 폭력을 견디면서까지 남편을 떠날 수 없었던, 혹 떠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막상 갈 곳이 전혀 없었던 그녀의 처지는 이번 사건이 바로 여성장애우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유순자 최갑석 두 사람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를 알아보자.
유순자 씨, 농촌 출신이다. 7남매라는 많은 형제자매가 있지만 모두 소식을 모른다. 장애 때문에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해 한글도 깨치지 못했다. 부모님과 살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오빠집에 얹혀 살았는데, 가난한 오빠집에 짐이 될 수 없어 오빠집을 나와 안양에서 혼자 살았다. 그 순간부터 그녀의 생계수단은 구걸이었다. 구걸로 생을 이어가던 그녀는 설상가상으로 폐결핵에 걸렸다.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육 년 전 대구에 있는 요양소에 보내졌고 거기서 최갑석 씨를 만났다.
최갑석 씨, 아들이 둘 있는 이혼남이고 비장애우다. 심한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더 이상 구체적인 신변 사향은 나온 게 없다. 추측컨대 이번 사건의 원인이 된 술이 그의 인생을 막다른 곳으로 내몰았고, 가족에게 버림받은 후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찾아간 요양소에서 유순자 씨를 만났을 것이다.
1년여 머물던 요양소에서 마음이 맞은 두 사람은 요양소를 나오게 되자 바로 안양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도 생계를 이어가는 책임은 전적으로 유순자 씨가 졌다. 말하자면 무능력자에다 알콜중독 혐의가 있었던 최갑석 씨는 유순자 씨에게 얹혀서, 유순자 씨가 구걸로 벌어오는 돈에 기대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군포시 금정역 근처에 있는 영구임대아파트 14단지에 이사온 것은 지난 97년이었다. 13평형 작은 아파트였지만 두 사람이 사는 데는 아무 불편이 없었다. 생활도 생활보호대상자 1종 거택보호대상자로 지정받았기 때문에, 정부에서 생계비를 지원해 줘서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이렇게 먹고 사는 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유순자 씨는 계속 일하러 나갔다. 금정역 육교 위에 앉아서 바구니 하나 놓고 구걸을 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콩을 까서 팔았다. 이렇게 일을 나가서 번 돈이 하루에 2∼3만원이었다.
최 씨 폭력으로 한 달에 세 번 꼴로 경찰서에 신고
이웃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유순자 씨는 무척 생활력이 강했다고 한다. 비오고 눈보라 치는 날만 빼고, 주위 사람들이 만류해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을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순자 씨는 구걸해서 번 돈을 모두 어디에 썼을까? 이번 사건이 일어나자 주위 사람들이 놀란 건 그녀의 검소한 생활이었다. 그녀의 집 장롱을 열어보니 유순자 씨 옷은 단 두 벌밖에 없었다.
즉 그녀는 번 돈을 자신을 위해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다. 대신 모두 최갑석 씨를 위해, 금반지를 사주고 개량한복을 사주는 등 아낌없이 썼다. 또 최갑석 씨가 술을 먹는데, 아이러니지만 최갑석 씨가 술을 먹고 그녀를 구타하는데 든 비용의 대부분이 다름 아닌 그녀가 구걸해서 벌어온 돈이었다.
다른 한 사람, 최갑석 씨도 일을 나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잠깐씩 경비로 취직해 일을 나갔지만 술 때문에 번번이 해고됐다. 따라서 수입이 전혀 없다시피 했지만 낭비벽은 무척 심했다.
14단지 부녀회장인 채인옥 씨는 최갑석 씨의 낭비벽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최갑석 씨는 평소 허풍이 심했어요. 낭비도 심하고,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사람들한테는 우리 마누라가 금정역에서 가게 해서 한 달에 150만 원씩 번다고 허풍치고 다녔어요. 어느 날 어떤 남자가 쫓아와서 유순자 씨에게 외상값을 갚으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최갑석이가 돈을 너무 잘 써서 부잣집 남잔지 알았다는 거였어요. 이런 식으로 최갑석이가 낭비가 심하다보니 아무래도 돈 문제 때문에 부부싸움이 잦을 수밖에 없었죠.”
역시 이웃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최갑석 씨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유순자 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평균 일주일에 한 번 꼴이었고.
그런데 이런 최갑석 씨를 동정하는 시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남자로서 술마시면서 무직자로 살아야 하는 삶에 절망하고, 사회적인 분노도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추측이다.
그래서였을까, 가슴속 분노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는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렸다. 거리에서 낯선 사람에게 시비를 걸다 행인이 신고해서 잡혀가는 등 수시로 파출소에 끌려가고, 14단지 내에 있는 복지관 경로식당에 찾아가서 “나도 생보자니까 밥을 달라”고 어거지를 부리는 일도 잦았으며, 집 유리창을 박살내서 병원에 실려가고, 또 유순자 씨를 구타하다 제풀에 넘어져서 부부가 함께 병원에 실려가는 등 시쳇말로 막 가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해서 그의 절망스러운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한다 해도 용서할 수 없는 건 유순자 씨에 대한 폭력행사였다. 무엇보다 장애가 심해 폭력에 대응할 수 없는 유순자 씨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건 그야말로 어린아이를 때리는 행위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웃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갑석 씨는 무지막지하게 유순자 씨를 때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것도 자주. 보다못한 이웃이 경찰서 에 폭행신고를 한 것이 한 달에 평균 세번 꼴이었다. 유순자 씨가 폭력을 피하기 위해 문을 닫아걸면 최갑석 씨는 유리창을 부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유순자 씨는 그런 최갑석 씨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얼굴에 피멍이 들고 뼈가 부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날이 잦았다. 14단지에 119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하면 대부분 실려가는 것은 가녀린 그녀였다.
유순자 씨, 평소 단속에 공포심 가져
이렇게 상상을 뛰어넘는 심한 폭력 앞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던 유순자 씨, 어쩔 수 없이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녀는 왜 최갑석 씨를 떠나지 못했을까. 무능력자에다 술만 마시고, 거기다 폭력까지 휘두르는 남자를 벗어나 새 삶을 시작할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답은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도저히 그녀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에겐 최갑석 씨를 떠나지 못했던 숨겨진 사연이 있었다. 우선 그녀가 정말 최갑석 씨를 사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아 지독한 외로움에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야 했던 그녀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최갑석 씨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혼자 되는 것이 두려웠던 그녀는 그래서 무지막지하게 구타를 당하면서도 쉽게 최갑석 씨를 떠날 수 없었다.
이게 드러난 이유라면 숨겨졌다가 드러난 또 한 가지 이유는 유순자 씨는 살아남기 위해서도 최갑석 씨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유순자 씨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던 14단지 부녀회장 채인옥 씨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있다.
“내가 하도 화가 나서 최갑석이에게 이 단지에서 당장 나가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최갑석이 하는 말이 유순자가 나 없으면 못 산다고 그런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왜 못 살아, 내가 대신 돌봐줄테니 너는 나가, 그랬죠. 그러자 최갑석이가 뭐라고 그러냐면 구걸하는 사람을 잡아다가 가두는 데가 있대요. 갱생원이라는 곳인데, 거기 잡혀가면 법적인 보호자가 있어야 나올 수 있다는 거였어요. 만약 유순자가 잡혀가면 남편인 자기가 데리고 나오는 게 제일 빠르기 때문에 유순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를 떠날 수 없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 적이 있어요.”
유순자 씨가 심한 장애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구걸을 직업으로 택해 연명해 왔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그대로다. 그리고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도 구걸이 그녀 삶을 지탱해줄 유일한 수단이라는 데에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다면, 그녀가 거리미화를 이유로 행정관청이 무차별 단속을 벌여 자신을 잡아 부랑인시설에 가두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에 평소 심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럴 경우 누가 자신을 꺼내주나, 바로 최갑석 씨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약점 때문에 유순자 씨는 얼굴이 짓이겨지는 폭행을 당하면서도 끝내 최갑석 씨를 떠날 수 없었다.
아쉬움이 남는 건 만약 여성장애우를 위한 쉼터가 존재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점이다. 매맞는 여성장애우를 위한 쉼터가 있어 유순자 씨가 최갑석 씨의 폭력을 잠시나마 피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이렇게 비극으로 치닫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라는 아쉬움을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여성장애우를 위한 쉼터는 없었고, 14단지 복지관의 한 사회복지사가 유순자 씨에게 작년 7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가정폭력방지법의 폭력남편 접근 금지 조항을 알려주며 본인이 신청하기 어려우면 복지관에서 대신 신청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리고 난 뒤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얼굴 짓이겨지는 폭행 당해
올해 1월 19일 밤 9시경이었다. 군포시 산본동 14단지 매화아파트 1409동 302호 그녀의 집, 당시 최갑석 씨는 이미 술에 취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최갑석 씨는 밖에 나가더니 소주 3병을 더 사가지고 돌아왔다. 유순자 씨가 “제발 술 좀 마시지 말라”고 했지만 최갑석 씨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소주 1병을 더 마셨다. 이때부터 최갑석 씨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9시 50분경 전화벨이 울렸다. 유순자 씨가 전화를 받았다. 보험설계사가 보험금 납부를 독촉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최갑석 씨 몰래 가입해둔 보험이 있었다. 그녀는 최갑석 씨가 보험 가입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때 최갑석 씨가 “누구냐?”고 물었다. 유순자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간 최갑석 씨가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전화를 걸었는지 대!”라고 소리치며 그녀의 머리채를 나꿔챘다. 그런 다음 방바닥에 그녀의 얼굴을 대고 짓이겨대기 시작했다.
폭행당한 유순자 씨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마치 사망한 것처럼 그녀가 전혀 기척을 보이지 않자 당황한 최갑석 씨는 전화를 찾아 늘 그랬듯이 119를 눌렀다. “우리 부부가 쓰러졌다. 둘 다 실어가 달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이때 유순자 씨가 정신을 차렸다. 엉금엉금 기어 싱크대로 간 그녀는 과도를 들었다. 그 과도로 전화를 거는 최갑석 씨의 등을 찔렀다. 칼을 맞은 최갑석 씨가 돌아 앉았다. 겁이 난 그녀, 다시 한 번 칼로 최갑석 씨 가슴을 찔렀다. 예리한 칼끝이 하필 최갑석 씨 폐를 파고 들었다. 최갑석 씨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사망했다. 잠시 후 119 구급대가 도착했다. 유순자 씨는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상태에서 혼이 빠진 모습으로 “119, 119”를 외쳐대며 서 있었다. 경찰에 의해 유순자 씨는 연행되고 최갑석 씨는 사망 판정을 받는 것으로 상황은 끝났다.
주변 사람들 전언에 따르면 사건이 벌어지기 전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징조가 감지된 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우발적으로 사건이 벌어졌다는 말이다. 계획된 살해가 아니라는 점은 채인옥 씨가 유순자 씨를 면회가서 나눈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왜 그랬니?” “몰라, 너무 맞아서 정신이 없었어.” “그래도 참지 그랬어.” “나 너무 많이 맞았어, 맞아서 죽을뻔 했어.” “그럼 바깥으로 도망치지 그랬어.” “언니 나 나가려고 했는데 머리채 잡혀서 끌려 들어갔어, 도망칠 수가 없었어......”
유순자씨 치료감호소에 보내 달라고 애원
내용을 정리해 본다. 이번 사건은 객관적으로는 여성장애우 문제와 가정에서 학대받는 여성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만약 개인 문제로 치부한다면 유순자 씨가 평소 최갑석 씨에게 가졌던 분노감과 응어리가 일순간 폭발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고.
하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분명한 건 사건 당시 여성장애우 유순자 씨는 최갑석 씨를 숨지게 할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누차 강조했지만 유순자 씨를 극한 상황으로 내몬 책임은 전적으로 이 사회에 있다.
가정이지만 만약 유순자 씨가 정부와 사회의 배려로 구걸을 직업으로 택하지 않았어도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여성장애우를 따로 배려하는 정책이 시행돼 최소한 쉼터라도 있었다면, 그래서 유순자 씨가 폭행을 당했을 때 피할 수 있는 곳이라도 있었다면, 그리고 평소 유순자 씨에게 관심을 가지고 돌봐주는 그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랬어도 유순자 씨가 최갑석 씨를 숨지게 하고 감옥에 갔을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다. 유순자 씨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또 유순자 씨에게 이 사회는 너무 냉정한 사회였다. 차디찬 감옥에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도 그녀는 냉정한 사회에 홀로 놓여져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한다. 그녀가 남편을 숨지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면서 그녀의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사회에는 따뜻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순자 씨가 감옥에 있는 지금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말들.
“그 여자는 내가 평소에 성행위를 안 해주면 꼬집어대.” 이 말은 최갑석 씨가 술 먹고 이웃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이 사람들 뇌리에 남았는지 “남편이 성행위를 해주면 참 좋아했대.” “어머, 그렇게 심한 장애를 가졌는데 성행위를 할 줄 알았나봐”라고 일부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다. 또 한 마디 말, “보기는 그래도 유순자 씨 성깔 대단했어요.” 이 말은 최갑석 씨가 구타했을 때 유순자 씨가 반항하는 과정에서 힘으로 안되니까 입으로 최갑석 씨를 깨물어서 나온 말이다. 유순자 씨로서는 입으로 무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반항 수단이었는데 그걸 보고 성깔이 대단했다고 사람들은 고개를 젓고 있다.
마지막 말 “그러길래 진작에 유순자 같이 장애가 심한 사람은 음성 꽃동네같은 데에 보냈어야지. 사회에서 살게 놔두니까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거잖아.”
유순자 씨는 구걸로 연명했을지언정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숨죽이며 살아온 유순자 씨 같이 심한 장애우는 시설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일부 사람들이 유순자 씨를 거명하면서 앞에 꼴에, 라는 심한 비하의 말을 붙인다는 것이다. 꼴에 성행위를 좋아했다며, 꼴에 성깔이 대단했다며, 꼴에 시설에 가서 살아야지 왜 사회에 살면서 사고를 저지르는 거야.....
이 사회에는 이렇게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참 문제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 건 현재 유순자 씨 구명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군포여성민우회, 안양여성의전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등 8개 시민단체는 ‘유순자씨구명을위한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탄원서에 붙일 시민 서명을 받고 있다.
현재 설상가상으로 자궁암이라는 중한 병에 걸려있는 유순자 씨는 수원교도소에서 남편을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한편으로는 감옥 생활이 고통스러워 치료감호소에 보내 달라고 애원하며 지내고 있다.
재판이 진행돼봐야 결과를 알 수 있겠지만 유순자 씨가 무죄로 나오기는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집행유예로 나오는 것이 최선책인데 이마저도 정상 참작이 되지 않으면 가능성이 없다는 게 유순자씨 변호를 담당하고 있는 이덕후 변호사 말이다.
유순자 씨가 만약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도 힘들겠지만 현재 유순자씨가 만약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도 힘들겠지만현재 유순자 씨 사건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도 마음의 빚을 나눠 가지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당사자인 장애우들은, 유순자씨 구명운동을 활발하게 벌여야 할 책임이 누구보다 장애우에게 있지 않을까? 장애우들은 그녀를 외면한다면 유순자씨는 정말 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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