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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서울의 신빈민촌 수서동 영구임대아파트촌을 가다

단위동에 가장 많은 영세민 거주 다양한 사회복지 실험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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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비리 이후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수서지역에 사회복지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제 수서지역은 서울 중계동 일대에 이어 대단위 영구임대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어. 전국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저소득 밀집지역으로 꼽힌다. 그러한 지역적 특성에 따른 각종 사회문제의 발생,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복지적 시도와 실험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나라의 빈곤층이 1천만명이 넘어섰다는 한 민간단체의 조사결과가 발표돼 관심을 모은 바 있다. 21세기, 1천만 빈곤층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지, 수서동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를 통해 알아보았다.

 

91년, 세간의 언론들은 수서비리에 대한 보도 경쟁으로 뜨거웠었다. 한보 정태수 당시 회장이 주택조합아파트를 지을 수 없는 수서지구 부지에 주택조합원을 모집해 놓고는 권력층에의 로비를 통해 용도를 변경하는 공문을 서울시에 내려 보내도록 한 것이 드러나 청와대 비서관과 각 정당의 의원 등이 처벌되는 사태로 번진 것이 수서비리의 요체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던 그 사건 이후 수서지역이 어떻게 개발됐고 어떻게 변모했는지는 세인들로부터 잊혀진지 오래다.
그런데 수서지역이 또 다른 의미에서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이제 수서지역은 서울 중계동 일대에 이어 대단위 영구임대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어, 전국적으로도 가장 대표적인 저소득 밀집지역으로 꼽힌다. 그러한 지역적 특성에 따른 각종 사회문제의 발생,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복지적 시도와 실험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사회복지학계에서는 관심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기대 모았던 백화점, 오피스텔은 부도로 건설 중단


서울지하철 3호선 수서역에 내려 주위를 둘러보면 얼핏 다른 지역과의 외견상의 차이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지도 모른다. 역 인근에 각종 상점들이 늘어서 있지 않고 포장마차들만이 옹색하게 비좁은 도로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과 아파트단지들이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 일단 눈에 들어올 뿐이다. 로즈데일백화점이라는 상호를 조금은 어렵게 찾아볼 수 있는 큰 빌딩과 오피스텔건물이 그 옆에 솟아있고 길 건너에도 건설중인 것으로 보이는 높은 건축물이 눈길을 끈다. 한창 개발이 진행중인 신흥 주거지역이구나, 싶지만 실상을 알아보면 로즈데일백화점과 나산트루빌은 부도가 나서 분양과 건설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로즈데일백화점 건물 하단의 오피스텔은 일부 분양돼 그나마 사용이 되고 있지만 트루빌은 몇 개월째 흉물스럽게 건물의 뼈대만으로 그렇게 서 있다. 그 건물들을 보면서 수서동 사람들 가운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수서동 일대의 지역 경제나 문화환경 수준이 같은 강남지역권에서도 현저하게 뒤떨어지고 고립돼 있는만큼 그 건물들이 신축된 후 자연스럽게 상권을 형성하고 유동인구들을 끌어오게 되면 그런 문제도 점차 어렵지 않게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일원지역까지 합하면 10만5천명의 인구가 밀집해 살고 있는 이 일대는 새롭게 형성된 주거지역으로 주거시설이 전체의 77.7%나 차지하고 있다.
특히 로즈데일 백화점 뒤편으로 있는 수서 6단지의 7개동 전체와 길 건너 나산트루빌 뒤편으로 있는 수서 3단지(그런데 동호수가 1백단위로 매겨져 통칭 1단지라고도 불린다) 가운데 14개동은 영구임대아파트단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수서동은 단위 동 가운데 생활보호대상자가 가장 많은 동으로 꼽히고 있으며, 이곳에 살고 있는 장애우수도 7백47명(99년 현재. 3단지 3백82명, 6단지 3백65명)이나 된다.
도시 계획 입안 당시부터 3단지는 주로 독거노인 세대로, 6단지에는 장애우세대로 대상을 구분해 입주신청을 받았다고 하는데 강남의 다른 생활권에 비해 노인인구의 비중이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영유아 인구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분포를 보인다는 것도 특징으로 꼽힌다.
영구임대아파트단지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들 단지들은 사회복지관을 끼고 있다. 3단지에는 수서명화복지관이, 6단지에는 수서종합복지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종로에서 옮겨온 태화복지관도 조금 떨어진 수서동 내에 자리잡고 있다.
이들 복지관이 개관과 함께 지역주민들의 욕구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곳 주민들은 관악구, 서초구, 강남구, 성동구 등지에 있던 달동네와 같은 빈민촌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3단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이사오기 전에는 월세방(40.5%)이나 비닐하우스(27.3%)에서 살았다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니 잠시 국가로부터 계약형식으로 빌려서 사용하는 ‘임대’ 아파트지만 자신의 문패를 걸고 살 수 있는, 그것도 난방이 잘 되고 겨울철에 손쉽게 온수도 쓸 수 있는 아파트공간에 대해 입주민들의 대다수는 크게 만족해했다.(3단지 주민의 경우 만족도가 76.8%) 그들 중 대부분은 아마 평생 가야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 소유의 집을 마련하기 어려워 계속 월세와 전셋집을 전전하며 살아갈 것이 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구임대주택 정책은 집없는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주거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주거 복지수준의 향상과 사회적 통합을 달성시킨다는 취지로 마련되었다. 주거환경이 안정되면 열악한 주거환경으로부터 발생하는 범죄, 청소년, 질병 문제와 같은 사회문제도 어느 정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예상도 가능했다.
그런데 입주민들이 속속 이주해 들어와 대단위 영세민 밀집촌이 형성되다 보니 예상과는 다르게 기대했던 긍정적 효과를 넘어서는 우려할만한 수준의 많은 문제들이 그것도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대들 중에 장애우, 노인, 편부·편모가정 뿐만 아니라 알콜중독자와 정신질환자들이 드물지 않은데 한데 모여 살다 보니 이들의 문제가 더욱 크게 그리고 눈에 띄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달동네에서보다 더욱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사회문제


특히 고정적인 일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아파트 마당에서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시비를 거는 모습은 지금도 종종 목격되는 일이다.
그것이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초창기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싸움이나 주민들끼리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수서복지관 오선영 씨는 이에 대해 “가정내 불화 뿐만 아니라 비교적 넓은 지역에서 모여든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청년회, 노인회, 부녀회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잘 알지 못하고 인정을 하지 않아 반목과 질시가 해소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설명한다.
수서복지관 정필현 대리는 “기존 달동네는 비교적 너른 지역에 걸쳐 있었지만 영구임대아파트에서는 좁은 면적에 많은 영세민들이 밀집돼 있다 보니 그러한 주민들간의 분쟁이나 가정 혹은 청소년문제가 더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수백 세대가 같이 쓰는 공동의 아파트마당에서 오고 가며 마주치게 되는 알콜중독자나 정신지체, 정신질환자들은 더욱 쉽게 눈에 띄는, 다른 주민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들이다. 더구나 누군가 그렇게 눈에 띄는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으면 유사 중독증세를 갖고 있는 다른 사람도 술에 대한 욕구를 자제하지 못해 음주는 단지내에서 고질적인 고민거리가 됐다. 게다가 6단지 인근에 오피스텔이 분양된 후 바로 옆에 24시간 편의점이 생겼는데 그렇게 24시간 술을 판매하는 곳도 생기면서 음주로 인한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도 많았다. 92년 10월 입주를 시작한 후 지하철이 개통된 것은 1년 뒤인 93년 10월이었기 때문에 그 때까지 한정된 버스노선으로 심각한 교통난을 겪어야했다. 그 교통난은 먼 거리에 생업을 갖고 있었던 이들의 생계까지 위협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영세민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다 보니 그나마 노인과 정상적인 취업이 불가능한 이들을 위해 마련한 행정기관의 취로사업도 한정된 예산에 인원이 많이 몰려 전반적으로 취로일수가 줄어들게 되었고 자연히 세대별 수입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게다가 기존에 거주하던 지역구에서 그나마 받을 수 있었던 각 기관의 지원이나 후원금도 같은 이유로 줄어들게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사오기 전보다 수입이 줄었어요”


흔히 빈민지역화의 징후는 다른 지역에 비해 가게나 상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에서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수서지역은 사무실이나 점포가 19.6%밖에 없다는 실태조사결과가 나오고 있는데 특히 6단지 쪽은 바로 얼마 전까지 아파트 7개 동과 복지관 하나만 덜렁 세워져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수서복지관 한 복지사는 “지금은 로즈데일백화점 건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초기에는 복지관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지하철역 사이에 아무 것도 없어 그냥 역까지 훤하니 다 보일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그런 상황이니 주민들은 기본적인 찬거리를 장만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인근에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이 있지만 가는 일이 번거롭고 그나마 있는 단지내 상가의 물가는 이전에 살던 곳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이 주민들의 불만이다.
“예전에 상가내 수퍼 주인에게 물가가 비싸다고 주민들이 불평하자 여기 말고 당신들이 살 곳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해서 주민들이 분개해했다”고 주민 김인옥 씨는 전했다.
뿐만 아니라 우체국이나 은행, 이발소와 같은 기본적 편의시설도 채 마련이 되지 않고 또 더디게 마련돼 주민들은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아이들의 대부분이 일상 대화 속에서 니네 집에 뭐 있니, 우리 집에 뭐뭐 있다,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다른 곳에 비해 없는 것이 많이 눈에 띄고 생활에서의 불편함이 피부로 느껴진다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정도 잘 안 생길 것”이라고 한 사회복지사는 지적하기도 했다. 
특히 수서동의 청소년들은 지역 내에 문화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시설이 없다는 데서 많은 갑갑증을 느끼고 있다. 청소년들이 흔히 가곤 하는 오락실, PC방, 하다못해 분식집도 거의 없어 포장마차에 서서 간단히 요기를 해결할 뿐이다. 게다가 학교마저 초·중·고등학교가 담 하나 사이에 두고 모여 있어 초등학교부터 인문계 고등학교까지를 똑같은 동네에서 지내다 보니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더구나 취로사업이나 수당 등 공적 부조로만 생활할 수밖에 없는 노인이나 장애우세대 뿐만 아니라 그렇게 생활상의 어려움을 더욱 심하게 겪게 된 주민들 수입의 절대 비율은 교육비와 관리비로 다 나가버린다. 그런 경제적 어려움은 사람들의 소비심리를 얼어붙게 하고 있고, 자연히 장사가 안되는 지역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돼 상가의 형성을 막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인지 3단지와 6단지쪽에는 그럴 듯한 외식업체도 찾을 수가 없다. 그나마 건너편 상가에 번듯한 일식당이 눈에 띄어 점심시간에 들러보니 손님이 적어 썰렁했다. 식당 주인은 장사가 잘 되냐는 질문에 “안돼 죽겠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한 문제들이야 다른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문제긴 하다. 그런데 강남생활권에 속한 이 수서지역의 유난히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 곳 주민들 직종의 대다수를 이루는 일용직, 행상, 취로사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에게는 경제적 어려움이 오히려 가중됐다는 점이다. 특히 행상의 경우 기존 재래시장에서는 누구나 손쉽게 좌판을 벌일 수도 있었지만 이 지역으로 이주한 뒤 임대료를 지불하고 상가에 정식으로 입주하거나 그것도 어려운 사람들은 단속 공무원들과 힘겨운 숨바꼭질을 벌여야 하는 노점행상으로 나서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기 때문이다. 3단지 내에서 과일 노점을 하고 있는 임순옥 씨는 “겨울은 단속이 조금 뜸하지만 봄부터 가을까지는 단속이 너무 심해서 오후 4시나 돼야 장사하러 나온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래서 복지관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욕구조사 결과를 보면 무료 직업·부업 알선서비스를 가장 많이 꼽는다. 
그런데 바로 몇 블록만 가면 중산층 이상이 거주하는 일반적인 강남의 아파트단지가 있고 이들의 소비수준이나 생활상을 어렵지 않게 목격하게 되는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자괴감은 더 크다. 몇 단지에 사느냐에 따라 경제수준이나 주거형태까지 모두 드러나는 상황에서 그렇게 영구임대아파트에 거주한다는 사실 자체가 주민들 사이에서 하나의 ‘낙인’이 되고 있다.
 

정부, 사회복지기관 지원에 기대는 심리 높아져

그런데다 IMF 이후 일용직·행상일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서동의 경제도 더욱 얼어 붙었다. 자활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취업을 할 수 없어 먹고 사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제 정부에서 나오는 얼마간의 수당에 점점 기대는 심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아파트 주민들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점차 정부지원이나 사회복지서비스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주민이 많아지는 것을 보고 지역 복지관의 사회복지사들은 생각이 많다. 근본적으로 지역주민들의 자활의지를 일깨우고 그러한 의욕이 지역사회내에서 잘 받아들여지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 시급함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서동사무소에서 조직한 지역지도자간담회에 복지관장이나 부장이 참석해 복지관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를 논의하고 다른 단체장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요구하고 있다. 수서복지관은 아파트 단지내 주민들의 자치회 운영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복지관 자체적으로 단지내의 반장, 부녀회, 청년회 성원들이 참석해서 단지내 일들을 논의하는 통반장회의체도 조직했다. 단지 내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임원들이 나서서 설득하고 막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반기보다 음주나 싸움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늦은 밤 놀이터등지에서 벌어지는 가벼운 범죄들은 자치회에서 자체방범을 통해 발생횟수를 줄여나가기도 한다.
일자리를 갖지 못한 주민들을 위해 공동작업장을 마련해 운영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주민들에게 금전관리의 기본부터 교육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한 복지사는 말한다. 일부 알콜중독자들에게서 특히 그런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평소에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돈이 생기면 자녀의 나이에 넘치는 용돈을 주는데 이것이 반복되면 청소년문제로 이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복지관과 달리 일반 분양아파트 지역에 걸쳐있는 태화복지관이 시도하고 있는 사업의 취지도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복지관의 수영교실, 건강교실, 청소년 자원활동, 탁아, 도서실 등 주민들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를 통해 얻어지는 물적 인적 자원으로 인근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사업을 실시하여 서로 어울려 돕고 사는 지역사회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수서지역의 복지관들은 지역 특성상 노인, 장애우, 청소년, 아동, 가정복지 등 사회복지의 전영역 가운데 어느 한 분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실정이지만 단위 지역 내에서 출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약물청소년문제나 정신장애우에 대한 사업도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특히 정신장애우에 대한 부분은 96년부터 태화, 수서 두 복지관과 강남정신보건센터가 협의체를 구성해 입원비 지원 뿐만 아니라 입원한 환자관리와 정신장애에 대한 가족교육을 실시하고 자립을 돕기 위해 공동작업장 취업과 물품을 지원하는 등 보다 전문성을 가지고 근본적인 사회적 지지망을 만들어가기도 했다. 또 태화복지관은 수서중학교에서 특별활동시간에 청소년상담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해 좋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수서동의 앞날은 이 수서동은 어떻게 바뀌어갈까. 그저 서울의 빈민촌의 대명사로 자리잡고 말 것인지. 3단지 인근의 씨티부동산 사장은 “나산이 부도난 후 나산 소유의 상가용지도 함께 묶여 있지만 이제 다른 곳이 인수를 해서 땅이 풀리면 상가도 여러 곳에 생겨나면서 이 지역도 개발될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도 했다.
수서복지관 정필현 대리는 “수서동 보다 일찍 영구임대아파트가 대단위로 입주해 있는 중계동의 경우는 인근 지역에 상가가 형성되면서 조금씩 슬럼화를 벗어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일단 현재의 로즈데일백화점이나 트루빌과 같은 대형 부도건물들이 정상화되어 상권이 형성되면 생활권이 자연스럽게 넓어지면서 현재 수서동지역의 가장 큰 문제인 고립의 문제도 점차 해결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어릴 적 가난을 경험했다는 시티부동산 사장은 “간혹 일반 아파트 입주를 문의하면서 인근에 영구임대아파트가 있어 꺼려진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신들도 언제 저기 들어가 살지 모른다고 돌려서 말하곤 한다”고 말했다. 그 사장의 말마따나 수서동을 취재하면서 이곳의 문제가 절대 ‘남의 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지난 해 11월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유엔개발계획의 연구용역을 담당하면서 최저생계비 이하의 빈곤층 인구 비율이 18.8%, 1천30만명(2백70만가구)이나 된다는 중간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복지부에서는 잘못된 계산이라고 펄쩍 뛰었지만 IMF 이후 빈곤층이 늘어만 간다는 사실은 여러 통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IMF 졸업여부는 부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천만이 넘은 빈곤층에게 수서동과 같은 임대아파트단지들은 벗어나기 어려운 종착지가 되고 말것인가 하는 과제가 남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 아파트는 부자들만 사는 덴줄 알았어요. "
월세집 전전하다 수서동에 자리잡은 김인옥 씨



 
애초에 영구임대주택 정책이 마련된 것은 자력으로는 주택을 마련하기 어려운 계층의 주거안정을 위한 것이다. 93년 1월 수서6단지에 보금자리를 마련, 병석에 계신 어머니와 여고생 딸과 함께 살고 있는 김인옥(시각장애·44) 씨도 바로 그런 경우다. 김인옥 씨는 자기 가족들만 사는 자기집에서 살아본 기억이 없다. 늘 월세집 아니면 전셋집이었다. 일용직을 전전하던 아버지는 체력이 약해 인옥 씨가 어렸을 때부터 집안을 지켜왔고 대신 어머니가 식당일을 하며 번 돈으로 집안의 생활비를 마련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결혼과 함께 출가했던 김인옥 씨에게 15년 전 녹내장이 찾아왔다. 점점 심해지는 그이의 시각장애를 참지 못한 남편이 집을 나가버리자 어린 딸을 안고 김인옥 씨가 찾아갈 곳은 그래도 친정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년 후 어머니마저 고혈압으로 쓰러져 아버지가 어머니 병수발까지 하느라 가세는 더욱 힘들어졌다.
“여기 오기 전에는 뚝섬 근처 달동네에 살았어요. 하루는 겨울이었는데 집주인이 건축허가가 나서 집을 재건축하겠다고 한 달만에 집을 비워달라고 하는 거예요. 아는 분이 소개해줘서 한달 있을 곳을 간신히 구했는데 마침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다는 통지문이 왔어요. 아파트는 부자들만 사는 그런 덴줄 알고 우리는 못가겠구나 했는데 한 친척이 거기 그런데 아니라고 가서 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보증금 1백67만원을 내고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여기서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인천쪽에 오빠가 살고 있지만 자신 명의로 된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데서 인옥 씨는 나름대로 자부심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어머니가 계속 병환중에 계셔서 빨래가 많은데 아파트라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빨래도 잘 말라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여긴 정부집이니까 전기세니 하는 세금들도 우리 식구가 사용한만큼 내면 되니까 편해요. 예전에는 월말에 집주인이랑 다른 세대들이랑 얼마 얼마씩 나누기 바빴는데.” 대신 지출은 좀 늘었다. 예전에 없던 관리비라는 것도 내야 하니 겨울에는 한달에 15만원 정도를 공과금으로 낸다.
그런데 인옥 씨는 실명을 한 뒤부터 집안에만 머물러 왔던지라 점자나 흰지팡이 사용법을 배운 적이 없다. “누가 눌러주면 타고 해서 엘리베이터 버튼도 최근에서야 만져봤다”는 그는 다른 사람이 데리러 와서 함께 예배보러 가는 경우 외에 혼자 외출을 해본 적도 없다.
인옥 씨에게 기숙을 하며 점자와 흰지팡이로 걷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지만 돌보아야 할 병든 노모와 고등학생인 딸이 있는지라 장기간 집을 떠나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저처럼 눈이 안보이면서 길거리에서 공중전화도 걸고 한다는 사람들 얘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저는 이해가 안돼요.” 그런 인옥 씨에게는 아파트동 바로 앞에 있는 복지관도 아주 멀고 먼 곳이었다.

 

"우리 보고 영구래요"

갈 곳 없는 수서동의 청소년들

 

올해 수서초등학교 3학년과 2학년인 선규, 선호(가명) 형제는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는다.
고속터미널에서 청소일을 하느라 늘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집에 오는 할머니와 보름 전 집 앞에서 또 다시 넘어져 꼼짝없이 거동을 못하시는 할아버지가 선규 형제가 함께 사는 가족의 전부다. 친아버지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찾아보긴 한다.
이 형제가 태어난 후 재혼한 아버지는 같은 아파트 단지의 다른 집에서 새엄마와 같이 살아서 선규 형제는 쭉 할머니 할아버지하고만 살아왔다.
선규와 선호는 학교가 파한 후 집으로 가지 않고 인근 복지관으로 직행한다.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방과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데 복지관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과 같이 숙제도 봐주고 나들이도 가곤 해서 복지관에 가는 일은 즐겁다. 그렇게 일곱시 무렵까지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를 기다린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런대요. 영구아파트 사는 애들은 ‘영구’라고 하고 일반 아파트 사는 애들은 ‘범생이’라고 하고. 애들이 자신들이 사는 곳이 영구임대아파트고, 자기집이 영세민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명화복지관 최윤주 복지사의 말이다.
그 수서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수서중학교로 진학한다. 그리고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은 또 대부분 세종고등학교로 진학한다. 이들 세 학교가 담하나 사이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담도 없이 교문도 같이 쓰고 있다) 지역적으로 가장 가까운 학교에 배정하는 규정상 그 ‘코스’를 피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수서중학교의 경우 99%가 인근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그래서 영구임대아파트 단지가 아닌 일반 아파트 사는 주민들 가운데 일부는 영세민 가정 아이들이 대다수인 그 학교에는 보내지 않으려고 위장 전입을 시켜서라도 다른 학교로 보내기도 한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아이들도 세종고등학교는 지겨워서 잘 안 가려고 그래요. 사실 늘 보던 담하나 옆의 학교로 길게는 12년 동안 옮겨 다녀야 하니까 애들도 지겨울 거라고 이해는 됩니다.” 제일 먼저 수서중학교가 생기고 주민들 수가 늘어나면서 그 뒤에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어쩔 수 없이 생겼다고 하지만 이렇게 세 학교가 모여있는 것은 도시계획상 좀 잘못된 것 같다고 한 교사는 지적했다.

 

“우리 동네에는 학교말고 갈데가 없어요”


최근 학교가 무너졌다는, 학교 현장에 ‘교육’을 찾아볼 수 없다는 자탄과 한숨어린 고백이 이어지고 있다. 빈번한 청소년 비행은 사회 전반적인 현상이 됐지만 특히나 빈곤지역으로 꼽히는 수서지역에서는 더욱 관심을 끄는 문제다. 태화복지관에서 수서·일원지역 청소년 약물사용에 대한 실태조사 (97)를 실시한 결과 술, 담배를 경험한 학생이 각각 50.6%, 21.1%, 본드 및 부탄가스는 1.3%로 나타났는데, 아예 학교를 중단한 청소년들은 제외된 상태의 결과여서 실제로는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우려를 던져주기도 했다.
수서중학교 김태선 학생주임은 “예전에 고등학교에서 나타났던 학생 비행문제가 이제는 중학교에서 나타나고 초등학교 고학년에 벌써 예전 중학생들 사이의 학생비행이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교육이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 내의 역할도 큰데 이 지역의 경우 편부, 편모 가정이 많고 그렇지 않으면 대개 생업에 쫓기는 학부모들이라 자녀 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고충이 크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한 교사는 “살아온 얘기를 들어보면 장편소설 몇 편을 써도 될만큼 심각한 수준의 가정환경 속에 놓여 있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다른 학교에 비해 수업비의 납입마감이 잘 지켜지지 않는데 어머니의 외도로 가정이 파탄나 등록금을 끝내 못내고 졸업한 아이가 있는가 하면 교육비를 다른 기관에서 지원받고도 그 돈마저 써버리는 부모들도 있어 전교생 중에 일년에 10명 정도는 끝내 수업비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수서중학교에는 매점이 없다. 그러다 보니 점심을 싸오지 못한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외출해서 떡볶이라도 사먹으려고 하고 교사들은 이를 잘 허락하지 않아 갈등이 빚어지곤 한다.
그나마도 사먹을 수 없어 결식을 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을 위해서 학교측은 아침에 교사식당에 빈도시락을 갖다 놓으면 밥과 반찬을 채워 점심시간 전에 가져다 먹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드러내기 꺼리는 학생들은 결국 굶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올해 수서중학교가 급식시범학교로 선정돼 신학기부터 시행이 된다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끼에 이천원 가량의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생길 것은 뻔한 일이어서 학교측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무난한 해결을 고심중이다. 
수서중학교 한 교사는 학교에 무엇하러 오느냐고 조사를 하자 38명 중에 단 2명만이 공부하러 온다고 답변해서 허탈했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학생들의 관심을 다시 학교로 돌리기 위해 관심분야에 따라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는 학생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장려하는 한편 지각, 결석을 일정 횟수 이상 하는 학생에게는 제적도 불사하겠다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구사하고 있다.
가톨릭대 정무성 교수는 “예전에 모든 국민이 못살 때 빈곤가정의 청소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가문을 일으켜 세우겠다고 하는 다짐을 하곤 했지만 지금과 같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 가난은 청소년들에게 좌절과 분노를 안겨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근 태화복지관에서는 청소년관련 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학생을 위해 "스마일학교" 라는 검정고시대비반을 운영하고 만성질환자 가족의 자녀와 소년소녀가장학생을 지원하는 다양한 사업을 벌여나가고 있다. 이러한 학교와 지역사회내 복지기관의 노력으로 수서지역 청소년들의 희망은 조금씩 출구를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인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수서를 바꿔가는 사람들

수서지역재활사업협의회의 이모 저모

 

서울 중계동 영구임대아파트 일대에서 5년여 무료 진료 사업을 벌였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의료특별위원회(위원장 허규열, 허규열내과 원장)가 진료 지역을 수서지역으로 바꾼 것은 올해 1월초의 일이다.
의사, 간호사, 작업치료사, 물리치료사, 학생 등 20여명의 자원활동자로 구성된 의료특별위원회가 중계동 내 평화종합사회복지관에 한 달에 두 차례 무료진료소를 차리고 복지관을 찾은 장애우들에게 상담과 함께 약을 받아 가도록 하는 한편 가정 방문 진료를 병행하던 무료진료 사업은 인근 주민들의 절대적인 호응을 받긴 했지만 언젠가부터 한계에 부딪혔다. 정작 의료적 접근이 필요한 장애우들은 그렇게 복지관을 찾아올 수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던 것이다. 아무리 영세 장애우라고 해서 병원측에서 노골적으로 무시한다고 해도 충분히 보건소등과 같은 다른 지역내 기관을 이용할 수 있음에도 편하다는 이유로 무료 진료소만 찾는 사람들이 고정되어 가는것도 문제였다.
진료팀만의 자족적인, 그저 단순한 무료진료 형태의 사업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아래 진료팀은 다른 형태의 장애우의료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진료지역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영구임대아파트 밀집지역인 수서동에 대한 조사를 벌여 나갔고 수서지역에서는 인근 복지관간의 협의체를 운영한 사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의료팀이 고민하고 있던 것이 보건과 복지분야를 포괄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이었기 때문에 맞춤한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수서동에서 다시 시작된 의료특별위원회 사업은 일단 가정방문진료를 기본으로 해서 진행되고 있다. 수서명화, 수서종합, 태화, 하상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여러 사업을 통해 의료적 처치가 필요한 대상자들을 알게 되면 둘째 넷째주 일요일 그 가정을 방문한 의료특별위원회의 의료진에게 일단 기초적인 진료와 상담을 받게 된다. 그 결과 정밀하고 근본적인 진료가 필요하면 인근 보건소나 강남병원, 보훈병원 등에 사회복지사와 동행해 진료를 받게 하고 장애가 장기화되어 거동이 불편하지만 잔존 기능을 개발할 가능성이 있는 장애우들에게는 작업치료사, 물리치료사가 그 사람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필요한 훈련방법을 본인이나 가족에게 가르쳐 준다. 또 매주 추후관리를 나가 그 간의 진척상황을 체크한다.
진료 후에는 각 복지관의 실무자들과 의료특별위원회 간사가 회의를 통해 그 대상자에게 물품이나 반찬서비스가 필요하다면 복지관 사업과 연계하거나 후원자를 개발하고 가정도우미같은 인력 지원이 필요하다면 행정기관에 적절한 절차를 밟아 배치될 수 있도록 한다.
그 결과 여러 놀라운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사고 후 근 30년 동안을 계속 누워만 지내면서 자신이 일어나 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왔던 조명희 할아버지는 작업치료사와 자원활동가가 간단한 동작훈련을 이끈 결과 이제 휠체어를 타고 외출도 어렵지 않게 할 정도가 됐다. 인근 태화복지관에서는 그 가정의 어려운 형편을 주위에 소개해 5백만원 상당의 후원금도 연결해 주었다. 또 계속 한쪽으로만 누워있어야 했던 한 할머니는 진료팀을 두 번 만날 때 혼자 힘으로 돌아누운 후 그제서야 벽에 걸려 있던 손녀의 사진을 볼 수 있다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할머니는 딸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옷을 갈아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해 몇 년을 그렇게 해왔지만 작업치료사로부터 한 손으로 갈아입는 방법을 배운 후부터는 혼자 옷도 갈아입고 화장실도 다녀온다.
수서 3단지에 사는 임호엽 씨도 이주일마다 진료팀을 손꼽아 기다린다. 중문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학생회장도 역임했던 건강한 청년이던 그가 88년 당하게 된 오토바이사고 후 1급 지체장애로 꼼짝없이 가만히 누워 지내야 했다. 모든 것을 어머니가 해주어야 했지만 어머니도 식당에서 일하느라 힘겹기만 했는데 진료팀을 만난 후 일어나 앉을 수 있게 된 후 이제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일어나 앉아 편지를 쓰고 예전에 공부했던 중국어 관련 책을 읽곤 한다. 그에게 인근 하상장애인복지관에서는 특수휠체어를 마련해 줬으며 주위에서 중국어 관련 아르바이트 일을 물색해 주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이렇게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같은 일들이 한사람 한사람에게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이 발표될 때마다 실무자협의회 회의장은 박수와 환호소리가 이어진다.
물론 장애 혹은 질환이 어쩔 수 없는 상태에까지 진행된 대상자를 만나면 진료팀도 무력감이 들기도 한다. 근이양증에 걸린 백종희 군의 경우 보건소와 병원에 동행해서 결핵 진단등을 받을 수 있도록 했으나 장애가 많이 진행돼 다른 의료적 지원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주일만에 꼭꼭 자신을 찾는 진료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종희 군의 유일한 낙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의료특별위원회 최인희 간사는 “고질적인 질환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진료팀을 만난 후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치료효과와 의욕을 보이는 것을 보고 그 동안 가족이나 그 누구에게서도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기본적으로 일단 거동을 못하고 집안에서만 생활하고 있던 장애우들을 일으켜 세우고 장차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필요한 서비스를 연결시키는 보건의료와 복지서비스의 포괄적 접근으로 더욱 많은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한다.
오랜 동안 별다른 변화없이 병석에 있는 가족을 돌보느라 지쳐있던 다른 가족들이 작게나마 차도를 확인하는 것은 새로운 가족관계 형성에도 도움을 주게 됨은 물론이다. 훈련을 진행할 장애 당사자가 혼자 힘으로 하기 어려운 훈련이거나 때로 의욕을 상실할 때 힘이 되어주어야 할 대상은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 때문이다.
이제 의료특별위원회는 철공소와 같은 지역내외의 자원을 활용해서 가옥 구조나 필요한 보장구를 개조, 개비하는 일에도 나설 계획이다. 
 

전국 최초의 본격적인 CBR 모델


이제까지 이러한 사업은 수서지역재활사업 실무자협의회와 이들이 속한 기관의 기관장회의를 통해 사업을 점검하고 필요한 내용을 논의하는 체계로 운영되어 왔다. 그리고 지난 12월 15일 기관장회의를 통해 수서지역재활사업협의회를 정식으로 발족시키고 초대 회장으로 태화 김현숙 관장을 선출했다.
이 CBR협의체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국립보건원 함철호 교수는 “이러한 형태의 CBR 사업은 외국에서는 빈번하게 진행되는 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전무했다”며 “수서지역에 구성된 복지관간 CBR협의체는 본격적 의미에서는 전국 최초라는 것에서 더욱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어 계속 지속되기를 기대하며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다른 지역의 경우 근거리에 있는 복지관끼리도 협의체를 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복지관 프로그램을 외부 프로젝트 수입에 의존해 진행하는 경우가 빈번해지자 근거리에 있는 복지관끼리도 알게 모르게 경쟁관계에 놓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서지역의 협의체가 1년여 기간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지점이다.
“이제 협의회는 주민 자치회에도 결합해서 지역사회 환경을 개선해 나가는데 주민들 자신이 더욱 많은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거나 진료를 받은 후 거동이 가능해진 장애우들은 공동작업장등지에 취업하여 훈련수당을 받아 진정한 재활을 이룰 수 있도록 할 생각”이라고 최인희 간사는 설명했다.
이제까지 자신의 몸조차 거동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우를 대상으로 한 사회복지기관의 복지 서비스는 일면 밑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지역의 자원이 일방적으로 소모되고 마는 형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의료부문이 본격적으로 결합된 지역사회재활사업을 통해 개개 장애우들의 보다 근본적인 삶의 질 개선을 도모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누워 있던 장애우가 일어나 앉았을 때 더욱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 한혜영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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