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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감옥에서 먹은 쌀밥이 잊혀지지 않아요"

한 장애우가 겪은 IMF와 장애우 감옥 이야기

본문



  우리 나라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로 인해 장애우들의 삶에도 짙은 그늘이 드리워 졌다는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경제위기는 장애우에게 어떤 고통을 안겨 주었을까. 여기 IMF로 인해 실직하고 감옥까지 갔다와야 했던 한 장애우가 있다. 지체 장애우 박순석(가명)씨, 그가 겪은 IMF와 장애우 감옥 경험을 통해 경제 위기가 장애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았다.

 


제화공에서 노숙자로 전락
  소아마비 장애우인 박순석(34세)씨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왜 차디찬 감옥에 갔다 와야 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 박순석 씨는IMF로 상징되는 경제 위기의 직접적인 피해자 중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경제위기가 시작되기 전 박순석 씨의 직업은 제화공이었다. 고향이 부산인 그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바로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우가 시작해 어느 덧 15년이 된 구두 기술자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제화공이란 직업은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먹고사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는 직업이었다.
  그랬는데 경제위기로 인해 일감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그는 곧바로 곤경에 처하게 된다.
  경제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세 명이 팀을 이뤄 하루 50여 켤레의 구두를 만들어냈었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일감이 줄어 작업량이 하루 서너 켤레에 불과 했다. 당연히 수입이 줄어들었고, 훨씬 나중 일이지만 그는 결정적으로 자신의 발목을 잡은, 신용카드 사용 대금을 제때 결제하지 못하는 처지로 내몰리게 된다.
  "제화공으로 일할 때 신용카드를 두 개나 가지고 있었어요. 그때 나는 구두 만드는 기술자였고 수입이 있었으니까 카드 두 개도 부족해서 몇 개 더 신청할까 생각하고 있었지 신용카드 때문에 나중에 잘못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가상의 상황이지만 만약 일감이 없어 구두 만드는 일을 그만 두게 된 그가 전업이 가능했다면, 그리고 적은 월급을 받더라도 안정된 직장 생활이 가능했다면 그는 신용카드 대금을 결제하지 못해 사기죄로 감옥에 가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다가온 경제위기는 두 가지 운 중 그 무엇 하나 가능하지 않았고 그를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았다. 그는 결국 그후 짧은 나날들 속에서 집중적으로 고난을 겪게 된다. 

  "구두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나서 친한 친구가 월급은 작지만 일하는게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해서 친구 소개로 신발 만드는 회사 개발실에 들어갔어요. 직원만 3천명이 넘는 회사였는데, 구두방에 있었을 때는 학벌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회사에 들어가니까 학벌을 따지더라구요. 내가 그 회사에서 일한 지 8개월만에 주임이라는 직책을 맡게 됐는데 다른 직원들이 나를 시기하는 거예요. 중학교 중퇴 학력이 어떻게 주임을 맡느냐, 그러길래 똑똑한 사람끼리 다 해 먹어라 그러고 회사를 나와 버렸죠."
  다시 실업자가 된 그는 제화공으로 일 할 때 알았던 선재 소개로 부산을 벗어났다. 경기도 일산에 있는 신발 밑창 만드는 회사인 우레탄 제조 업체에 숙식 제공받고 월 70만원을 받기로 하고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영세회사여서 월급이 제때 안나와 곧 그만둬야 했다.
  다시 경기도 포천에 있는 같은 업종의 공장으로 옮겼는데 경제위기가 본격화되면서 그 공장에도 얼마 있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우레탄은 원액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경제위기로 인해 환율이 1불당 천 칠백원까지 올라가다 보니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회사에서 우레탄 원액을 수입할 수 없었던 거예요. 원액이 없으니까 일을 못하게 되고, 그러면서 회사는 부도위기에 내몰리고, 그 지경이 되다 보니 직원들 거의 다 월급도 받지 못하고 그만둬야 했어요."
  그 때가 작년 4월 초였다. 나라 전체가 온통 경제위기로 술렁이던 때여서 취직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그는 별 수 없이 부산집에 내려가려고 서울역에 갔다. 그런데 역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다 우연히 근처에 있는 몇 명의 노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그와 이야기를 나눈 노숙자둘 중에는 그와 같은 고향인 부산 사람들이 섞여있었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그들과 고향 얘기를 화제로 어울리다가 노숙자들이 건네주는 소주를 마시게 됐다.
  "노숙하는 분들이 건네주는 술을 먹고 대합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어요. 눈을 떠보니까 내가 탈 열차는 떠나버렸고, 그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몇 개월 동안 집에 돈 한 푼도 안 갖다줬고, 카드 빚도 있는데 무슨 염치로 집에 얼굴을 내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생각 끝에 에라 모르겠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 서울역에 눌러 앉게 됐지요.
  그가 제화공에서 한때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IMF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사기죄로 감옥에 들어가
  그가 노숙자로 지낸 기간은 두 달여 이다. 그는 처음 서울역 주변에서 노숙했다. 그러다가 그의 말에 따르면, 서울역 노숙자들이 거의 매일 지지고 볶고 싸우고, 거기다가 텔레비전 카메라가 수시로 찾아와서 비추는 상황이 벌어지자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거처를 여의도 순복음 교회로 옮겼다.
  그가 순복음 교회로 거처를 옮긴 이유는 순복음 교회에는 3백65일 철야 예배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새벽 1시부터 시작되는 2부 예배가 자유로운 기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즉 새벽에 신도들이 기도하고 있는 옆에서 노숙자들이 잠을 자도 누구 한 명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재미있는 건 역시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는 서울에 있는 노숙자들 거의 대부분이 잠을 자는 장소로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선택해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밥은 토마스나 베들레헴의 집이라는 간판을 단 한 끼 식사에 2백원을 받는 노숙자 급식소에 가서 먹고, 잠은 교회에서 자는 고단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가 다행히 끼니를 거르지 않고 잠 잘 곳은 확보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노숙 생활이 무척 힘들었을 것이라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 아무리 염치가 없기 때문이라지만 부산집에 내려가는 것이 노숙 생활보다는 훨씬 나았을텐데 그는 왜 끝내 집에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그는 자신의 장애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내가 집에 있으면 엄마는 나만 보년 한숨을 푹푹 쉬는 거예요. 몸도 불편한데다 장가도 가지 못하고 거기다 안정된 직장도 없고, 때문에 차라리 내가 엄마 눈을 벗어나야지 엄마가 편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집에 가지않고 노숙자로 지냈는데 그러면서도 엄마한테 전화는 했죠. 친구집에 잘 있다고 그러면 엄마는 못미더운지 어떤 친구인지 바꿔보라고 그러거든요. 그러면 노숙하면서 알게된 친구를 바꿔줬어요. 그 친구가 내가 미리 일러준 말대로 어머니 걱정하지 마시라구, 지금 경제가 어려워 밥만 먹고살고 있는데 경제가 풀리면 괜찮을 겁니다. 라고 말하면 그때서야 엄마는 안심하곤 했어요."
  그는 이렇게 꼬박 두 달여를 노숙자로 지낸후 작년 6월초 노량진에 있는 한 교회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어느날 그 교회에서 서울역에 노숙자 전도를 나왔어요. 그때 나와 동료들이 사정 얘기를 했죠. 교회까지 가려해도 차비가 없다고 그러니까 교회측에서 한 사람 당 5천원씩 주더라구요. 그러면서 교회에 오면 또 돈을 준다고 그러길래 그때부터 일요일에는 교회에 찾아갔는데 갈 때마다 1만원씩 주더라구요. 그게 계기가 돼 그 교회에 전도부 숙소가 있었는데 아예 거기서 먹고 자고 하게 됐어요."
  교회에서 얼마동안 지내다가 그는 삼각지 성당이 노숙자들을 잘 보살펴준다는 소문을 듣고 거처를 삼각지 성당으로 옮기게 됐다. 소문대로 삼각지 성당에서는 노숙자들에게 숙식 제공은 물론 주민등록증도 만들어줬다. 그는 성당 측이 배려로 장애우 수첩도 다시 발급 받게 됐는데, 중요한 건 신분증이 생기면서 그도 공공근로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공공근로를 신청했다. 이제 어느 정도 고생이 끝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다른 어려운 상황이 그에게 닥쳐오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신용카드 빚이었다. 그가 구두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나서 몇 군데 직장을 전전하고 결국 노숙자로 전략하는 동안 카드 빚이 이자에 이자가 붙어서 5백여만원으로 늘어나 있었다. 거기다가 그와 연락이 되지 않자 카드회사는 그와 연락이 되지 않자 카드회사는 그를 사기죄로 고발해 놓은 상태였다. 즉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기소중지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1차 공공근로대상자로 선발돼서 올해 1월 18일 동사무소로 갔어요. 너무 놓았지요. 그런데 나를 기다린 건 공공근로가 아니라 경찰이었어요. 거기서 바로 긴급 체포돼서 노량진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처음에는 막막했어요. 누구한테 얘기할 수도 없고, 집에 연락도 못하고, 그랬는데 시간이 흐르니까 이 불경기에 어디가서 5백만원을 벌겠냐 싶더라구요.
  내가 그 생각을 한 것 먼저 잡혀와 있던 사람이 감옥에 가면 하루 2만원씩 빚울 갚을 수 있다고 알려줬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내 생각에 1년만 감옥에서 살면 카드 빚 5백만원을 다 갚을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는 경찰서에 8일간 잡혀 있다가 1월 26일 구속영장이 발부돼서 바로 서울구치소로 넘겨졌다. 감옥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누구나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간다. 이런 원칙이 장애우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면 감옥에서 비장애우와 장애우의 차이는 뭘까, 교정당국이 장애우들을 배려하는게 있다면 그건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들이 가는 구치소에서는 장애우 감옥을 따로 수감돼 있는 장애우 감옥에 대한 얘기는 그 동안 알려진게 없다. 이제 박순석 씨의 경험을 통해 장애우 감옥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4천6백원을 훔쳐 감옥에 간 장애우
  "서울 구치소 미결수 감옥은 3층으로 돼있는데 그 중 1층이 장애우 감옥이었어요. 장애우들은 모두 1층으로 보내는 거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층에 있는 여섯 개 방이 장애우 감옥이었고 한 방에 6명씩 모두 36명 정도의 장애우들이 수감돼 있었어요. 그 중에서 내가 수감된 장애우 감옥 1층 열 번째 방이었어요. 저녁 11시에 방에 들어갔는데 첫날은 화장실 옆에서 자라고 해서 자고 다음 날 아침 신고식을 했어요. 먼저 와 있던 장애우들에게 내 이름을 대고 내가 지은 죄를 설명하고 가족 사항은 어떻게 되며 취미와 특기가 뭔지를 얘기하는 거죠. 염려했던 구타는 전혀 없었어요."
  그가 수감된 감옥에는 그를 포함해 7명의 장애우가 있었다. 그러면 도대체 장애우들은 무슨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는걸까? "나를 포함해 소아마비 장애우가 세 사람, 관절 장애우가 한 사람, 심한 화상을 입은 장애우가 한사람, 전신마비 장애우가 한 사람, 편 마비 우가 한사람 이렇게 일곱 명의 장애우가 수감돼 있었어요. 나이는 제일 나이 많이 먹은 장애우가 59살이었고, 막내가 27살 이었어요. 그들 중 먼저 59살인 소아마비 아저씨는 음주 상태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사람을 다치게 해서 감옥에 들어왔고, 46살 먹은 소아마비 아저씨는 절도미수에다 전과가 있어서 8월 징역형을 선고받은 상태였지요.
  43살인 전신마비 아저씨는 상습보험 사기죄로 들어와 있었고, 관절장애를 가진 아저씨는 감금 폭행을 교사한 죄로 들어와 있었어요. 39살인 화장 장애우는 전과가 있는 상태에서 친구가 훔친 수표를 자기 이름으로 바꾸다가 장물 알선죄로 감옥에 잡혀와 있었어요."
  그를 제외한 6명의 장애우 중에서 그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장애우는 27살 막내, 편 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는 김인수(가명) 씨이다. 김인수 씨에 대한 얘기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다.
  김인수 씨는 지하철에서 껌 장사를 하다가 단속반에 걸려서 벌금을 내게 되자 홧김에 술을 먹고 주차장에 들어가서 기물을 파손하고 돈을 훔쳐서 절도죄로 들어 왔는데 김인수 씨가 훔친 돈은 고작 4천6백원이 전부였다. 그는 김인수 씨의 반성문을 대신 써줘서 자연스럽게 김인수 씨의 곡절 많은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 친구를 낳자마자 다른 남자한테 시집가고 아버지도 새 장가를 들어 외가 집에서 자라야 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외할아버지가 술만 먹으면 때려서 그 친구가 11살이 됐을 때 외할머니가 아이 없는 집에 양자로 보냈는데, 새엄마가 될 여자가 그 친구를 데리고 서울역으로 가서 표를 끊다가 그 친구를 잃어버린 거예요. 그 친구가 울고 있으니까 경찰이 고아원인 소년의집으로 보내서 거기서 자라다가 14살이 됐을 때 친구들과 집단으로 소년의집에서 도망쳤대요.
  그때부터 껌팔이 구두닦이 등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면서 남의 물건도 훔쳐 소년원에 왔다갔다 했는데, 그 친구 나이 22살 때 조직을 벗어나겠다고 했다가 같은 패거리들에게 심하게 맞아서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었데요. 마지막으로 3년 전에 광주교도소에서 나와서 겨우 어학테이프 만드는 공장에 취직이 돼 들어갔는데 공장 지하실에서 자던 어느 날 갑자기 예전에 심하게 맞은 후유증으로 전신마비가 온거예요. 119 구급대에 실려가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아 겨우 목숨은 건졌는데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보름만에 병원에서 도망쳤고, 휠체어 타고 무작정 서울역으로 가 오갈데 없이 지내던 중 지나가던 수녀가 꽃동네에 가자고 해서 꽃동네에 들어가서 2년을 지냈대요. 거기서 치료받고 편마비 장애를 갖게 되긴 했지만 걸어다닐 수 있게 되니까 꽃동네를 나왔는데 막상 할 게 없으니까 껌팔이를 하다가 단속에 걸렸고 그러자 홧김에 술을 먹고 사고를 친 거죠. 그 친구는 전과가 5범이라 징역 1년6개월을 구형 받았어요. 참 불쌍한 친구였어요."

 


들어간지 78일만에 감옥에서 나와
  그의 말에 따르면 구치소의 장애우 수감자들에 대한 배려는 우선 일주일에 한 번 씩 있는 목욕시간 때 장애우들의 목욕시간을 맨 뒤로 배정해 장애우들이 여우 있게 목욕을 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무실에 가는 것도 비장애우 수감자들은 긴급상황이 아니면 다음날 보내주거나 약만 주는데 장애우들은 오전에 의무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 오후에 의무실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읽고 싶은 책도 신청하면 바로 갖다준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 밖에도 방이 조금 지저분해도 눈 감아 주고 한 사람 정도는 하루 종일 누워 있어도 모른체 해준다는 것이 구치소측의 장애우 수감자들에 대한 배려이다.
  그는 이런 장애우들에 대한 배려가 있는 서울구치소에 수감 돼 있으면서 두 번의 재판을 받았고 최종적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그리고 사회봉사 72시간 형을 선고받고 4월 2일 석방됐다. 정확히 감옥에 들어간지 78일 만에 다시 사회로 나온 것이다.
  "감옥에 있으면서 재미있었던 일은 그 보기 힘든 쌀밥을 두 번이나 먹을 수 있었다는 거예요. 구정 때 쌀밥과 떡국에다 닭두루치기가 나왔어요. 사회 생활하면서 먹어 보지 못한 하얀 쌀밥을 감옥에서 먹었다는 게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는 구치소를 나오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고향인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으면서 그는 무엇보다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은 것 같아 내내 우울했다.
  그러면 경제의기로 인해 실직해야 했고 노숙자로 전락했으며 감옥까지 갔다온 박순석씨. 그의 고생은 이제 끝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감옥에서 막 나왔을 때 "부산에 내려가도 신발 업종이 다 죽었기 때문에 아마 직장 갖기가 힘들 거예요. 다시 서울로 올라 와야죠. 서울에서 예전처럼 노숙을 하게 되더라도 버텨볼 작정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그는 얼마 후 장애우문제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장애우 실직자 모임터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실직상태였고 하룻밤 잠잘 곳이 없어 애태우고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경제 위기는 잔인하게도 장애우 박순석 씨에게 긴 터널의 끝을 아직 보여주지 않고 있다.

 

 

글/ 이태곤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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