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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수용소보다 참혹한 인권탄압 현장, "수심원"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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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노역 뿐만 아니라 수갑을 채운 채 독방에 몇 달씩 감금하고 형편없는 식사와 정수도 되지 않은 바닷물을 먹도록 했던 곳, 누구도 관심 기울이지 않은 사이에 수십 명의 생명이 무참히 죽어 나갔던 그곳, 유부도 장항수심원의 인권탄압 실상이 적지 않은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방송취재현장에 직접 동행해 그곳에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던 원생 9명의 탈출을 도왔던 정신과 전문의 김병후 박사가 사건 이후의 상황과 함께 정신보건법의 실상을 고발한다. 

 

90년 방송 이후 오히려 무참한 보복 자행되기도
 

▲참혹한인권탄압의현장-수심원

  유부도에 위치한 수심원은 90년도 초반 이미 두 차례 방송매체의 인권 고발 프로그램에 의해 고발을 받은 곳이다. 수심원은 정신요양원이다.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은 사회복지시설이다.

 

충남 서천군이 지도감독을 해야할 의무를 지닌다. 1995년 12월 통과된 정신보건법에서 향후 사회복귀시설이나 정신요양병원으로 7년 안에 전환시켜야 하는 시설로 규정되고 있다.

 

법이 통과되어 정신병원 뿐 아니라 정신요양원도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SBS의 요청으로 그곳에서 탈출한 환자와 면담한 후 놀라웠던 것은 방송에 의해 지탄받은 요양원의 인권말살행위는 없어지지 않고 지금도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더 심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아마도 정신요양원이 정신질환 환자를 다루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방송이 나간 이후 해당 정신요양원에 대한 폐쇄 결정은 어렵게 내려졌지만 수심원은 아직도 환자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있다. 방송 이후 상황을 알아보기 위한 SBS의 노력은 서천군의 비협조로 이뤄지지 않았다.


  현직 국회의원이 국정검사권을 발동시키겠다고 해도 원장은 막무가내였다. 마치 정신요양원이 자신이 지배하는 왕국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듯 했다. 직원은 환자들의 최소한의 인권도 무시하였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도 해결해주지 않을 뿐더러 일반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성폭행이 자행되고 있었다. 원장과 이사장 개인을 위한 작업에 몸이 아파 참여하지 않았다고 2명에게 수갑을 채우고 10일 동안 화장실까지 같이 가게 만들었다.


  탈출한 환자는 90년도 방송 취재 당시 사망자명단을 제공하고 요양원의 문제를 알려 주었다는 이유로 원장에게 매를 맞고 독방에 가두어졌다. 방사선과에서 조사해 보니 오래된 골절이 여러 군데 있었다. 여자 환자들은 남자 환자들이 더 불쌍하다고 했다. 원장이 기분 나쁜 날은 술 먹고 들어와서는 남자들을 줄 세워 놓고 이유 없이 구타했다고 한다. 방송에 보도된 것 말고도 원장과 직원들은 여자 환자들을 대상으로 성적인 접촉을 수 차례 자행하였다. 구타 후 성폭행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필자가 정신요양원을 처음 방문한 것이 1986년도부터였다. 수용된 사람에게서 나는 특이한 냄새에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당시는 견디기 어려웠다. 쇠고랑을 찬 환자를 처음 본 것도 그때였다. 수용된 알콜 중독환자들에게 작업을 시키면서 술을 주는 것에 대해 항의를 하였지만 요양원 직원들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또 다른 요양원에서는 밤이 되면 당직을 서는 요양원 직원이 여자 환자들을 성폭행했다는 사실을 촉탁의가 끝나는 날 들을 수 있었다.


또 어떤 환자는 30세 때 경찰로 일하다가 주사가 심해 요양원 정신 기도원에 수용되었다가 1년만에 퇴원하였다. 당일 날 다시 술을 먹고 가족에게 행패를 부려 그 날로 기도원에 재수용되었다. 5년 후 출소하여 왜 기도원에 넣었느냐고 항의하여 다시 수용되었고 그 이후 26년을 요양원에서 살고 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주사가 있는 사람이 2차례 주사를 한 것이 30년을 요양원에서 살게 되는 이유가 되는 셈이다.


  가장 안타까운 환자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조울증 환자였다. 형이 결혼해 형수가 들어오면서 그 환자는 집안에서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는 이미 요양원에서 17년을 살아왔다. 요양원의 병동 내부의 환자 총책임을 맡았던 그는 집단 회의의 사회를 사회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히 꾸려 나갔다. 요양원보다는 차라리 기간이 정해져 있는 형무소가 더 좋다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던 정신과 의사로서의 무력감이 괴로웠다.


  정신보건법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자연히 정신요양원과 정신병원의 인권상황과 환자 치료기능에 대한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정신보건사업이라는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정신병원에서의 장기수용의 문제점 때문에 가능하면 환자를 정신병원의 울타리를 벗어나 지역에서 살게끔 한다. 병원이라는 시설은 환자를 치료시켜 독립된 개체로 살 수 있게끔 도와주는 곳이지 결코 시설을 위해 환자의 자유를 박탈해야 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곳은 자신이 죄를 지어 복역하는 형무소 이외에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1950년대 이후 선진국들은 정신병상 수를 줄이고 지역에서 관리하는 체계를 개발해왔다.


  만성환자를 주로 관리하는 정신병원에는 나이가 많아 더 이상 사회에 복귀하기 어려운 정신병 환자나 노인성 치매환자, 알콜이나 약물중독 환자들만이 남고 대부분의 환자는 퇴원한다. 그 결과로 정신병상의 75%가 폐쇄되고 대부분의 정신병원은 문을 닫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탈수용화 혹은 탈원화라고 한다. 정신병 환자들은 일반 병원이나 30병상 정도의 소규모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정신병원이 거대화되고 정신병상이 많았던 선진국에서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보다 병상 수가 적은 말레이지아나 필리핀 같은 중·후진국에서도 일어났던 현상이다. 

 

기도원이 요양원이 되고, 요양원이 짓는 부속 정신병원의 고리들

 

  그런데 우리는 21세기가 가까운 80년대부터 정신병원을 짓고 그것도 모자라 정신요양원을 지어서 수많은 환자들의 자유를 빼앗는다. 환자들에게 족쇄를 채워 물의를 빚는 기도원은 얼마 후 요양원이 되고 환자가 가장 많이 죽어 나갔다는 요양원은 곧 부속 정신병원을 짓는다. 정신병원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거대화되고 거대 정신병원은 그들의 막강한 로비력으로 정신보건정책을 좌지우지한다. 이미 거대화된 정신병원들은 위탁이란 명목으로 지방정부의 자금으로 정신병원을 짓고 위탁 시도립병원들은 지방정신보건을 주도한다. 말이 주도한다는 것이지 전 세계적인 흐름을 타고 있는 지역정신보건사업의 일반화를 막고 있다.


  거대 정신병원의 병상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정신보건사업을 하기 위해 필수적인 환자의 탈원화를 막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정신질환은 위험하기 때문에 사회에 풀어두면 안된다", "아무도 데려가지 않은 정신질환자를 우리만이 돌볼 수 있다", "정신질환이란 낫지 않는 병이다" 그리고 "우리만이 그들을 보살피고 있다"고. 이러한 정신병원 관계자들의 말을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지방 공무원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민들은 "정신질환이란 위험한 병이기에 운전면허도 박탈하고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수심원으로 돌아가 보자. 독방에 가두었던 한 환자는 억울한 나머지 우리에게 자신이 당했던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았지만 곧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전에 방송 고발프로그램에 방영된 이후 원생들에게 돌아온 것은 인권상황의 호전이 아니라 끔찍한 보복이었기 때문이다. 그 환자는 시간이 지나 수심원이 당장 폐쇄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점차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국회의원이 오고 정신과 전문의가 동행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힘을 부리는 자는 원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떤 환자는 우리들이 떠난 상황을 예측하면 견딜 수 없는 공포 때문에 울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우선 원장에게 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높고 성폭행 당할 가능성이 높은 환자들과 입원할 필요가 없는 환자들 아홉 명을 선정했다. 물론 나머지 환자들 중에도 입원할 필요가 환자들은 많았다. 120명의 환자들 중 40명 이상은 퇴원해도 무방한 환자들이었다. 아홉 명의 환자들은 배를 타고 군산으로 향하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부분 7-8년을 수심원에서 수용되었던 환자들이었다. 동행했던 이성재 의원과 이런 말을 했다. "요양원 사람들처럼 돈버는 일은 아니지만 마음이 너무 뿌듯하다고. 이런 맛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라고. 

 

고발시설에 입소 희망전화가 쇄도하는 현실

 

  그들은 아이들처럼 기뻐하였다. 너무 들떠 사고가 날까 걱정될 정도였다. 환자들 중 몇 사람은 집에 연락하고 싶다고 했지만 병원에 도착한 후 자유롭게 연락을 취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통제를 하였다. 모든 환자들의 협조로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병원 식당 아주머니는 이렇게 식사를 잘하는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예기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다. 환자들이 집에 전화를 한 후 몇몇 가족들이 이성재 의원 사무실, 방송국 그리고 필자에게 항의전화를 해오기 시작하였다. "당신이 뭔데 그 애를 마음대로 데려왔느냐. 우리는 이제 모두 죽었다", "가족들의 고통을 알기나 하는가" 등이었다. 환자 가족의 고통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아프다 못해 야속했다. 가족의 고통도 이해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몇 년씩 요양원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1983년 족쇄를 채운 기도원이 고발프로그램에 방영된 적이 있었다. 정신과학회에서 상을 받았던 담당PD는 시상식장에서 방송 후 자기 아이를 그곳에 수용시키고 싶다는 전화가 수없이 왔다는 말을 하여 허탈해 했던 적이 기억났다.


  결국 수심원에서 나온 환자들은 국립정신병원을 경유하여 대부분 퇴원조치 되었고 보건복지부에서 국립정신병원에 의뢰하여 환자를 재분류하여 나머지 환자들 중 22명도 귀가조치를 시켰다고 한다. TV에 방영된 후 길을 가다가 프로를 보았던 사람들은 훌륭한 일을 하였다고 칭찬을 한다. 몇몇 주위 분들은 환자들에게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오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은 북한보다 못한 곳이 우리에게도 있다고 흥분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프로를 재방영하여 안일에 빠진 우리 청소년들에게 우리 사회의 엄혹한 현실을 알려 주어야 한다고도 하였다.


  며칠 후 퇴원한 환자 가족이 같이 식사를 하자고 전화가 왔다. 우리에게 항의를 했던 바로 그 보호자였다. 방송을 보고 너무 놀랐고 그렇게 고생하는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연락할 때마다 요양원은 그 환자의 상태를 과장하여 말하였다고 했다. 좋은 분위기였지만 입원시킨 이유를 환자가 물어 보호자가 답하니 환자가 "그래도 어떻게 나를 그런 곳에 10년을 나둘 수가 있느냐"며 울던 모습이 가슴 아프다. 어떤 여자 환자는 22세의 꽃다운 나이에 수용되어 39세가 되었다. 원장의 성적 학대를 받고 살아야 했다. 그 환자는 약도 주지 않을 만큼 정상이었다.


  과연 제2, 제3의수심원이 없을까? 수심원과 똑같은 정신병원이 없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신요양원과 정신병원에 장기 수용되어 있는 환자의 40%는 그렇게 수용될 필요가 없는 환자들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작성자김병후 ( 김병후 정신과의원 원장)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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