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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3] 공권력에 무너져 버린 한 젊은이의 꿈

의경에 폭행당한 후유증으로 폐허가 된 삶 사는 뇌성마비장애우 이동원씨

본문

[초점]

 

공권력에 무너져 버린 한 젊은이의 꿈

 

의경에 폭행당한 후유증으로 폐허가 된 삶 사는 뇌성마비장애우 이동원씨

 

 

  의경에게 폭행당하고 병원에 입원중인 뇌성마비 장애우 이동원씨의 재판이 지난 11월7일 있었다.(함께걸음 3월호 참조) 가해자 김준태씨(당시 의경)에게 실형 6개월이 선고되는 것으로 재판은 끝났다. 함께걸음에 이동원씨 관련 기사가 나간 이후 재판이 있기까지의 사연을 이 씨의 누나인 이현주씨가 함께걸음에 보내왔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장애우에 대한 편견과 이로 인해 고통받아야 했던 한 장애우 가족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자립과 장애우복지에 대한 꿈을 키워 가던 동생 동원이

 

▲동원씨

   제겐 장애우의 불우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동생 동원이가 있다. 8세가 되어도 제대로 걷지도, 엄마 소리도 못했지만 어머니의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인지 얼마 안가 걷고, 말도 하기 시작했다. 마치 기적처럼.
  9세에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한 동원이는 성격이 밝고 명랑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고, 천재소리를 들으며 중학교까지 마친 후 독학으로 방송대 농학과에 입학했다. 그렇게 동원이는 배움의 의지가 강한 아이였다.
  성인이 되자 동원이는 자신의 나이가 있으니 취직을 한다며 이력서를 들고 장애인고용촉진공단과 여러 회사를 열심히 찾아 다녔다. 그렇지만 장애우가 일할 자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94년 3월, 동원이는 초등학교 시절 은사님을 찾아갔었다. 인사차 간 것인데 은사님은 용돈에 쓰라며 오만원이 든 봉투를 주셨다고 한다. 그 돈을 받아들고 동원이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나도 남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그 해 4월부터 은사님이 주신 오만원으로 물건을 사서 행상을 시작했다.
  아침에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고, 가방을 슬그머니 뒤로 감추는 동원이가 무엇을 하는지 식구들은 며칠 동안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외숙모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내용인즉 동원이가 청량리역에서 무슨 물건인지 무겁게 어깨에 메고 가다 떨어뜨려 줍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원이한테 조심스럽게 이유를 묻자 동원이는 대답하길 자기 자신도 행상을 할 용기가 나지 않지만 자기보다 더 심한 장애우, 고아, 버려진 노인들처럼 자신이 도와야 할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하는 것이니까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이 돈은 내 돈이 아니고 사회 것이다.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엄마 마음 아플까봐 말하지 못했는데 이제 가족들이 알게 됐더라도 자신이 하는 것을 막지 말아달라. 돈을 모아 복지관을 세울 거다, 그렇게 말했다.
  그런 동원이를 보며 한편 마음도 아팠지만 식구들은 동원이를 만류할 수 없었다. 이렇게 94년 4월부터 96년 1월까지 동원이는 주로 서울 강남지역에서 모금활동을 했고, 유니세프, 구세군, 불우이웃돕기 등에 기금을 내면서 헌혈이나 복지에 관한 국민제안을 몇 해 계속 행정쇄신위원회에 보내기도 했다. 경기도 대표로 체육대회에 출전하고, 컴퓨터 부분 경진대회 출전하기도 하는 와중에도 2천만원 이상을 행상으로 모아갔다. 밤에는 공부를 하는 틈틈이 외국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무료로 볼 수 있도록 컴퓨터 선교회에 기증하기도 했다. 여동생이 고등학교 3년간의 장학금도 오빠인 동원이의 뜻을 이루는데 보태라며 주기도 했다.

 

 

의경에게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고

 

  96년 1월11일, 동원이가 오후에 집을 나섰는데 그 날 어머니께서 종일 안절부절못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 조짐인 듯 말이다. 결국 그 날 동원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소화기, 소화기"라고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동생 동원이에게 들은 것은 독립문역에서 전철 내에서 물건을 팔다 의경 김준태(경복궁 지하철 수사대 소속)에게 적발되었는데, 위법 처리하러 데려가는 줄 알고 따라간 곳은 홍제역 역무원 침실이었다고 했다.
  동원이가 침실에 들어선 순간 김준태는 문을 잠그며 "너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며 발로 배 부위를 한 대 걷어차, 동원이가 맞고 허리를 구부린 순간 김준태는 그곳에 비치된 소화기로 동원이의 머리를 내리쳐 쓰러뜨렸다.
  "내가 사회에서 깡패짓 하다 왔는데 너 잘 만났다. 내가 태권도 3단 유도 3단 합기도 3단 합해서 9단이다. 너 같은 앵벌이들은 사라져야 돼"라며 김준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동원이를 위협했다. 계속해서 김준태는 소화기통의 밑면으로 가슴을 때려 찍고, 손으로 얼굴을 때리고 발길질을 했다. 동원이가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세워 때려눕히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등 김준태는 구두발로 짓이기기도 했고, 쓰러져 있는 동원이의 배에 의경 김준태는 앉아서 다리를 얹고 머리채를 뒤로 잡아채고는 "죽을래 살래"하며 "살려 주세요. 나 죽는 것은 괜찮지만 많은 사람들을 구해야 해요."라고 동원이가 두 손으로 빌며 사정한 후에야 씻으라며 욕실로 데려갔고, 몇 가지 질문(주소 나이 등)을 한 후 돈 3천원을 주며 사라졌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도 동원이는 대치동 신한국당 정성철 의원 사무실을 피를 흘리며 찾아가 김정태 사무장에게 상황을 이야기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가족들은 김준태의 소속근무지, 경복궁 지하철 수사대에 전화한 후 112신고도 하였고, 동원이에게 응급처치를 했다.
  다음날 의경 김준태와 소속 소장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들이 오기 1시간 전, 어머니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폭행이므로 증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녹음기를 급히 사오라고 했다. 소장 김택일은 진급시험을 운운하며 부하로 인해 진급이 안되면 곤란하다고 부하를 한 번만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이 진정으로 용서를 빌면, 우리가 마음을 넓게 먹어야 동원이도 빨리 낫겠지 하는 마음에 증거가 있어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치료비를 내면 그냥 용서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치료비가 많이 나오자 사고 20여일 후, 찾아온 김준태의 삼촌은 아무 증거가 없겠거니 생각하고, 언제 때렸냐며 오히려 행패를 부렸다. 또 소속 소장 김택일도 난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녹음이 돼있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우리 가족은 96년 2월1일 고소장을 서부지청에 냈다. 그러나 담당검사는 4월8일부로 약식기소 처리해 벌금 150만원으로 끝내 버렸다. 이에 우리는 4월18일 뇌성마비복지회 관계자분과 함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님을 찾아갔다. 4월18일까지 불구속 기소로만 알고 있던 우리에게 사건번호를 알아오라 해서 법원에 갔더니 그런 서류는 없다는 것이었다. 서부지청 민원실에 가보니 불구속 기소중이라 해놓고 실제로는 약식기소로 끝냈던 것이다.
  우리 가족은 곧장 검사실에 올라갔다. 사건번호를 대고 왜 왔는지 자초지종을 말하려는 순간 검사는 말없이 손으로 까닥까닥 하며 나가라고 신호를 했다. 그런 검사에게 어머니와 내가 "저희 사건을 너무 가볍게 보신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더니 "이런 Ⅹ같은 Ⅹ들 나가! 니네가 판검사 다 해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어머니께서 "그럼 검사님 친척 중에 누가 소화기로 맞고 죽을 지경이 되었다면 벌금 150만원으로 끝내겠습니까"라고 했더니 그 검사는 옮겨 적기도 민망하게 "이런 ⅩⅩⅩ들 안 나가, 나가란 말이다"라며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너는 네 어미도 없냐며 죽기 살기로 대항하고 싶었지만 그 수모를 겪고 복받치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와야만 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정식 재판을 청하는 진정서를 각계에서 받아냈다. 그 뜻이 하늘에 닿았는지 이 사건은 정식 재판에 회부됐다. 그러나 96년 10월 첫 공판이 있던 날, 김준태와 일행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들이 변론기일을 달라며 연기 신청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집안은 조금씩 기울어 갔다. 아파서 몸부림치는 동원이, 이 일로 장사도 할 수 없는 식구들은 동원이 입원비와 치료비만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빚과 이자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무척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97년 3월 다시 재판이 열렸다. 가해자 김준태와 선임한 변호사가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 진술을 했고 이어 피해자 동원이가 진술을 한 후, 6월17일 의경 김준태는 실형 1년으로 법정 구속되었다.
  김준태가 동원이에게 무자비하게 폭행 아닌 살인행위를 한 것에 비하면 1년 실형도 약한 것이지만 공판검사의 2백만원 구형을 뒤엎고 실형을 내려준 것만으로도 이 땅에는 정의가 살아있다고 믿게 됐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김준태가 공소사실 부인과 원심이 무겁다는 이유로 6월18일 다시 항소하고 나섰다.

 

 

사건 후유증으로 폐허같은 절망에 빠지고

 

  검경이 한 형제와 다름없는 현실에서, 피고는 죄가 있든 없든 변호사를 선임해서 죄를 감해 달라고 하는데, 원고는 검사가 대변인이라며 변호사도 선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97년 11월7일 재판에서 피고측은 지금까지의 동원이의 건강기록은 모두 허위이고, 뇌성마비 정신병자라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했고, 피고에게는 실형 6개월이라는 재판결과가 내려졌다.
  판결 내용인즉, 폭행사실을 인정하나 피고가 대학생인 점, 복무 중 일어난 일인 점, 공탁금 5백만원(96년 2월1일)과 1천만원(97년 8월25일)을 낸 것으로 합의를 보려고 한 점으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6개월로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의 판결은 2년 동안 지켜온 결과로 보기엔 너무도 부당한 결과다. 차라리 처음부터 검사가 약식 벌금 150만원으로 끝내지 않고 6개월 실형이었다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동원이와 우리 가족이 지금과 같이 고생은 안했을 것이다.
  이런 저런 거짓말을 받아내는 동안 우리 가족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진정서와 탄원서를 내는 일과 변호사 사무실을 기웃대고 숱하게 찾아다니는 일 등으로 채워야 했다. 병원 문을 드나들며 흘리는 눈물, 아픔과 분노로 얼룩진 마음과 분명 달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지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실, 동원이는 그때 그 충격과 후유증으로 이젠 정신과 치료를 언제까지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가운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폐허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장애우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인격이 있고 인권이 있다는 것, 힘있고 잘난 사람들이 한껏 더 보살필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면 이 세상은 그렇게 험난하지 않을 것이며 밝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구지 않고 해본다.
  동생 이 동원의 쾌유를 함께걸음의 모든 분들이 빌어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우리 가족의 사연을 띄어 봤다. 함께 사는 사회, 복지 사회 정말 살기 좋은 사회를 꿈꾸며 이만 줄인다.

 

글/ 이현주

작성자이현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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