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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르포] 빈민장애우 밀집지역 뚝방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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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 2동 빈민 밀집지역>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기세 좋게 퍼붓던 소나기는 오전 10시가 자나자 실비로 변해 가는 입자만을 흩뿌리고 있었다.
 도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더욱이 핍팍한 진흙길 위에 서서 겨울을 재촉하는 비를 맞는다는 건 그 자체가 쓸쓸함이었다. 겨울과 가난한 사람들이 동시에 연상시켜 주는 이미지는 웬지모를 답답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뚝방동네, 혹은 난민촌이라고 불리우는 도봉 2동 빈민밀집지역은 서울 외곽지역, 의정부로 넘어가는 길목 오른편에 중랑천을 옆에 끼고 낮으막히 숨어 있었다.

 여기서 숨어있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 빈민지역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함이다.
 도봉 2동 빈민지역은 흔히 사람들이 연상하는 깎아지른 산동네가 아니다. 평지에서도 가장 낮은 지표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주민들은 해마다 장마철이면 물난리를 겪고 있을 정도이다.

 의정부행 전철을 타고 도봉역에 내리면 곧바로 오른쪽으로 허름한 상가들이 늘어서 있는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전철역에서 도봉 2동 빈민지역을 찾아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국군창동병원과 고려페인트 가게 사이로 난 골목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길지않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큰 대로변이 나오고 그 대로를 건너면 곧바로 번듯한 2층 양옥들과 맞닥뜨린다. 그 골목들 틈새로난 아무 골목으로나 기웃거려보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집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 한 명이 우산을 펼쳐들고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 서 있는 번듯한 집들은 한눈에도 이 빈민 지역을 더욱 더 초라하게 만든다. 그리고 군데군데 서 있는 파란 통으로 된 공동화장실은 이 지역을 대표하고 있는 상징물로서 열악한 주거환경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60년대 초부터 형성돼>

 이 지역에 빈민집단주거지가 형성된 건 지난 60년대부터이다. 애초 논이었던 곳에 역시 판자촌이었던 남산 도봉 영세민들이 화재가 나자 집단 이주해와 정착하면서 시작된 동네는 그 후 여기저기서 철거민들이 밀려오고 팔십년대 중반에는 상계동 철거민들까지 집단 이주해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중랑천 뚝을 끼고 팔백미터가량 이어진 이 동네는 땅의 93.5%가 시유지이고 나머지 6.5%만이 사유지인데 건물은 대부분이 무허가 집들로서 가옥 형태는 60년대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현재 이 동네에는 가옥주 1천2백가구, 세입자2천7백여 가구, 도합 약 3천6백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가구당 평균 주거공간은 4평이다. 부엌이 딸린 방 하나의 전세가격은 5백만원 이하로 거래되고 있다.
 주인들 대다수는 여느 빈민지역과 마찬가지로 막노동, 파출부, 노점상 등 하루벌이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가구당 한달 평균 수입은 30만원에서 50만원 사이이다. 개중에는 아파트 경비원, 회사원 등 비교적 나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도 있지만 주민들 대다수는 저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최하의 하층 노동자들 일색이다.

<상대적인 빈곤감에 시달려>

 이들 주민들이 벌어들이는 수입만을 놓고 본다면 수입에 비해 주민들 생활 수준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빈민들이라고 할 수 없다. 세탁기가 없는 집이 없고 가스렌지도 거의 다 설치해 놓고 살고 있다. 심지어는 정수기까지 있는 집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당황함은 어쩔 수 없이 가난을 보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즉 어느새 가난의 개념은 절대적인 굶주림이 아니라 상대적인 빈곤감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인 빈곤이 주는 공허감은 주민들 대다수로 하여금 4백∼5백만원의 빚더미에 오르면서까지 살림을 장만하도록 충동질하고 있다. 그리고 부부가 같이 벌어야 겨우 살 수 있는 구조하에서 주민들은 시간을 절약하고 힘든 가사노동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가전제품은 반드시 필요한 필수품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사치(?)가 정당하다고 한 목소리로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민들 전체가 갖출 것을 모두 다 갖춰놓고 살며 어느 정도의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지역에 여전히 절대적인 가난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빈곤 가구의 절대 다수는 장애우가 세대주이거나 아니면 장애우가 식구 중에 포함되어 있는 가정들로 국한되어져 있다.

<절대적인 가난에 시달리는 장애우>

 빈민지역에 대한 한 조사는 "빈민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반 이상은 장애우, 정신질환자,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로 구성되어져 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굳이 통계가 아니더라도 빈민지역에 장애우들이 많이 살고 있으리라는 짐작은 이미 사회적인 공인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빈민지역에 사는 장애우들은 뚜렷한 직업이 없다. 이들이 직업을 가질 수 없음으로 해서 파생된 절대적인 가난은 타지역에 비해 비교적 집세가 싸고 물가가 헐은 빈민지역에 장애우들을 묶어두고 있다. 최악의 지경에 처하더라도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약간의 돈으로 근근히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 장애우가 있어 어떻게든 장애를 고치겠다고 재산을 탕진한 가정도 이와 마찬가지 경우이다. 이농민으로 출발해서 결국 폐질화된 노동자로 전락한 사회적 장애우들 또한 빈곤의 나락으로 밀려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매한가지다.

 이들은 빈민지역에서 가난 외에도 한결같이 시달리고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빈민들 내부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또 다른 빈민이라고 정의 내릴 수밖에 없다.

<빈민 장애우들 열악한 삶을 살고 있다>
 
 80년대 말에 접어들어 장애우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장애판에서는 "장애우 문제는 곧 가난한 장애우 문제이다"라는 말이 꽤 설득력있게 유포된 적이 있었다.
 이 말이 주는 의미는 장애우 문제 또한 계급화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애해방은 궁극적으로는 가난한 장애우들의 해방을 뜻하는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장애우들의 구체적인 실상은 언제나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그들은 숨어 있었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과연 가난한 장애우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을 찾아 나섰다. 여전히 실비는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뚝과 판자집 사이로 난 좁고 긴 길을 걸었다.
 군데군데 판자집을 개조해 만든 가내공장에서 부녀자들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 서서 한참 눈길을 주고 서 있었음에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같이 찌든 삶이 배인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다.
 황량한 길 맞은편에서 노인들 대여섯 명이 손에 구두칼과 물통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중풍을 앓은 듯 팔과 다리를 저는 노인들도 세 명이나 끼어 있었다. 노인들은 걸어오다가 전봇대를 만나면 멈추어 서서 전봇대에 붙은 모집공고나 광고전단을 익숙한 솜씨로 긁어 냈다.

 마침 열대여섯살 먹었음직한 한 소녀가 길을 지나갔다. 노인 중 한명이 그 소녀를 발견하고 말을 붙였다. "점심 먹고 일하러 가니?" "예-" 여운이 길게 이어졌다.

<자식 생각하면 잠도 안와>

 일당 칠천원을 받고 새마을 취로사업으로 벽보를 떼는 일을하는 노인들 중에는 금양금 할머니도 포함되어 있었다.
 올해 예순 다섯 살인 할머니는 91-11번지에 산다고 했다.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6만원을 내는 단칸방에서 할머니는 외아들 이종곤(32세)씨를 오히려 부양하며 살고 있단다.
 할머니는 "얼마전 넘어져 이마를 다쳤어, 그래서 일도 못하다가 방세를 내기 위해 할 수 없어 일을 나섰네…"라며 한탄을 내뱉는다.

 할머니의 아들 이종곤씨는 선천성 정신지체 장애우였다. 아들녀석 밥을 차려주어야 한다는 할머니를 따라가 만난 이종곤씨는 낮선 사람들을 보고도 눈만 멀뚱멀뚱 거린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가 밥상을 차려주자 허겁지겁 먹는 데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그런 이종곤씨 주변으로 어지러이 화투짝이 널려져 있었다. 
 "하루종일 화투와 장난감만 가지고 놀아, 물어보지 마쇼 내가 열이 나서 못살겠네, 어딜 보낼려고해도 아는 데가 있어야지 답답할 뿐이네"
 옆에 앉아 한숨을 내쉬는 할머니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내가 재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자, 이년이 죽으면 저 놈이 어찌될까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이네 정말 애통터져 죽겠어…"

<부모의 무지함이 장애아 양산>

 금양금 할머니 외에도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할머니(59세)도 외아들의 장애 때문에 심한 심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13통 4반 반장인 할머니는 요즘 매일을 아들인 시각장애우 이덕성(26세)씨를 데리고 병원에 드나드는 게 일과라고 했다. "눈이 먼 것도 억장이 무너질 노릇인데 그 눈에 염증까지 생겨 사람 환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할머니의 하소연이었다.
 오래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생활보호대상자로 책정 받아 매달 동회에서 나오는 약간의 돈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할머니는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하다"며 고개를 내젓는다.

 두 할머니의 경우가 말해주듯 빈민지역에서 부모가 장애우를 자식으로 두고 있을 경우 부모들이 대처하는 방식은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바쳐 희생하는 케이스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걔중에는 방치하거나 아니면 자식을 시설로 보내는 부모들도 있지만 이런 처방을 쓰는 부모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문제는 오히려 외적인 상황에서 기인하고 있다.

 빈민지역의 특성상 정보가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조기발견으로 고칠 수 있는 장애를 방심해서 심각한 장애 상태로 굳어버리게 만드는 무지함을 이들 부모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경기를 시작하면 부모들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다가 아이의 경기가 심해지면 당황하게 되고 그때서야 병원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가 늦어 아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가지게 된 후이다.
 장애를 고쳐보겠다고 빚을 얻어 돈은 어떻게든 끌어대지만 한번 굳어진 장애는 속수무책으로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면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죄의식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파 무조건적인 애정을 장애우가 된 자식에게 쏟아 붓게 된다.

 무조건적인 애정은 아이를 성년이 되어서도 이기적이고 어리광만 부리는 유아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또 다른 장애를 유발한다. 가난에서 기인한 장애에 대한 지식의 짦음이 가져온 무서운 결과이다.

<죽고 싶다는 말 자주 해>

 올해 열서섯살인 미란이는 어머니가 임신중절 약을 잘못 먹어서 선천성 뇌성마비 장애우로 태어나야 했다. 밑으로 중학교 2학년에 다니는 동생이 하나 더 있지만 상대를 안 해줘 미란이는 거의 매일 집안에 방치된 채 외로움을 곱씹으며 지내고 있다. 라디오가 유일한 친구다.

 방수 일을 하는 아버지와 옷 만드는 가내공장에 다니는 어머니는 먹고사느라 바쁘다보니 미란이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그리 자상한 편이 아니어서 간혹 가다 미란이에게 심한 말을 퍼붓기도 해 미란이는 괴롭다. 그래서인지 미란이는 요즘 부쩍 죽고 싶다는 마을 자주 한다.

 작년 여름 이후 병이 도져서 혼자서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비관하는 강도가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미란이를 외부에 노출시키기를 거부한다. 어머니가 미란이를 시설에 보내자고 말을 꺼냈을 때도 아버지는 노발대발 화를 내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나타냈다.
 아버지에게는 미란이의 장래가 염두에 없다. 품안의 자식이 그저 측은하고 불쌍하기만 해서 옆에 두고 돌봐주어야겠다는 생각뿐인 것이다.

 역시 뇌성마비 장애우인 영진(20살)이는 지금은 꽃동네에 가있다. 영진이네 집은 한마디로 영진이 때문에 풍지박산이 난 경우이다.
 영진이는 태어날 때부터 누가 부축해주지 않으면 혼자 안지도 못 할 정도로 장애가 심했다. 이런 영진이로 인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툼이 그치질 않았고 결국 영진이 어머니는 영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와 심하게 다투고 가출해 버렸다.

 영진이 아버지는 미장공 일을 해 돈을 잘버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영진이를 돌봐야 했기에 제대로 일을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영진이 아버지는 술집여자를 데려다 같이 살게 됐다. 그러나 새엄마는 들어온 날부터 영진이를 몹시 구박했다. 영진이 아버지가 일을 못나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마음 고생은 예전보다 더 심해졌다. 살림도 여전히 쪼들렸다.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던 영진이 아버지는 올해 초 영진이를 가족이 없는 것으로 꾸며 꽃동네에 보냈다.
 막상 영진이가 곁에 없자 영진이 아버지는 곧바로 심한 허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물론 폭음을 하게 되는 날들이 많아졌다.
 영진이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영진이 아버지는 끝내 얼마 안 되는 가산을 정리해 동네를 떠나 평생봉사자로 역시 꽃동네로 들어가야 했다.

<이웃도 모르는 장애아들 많아>

 경희는 정신지체 1급 장애우이다. 열여덟 해를 살아온 경희의 삶의 이력은 빈민지역 장애우의 한 전형이라 할만하다.
 경희는 1남3년 중 둘째 딸이다. 아버지는 평생 건축 일을 한 일용노동자다. 경희의 친엄마는 경희가 아직 어릴 때 병을 앓다 돌아가셔 지금은 새엄마와 같이 살고 있다.
 경희의 새엄마는 술주정뱅이다. 술만 먹으면 아이를 못나 소박을 맞은 한을 경희한테 푼다. 경희의 온몸은 매를 맞은 자국 투성이다. 다리가 성할 날이 없고 얼굴에도 멍이 든 자국이 시퍼렇다. 경희 새엄마는 경희에게 죽어버리라는 저주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래도 경희는 웃는다. 새엄마가 양말을 주지 않아 맨발로 동네를 돌아다니면서도 추운 줄도 모른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희는 집안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직장으로 학교로 식구들이 나가버리면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가 혼자 남겨진 경희는 세재를 풀고 샴푸를 쏟아버리는 등 장난을 치며 지냈다.
 심지어는 가스렌지를 틀어놓고 장난을 쳐서 불이 날 뻔한 적도 있었다. 경희가 위험한 장난을 치자 이웃 주민들이 들고일어났다. 불이 날 염려가 있으니니까 차라리 경희를 밖에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희는 밖에 나오게 됐다. 그러나 경희의 해방은 또 다른 시련을 잉태하고 있었다. 말 만한 남자들이 그냥 놔둘리 만무였다. 여러 남자들이 집적거리고 한 홀애비가 결정적으로 경희를 농락했다. 이즈음에는 경희의 임신 여부 때문에 부모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봉 2동 빈민지역에는 또 다른 미란이, 경희가 많다. 집에 갇힌채 사육당하는 장애아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한 장애아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기어 문지방을 넘다 부뚜막에 떨어져 심한 화상을 입었다던지 수발을 들 식구가 없어 끼니를 거르는 장애아가 있고, 평생 햇뱉을 쬐이지 못하고 시든다는 장애아들의 사연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식구들조차 전혀 내색을 안해 바로 이웃한 주민들도 모르는 장애아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동네에 딱히 이 이유가 전부는 아니지만 장애를 낫게 하는 효염이 있다는 남묘효령교 등 외색종교가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사례이다.

<시각장애우들 많이 살아>

 이 지역에는 또한 다른 빈민지역에 비해 유독 시각장애우들이 많이 살고 있다. 지형상 산동네가 아닌 잇점이 있기 때문인지 1호선 전철 안에서 구걸하는 시각장애우들의 태반이 이  동네에 살고 있다고 한 주민은 전한다.
 대부분이 세대주인 이 지역 시각장애우들도 역시나 삶의 중압감에 시달리며 휘청거리고 있었다. 아내는 진작 가출하고 이제 중학교 3학년에 다녀야 할 딸아이는 탈선해 술집에 나가는 기막힌 상황은 결코 특이한 일이 못된다. 그보다 더 비참한 상황에도 도처에서 도출되고 있다.

 심학 약시 장애우인 김순희(31세)씨는 전세 1백50만원짜리 두평 남짓한 셋방에서 여섯 살과 아홉 살이 된 딸 둘을 키우며 살고 있다. 김순희씨가 사는 셋방은 어른이 대각선으로 누우면 고개는 구석으로 처박고 다리는 물건 위에 얹어야 겨우 잡을 잘 수 있는 찜통방이었다.
 김순희씨는 처녀 때는 봉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눈이 제대로 안보여 간단한 단순작업을 하는 전자공장엘 다니고 있다. 월급으로 20만원이 조금 넘는 돈을 받는단다.

 김순희씨는 요즈음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하염없이 우는 버릇이 생겼다. 바람이나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애들 아빠에 대한 미움과 직장에서 받는 천대, 그리고 빗나가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그녀로 하여금 눈물을 쏟게 만든다.
 그녀가 버는 수입으로는 겨우 밥하고 김치만을 먹을 수 있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용돈을 못주자 아이들은 남의 물건을 훔친다. 도벽이 생긴 것이다. 어떤 때는 엄마를 우습게 알고 대들기도 한다.

 김순희씨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서도 매일 야근을 한다. 야근을 하면 간식으로 빵과 우유가 나오기 때문에 그 간식을 먹지 않고 챙겨 두었다가 아이들에게 갖다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자신이 일하는 부서에 야근이 없으면 일부러 다른 부서를 찾아가 야근을 자청한다.

 시흥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다가 실명한 이헌식(65세)씨는 91-429번지에서 혼자 산다. 어딘가에 살고 있을 가족들과의 연락은 두절 된지 오래다. 2백2십만원짜리 전세방에서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지원금과 예전에 벌어 두었던 약간의 돈을 까먹으며 산다. 한 달 생활비로 약 6만원을 쓴다.
 이헌식씨는 직업이 없다. 구걸도 나가지 않는다. 하루종일 골방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지내다가 저녁 무렵 답답하면 밖에나가 바람을 쐬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밥도 빨래도 직접하며 연탄도 직접 간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연탄구멍을 맞추냐고 물어보자 "시간을 맞춰 아직 불이 많이 남아있을 때 연탄을 갈명 구멍을 안맞춰도 핀다"고 요령을 가르켜 준다.
 이헌식씨에겐 남아 있는 희망이 없다. 그의 말대로 "살만큼 살다 가는 거지"가 유일한 바램이다.
 역시 시각장애우인 김안식(36세)씨는 구걸이 직업이다. 아무래도 전철안은 자신이 없어 지하도나 육교에서 구걸을 해먹고 산다.

 김안식씨는 이 동네에 오기 전 시각장애우 시설에서 3년 동안 침술과 안마 기술을 익힌 경력이 있다. 그러나 그 기술은 김안식씨 자신의 말대로 안마는 남자는 취업이 어려워서, 침술은 가게를 얻어야 되는데 처지가 되지 못해서 각각 사장되었다.

 이제는 자신이 기술을 배웠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보증금 60만원에 월세 6만원짜리 방에서 반찬 사먹고 담배 사 피우는 것이 생활의 전부인 삶을 살고 있다.
 가족으로 형님과 남동생이 있지만 서로간에 관심이 없어진지 오래이기 때문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혼요? 감히 꿈도 못 꿉니다. 누가 시집오겠어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낭패한 표정으로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무관심이 장애우를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해>

 어느새 사람이 죽으면 과연 장사지낼 관 하나 제대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싶은 협소한 골목길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장애우들의 절망이 사방에서 묻어 나오는 듯했다.
 30살에 연탄가스를 마셔 정신지체 장애우가 된 김호씨는 천진난만하게 과자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소아마비 장애우인 김진국씨는 새벽같이 일을 나갔고 또 다른 지체장애우인 이모(36세) 여인은, 그녀는 생활고를 비관해 3일전 목을 메어 자살했고…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휘저었다. 근처에 그 흔한 장애우 복지관 하나 없는 정부의 정책부재를 따져본들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정부차원의 대책 없음도 문제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무관심이라는 판단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적어도 빈민지역의 장애우만을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무관심이 이들을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느낌이 어쩔 수 없이 들었다.
 실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글/이태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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