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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읽기 쉬운’ 판결문, 인권의 눈으로 톺아보기

국내 vs 해외 장애인권

본문

 
작년 12월 2일 우리나라 사법부에서 최초로 ‘읽기 쉬운(Easy-Read)’방식을 적용한 판결문이 나왔다. 본 판결은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에서 선고한 사건으로 원고는 수어를 주된 언어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이다. 원고는 채용 과정에서 충분한 편의제공을 받지 못하는 등 차별을 받았다며 강동구청을 상대로 장애인 일자리사업 불합격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 해 재판부는 평등원칙 위반과 같은 절차상 위법이 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청각장애가 있는 원고는 탄원서를 통해 ‘읽기 쉬운 용어로 판결문을 써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하였다. 이에 재판부는 이는 ‘장애인의 당연한 권리’라는 입장을 밝히고 ‘사법지원가이드라인’과 ‘장애인권리협약’ 제 13조 및 UN의 권고의견에 근거해 판결문의 엄밀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읽기 쉬운’ 방식으로 최대한 쉽게 판결 이유를 작성하였다.
 
‘읽기 쉬운’ 판결문의 내용은 기존의 판결문과 어떻게 다른가
그동안 법원의 판결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2013년 9월 대구지방법원이 일반 시민 12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판결문을 읽어 본 경험자 62명 중 ‘한 번 읽고 쉽게 이해가 됐다’라고 응답한 비율은 6.5%에 불과하였다. 법률적 용어가 익숙한 로스쿨 학생을 상대로 한 조사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법률신문이 2013년도 로스쿨 학생 1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중 절반에 가까운 48%가 ‘판결문을 읽다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일이 자주 있다’고 응답하고 70%가 판결문을 이해하기 어려운 원인으로 ‘지나치게 긴 문장 사용’을 꼽았다.
 
이번 ‘읽기 쉬운’ 판결문은 재판부에서 원고의 요청을 받아들여 보다 읽고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어진 첫 판결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내려놓지 못했던 ‘권위적인 판결문’의 관행을 깬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또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라는 문장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고 법률적 표현을 쉽게 풀어 기재하였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첫 시도, 이대로 괜찮은가
건물에 대한 물리적 접근권만큼 중요한 요소가 사법 제도에 대한 접근이다. 법정 안에서 장애당사자들이 적절한 정보와 편의지원이 없어 의사결정 과정에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일이 발생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이번 판결처럼 장애인의 권리에 대해 다루는 소송일 경우 더 그러하다.
 
그러나 한국보다 더 먼저 ‘읽기 쉬운’ 판결문을 작성하기 시작한 서구의 사례와 비교했을 때 우리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먼저 해당 판결문을 읽게 될 원고의 장애유형을 충분히 고려하였는지에 관한 질문을 갖게 된다.
 
원고는 수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농인이다. 농아인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한국농아인협회와 시립서대문농아인복지관 관계자에 따르면, “농문화에 익숙한 농아인은 평소 구화를 잘 사용하지 않아 아무리 쉽게 문장을 풀어써도 한계가 있다”며 “QR코드 등을 첨부하여 판결문을 수어영상으로 제공하거나 수어통역사가 보다 더 정확하게 통역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간결한 문장으로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이번 판결문에 쓰인 ‘~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와 같이 부정 표현이 여러 번 사용된 문장은 수어 표현에 한계가 있어 어려워 농인의 해석을 어렵게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평등의 원칙’을 설명하기 위해 재판부에서 삽입한 그림
 
또 판결문에는 평등의 원칙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을 삽입하고 ‘왼쪽 그림(기회의 평등)과 같은 상황이 원고가 겪은 상황이라면, 평등원칙에 위배되어 위법하다고 볼 여지가 큽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재판부는 그림이 농아인에게 ‘쉬운정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농아인이 가진 장애는 인지능력과 무관하므로 수어표현이 가능한 간결하고 단순화된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판결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재판부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삽입한 그림은 농아인에게 과도하고 불필요한 정보이며 마치 농아인에게 인지능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
 
구색을 갖추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위한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로 판결문을 읽는 당사자의 장애유형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국 대법원 판결문 속 용어설명 부분
 
해외의 사례를 살펴보면 잉글랜드 웨일스 가정법원의 한 사건(EWFC 48)을 담당한 재판부는 판결문을 가장 잘 이해야 할 사람이 14세 아동인 점을 고려하여 ‘편지’의 형식으로 판결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해당 판사는 판결 서두에 아동이 읽을 판결문이니 최대한 짧은 문장과 쉬운 단어로 작성할 것임을 알리며 ‘ 이 사건은 당신(14세 아동)의 미래에 관한 것이므로, 나는 당신과 당신의 부모님에게 내 결정을 전달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 편지를 쓰겠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판결문을 읽는 대상의 장애 특성을 충분히 숙지한 뒤, 발달장애인이라면 직관적인 그림 또는 쉬운 단어 위주의 단문을, 시각장애인이라면 점자와 보이스리더가 가능한 한글파일을 제공하고 또 청각장애인이라면 수어 판결문이나 수어 표현이 가능한 간결한 문장으로 작성된 판결문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는 법률 용어부터 쉽게 정비할 필요가 있겠다.
영국 대법원은 지난 2020년 자폐성 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관련한 소송(A Local Authority v JB)을 진행하며 소송 경과에 대해 ‘읽기 쉬운(EasyRead)’방식의 Case summary(사례 경과 요약문)를 제작한 바 있다. 서울행정법원 판결과 눈에 띄게 비교되었던 부분은 개조식으로 작성되었다는 점과 큰 글씨체, 그리고 항소인과 피항소인 등 법률 용어를 가장 서두에 쉽게 풀어 기재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수어는 조사 없이 단어와 단어로 연결된 형태의 언어체계를 갖추고 있어 단어에 대한 부연 설명이 더욱 필요하다. 단어로 소통하는 것이 더 편리한 사람들을 위해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자주 등장하게 될 법률 용어(가령, 원고와 피고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 추가된다면 훨씬 더 판결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법원은 하급심 판결 이후 소송당사자가 취해야 할 다음 단계에 대해서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이지리드’ 판결문을 받은 원고의 대리인(가현 법률 무소 장수혁 변호사)에 따르면 원고는 1심 결과에 불복하여 항소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장애인 원고가 자신의 사법적 권리를 온전히 행사할 수 있도록 재판부에서는 판결문 뿐 아니라 향후 절차에 관한 안내도 이해하기 쉬운 문서로 제작할 필요가 있다.
 
쉬운 말로 작성된 영국항소법원의 항소절차
 
영국 법원은 지적장애 등을 가진 재판당사자가 항소할 수 있는 방법과 절차에 대해 쉽고 간결한 언어로 매뉴얼을 작성하였다. 매뉴얼에는 당사자가 생각 했던 것 보다 형이 길게 선고되었을 때와 판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등 각 상황에 대한 대처방 법을 쉬운 말로 제시함으로서 지적장애인의 이해를 돕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법부의 꺾이지 않는 마음
사법부의 도전이 이번 처음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법정에서 다양한 유형의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당사자가 온전히 자신의 사법접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일련의 과정을 함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법부는 장애당사자 또는 관련기관으로부터 자문을 구하여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가 아닌 당사자들이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판결문을 지속적으로 생산하여야 한다. 첫 시작을 했으니 반만큼 온 사법부의 꺾이지 않는 마음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작성자글. 김영연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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