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권리 외침 30년, 함께가 아닌 따로의 역사
기획 / 장애계 30년 전과 오늘
본문

△ 1995년 당시 ‘장애인에게는 동정보다 일터가 필요하다’는 플랜카드를 들고 장애인 일자리를 요구하고 있다. ⓒ함께걸음
<함께걸음>은 올해 ‘장애계 30년 전과 오늘’ 기획을 통해 30년 전 우리 사회에서 제기됐던 장애계의 요구와 지향점을 되짚어보고, 오늘의 현실과 비교하며 앞으로의 과제를 살펴보고 있다.
지난 1편에서는 특수교육 분야를 통해 장애인의 ‘배울 권리’가 어떻게 제도화되고 변화해 왔는지 돌아봤다. 교육을 통해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그다음 단계인 ‘일할 권리’를 살펴볼 차례다.
이번 고용 편에서는 1990년 ‘장애인고용촉진등에관한법률’ 제정을 전후로 장애인의 노동권이 어떤 기대 속에서 출발했는지,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약속이 어디까지 실현됐는지를 짚어본다
■ 30년 전, 장애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노동
1990년은 장애 3법이 완성된 해이기도 하다. ‘특수교육진흥법(1977)’, ‘심신장애자복지법(1981)’에 이어, ‘장애인고용촉진등에관한법률’이 같은 해 1월 제정되고 4월에는 ‘장애인복지법’이 전부 개정됐다. 고용촉진법은 세 법률 중 가장 늦게 제정됐지만, 그만큼 기대도 컸다.
민주화운동 이후 다양한 계층의 요구가 빠르게 분출되던 시기, 장애인들의 목소리도 함께 높아졌다. 장애인 판사 임용 거부, 학교 진학 거부 등에 맞선 투쟁이 이어지며 ‘장애인의 노동권과 생존권 보장’에 관한 요구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980년 한국보건개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생산 가능 연령층(15~64세) 장애인 가운데 60% 이상이 실업 상태였고, 지체장애인의 70% 이상은 전혀 수입이 없었으며 월 30만 원 이상을 버는 장애인은 0.3%에 불과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비롯해 한국장애자선교회, 전국지체부자유대학생연합회 등이 장애인 노동권 보장을 끈질기게 요구하면서 장애인 노동관련 법인 ‘장애인고용촉진등에관한법률’이 최초로 제정됐다.
이 법을 통해 300인 이상 사업체의 상시근로자 2%를 장애인으로 고용하도록 명시한 고용의무제가 도입되고 장애인 고용을 지원하는 전담 기관인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현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설치되면서 장애계는 모든 장애인의 노동권이 보장될 것이라 믿었다.
고용 중심 체계의 그늘
중증장애인은 여전히 법 밖에 남았다
그러나 기대와 현실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장애계 기록에 따르면, 당시 장애인고용률은 법정 고용률인 2%를 훨씬 못 미치는 0.4%대에 머물렀고 장애인 고용 정책의 주요 대상이 경증장애인 중심이어서 사실상 중증장애인은 법의 테두리에서 비켜나 있었다.
당시 장애인 비례대표로 제 15대 국회에 입성한 이성재의원(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사)은 본회의 연설을 통해 열악한 장애인 고용 현실을 폭로하고 장애인 고용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동안 정부와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의 장애인고용정책은 한마디로 실패입니다. (중략)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된 지 7년이 넘었습니다. 공단은 직업소개소로 전락했습니다. 장애인의 직업재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수백억 원씩 예산을 들여 대형건물이나 짓는 예산낭비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애인직업재활이 단순 직업소개소의 수준을 벗어나 중증장애인직업재활로의 전환을 위하여 주관 부서가 노동부로부터 보건복지부로 이관되어야 합니다.” - 제184회 본회의 1997년 7월 28일
실제로 1998년 장애인신문에서는 훈련교사 한 명이 중증장애인 15명을 맡고, 단가 5원의 단순 포장 작업을 반복하는 보호작업장의 현실을 보도하며 중증장애인이 일을 하는 보호작업장이 수용시설로 전락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되었지만, 다수의 중증장애인은 예산지원도 받지 못한 채 노동착취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또 2000년도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직업위원회 조사에서는 장애인 고용의 중추 기관인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운영하는 일산장애인직업전문학교 졸업생의 직장 근속률이 20대에 머물고, 80%에 가까운 장애인들이 실업 상태거나 훈련받은 직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곳에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간사로 일했던 조문순(대구대학교 대학원) 초빙 교수는 “당시 장애계는 장애인고용을 위해 마련된 막대한 기금을 다수의 장애인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업주 이익을 대변하는 데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고 설명했다.

△ 1998년 당시 장애 관련 주간지에 실린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관을 반대하는 성명서 ⓒ함께걸음

△ 1998년 당시 한국장애인복지공동대책협의회의 주최로 ‘장애인 직업정책 개혁을 위한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함께걸음
‘고용인가, 재활인가’ 장애계는 갈라졌고
단식농성·결의대회로 거리는 뜨거웠다
1997년부터 1999년 사이 장애계는 장애인 고용 정책을 둘러싸고 전례 없이 숨 가쁘게 움직였다.
권도용 교수(당시 한신대학교 재활학과)를 비롯해 장애 우권익문제연구소와 장애인복지공동대책협의회,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등은 장애인고용촉진법의 폐쇄성을 지적하며 장애인직업재활과정에 대한 명문화와 중증장애인 고용을 위한 체계 마련 및 장애인고용촉진정책을 노동부에서 보건복지부로 이전하는 내용을 담은 ‘장애인직업재활법안’을 마련했다.
반면 한국지체장애인협회,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한국장애인연맹 등은 “장애인직업재활법이 일반고용시장에서 장애인을 분리할 우려가 있고, 사업주에게 중증장애인고용지원을 강제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지적하며 “직업재활법안은 장애인을 복지의 대상으로 축소시키고 노동자가 아닌 서비스 대상자로 전락시킨다”고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장애인 고용정책을 두고 장애계는 반으로 쪼개져 수차례 성명서를 내기도 하고 범국민장애인총궐기대회 등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는 등의 갈등이 반복됐으며 이는 2년간 이어졌다.
입법기관인 국회 상임위도 둘로 나뉘었다. 1998년 노동환경위원회는 기존 ‘장애인고용촉진등에관한법률’ 개정안을, 보건복지부위원회는 ‘장애인직업재활법’을 통과시켰다. 두 법이 동시에 법안심사위원회에 상정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에는 경실련·참여연대·민변·한국YMCA·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민주노총까지 참여, 직업재활법안에 대해 각기 찬성과 반대 의사를 표출했다. 결국 격렬했던 중증장애인 고용과 한국고용촉진공단의 이관 문제는 1999년 장애인고용촉진법과 직업재활법을 절충한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으로 통과됐다.
고용과 직업재활의 절충안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이 법을 통해 ‘직업재활’이 추가되고 중증장애인을 위한 지원고용, 직업적응훈련, 취업 후 적응지도 등이 처음으로 법적 근거가 마련되는 동시에 장애인고용촉진기금의 일부를 중증장애인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 아래 표와 같은 내용도 추가되었다.
조 교수는 “90년대 말에는 막대한 고용 예산이 장애인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업주 이익을 대변하는 데 쓰인다고 생각했었어요. 예산을 집행하는 기관이 노동부였고, 보건복지부 쪽으로도 기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죠. 장애계가 양분되기는 했지만 각기 주장마다 설득력이 있었어요. 당위적으로 모두 이해가 되었죠. 그렇지만 그 당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중증장애인의 노동권 보장이라는 현실이었어요”라며 회상했다.
거리에서 때로는 토론장에서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며 만들어진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약 30년이 되어가는 지금 장애인 고용 현장은 어떻게 달라졌고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
관련 기사
장애계 30년 전과 오늘 [고용] ② : 30년이 지난 지금 수치는 늘었지만 본래 취지와 목적은 사라져…
작성자글과 사진. 함께걸음미디어센터 cowalk1004@daum.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