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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청년 네 명에게 물었다. 이번 여름, 어디서 놀아요?

기획 / 여름특집

본문

▲수다회 전체 전경
 
“여행은 우리 모두 중요하잖아요.”
 
자기소개를 시작한 지 몇 분이나 됐을까. 조재현 씨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최근 여수를 다녀온 재현 씨는 7월 말부터 8월 초 가족들과 삿포로에 갈 예정이다.
 
그 옆에 앉은 강주연 씨도 만만치 않았다. “휴가를 못간 지 2년 정도 됐어요.”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르다. “그래도 국제학회 때문에 작년에는 미국에 갔고요. 재작년에 칠레. 올해는 독일에 가요.”
 
순간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졌다. “우리 지금 국내 여행 얘기할 게 아니라 각자 항공 마일리지부터 까야 되는 거 아니야?”
 
강릉에 사는 김남영 씨는 며칠 뒤 친구들과 바다에 나갈 예정이라 했다. “조개 잡자”는 연락이 고등학교 친구들의 단체 채팅방에 막 올라왔다. 바다가 집에서 5분 거리인 강릉 사람들의 휴가는 남달랐다.
 
위유진 씨는 지난 4월 대만을 다녀왔다. 올해 하반기에는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았다. 미국, 칠레, 독일, 일본, 대만, 삿포로, 여수, 강릉이 나왔다. 이쯤 되니 오늘 수다가 어디로 튈지 조금 궁금해졌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던 7월 2일, <함께걸음>은 여행 좀 다녀본 장애청년 네 명을 한자리에 불렀다. 2~30대 청춘들과 함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시각장애인 조재현·강주연 씨, 뇌병변장애인 김남영 씨,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인 위유진 씨와 함께했다.
 
여름 느낌이 물씬 나는 곳에서 수다를 떨고 싶었지만, 비 소식이 있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파도 영상과 노을 포스터를 걸어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네 명의 장애청년 당사자들과 김형수 편집장 외 함께걸음 기자들이 함께 참석했다.
 
처음 준비한 질문은 ‘장애인에게 여행은 왜 어려운가’였다. 하지만 일단 그 질문은 잠시 접었다. 이 젊은이들이 어떻게 쉬고, 어디로 가고, 누구와 함께 노는지부터 차분히 들어보기로 했다.
 
PART 1
잘 쉬는 것도 각자의 방식이 있다. “깊은 휴식이 있고, 얕은 휴식이 있다”
 
김영연 벌써부터 여러분들의 활기찬 얼굴과 목소리에 오늘 수다회가 기대되네요. 열심히 떠들어 보아요! 우선 휴식에 대한 얘기를 해보면 좋겠는데 여러분은 요즘 어떻게 쉬나요?
 
조재현 저는 깊은 휴식과 얕은 휴식이 있는 것 같아요. 시간과 돈이 되면 강릉도 가고 싶고, 맨날 호캉스도 가고 싶죠. 그런데 그건 안 되잖아요. 일상에서 조금씩 쉬는 방법도 필요한 것 같아요.
 
김영연 오! 새로운 정의네요. 재현 님의 ‘얕은 휴식’은 뭔데요?
 
조재현 밤 산책이요. 제가 연남동에 사는데 연트럴파크가 있거든요. 학기 중에 과제를 진짜 정신 나간 듯이 하고 새벽에 딱 끝내면 너무 힘들잖아요. 그때 노래 들으면서 그냥 동네 한 바퀴 걸어요. 발길 닿는 대로요.
 
김남영 저도 최근에 휴가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려봤는데요. 제가 강의를 하다보니까 최근에 진짜 정신없이 돌아다녔거든요. 파주, 양주, 춘천, 강릉, 서울….‘이건 안 되겠다. 무조건 쉬어야겠다’ 싶어서 인천에 호텔을 3박 4일 예약했었는데 취소했어요.
 
김영연 어? 왜요?
 
김남영 아니 생각해 보니까 제가 혼자 출장을 가면 이미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데 또 혼자 호텔에 있는다고 생각하니까 공허하더라고요. 외롭고. 그래서 차라리 그냥 내가 사는 공간을 휴식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면 휴가가 꼭 필요할까 싶더라고요. 최근에 고등학교 친구들 단톡방에서 “바다 가서 조개 잡자”는 연락이 왔어요. 강릉은 바다가 5분 거리니까 이렇게 많이 노는데 저한텐 이게 휴가인 것 같아요.
 
김형수 오. 강원도 사람은 노는 것도 스케일이 다르네요! 지금 이야기 듣다 보니까 다들 혼자 보내는 휴가 보다는 친구들과 많이들 가시는 것 같네요. 여러분들은 주로 여행 가자고 먼저 친구들을 꼬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꼬임을 당하는 편인가요?
 
김남영 음.. 저는 제가 먼저 꼬시는 게 60%, 친구들이 가자고 하는 게 40% 정도?
 
위유진 저도 주로 제가 제안하는 편이에요. 친한 친구 다섯 명이 있는데 저희끼리 장난으로 모임 이름을 ‘사륜구동’이라고 지었거든요.
 
김영연 사륜구동이요? 다섯 명 모두 휠체어 타신 분들이라서 그런가..?
 
위유진 아뇨. 휠체어 타는 사람은 저밖에 없는데요. 제가 이 모임에서 엔진 역할이고 나머지 친구 네 명이 바퀴예요. 다들 만나고 싶어 하는데 아무도 추진을 안 해서 제가 “야, 만나자”, “여기 가자” 하면 다 따르는 친구들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엔진이에요.
 
일 동 (웃으며) 아 그래서 사륜구동이구나!
 
김형수 장애인의 여행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의 동행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들어보니까 다들 “내가 꼬실 건데?”, “내가 엔진인데?” 이런 분위기네요. (웃음) 다들 완전 적극적이야!
 
정말 그랬다. 이날 모인 네 사람 가운데 ‘휴가철이 되면 갈 곳이 없어, 함께 갈 사람이 없어 막막하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누가 먼저 친구를 꼬시는지, 누가 여행 계획을 짜는지 이야기가 한참 이어졌다.
 
PART 2
여행은 비행기표를 끊기 전부터 시작된다
“플랜 C를 짜는 사람과 아주 센 후레쉬를 챙기는 사람”
 
김영연 이제 여행 계획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여러분들은 여행 갈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뭐예요?
 
조재현 저는 MBTI가 J거든요. 한 번 가는 거 이왕이면 잘 가고 싶으니까 맛집, 호텔, 놀거리 다 열심히 찾아보는 거 같아요. 해외는 자주 못 가니까 더 열심히 찾고요.
 
위유진 저도 J인데요. 저는 플랜 B, C를 계속 생각해서 대비해 놓는 편이에요.
 
김영연 그건 장애의 영향이 있을까요? 아니면 성향 때문일까요? 준비한 계획이 틀어지면 스트레스를 받으시나요?
 
위유진 음.. 장애 때문이라기 보단 그냥 제 성향인 것 같아요. 물론 어느정도 장애가 제 성향을 만드는 데 일조를 했겠지만요. 그리고 계획이 틀어지면 어떻게 할지까지 계획해 놓으면 돼요. 그러면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 있어요.
 
일 동 (웃으며) 진짜 J 답네요!
 
강주연 저는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은 잘 안 가는 편이에요. 제가 중심 시력은 괜찮은데 주변 시야가 좁거든요. 사람이 많으면 이동할 때 힘들고 자주 부딪힐 수 있기 때문에 정적이고, 동선이 단순한 곳을 좋아해요.
 
김영연 그래서 주연 님이 여행 꿀템으로 가져오신 게….
 
강주연 후레쉬요.
 
▲후레쉬를 들고 있는 강주연 씨
 
책상 위에 묵직한 후레쉬 하나가 올라왔다.
 
‘본인만의 여행 꿀템을 하나씩 가져와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주연 씨가 가져온 물건이었다. 그냥 휴대전화 손전등 정도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소방관들이 쓸 법한, 제법 강한 빛을 내는 후레쉬였다.
 
강주연 제가 야맹증이 조금 있어요. 그런데 밤에 돌아다니는 건 좋아하거든요. 밤에 다니다 보면 일행보다 걸음이 느려질 때가 있는데, 그게 싫어서 이걸 비추면서 다녀요.
 
‘야맹증이 있으면 밤에 안 다니겠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주연 씨의 답은 달랐다. 밤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니까, 빛을 더 강하게 내는 후레쉬를 샀다. 사람이 많은 여행지를 피하는 대신 조용하고 동선이 단순한 곳을 찾는다. 어두운 곳에서 일행에게 걸음을 맞춰 달라고 하기보다 후레쉬를 켠다. 장애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행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주연 씨는 자신의 시야에 여행을 맞추는 중이다. 이야기를 조금 더 듣다 보니 이들의 여행 준비에는 ‘고수’의 냄새가 났다.
 
김영연 숙소는 다들 어떻게 찾으시나요? 요즘 예약 사이트에 장애인 객실을 선택하는 기능도 있던데요.
 
김남영 있긴 한데 별로 신뢰도가 높지는 않아요. 저는 그냥 숙소에 직접 연락해요.
 
위유진: 저도 아고다 같은 숙소 사이트 통해서 예약할 때 꼭 호스트나 업체에 메시지를 남겨요. “저는 전동휠체어 사용자이고 이런 게 필요한데, 있는지 없는지 회신해 달라”고요.
 
김영연: 역시 직접 확인하는 편이 제일 정확하군요. 답장이 잘 오는 편인가요?
 
위유진: 생각보다 잘 오는 편이에요. 특히 해외는 메일로 많이 연락하고요.
 
김형수: 저는 대만 갈 때 사진까지 찍어 보내달라 한 적 있어요. 장애인 객실 욕실 사진 보내달라 하니까 직접 찍어 보내주더라고요.
 
사진 한 장이면 될 일을 ‘장애인 객실’이라는 표시 하나만 믿었다가 낭패를 볼 수는 없다. 필요한 정보가 없으면 직접 묻는다. 확신이 없으면 사진을 보내달라고 한다. 항공권을 고르는 기준도 조금 달랐다.
 
김형수: 그리고 보통 장애인들은 저가 항공사를 잘 안 타죠. 전동휠체어 부숴 먹으면 안되니까요. (웃음)
 
위유진: 아 맞아요. 저가항공이 싸긴 하지만 그런 부분이 불안해서 웬만하면 국적기를 활용하는 편이고요. 저는 항공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장애인 서비스를 꼭 읽어봐요.
 
김영연: 국적기는 저가항공이랑 가격 차이가 꽤 날텐데요..
 
김형수: 그래도 전동휠체어가 부숴지면 진짜 대책이 없으니까요. 도착했는데 휠체어가 망가지면 끝이에요.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보상하거나 대처할 수 있는 항공사를 선호하는 거죠.
 
위유진: 맞아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내 휠체어를 안전하게 운반해 주는지, 필요한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는지가 가격보다 먼저인 것 같아요.
 
이 여행 고수들은 최저가 항공권을 검색하기 보다 개별 항공사 홈페이지의 장애인 서비스를 정독한다. 숙소를 예약할 때도, 식당을 정할 때도 호스트와 연락하거나 로드뷰를 통해 식당의 경사로 유무를 확인하는 것은 기본값이다. 많이 번거롭지만, 이들의 표정은 꽤 태연했다. 여행을 많이 다니며 생긴 각자만의 방법이었다.
 
PART 3
최고의 여행 VS 다시는 안 갈 여행
“패러글라이딩을 도전해 보고, 독일 버스에 아무 생각 없이 올랐다”
 
김영연 이야기가 점점 무르익네요. 이번엔 최고의 여행과 최악의 여행을 꼽아볼까요.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어요?
 
김남영 음.. 저는 단양에서 패러글라이딩 탔을 때요.
 
김영연 와, 패러글라이딩을 타셨어요?
 
김남영 네! 처음엔 거기 직원들도 저 같은 장애인을 태워본 적은 없어서 당황한 듯 했거든요? 특히 처음 출발할 때 속도를 내려면 좀 뛰어야 되는데 제가 못 뛰니까. 근데 결국 거기 있던 남자 분들이 저랑 같이 막 뛰어줬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조재현 저는 독일에 갔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같이 간 팀원 중에 휠체어 타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버스를 타면서 한 번도 승차 거부를 당하지 않았던 게..
 
김형수 그게 ‘좋은 여행’의 기억이에요?
 
조재현 네. 이게 좋다고 말하는 게 슬프긴 하죠. 독일은 버스가 오면 기사가 와서 퉁명스럽게 ‘퉁’하고 리프트를 내리더라고요. 우리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타고요. 아니 이게 너무 일상적인 거예요. 한국에서는 그 친구랑 밥을 먹으려면 로드뷰로 식당 입구를 하나하나 다 찾아봐야 하는데 독일에서는 그냥 맛집을 찾아서 들어가면 됐어요. 추가로 조사하거나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는 것. 그게 정말 편했어요.
 
위유진 저도 재현 님 이야기 들으니까 스웨덴에서 갔던 식당이 기억나요. 그 식당에 턱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주방장까지 다 나와서 저한테 먼저 물어봤어요. “우리 식당이 접근성이 좋지 않은데 괜찮겠느냐. 부담스러우면 다른 곳에 가도 된다. 원하면 우리가 들어서 도와줘도 되겠느냐”고요.
 
김영연 유진 씨에게 선택지를 준 거네요.
 
위유진 네. 그리고 저한테 사과를 했어요. “우리 식당이 접근성을 갖추지 못해서 미안하다”고요. 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아, 내가 이걸 사과받을 수도 있는 거구나.’
 
김영연 한국에서도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위유진 사과요? 없어요. 한 번도. 아직까진.. (웃음)
 
김남영 저도 비슷한 걸 케냐에서 느꼈어요. 케냐 시골은 흙길이고 저상버스라는 개념 자체가 없거든요. 물리적인 접근성만 보면 정말 열악하죠. 그런데 현지 사람들이 계속 저를 도와주려고 했어요. 아무리 계단이 있어도 “우리가 도와줄게, 같이 해줄게”하면 누릴 수 있는 게 있거든요.
 
▲이야기하고 있는 김남영 씨
 
김형수 비장애인도 여행 가서 고생하잖아요. 다리도 아프고, 발목도 삐고, 비도 맞고, 캠핑도 하고. 체력 안 되고 날씨가 안 좋아도 친구랑 가면 즐거우니까 가는 건데, 왜 장애인의 여행은 완벽하게 편한 곳에 가야 한다는 게 기본값인가. 이런 생각도 드네요.
 
김남영 맞아요. 편의시설은 당연히 있으면 좋고 있어야 하죠. 근데 그게 여행의 필수 조건은 아닌 것 같아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어떤 배리어프리가 더 중요한가’로 흘렀다. 경사로일까. 엘리베이터일까. 저상버스일까. 당연히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이 청년들은 계속해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상버스가 있어도 기사가 승차를 거부하면 탈 수 없다. 반대로 턱이 있는 식당에서도 누군가 먼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라고 물으면 즐거운 저녁을 보낼 수 있다.
 
유진 씨가 말했다. “인프라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마인드가 정말 중요해요.”
 
요즘에는 이것을 ‘정서적 배리어프리’라고도 부른다. 조금 더 말랑한 마음. 상대방에게 먼저 의사를 묻는 태도. ‘안 됩니다’보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를 먼저 생각하는 것.
 
네 명의 여행자가 오래 기억한 것은 의외로 완벽하게 잘 갖추어진 무장애 관광지가 아니었다. 스웨덴의 작은 식당에서 먼저 건넨 사과 한마디였고, 케냐 흙길에서 사람들이 내민 손이었다.
 
그렇다면 최악의 여행은? 재현 씨는 어린 시절 가족들과 찾았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산소를 떠올렸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문제였다. 시야가 좁은 그에게 가파른 산길은 만만치 않았다. 발을 헛디뎌 몇 번 넘어지기도 했다.
 
조재현 그때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 다음에는 길을 좀 잘 닦아 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인데 아주 불효막심한 마음을….
 
일 동 (웃으며) 근데 그건 어쩔 수 없긴 해!
 
좋은 여행도, 나쁜 여행도 있었다. 유럽에서 열차 고장 문제로 갑자기 멈췄는데 휠체어 때문에 기차 안에 꼼짝없이 남아 당황했던 순간도 있었다. 오래된 궁전의 계단이 ‘트랜스포머’처럼 변해 리프트가 되는 광경에 감탄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최악의 여행’ 이야기가 좀처럼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몇 년 뒤 웃긴 에피소드가 됐고, 친구들과 다시 꺼내는 이야깃거리가 됐다. 여행이 원래 그렇듯이 말이다.
 
PART 4
좋아하는 사람이랑 갈 때는 ‘예습’도 합니다
“장애 때문이 아니라, 모양 빠지고 싶지 않아서”
 
친구와 여행할 때는 “일단 가자!”고 외치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연애 이야기 앞에서는 조금 신중해졌다.
 
조재현 친구랑 갈 때랑 애인이랑 갈 때는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데이트할 때는 좀 더 제가 아는 곳, 익숙한 곳으로 가려고 해요. 제가 모양 빠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일 동: (웃으며) 아,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
 
조재현 아는 곳에 가면 제가 더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잖아요. 제 친구 중에도 저보다 좀 더 잘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이 있는데 여자친구랑 어디를 가고 싶으면 저한테 연락해요. “재현아, 나 여기 가고 싶은데.”
 
김영연 그래서요? 두 분이서 먼저 가보는 거에요?
 
조재현 네. 예습하러요.
 
테이블이 다시 웃음바다가 됐다. ‘데이트 사전답사’.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길을 헤매고 싶지 않은 마음은 장애가 있든 없든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는 포털사이트에서 맛집 후기를 보고, 누군가는 친구를 데리고 직접 한번 가본다. 유진 씨도 연애 초반에는 비슷한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여름휴가 관련 물품이 들어있는 상자를 꺼내는 중인 조재현 씨
 
위유진 저도 비슷한 것 같아요. 친구나 가족은 편한 관계잖아요. 제가 휠체어를 타다가 조금 힘든 모습을 보여도 ‘이것 때문에 나랑 친구를 안 하지는 않겠지’라는 확신이 있는데.. 연인 관계는 조금 다른 거 같아요. 특히 초반에는 더 그렇고요.
 
김영연 어떤 점이 다를까요?
 
위유진 내가 좀 ‘덜커덕거리는’ 모습을 보였을 때, 이 사람이 ‘나랑 사귀기 어렵겠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있었어요.
 
‘덜커덕거리는 순간.’ 여행도, 연애도 늘 매끄럽지는 않다. 예상하지 못한 턱을 만나고, 버스가 서지 않고, 늘 편하게 가던 가게 문이 닫혀있을 수도 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덜커덕거림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예습을 하고, 아는 곳을 고르고, 플랜 C까지 만들어본다.
 
PART 5
그래서, 이번 여름 어디로 가고 싶나요?
“남극의 오로라부터 호주의 여름 크리스마스까지”
 
김영연 이야기가 너무 즐겁네요 여러분. 마지막으로 돈도, 접근성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정말 마음대로 여행을 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가고 싶나요?
 
위유진 제 버킷리스트 말해도 돼요? 저는 크리스마스를 호주에서 보내고 싶어요. 저는 새로운 걸 해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우리가 한국에 살면서 계절에 대해 당연하게 느끼는 게 있잖아요. 크리스마스는 춥고, 겨울이고. 그런데 그걸 완전히 뒤집어엎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가장 직관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게 ‘여름의 크리스마스’ 아닐까요?
 
자신의 여행꿀템으로 자동 필름카메라를 가져온 위유진 씨. 손 사용이 자유롭지 않은 유진 씨는 이 카메라로 타이머를 맞춰놓고 촬영을 할 수 있어 꿀템으로 소개했다
 
유진 씨의 이야기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이들의 여행 욕망도 하나 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남극에 가서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사람, 하와이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싶다는 사람, 통창 너머로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며 가만히 쉬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각자의 욕망이 이렇게나 다양한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장애인의 여행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이 당연한 질문을 건너뛴다. ‘어디에 가고 싶은가’보다 ‘어디에 갈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이날 네 사람에게도 분명 필요한 것은 있었다. 정확한 접근성 정보, 믿을 수 있는 숙소 정보, 휠체어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 장애인이 여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남들보다 몇 배 더 많은 검색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
 
장애청년의 여행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자주 ‘없는 것’부터 찾는다. 경사로가 없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정보가 없다, 갈 수 있는 숙소가 없다. 그러나 두 시간 동안 이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은 ‘갈 수 없는 곳’의 목록이 아니었다.
 
‘놀러가자’고 친구를 꼬시는 사람. 여자친구와 갈 곳을 친구와 먼저 예습하는 사람.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다음에는 스카이다이빙을 꿈꾸는 사람. 밤눈이 어둡지만 밤에 돌아다니고 싶어 아주 센 후레쉬를 켜는 사람. 그리고 친구 네 명을 바퀴 삼아 ‘엔진’을 자처하는 사람.
 
이들은 가고 싶은 곳이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다. 턱 하나에, 누군가의 입장 거절에 여행 욕구가 사라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될 때까지 문을 두드려보고 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하는 그런 사람들.
 
이번 여름에도 이들은 아마 어디론가 떠날 것이다. 호주일 수도, 하와이일 수도, 집 앞 5분 거리의 강릉 바다일 수도 있다. 이 글을 다 읽은 당신도 슬슬 지도를 켜고 여행지를 검색하고 있다면 좋겠다.
 
 
작성자글. 김영연 기자 / 사진. 박수찬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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