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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월례강좌] 장애인의 허위의식과 자주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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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드리고자하는 말씀의 내용이, 사람이 사람답게 자주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장애인으로서 자주인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모습들과, 자주인으로 자기 삶을 사는 것은 어떤 것인지,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고자 위의 제목을 붙였습니다.
사람이 "자기와 관계를 맺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 나와 생각으로써 반성되어지는 나, 이렇게 둘로 분리되는데 바로 이것이 짐승과 다른 특징입니다.
바꿔 말하면, 예를 들어 어떤 개(犬)가 하루종일 놀다가 저녁에 오늘 개로써 못할 짓을 했구나 하는 반성을 하는 개가 있다면 그것은 개가 아닙니다. 개는 자기를 행동하는 개와 반성하는 개로 분리시켜 생각할 능력이 없습니다. 짐승의 의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새끼와 어미의 의미가 양적인 의미 밖에는 없지만, 사람은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자기를 객관화 하고,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질적 변화를 하면서 인간다움이라는 자주의식을 성장시키며 살아갑니다. 반대로 만약 사람이 자기를 객관화시켜서 초월하거나 반성하면서 새로운 존재로 자기를 살아가지 못할 때 사람은 짐승의 존재 양식과 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자기를 의식하며 관계를 맺으면서 자주의식을 가지게 될 때 바로 자기를 쳐다보는 그 순간 곧 그는 자기와 자기만의 관계가 아니라 이미 세계 속에 사는 자기를 보고 있기 때문에, 자기와 세계의 관계에서 세계를 객관하고 초월하게 됩니다. 짐승은 다아윈의 "진화론"처럼 세계 속, 즉 환경 속에 적응하면서 발전하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하는 자연 도태적인 적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그 사회 속에 태어나서 적응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객관화 또는 초월하여 변혁을 통한 창조하는 행위를 합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의 과거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사는 존재도 아니고, 짐승의 존재 양식처럼 자신의 객관적 반성 없이 하루를 사는 것도 아니며, 시간의 흐름에 내맡기는 존재도 아니며, 부단히 열린 미래를 향해서 자기와 세계를 객관화하는 속에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본래적인 사람의 존재양식이고, 이렇게 살아가야 그 사람은 자주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자주인이라 하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적인 문제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사람의 기본적 양식을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만들 때 거기에서 바로 사회문제, 또 인간문제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존재양식을 원론적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지금까지의 학교교육이나 사회의 문화적인 교육, 사회적인 환경이 사람으로 하여금 "적응"이라는 것만을 강조하여 적응 못하는 인간에게 소위 낙오적인, 문제적인 그런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객관화하여 이 사회가 올바른 사회인가, 또 그런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자기 주체적 반성 속에서 자기를 창조하기에 앞서 적응이라는 각도 속에서 우선 적응하지 못했다는 강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결국은 자포자기하거나 불의한 체제에 순응하면서 수단을 부려서라도 생존하려는 양식으로 변합니다. 불의한 사회일수록, 사람들에게 사회가 개방되어 창조적인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폐쇄된 사회가 되어 체제가 절대가 되고, 그 체제 안에서 인간이 어느 만큼 적응하는가에 인간의 등급과 평가가 내려지게 됩니다.
결국 장애인의 문제는 폐쇄된 사회 속에서 적응하는 등급서열에서의 인간평가의 마지막 단계인 적응하지 못한다라는 측면에서 장애인의 공통의 문제는 모두 거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여기 본질적 기본의 인간됨으로써의 존재양식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획일적으로 주어진 적응만을 강조하는 체제 속에서 인간 가치를 평가받는 사회 속에서의 장애인의 문제는 결국은 부수적 혜택 조건으로서의 어느 정도 동등성을 얻어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이런 문제를 던져놓고 함께 생각해 봅시다.
오늘 날 우리가 사는 산업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존재양식은 "능률"이며 "생산"입니다. 이 절대가치는 인간에게도 적용되어 능률적이고 생산적인 인간만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인간성이 좋다고 하더라도 무능력자가 되고, 사회의 부적응자가 됩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장애라는 것은 능률과 생산의 의미에서 산업사회에서나 자본주의에서 보는 도구로 볼 때 이것은 깨진 도구이거나, 써먹을 수 없는 도구이거나 이미 능률과 생산을 상실한데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도 존엄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도덕적인 호소만 가지고 이 거대한 산업사회의 자본주의구조에서 우리의 문제가 해결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기본적 양식을 생각해 보고, 그 과정에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장애를 입은 사람으로서 장애라는 일차적인 문제가 있습니다만 이 폐쇄된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으로서 자기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하고, 획일적 적응만을 강요당하는 사람은 장애인들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우리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애인의 문제해결이라는 사회운동 역시 일차적으로는 자기이익추구에서 출발하지만, 이것이 다음 단계에서는 인간 모두의 과정에서 모두와 함께라는 차원에로의 의식과 기본적 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볼 때, 장애인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것이 이 사회속에서 장애인이 아니면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자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 즉 장애인이 개방적으로 살 수 있는 사회는 그들에게도 개방적으로 살 수 있는 사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농민운동, 교사의 교권회복, 노동자 운동 등도 자기의 문제 해결의 접근방식, 2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인간 근원적인 문제로 접근할 때, 소위 말하는 "연대라고 말하는 사회적 공감대, 모두 함께라는 차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장애인의 의식을 논하기 앞서,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예를 들어 보면, 정신과의사인 그는, 알제리인의 정신병의 근원이 알제리인의 프랑스 식민화 된 것의 문제가 있으므로 정신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려면 식민지를 바꿔놓지 않으면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측면의 단지 의사로서의 소명만이 충만한 그야말로 순수한 의사로서의 행위를 보여주었을 뿐이지, 그가 결코 정치의식, 정치적 목적에서의 게릴라전사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거든요.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는 "순수"라는 말의 가치가 순수예술, 순수학문, 순수종교, 순수의술 등 마치 역사, 현실에서 떠난 것인냥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인간의 직업 중 최소한, 인간의 진리를 추구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의미에서의 성직, 의사, 법률가, 교사 등 이 4개의 직업만은 생존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순수"라는 말이 붙습니다. 인간을 위하고, 진리를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도 잃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직업의식의 소명성에 순수하면 필연적으로 열사적이고,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사회가 바로 그들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현실 속에서 정치적인 모든 것이 허위적 가치로 판단되어지는 문제를 던져 함께 생각하면, ...파농이 정신적 근원의 문제를 계속 연구하며 발표한 사례를 보면, 정신병의 근본문제는 흑인이 흑인됨을 인정하지 못하고, 백인처럼 살고 싶은 "허위의식"에서의 자기분열증이다.
흑인 스스로가 백인은 인간이고, 흑인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자기 비하의 의식을 허위의식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흑인들은 백인이 되기를 열망한다.

"검은피부 흰가면" 이라는 그의 저서에 한 서민인 흑인처녀가 백인청년과 결혼하기 위해 화장 등 갖은 노력을 다한다. 파농은 그녀에게 "바닷가에 가서 너의 검은 피부를 문질러 봐라,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너희 흰 피부가 아니다. 백인과 똑같은 붉은 피다. 진정 인간이고 싶으면, 흑인으로서의 네 자신을 인정하고 살아라" 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것이 "Black is beautiful" 흑인의 허위의식을 깨는 해방의 내용인 "검은 것은 아름답다" 입니다. 보통 일반 사람들은 색깔의 허위의식 때문에 검은 것 나쁘고, 흰 것은 선하고 순결하다고 연상합니다.
이렇듯, 태어나면서부터 검은 것 자체가 부정의 존재가 되는, 그런 측면에서 흰가면을 사려고 하는 흑인들의 허위의식 문제를 다룬 이 책을 생각하면서 우리 장애인들도 사회적 적응 과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쓰고 있는 허위의 힘 가면이 사실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비장애인 하고 나를 맞추어 사회적 대우 면에서 동등하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면 스스로 열등성을 부인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사회적 평등에서 주장하는 것이지만, 인간으로서, 의식면에서는 어느 편에다가 자신을 동일화한다는 자체가 열등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회적 조건면에서의 동등한 권리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그렇지만, 의식면에서는 내가 장애인인데 비장애인과 동등하다는 그 자체가 자칫하면 허위의식이 될 수 있고, 부인한 나는 장애인이다.  장애가 있기 때문에 내 삶을 내가 산다. 자기 의식이 도리어 자기를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이 지체 장애인으로서 자기에게 열려진 이 삶을 당당히 산다는 그 자체가 "자주의식"입니다.

저의 가까운 친구 중에 학교 다닐 때 학보에다, 하나님, 비틀 걸으소서, 라는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그 친구가 나와 더불어 생활하다 보니까 나처럼 걸어야 내가 겪고, 바라보는 세상을 자기도 만날 수 있게 되고, 그런 세상의 모습속에서 바로 자기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 친구의 진정한 마음이 와 닿았습니다.
각기 나름대로 자기 꿈이 있고, 자기가 계획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우리가 해결해야 될 문제들은 그런 측면에서 장애인들이 장애인으로서 자기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의미입니다.  우리 속에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허위의식을 몰라 다 없애버릴 수는 없지만 (모든 인간들의 사회의식이라는 것은 사실은 다 허위의식으로 작용하니까) 그 속에서 스스로의 자주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자주의식이라 함은 앞서서도 말했지만 삶이라 한 것은 자기가 열려진 미래를 향해서 자기를 창조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의 개별적 다양성처럼 삶의 목표나 삶의 자기과정 속에서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얼마든지, 자주의식에서의 자기 객관화, 즉 자기검토를 통해서 의식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사회적 운동의 변화와 같이 이루어 질 때, 장애인의 근본 문제가 하나 둘씩 해결되리라는 그런 생각입니다. 장애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우선 외적인, 사회가 적응 못하게 하는 사회적 장애입니다 만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주하는, 자기가 자기 삶의 당당한 주인이 되는 그런 삶으로 의식을 전환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으로는 외적 조건이나, 편견, 불평등한 체제를 변혁시켜 나가는 외적인 것과 함께, 그 과정이 곧 내적으로는 장애인의 허위의식을 하나 둘씩 벗고, 자주의식을 발전시켜서 인간의 본래적인, 역사에서의 자기 삶에 있어서 자주적인, 자기 주체적 자기에로의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그럼으로 외적으로는 사회변화이고 내적으로는 자기 변화라고 하는 이것이 동시에 수행되어 가는 과정일 때 진정으로 하나의 장애인의 문제를 올바르게 극복해 나가고 우리 모두가 함께 걸음을 걸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오늘의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질1 : 사람이 사람답다라고 했을 때는 어떤 사회생활의 관련 속에서의 틀에 규정지어 버린다는 해석은 안드시는지요?.
답1 : ∼답다" 라는 의미가 어떤 틀에 적용시켜 말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환경 조건이나 신체적 개인 조건에서도 부단히 자기를 좌절하거나 체념하거나 열등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를 이뤄나가는 과정 그 자체를 말한 것입니다.
질2 : 행동의 문제 접근 방법으로 독립된 복지시설 자체는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날이 와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까?
답2 : 최근에는 격리수용 격리생활 가운데서, 똑같이 생활할 수 있는 체제도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격리수용에서의 어떤 질병이나 문제의 해결이 되었다 해도 그것이 사회로 환원되면, 사회적 적응과정에서 또 하나의 이차적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제는 장애인이 비장애 중심의 사회 구조 속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비 장애인이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교육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특별계층을 위한 복지라는 것 자체도 불평등한 것입니다.
질3 : 내면의 의식의 차원이라는 것은 변혁적 세계관을 통한 사회의식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의식의 변화만으로 우리는 어떻게 이 사회를 바꿔 나갈 수 있습니까?.
답  : 내가 말한 "의식" 은 내면의 세계만이 아니라 자기 창조와 사회 변혁을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장애인의 운동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는 역사적이고 정치적 운동으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정치적 영역을 벗어나는 세계라는 것은 없습니다. 불의를 극복하고자 하고 보면 정치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측면에서 장애인도 계급 모순 구조 속에서의 소위 말하는 피지배 계급이라고 하는 그런 도식으로서만 접근하는데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이 계급 모순을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해결하는 것이 민주화 투쟁이고, 나머지 즉 소위 도시에 있는 빈민(Lumpenproletariat)은 기본계급에 동조세력이고, 장애인은 그보다 더한 들러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그런 단순 사회과학적 만으로는 도리어 더 그것보다 소외된 인간들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사회가 진정 정의로운 사회인지의 척도는 민주적이라는 정치구조의 모든 것보다도 장애인이 자기의 삶을 자기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때 근본적인 민주화, 근본적인 정의는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 부의 분배 기준을 보통 시민이나 민중이 아닌, 장애인으로 하여야 그 다음의 소외계층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질4 : 오늘날 장애인의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운동차원에 있어서의 우리의 모습과 지식인들의 역할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답  : 우선 모여서 서로의 생각, 경험, 문제 등을 나눠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개별적이 아닌 공동의 인식이 쌓이게 되고, 연대의식을 형성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인은 지식의 권위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허위의식이 많습니다. 우선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하고, 그들 지식인이 선도하는 이론을 따라서 운동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주적인 운동에 지식인이 함께 참여하고, 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정리를 받았던 훈련을 가지고, 정리해 내지 못하는 경험들은 정리해 줌으로서 새로운 실마리를 풀어내는 어떤 안내를 해보는 역할이 지식인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자기 지적 권위체계 자체도 반드시 변화되어져야 합니다.

작성자김성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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