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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지상강좌] 장애인복지의 시각과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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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에 이어서...
또한 뇌수술을 받으려면 막대한 수술비가 들텐데, 그 많은 돈을 빛낸다면 우리는 알거지가 될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나는 힘없이 동생과 함께 미영이를 안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무 내용도 모르는 미영이는 이제는 "방긋방긋" 잘 웃어 주었습니다.
박꽃처럼 하얀 얼굴에 초로초롱한 눈망울, 앵두같이 곱게 물든 입술이 너무도 아름답고 귀여운 딸인데, 한가지 머리가 커서 가누지를 못한다니....., 나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나에게 무슨 큰 죄가 있기에, 이렇게 자녀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하시는지 믿음이 부족한 나로서는 알길이 없었습니다.
미영이가 거의 10개월이 넘자 나는 쌀로 흰죽을 쑤워 으깨어서 먹이었습니다.  때마다 죽을 별 탈 없이 잘 먹어 주는 것이 다행이라 싶었습니다.
여동생 명환이는 곧 공장에 취직이 되어 매일 직장에 나가기가 바빴습니다. 집에는 미영이와 나만 남았습니다. 미영이의 발을 보니, 너무도 애처로왔습니다.
갓난 아이의 여린발과 똑같았습니다. 발육이 건강한 아이라면 지금쯤 걷기 위해 "따따따"도 하고 "도리도리"라든지 "짝짝쿵" 정도의 재롱을 잘 할 것이고, "엄마"나 "아빠" 소리도 이따금 씩 부를텥데, 우리 아기에게 만은 그런 즐거움이 도무지 찾아 올 줄 몰랐습니다. 나는 왜 그때 어린 것에게 아무 약이나 함부로 먹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의사가 아닌 돌팔이 의사에게 왜 주사를 맞추었는지 뼈져리게 후회를 하였습니다.
가난이 무엇인지, 기실 가난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너무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무지에서 실수의 원인이 되었던 것같았습니다. 몇 달 후 미영이의 돌날이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친정 부모님이 올라오셨습니다. 비록 말을 못하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미영이지만 나는 성심껏 음식 장만을 하였고, 본 교회의 목사님과 몇몇 성도들을 모시고 예배도 드렸습니다. 손님들이 다 돌아간 저녁때쯤 아버지는 누워있는 미영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생각하신 무엇이 있으신지 앉아있는 나를 향해 무겁게 입을 열으셨습니다. 「차라리 미영이 이 애는 안 태어난 것만 못하구나, 더 속 썩이기 전에 아예 죽는 것이 너에게도 낫고, 그 애에게도 신상에 좋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소리내어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원래 자상하시지 못하고 완고하신 분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상처를 안고 사는 나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실 줄은 너무도 뜻밖이었습니다.
「아버지! 너무 하십니다. 죽는 게 낫다니요, 어디 맘대로 죽어지나요, 그리고 누구는 병들고 싶어서 병이 드나요. 아버지가 미영이를 기르시나, 왜 죽기를 바라세요. 그런 말씀을 제 앞에서 하시다니요, 너무 야속하십니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울면서 마구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도 너무나 내 지친 모습과 미영이의 모습이 안스러워서 그런 말씀을 하셨음을 나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대고 나의 면전에서 그런 모진 말씀을 하신 것에 좀처럼 서운한 감정이 풀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어린 시절에 학대받은 일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내 위로 두 언니를 낳고 나를 세번째로 낳으셨을 때, 아버지께서는 딸만 낳는다고 호통하시며, 딸을 무엇에 쓰느냐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어머니에게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밤낮 없이 얼큰하게 술이 취하여 들어오셔서는 죄 없으신 어머니에게 매질을 하는 등, 혹독한 꾸지람으로 어머니를 괴롭혀드리기가 일쑤였다고 했습니다.
매일의 생활이 불안과 무서움의 삶이었기에 우리 딸들은 너무나 힘도 못쓰고 눌려서 살아온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생각만 하면 아버지가 너무도 미웠습니다. "결혼한 뒤에도 못다 하셔서 이렇게 나에게 아픔을 주시다니...." 하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이 가실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한편 마음을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도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해 지셨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어떻게 대해 주셨든, 나는 아버지로 인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는가 생각하니, 조금 전에 아버지를 향해 심한 넋두리를 한 것이 뉘우쳐졌습니다. 나는 눈물을 닦은 후 다시 힘을 내어 생활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제 부모님도 시골에 가시고 나는 생활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부업을 찾았습니다. 수출품으로 나가는 스웨터를 털실로 짜는 일이었습니다. 미영이의 약값이 너무나 많이 들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더니 바쁘게 생활하는 가운데 벌써 미영이의 나이가 3살이 되었습니다. 막 두 돌을 지냈습니다. 아직도 아랫목에서 뒹굴고 있어야만 하는 미영이였습니다. 날마다 누웠던 곳으로만 누워서 한쪽 머리통이 반들반들하여 머리털이 날새가 없이 대머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느정도 말귀도 알아듣고, 누워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했지만, 머리통은 조금 더 커졌고 도저히 가눌 줄을 몰라했습니다. 제발 머리만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안타까왔습니다.
미영이가 세 살이 되던 그 해 가을에 나는 둘째 딸아이 미선이를 출산하였습니다. 미선이는 제법 또랑 또랑하게 발육도 빨랐고, 백일이 되던 때에는 고개를 빳빳하게 가눈 채 이 사람 저 사람을 돌아다보며 응얼이는 것이었습니다. 때없이 누워있는 자기 언니가 자못 불쌍한지, 그쪽을 향해 무어라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로 종알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이미 지쳤고, 미영이의 병은 모든 의학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만 전폭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아랫계단에 세워진 작은 개척교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시간이 나는대로 그곳 교회에 들어가 미영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생활을 갖었습니다. 아직 개척한 지 얼마 안되는 작은 교회였기에, 바닥도 마루가 아닌 가마니를 뜯어서 깔아 놓은 모습이었습니다.
한밤 중에도 나는 아이들을 잠재워 놓고 교회에 나와 밤이 맞도록 쳘야기도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간절한 심정으로 부르는 찬송과 함께 쏟아지는 눈물은 강물처럼 여울져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없이 외치다 보면, 어느새 새벽을 알리는 밝음이 창문으로부터 신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겨울도 가고 따뜻한 봄이 왔습니다. 미영이의 나이는 4살이 되었고, 미선이는 2살이었습니다. 미영이의 시선속에서 우울한 나날만을 보내다가 미선이의 재롱떠는 모습을 보게되니, 조금은 내 마음이 우울증에서 갈아 앉을 수도 있었습니다. 10개월이 되자 미선이는 벌써부터 "따따따"하며 걸음마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소리도 제법 잘하고 아랫니가 쫑긋하니 두 개가 나와 있어서 과자를 주면 깨물어 먹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방 아랫목에 누워 바라보고 있는 미영이를 손가락질 하며, 자기 딴에는 누워있는 것이 우습다는 듯이 지껄여대곤 하였습니다.  나는 미선이가 재롱을 부리고 점점 자라 갈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더욱더 아픔이 이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미영이가 너무나 불쌍하고 애절해서 못견디었습니다. "미영아!" 하고 부르면 얼른 방바닥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씽긋 웃어줍니다.
이 세상에 나 하나만 이런 고통과 아픔을 느끼며 살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미선이가 돌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돌잔치를 크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미영이의 돌날 충격을 받았던 나로서는 조용히 지내고 싶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푸짐한 보따리를 머리에 이시고는 힘들게 올라 오셨습니다. 역시 기쁜 때에 나 슬픈 때에나 큰 힘이 되시는 분은 우리 어머니뿐이었습니다. 며칠 후 내 동생 명환이도 이젠 피곤에 지쳐 고달픈지 이젠 엄마 따라 이천 집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미영이 곁에서 늘 자던 동생인지라, 떠나기 전 미영이를 안고는 한동안 눈물짓고 있는 모습이 가엾게 보였습니다. 동생이 가는 날도 미영이는 방의 아랫목에 누운 채 곁에 서 있는 이모의 스타킹 신은 종아리를 재미있는 듯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빙그레 웃고있는 것이었습니다.
산비탈을 내려가며 얼마 후에 또 오겠다는 여동생의 모습을 바라보니, 그 동안 우리 좁은 집에서 고생해 가며 미영이를 위해 너무나 애쓴 동생이었기에, 제대로 대접도 못받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느덧 미영이가 5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어떤 날 갑자기 미영이에게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병명은 이질이었습니다. 그 더운 여름날 곱똥을 싸고 심지어는 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웬일인지 병원에 다녀도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미선이는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둔 채, 나는 미영이의 병간호에만 여념이 없었습니다. 거의 두 달 이상을 앓았을까. 이제는 그나마 미영이의 통통했던 얼굴도 가죽만 남았고, 큰 눈은 더 커져서 볼 수 없었습니다. 잘 먹지도 못하지만 10분이 멀다하고 변을 보는데, 이제는 기저귀에 핏덩이만 묻어 나왔습니다.  나는 물을 길어다가 기저귀를 빨아대기 만도 기진맥진하였습니다. 밤이면 아빠가 미선이를 맡아서 돌보고, 나는 미영이 곁에서만 지내기가 일쑤였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작성자나동석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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