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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어라는 이름의 폭력

인권이 던진 질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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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케어팀 나와, 이 사람들 치워!” 경찰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경찰 옷 위에 조끼를 입은 대대를 향해 외친다. 성주 소성리 앞에서 사드추가배치를 막기 위해 참여했던 종교인들을 끌어내라고 ‘종교CARE팀’에게 지시한 것이다.

지난 9월 6일과 7일에 걸쳐 정부는 경북 성주 소성리에 사드를 추가 배치했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 400여 명이 모였다. 성주 주민들만이 아니라 종교인들도 그곳에 있었다. 특히 성주 소성리는 원불교 성지라 원불교 교무들(원불교의 지도자들은 교무라 부른다)과 교도들이 지속적인 사드반대운동을 펼쳤다. 이날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 8,000명을 동원했다니 종교CARE팀이 아니어도 폭력의 강도는 매우 강했을 것이다.

 

종교CARE팀=특정 집단에 대한 통제와 폭력

사드(THAD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는 미국이 북한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는 미사일 방어체계지만 사드는 가까운 곳이 아니라 먼 곳을 목표로 하기에 사실상 중국과 러시아를 대상으로 한 전략무기라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그래서 중국이 엄청나게 반발을 하고 있다. 중국 내 롯데마트가 철수할 정도로 한국 물건을 거부하고 한국관광도 줄이고 있는 정도다. 문재인 정부는 급작스런 사드 배치에 북한의 계속된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새 정부가 박근혜 정부와 다르게 환경영향평가와 주민 동의 없이 배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파기한 것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무튼 이때 처음 등장한 게 ‘종교CARE팀’이다.

새 정부가 ‘인권’을 종종 언급하며 강조하고 있고, 경찰은 검찰과의 수사권 조정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라 수사권을 받기 위해 최근 ‘인권친화적 경찰’의 모습을 보이려 애쓰고 있다. 예전보다 집회금지도 줄이고 경찰개혁위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동기가 어떻든 그 애씀이 실질적인 ‘인권친화’의 변화면 좋겠다. 그러나 성주 사드 배치과정에서 보여준 폭력은 단지 이미지 관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줬다. 그 폭력의 과정에 ‘종교CARE팀’이 있었다.

처음 교무님, 신부님, 목사님들은 6일에 등장한 ‘종교CARE팀’을 보고 ‘우리를 보호하려나 보다’하며 정권 교체가 실감된다는 담소를 나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들은 이전 경찰과 똑같이 종교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신부들이 기도하기 위해 만든 기도처(성소) 천막을 부셨고, 목사들이 신도들과 시민들이 함께 예배할 수 있도록 만든 천막에 있는 십자가를 경찰이 밟고 있었다. 원불교 여자 교무님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쪽진 머리를 경찰이 잡아 그를 질질 끌고 가기를 수십 번 했다. 신부나 목사도 사지가 들려 끌려 나왔다. 팔다리가 꺾이고 멍이 들고 콘크리트 바닥에 쓸렸고, 끌어낸 사람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부상을 당하고 신부복이나 법복이 찢어졌다. 항의하는 여자 종교지도자에게 ‘아줌마’라며 비웃거나 “남자 경찰들이 있으니 좋지?”라는 성희롱도 서슴지 않았다. 인권은 볼 수가 없었다. 결국 이들이 말한 ‘케어’란 폭력을 가리는 말일 뿐이었다. 종교인을 표적으로 삼았으니 종교인들은 경찰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성직자들은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반면 종교CARE팀 소속 경찰들은 당당했다. 종교인들을 어떻게 하든 자신의 업무라 괜찮다고 여기는 듯했다. 경찰관리의 표적이 된 집단이 자유로운 집회시위의 권리를 누릴 수 있을까? 이러다 나중에는 장애인케어팀, 노동자케어팀처럼 특정한 집단을 표적삼은 경찰대응팀이 나오지 않을까.

 

일방적인 돌봄서비스제도와 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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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CARE팀은 특정 집단에 대한 폭력을 케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어느 종교인도 경찰에게 케어(돌봄)를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요상한 이 팀을 구성했다.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필요에서 만들어놓은 팀이지만 명칭은 마치 대상자인 종교인을 위하는 조직으로 보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서 케어(돌봄)의 일방성을 이미 많이 보아왔다.

우리가 흔히 케어라는 이름을 많이 듣는 경우는 헬스케어, 피부케어 등이다. 기술적 지원을 전문성으로 상품화하고 포장할 때 케어라는 명명을 사용하곤 한다. 그에 반해 정작 돌봄 영역에서는 케어보다는 직종의 이름으로 불리곤 한다. 노인요양(요양보호사), 보육, 장애인활동보조(활동보조인) 등으로 말이다. 그런데 돌봄을 수행하는 노동자들 대부분 여성 직종이다. 국가가 추진하는 복지에서 이러한 돌봄서비스는 성별화되고 저평가된 노동이다. 역사적으로도 돌봄은 여성들이 무임금으로 집에서 하던 일들 자체가 저평가되고 비가시화됐던 것과 흡사하다. 돌봄서비스를 주요한 노동으로 보고 당사자들의 욕구를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가 돌봄에서는 중요하다. 장애인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한 보살핌(돌봄)을 잘 누리기 위해 필요한 요건이다. 그런데 현재 공적 서비스체계의 돌봄은 매우 일방적이다. 국가가 돌봄은 중요하게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이용자의 욕구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서비스의 제공이나 평가도 산술적으로 접근한다. 심지어 돌봄관계에 있는 두 주체인 돌봄노동자와 이용자를 감시하기까지

한다. 지난달에 활동지원인노동조합에서 정부의 노동 감시를 증언하는 자리가 있었다. 이른바 부정수급을 막겠다는 취지로 중계기간, 지방자치단체나 사회보장정보원 등에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이용자와 활동보조인이 같은 공간에 있는가를 확인하며 감시한다고 했다. 피해자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이용자 모두였다. 부정수급을 막는 건 복지재정의 낭비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지만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부정수급보다는 부족한 활동보조서비스로 고통 받고 있지 않은가. 국가재정만을 중시하는 접근 결과, 장애인 당사자는 이동은 물론 용변을 보는 등의 생리적 욕구도 참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게다가 장애등급제로 급수에 따라 돌봄을 받는 시간이 정해져, 급수에 따라 병원비며 연금이며 다르다. 장애등급제와 활동보조서비스제도가 장애인당사자가 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복지라는 이름의 돌봄제도가 장애인의 자립을 막고 시설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비용의 문제로 정부가 주산알만 튕기는 동안 권리는 사라지고 이름만 남는다.

 

평등한 돌봄관계가 가능하려면

주산알만 튕기는 돌봄제도는 돌봄제공자와 이용자 간의 평등한 소통도 어렵게 한다. 돌봄은 돌봄을 제공하는 자와 받는 자 간의 상호작용이 없이는 진행될 수 없기에 일방적이어선 안 된다. 어쩌면 돌봄의 주체는 제공하는 자와 받는 자 모두라 할 수 있다. 돌봄노동은 돌봄 관계를 떠나서 상상하기 어렵다. 진행도 평가도 불가능하다. 상호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노동자가 일방적으로 이용자를 돌본다고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이용자의 지위를 강조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서로를 의식한 서로에 대한 존중 없이 돌봄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돌봄에는 신체활동지원만이 아니라 정신적, 관계적 지원의 속성도 포함돼 있어서다.

신체활동의 경우에도 신체, 즉 자신의 몸을 돌봄노동자에게 맡겨야 하는 장애인에게는 프라이버시 영역이다.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기에 서로의 존중과 정서적 교류 없이 기능적으로 수행되는 일이 아니다. 신체활동조차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라는 것을 돌봄노동자가 의식해야 한다. 생리적 욕구까지 돌봄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돌봄노동자가 이용자를 존중하지 않으면 돌봄과정에서 장애인 같은 이용자의 권리를 ‘의도와 상관 없이’ 침해할 수 있다.

돌봄이 보살핌이 아니라 관리를 위한 보호로 뒤집히기 쉽다. 반대로 신체활동지원만이 아니라 때로는 정서적 지원을 하는 돌봄노동의 특성에 기대 이용자가 활동보조 이외의 시간까지 관계를 확장하기 쉽다. 돌봄노동자의 노동시간, 휴게 등이 침범될 수 있다.

이렇듯 장애인과 돌봄노동자의 관계는 여러 위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쉽지 않다. 장애인/비장애인 위계만이 아니라 제공자/이용자의 위계 말이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인이라는 약자의 위치에 설 때도 있고, 돌봄이 시장화된 복지국가에서 이용자의 평가가 영향을 미치는 우위에 서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않으면 권력으로 작동될 수 있기에 서로를 존중하는 반차별 감수성이 양자에게 요구된다. 장애인이 타자화된 사회, 돌봄노동이 저평가된 사회에서 상호존중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다고 포기할 수 없다. 평등한 만남과 소통이 되는 케어(돌봄)를 꿈꾸어 본다.

작성자글. 명숙/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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