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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다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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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처음 만들면서 함께 외쳤던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감히 역사를 만드는 길이라는 자부심으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에서 활동을 해온 지 벌써 6년이 지나고 있다. 그 사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시행 10주년을 맞이하였고, 난 오늘도 장애인의 차별과 인권침해에 대응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싸울지를 고민하고 있다.

 

장애를 갖고 있었던 나의 가족들

나의 친가는 가족력으로 당뇨병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아버지의 형제분들, 그리고 사촌형제들까지 당뇨는 많은 가족들에게 찾아왔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친하게 지내던 사촌언니 둘이 연이어 당뇨로 시력을 잃게 되면서 아주 가까이에서 장애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장애와 관련해 경험하게 된 나의 첫 사건은 언니의 이혼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당뇨로 시력과 신장 기능을 모두 잃게 된 큰언니는 남편의 폭력과 폭언에 결국 갓난아기를 데리고 친정인 나의 고모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삶의 굴곡이 많았던 언니는 오래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장애인이 되었다고 부인과 아이까지 버린 그 인간은 나쁘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했다.

이후에 당뇨로 시각장애를 갖게 된 작은언니는 큰언니의 아이를 성심성의껏 키우며 시각장애와 관련한 모임과 활동들을 활발하게 이어갔다. 장애와 관련한 나의 경험은 언니들을 통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가왔고, 결국 지금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했다. 물론 이후에도 당뇨는 많은 나의 가족들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게 했다.

 

장애인단체와의 인연, 함께걸음으로 한걸음 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시각장애인인 사촌언니의 소개로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시각장애인선교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선교회를 운영하던 분은 엄청난 재력을 가진 외과의사로 중도실명하게 되면서 시각장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주요업무는 장학금을 받을 학생을 추천받아서 선정하고 찾아가서 장학금을 전달하고,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의 감사편지에 답장을 하고 안부를 묻는 일이었다. 업무특성상 그리고 시각장애 학생들과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서 함께 일하던 동갑내기 시각장애 친구에게 점자를 배웠다. 물론 지금은 너무 사용하지 않아서 가물가물하지만 여섯 개의 점으로 표현하는 문자는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장애와 관련한 나의 활동은 동정과 시혜에 공감하는 정도였다. 엄청난 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선교회 회장은 지금 생각해보면 겨우 학생 한 명에게 일 년에 5만 원이 안되는 돈을 장학금으로 주었던 것 같다.

물론 25년도 넘은 일이고, 한 사람에게만 주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에게 쬐끔씩 나누어주면서 생색을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장애인인권과 관련해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장애인인권이라는 말이 쑥 다가오는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장애우대학’이라는 오프라인 강의였는데,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장애인인권을 주제로 매주 금요일 저녁 강의를 듣고 이야기도 나누고 술도 함께 나누는 그런 자리였다. 아직 20대 초반의 나에게 그 교육은 내 인생을 바꾸는 일이 되었다. 몇 개월간 이어진 그 교육 안에서 처음 장애와 인권을 만나고 시혜와 동정을 베풀고 있는 단체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첫 번째로 내가 활동했던 단체는 이후에 관련한 활동에 시들해진 운영자의 마음과 직원들의 비인권적인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자원활동을 핑계로 신나게 출근도장을 찍게 되었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함께걸음’ 편집실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고 나의 두 번째 단체 활동이 시작되었다.

‘함께걸음’을 통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시 연구소의 제일 막내였던 나는 선배들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인권과 사람을 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걸음 편집부에서 함께했던 선배들의 글과 월간지에 대한 열정에 크게 감동하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너무나 뿌듯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렇게 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후회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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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아이들, 엄마로서의 활동

후회 없을 만큼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그 만큼 사람을 지치게 했다. 너무 많은 것을 쏟아내고 결국 도망치듯 ‘함께걸음’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결혼하면서 가정 안에서 잠시 숨을 고르기로 했다. 그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있다가 혼자 보내는 시간은 한가하고 여유로웠다.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아이를 키우면서 고민을 나누고 다른 엄마들을 만나면서 지역사회 안에서 다시 여성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먹거리를 중심으로 환경과 자연과 함께하는 육아를 고민하면서, 유기농매장을 함께 운영하고, 아파트 안에서 유기농 식생활 교육과 모임을 진행하고 아이를 업고 다시금 바쁘게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지역사회 안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다시 시작된 인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원래 나는 사회복지전공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함께걸음에서 일하는 동안은 월간지 만드는 편집팀에서 원고 쓰고 책 만들고 하는 업무를 주로하면서 다른 활동들을 했기 때문에 주변의 권유에도 특별히 다시 사회복지를 공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느정도 자라고 지역사회 활동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공부거리를 다시 찾게되었고, 내가 알고 있는 현장을 학문으로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또한 순수하게 공부를 시작하는 것 뿐이었지, 당시에 다시 장애쪽 활동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사회복지 실습을 할 즈음 나의 움직임을 감지한 지인들의 소개로 지금의 단체에서 실습을 명목으로 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잠깐의 외출로 끝내려고 했던 마음과는 달리 일손이 부족했던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에 활동가가 되어버렸다.

 

어렵고, 힘들고, 그런데 재미있나?!

우리집은 강화대교를 바라보고 큰길에서 4km나 들어가야 하는 아주 외진마을에 있다. 남편과 자연에서 아이들을 키우자는 마음으로 선택한 공간인데, 난 지금 그 시골살이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루 왕복 100km의 거리를 도시로 출퇴근하고 있다.

작은 마당도 뒷산도, 마당에 텃밭을 가꿀 틈도 없이 새벽에 나가 밤중에 들어오며 동네에서 보는 것은 그저 맑고 초롱한 별뿐이고, 그런데도 매일같이 이 출근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뭘까?

20년이 넘는 시간을 겨우 두어페이지에 정리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래도 가끔 나에게 어떻게 처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냐고 물어오는 새내기 활동가들에게 이 두서없는 글이 짧은 답은 되려나? 왜 계속 여기에 있는지는 그저 물음표로 남겨놓아야할 것같다. 지체장애를 갖고 있는 남편에게 아직도 빨리 좀 오라고 채근하는 나의 이 얕은 장애감수성을 보면서, 나도 왜 이곳이 그리고 이 일과 사람들이 이렇게나 좋은지 알 수 없으니까!

작성자글. 김성연/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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