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운동이 넓혀준 세상, 함께 폭력의 질서를 흔들자! > 기획 연재


기획 연재

미투운동이 넓혀준 세상, 함께 폭력의 질서를 흔들자!

인권이 던진 질문

본문

온몸으로 말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1월 29일, 방송에서 성폭력 피해를 말하는 서지현 검사의 모습이 딱 그랬다. 쿵쾅하는 심장을 애써 누르는 듯한 손짓과 표정, 떨리는 목소리…. 8년이 지나도 그녀의 고통이 현재진행형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팠다. 화가 났다. 무엇보다 세상이 놀란 이유는 그녀가 검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검사란 무소불위의 권력, 그 자체 아닌가. 그런 검사마저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성폭력의 대상이 되다니.

그리고 성폭력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도 들었다. 2010년 안태근 검사에게 당한 성추행을 호소하자, 그녀의 행실 운운하거나 참으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심지어 해결은 하지 않은 채 피해자를 멀리 통영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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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한 당신들, 고맙고 존경스럽다

그 후 3개월 동안 봇물 터지듯 연극계, 영화계, 학계, 종교계, 정치권 등 여러 영역에서 성폭력 증언인 미투(#MeToo)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너무 오래된 성폭력범죄라 공소시효가 끝난 경우가 많았다. 가해자 한 명에게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여럿인 경우도 비슷했다. 어떻게 수많은 피해자가 나오도록 성폭력을 방치했을까. 왜 그녀들은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여기서 읽어내야 할 것은 바로 성폭력을 오래도록 방치한 조직과 제도, 문화, 법제도라는 사회구조가 뒷배였다는 사실과 피해자들이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 성폭력에 대한 편견일 것이다.

특히 가해자가 해당 분야에서 막강한 권력이 있다면, 피해를 폭로한 결과는 가해자 처벌 같은 해결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돌아올 불이익뿐이다. 불이익은 가해자가 막강한 권력이 있지 않더라도 생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지지하기보다는 피해자를 멀리한다. 그동안 쌓은 피해자의 경력을 의심하며 피해자와 함께 활동하기를 꺼려한다. 강간 정도의 성폭행이 아니면 성추행이나 성희롱 정도는 넘어갈 줄 아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사회생활 할 줄 모르는 까탈스런 사람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일하는 것을 성폭력이라는 불미스런 일에 자신이 연루되는 것으로 여기며 피해자를 슬금슬금 피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지인은 성폭력사건을 공론화한 이후, 주변 사람들이 마치 그녀가 전염병에 걸린 양 반경 1m 이내로 접근하지 않더란 말을 씁쓸하게 한 적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 경험을 폭로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하는 엄청난 모험이다.

그럼에도 그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분노와 옆에 있는 그/녀의 지지자들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 피해자가 고통과 고립에 갇혀 있는 동안,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승승장구하는 가해자들을 보며 피해자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했을까. 참고 참다 목구멍까지 숨이 막혀왔을 때 그/녀들은 숨을 쉬기 위해 그들의 범죄를 말했을 것이다. 더 이상 비슷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야 고통이 깊어지지 않을 거 같아서 입을 연 것일 게다. 그래서 나는 미투운동에 함께한 그/녀들이 존경스럽고 고맙고 미안하다.

 

펜스룰과 남성연대

미투운동이 활발해지자 펜스룰(Pence Rule)이라는 게 한동안 유행했다. “구설에 오를 수 있는 행동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아내 외 다른 여성과는 단둘이 식사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미국 부통령 펜스의 말을 빗댄 것이다. 펜스룰을 마치 성폭력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치장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여성 배제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남성들은 언제나 여성을 성희롱, 성추행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시인한 것이다. 문제는 펜스룰로 인해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피해를 본다는 점이다. 실제 기자인 지인이 얼마 전 기업체에서 불러 식사를 하러 갔더니 남자 기자들만 있더란다. 그래서 왜 다른 여자기자들은 안 왔냐고 물었더니 문제 생길까봐 부르지 않았다고 업체는 말했단다. 펜스룰이라는 이름으로 여자기자들은 취재원으로부터 배제되는 피해까지 입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남성들의 술 문화에 함께하지 않아서 그를 불편해 한다고 했다. 노래방에 가도 도우미가 있어야 하는 문화에서 거기에 함께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거나 대신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는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는 남성연대를 무너뜨리는 까탈스러운 사람일 뿐이다. 그러는 동안 그는 고급정보에서 배제되었을 것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술문화로 단결하는 남성들의 연대, 그것이 성폭력을 양산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펜스룰은 남성들의 자성이 아니라 미투운동에 대한 공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해야 할 것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남성연대, 유흥문화를 해체하는 일이다.

 

흔해빠진 성폭력, 미투가 바꿀 세상

지금 이윤택, 조재현, 안희정 등 유명인사의 성폭력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가해자가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지 않거나 최소한 직장 상사라도 아니면 마치 미투가 아닌 양 착각한다. 하지만 성폭력은 불평등한 젠더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여자니까 함부로 해도 된다는 생각, 여성을 동료로 보지 않고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해도 되는 사람으로 여기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여성의 몸에 손을 대도 문제가 아니라고 배우고 듣고 자란 탓이다. 그들이 흔하게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행위가 성폭력이다.

흔해빠진 성폭력에 관대한 한국의 사법부 탓에 성폭행을 신고해도 불기소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작년 한해 신고된 성폭력 범죄 중 40%만이 기소됐을 뿐이다. 그러니 가해자들은 ‘친근함’의 표시였다고 변명하거나 피해자들이 ‘유혹해서’라고 적반하장할 수 있다. 설사 재판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가해자가 받는 벌금이나 형량은 매우 낮다. 집행유예가 절반이다. 게다가 가해자보다 피해여성을 더 비난하는 세상이니, 숨는 일은 가해자의 몫의 아니라 피해자의 몫이 되곤 한다. 그토록 떠들썩했던 안태근 검사의 성추행 폭로가 3개월이 다 됐지만 아직 별다른 진전이 없다. 여전히 사법부는 성폭력을 하찮게 여긴다는 반증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 사회에 너무나 흔해빠진 성폭력으로 그 피해를 호소하기는 쉽지 않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흔하게 겪는 성폭력을 미투하려면 피해자가 걸어야 할 게 많다. 꽃뱀이라는 비난, 사회생활 못하는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 융통성이 없는 사람, 이제 와서 가해자에게 보복하려 하는 저의가 뭐냐는 의심 등등 만만치 않다.

그러나 미투운동의 물결이 일렁이는 이 때를 놓치면 안 된다. 언제 반격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성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인 제도와 관행을 바꿀 때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에 대해 말하고 ‘그만하라!’고 외쳐야 한다. 그래야 성추행을 낭만으로 포장하는 일이 사라질 수 있다.

누군가 여성들의 손을 잡고 싶거나, 키스 등의 신체적 접촉을 하고 싶으면 제멋대로 판단하지 말고 상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상식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상대의 뜻을 묻는 건 낭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무례가 없어지는 일이다. 여성을 생각과 감정이 있는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더 이상 남성들이 상대여성이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무성애자인지도 모르면서 남성을 좋아할 것이라는 착각으로 들이대지 않게 해야 한다.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근거 없는 자신감을 풍기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작태가 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피해자를 옭매는 성폭력특별법

남성들이 여성을 낮은 지위,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바라보기에 법도 그렇게 짜여졌다. 2013년 성폭력특별법이 개정돼 비친고죄로 됐지만, 여전히 법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구조화돼 있다. 강간을 당했다 하더라도 피해자가 강력하게 거부의사를 했는지를 사법부는 따진다. 반면 강력한 거부행사로 가해자가 다치면 그건 또 피해자의 과잉방어가 된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남성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법은 장애인에게도 다르지 않다. 장애인 성폭력 처벌에 대한 규정인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6조는 피해자의 나이에 관계없이 피해자가 ‘신체 장애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항거불능 상태임을 이용해 간음 또는 강제추행’을 한 경우에 대해서 처벌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항거할 수 있는 상태의 장애인은 성폭력 피해를 입어도 가해자를 처벌하기란 쉽지 않다. 물리적 반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신체장애인이거나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정도의 지적장애여성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가해자의 접근에 쉽게 저항하지 못하는 위축감과, 가해를 보살핌으로 왜곡하는 의존성 등이 있는 장애 특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어 무죄가 되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 성폭력에 대한 편협한 이해가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범죄를 허용하고 있다.

미투운동으로 우리의 시야는 넓고 깊어졌다. 그동안 피해자들 본인이 어리숙해서 당했다고 스스로 자책했는데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증언으로 알게 됐다. 이 사회가 성폭력을 양산하고 심지어 성폭력에 관대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열린 장에서 성폭력만이 아니라 불평등한 젠더권력의 양상에 대해 더 많이 문제 삼아야 한다. 불평등의 질서를 더 흔들어보자!

작성자글. 명숙/인권활동가,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 운영위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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