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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여성 문제, 근본적 해결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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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 창간 30주년인 2018년을 맞아 편집부에서는 함께걸음이 다뤘던 주요한 장애계 이슈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각각의 주제가 이슈화 됐을 당시를 생생하게 떠올리는 인물을 통해 과거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지금까지의 변화와 앞으로의 미래상을 그려볼 예정이다. 네 번째 주제는 장애계에서의 또 다른 소수자 ‘장애여성’이다.

 

나는 서른 두 해를 살면서 내가 차별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며 살아 왔다. 아니 차별과 억압이 뭔지 몰랐다는 게 맞는 말일 것 같다. 나는 태어나 8개월 때쯤 열감기 때문에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가지게 됐다. 내가 원해서, 나의 부모가 원해서 장애인이 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장애여성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내가 ‘여성’이며 ‘장애인’이었기에 겪어야 했던 모든 상황들은 나뿐이 아닌 모든 여성장애인들도 경험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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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며, 다른 여성들도 그럴 때가 있듯이, 나 또한 치마를 입고 싶어 하던 때가 있었다. 치마 입은 내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이 “몸도 불편한데 치마보다는 바지가 났지 않냐?” 라고 한마디씩 했을 때도 그저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이려니 했다. 치마 입고 뒤뚱뒤뚱 걷는 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뚫어져라 계속해서 쳐다봤다. 나는 “쯧쯧~~”, “얼굴은 예쁜데 몸이 저래서 안됐어”, “저런 자식을 둔 부모는 오죽할까”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으며 살아야 했다. 첫 생리를 했을 때도 주위 사람들은 “너도 생리를 하는구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나는 생리를 하면 안 되는 건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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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장애여성 모임에 참여하며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알게 됐고 그로 인해 내가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억압과 폭력이었고, 차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장애 때문에 겪어야 했던 외로움과 아픔들, 차별, 억압과 폭력들을 다시는 다른 여성장애인들은 겪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04년 7월호 함께걸음 ‘중증장애인 일상다반사(9)’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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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장애여성으로 산다는 것

“가부장제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막강한 가장의 울타리에 갇혀 ‘나의 주체성’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 또 가정에서 장애인은 쉽게 배제되고 부정되는 존재다. 여성과 장애,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가진 여성장애인의 삶은 필연적으로 주체성, 자존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수밖에 없다.”

10여 년 이상 (사)한국여성장애인연합에 몸 담근 이희정 전 사무처장은 한국사회에서 장애여성의 삶이 억압과 배재 등 복합적 차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처했다고 말했다. 장애인의 사회참여를 가로막는 장벽이 지금보다 견고하던 과거를 살아온 당사자들 증언에 따르면, 장애를 가진 자식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 부모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에서 교육을 시키고 기술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 수혜가 장애여성에게까지 닿는 경우는 드물었다.

가부장제가 뿌리 깊던 당시 여성들에게 교육, 기술보다 아내, 엄마로서의 역할이 더 중시됐기 때문이다. 결국 이 역할을 ‘잘’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장애여성은 가정에서, 교육에서, 노동에서 쉽게 배제됐다. 자연히 장애여성의 삶의 반경은 집 안으로 한정됐고, 개인의 삶에서의 모든 선택권한 역시 가족에게 쥐어졌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정에서, 사회에서 그들의 ‘존재’를 찾는 일은 더 어려웠다.

장애여성네트워크 김효진 대표는 현재까지도 장애여성에게 가해지는 복합적 차별은 지속되고 있으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부정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과거에 비해 여자이기 때문에 받아야하는 불이익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성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한다. 특히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의 여성성이 발현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성이라면 경험할 수 있는 연애, 결혼, 출산 등의 가능성을 애초에 배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살아간다고 한들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한 삶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

이희정 전 사무처장은 최근 한 부모로부터 받은 상담 내용을 밝히며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부정당하고 있는 장애여성의 현실을 토로했다. “갓 생리를 시작한 딸의 임신을 제한할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여기에도 당사자 본인의 의사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실제로 이 같은 부모의 요구는 오랜 과거부터 꾸준히 있어왔고, 관련 시술들이 아직까지도 암암리에 일어나고 있다. 단순히 부모만의 문제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장애인이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장애여성 운동의 시작

국내에서 장애운동이 본격화된 1980년대 ‘장애여성’ 이슈는 생물학적 성에 초점을 둔 임신, 출산 등에 한정됐다. 당시 함께걸음에서는 성폭력과 가정폭력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장애여성의 문제를 이슈화시켰다.

김효진 대표는 당시 부각된 성폭력 이슈가 장애여성의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 긍정적 결과를 가져온 한편, 당사자들의 삶을 더 고립시키는 부작용을 동시에 초래했다고 말했다.

“장애여성 운동의 불가피한 과정이었지만, 매번 성폭력 이슈가 공론화될 때마다 장애여성은 마치 성폭력만 당하는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다. ‘장애여성은 성폭행을 당한다’는 인식이 나를 포함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더 움츠러들게 했고, 자신이 장애여성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히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1994년에 이르러서는 국내 최초의 여성장애인 자조모임 ‘빗장을 여는 사람들’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결성됐다. 국제사회 장애인 운동사에서 ‘자조모임’의 개념은 서비스의 수혜자로 대상화되던 당사자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빗장을 여는 사람들’ 구성원들은 1995년 북경세계여성대회와 1997년 워싱턴에서 개최된 국제장애여성 리더십포럼 참가를 준비하면서 장애여성을 둘러싼 더 다양한 이슈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 계기들로 촉발된 장애여성 활동이 주체성을 갖고 본격화된 것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다. 국외 활동 이후 여성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남성 중심화 된 기존 장애단체를 떠나 독립된 단체 결성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후 오랜 시행착오 끝에 ‘장애여성공감’, ‘(사)한국여성장애인엽합’ 등이 차례로 발족했다.

 

주체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

국내 최초로 독자적 장애여성 단체 ‘장애여성공감(공감)’은 1998년 ‘빗장을 여는 사람들’의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됐다. 공감의 창립멤버인 배복주 대표는 한국사회에서 장애여성들을 포함한 다양한 소수자들이 낮은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구조를 해체하는 작업에 주력해왔다고 소개했다.

“장애여성의 현실이 왜 이럴까 의문을 갖다보면 결국 성차별 문제가 빠지지 않는다. 유년시절 교육의 기회에서 배제당한 많은 여성들은 아직까지 힘을 가진 이들에 의해 대상화되고 속박된 삶을 살고 있다. 여기에 장애라는 요소가 더해져 복합적인 차별을 겪고 있는 장애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권운동이 개별적 경험을 어떻게 언어화 시켰느냐에서 시작했듯이, 그 경험들을 수집해 유통시키고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우리의 운동이다.”

이듬해 출범한 ‘(사)한국여성장애인엽합(여장연)’은 전국단위 연합체로 여성장애인의 권리보장과 관련한 활동을 해왔다. 이희정 전 사무처장을 포함한 활동가들은 장애계에서도 소외된 위치에서도 꾸준한 활동을 지속했다.

“우리의 요구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것이었다. 교육받게 해 달라, 일하게 해 달라, 안전하게 해 달라... 이 기본적인 요구들이 가족에 의해서, 사회에 의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또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더 쉽게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요구들이 현실화되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지만, 성과가 아예 없던 건 아니다. 여장연에서 진행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시범사업을 통해 지원하던 여성장애인 출산지원금을 제도화하는 한편, 장애인성폭력센터, 가사도우미 ‘홈헬퍼’ 제도도 생겨났다. 장애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한 지원이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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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하지 못하는 장애여성 문제

하지만 장애여성 이슈와 관련된 대부분의 요구들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 대표적인 하나가 ‘여성장애인 기본법’ 제정이다. 여장연을 비롯한 장애여성 단체들은 오랜 기간 여성장애인 기본법 제정의 필요성을 외쳤다. 기본법 제정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집단에서는 “현행 장애 관련 법률로 충분하다”고 주장하지만, 김효진 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장애인 복지법, 장애인차별금지법 등 장애관련 여러 법률들이 제정됐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 안에서 여성장애인은 소외된다. 한 예로 장애인 고용정책이 있지만, 여성정책연구원에서 성별에 따른 수혜율을 조사한 결과 여성은 1/3밖에 그 수혜를 받지 못했다. 나머지 사각지대에 현행 정책과 법률이 닿지 않는다는 증거다. 기울어진 수치를 의도적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여성장애인 기본법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희정 전 사무총장은 기본법 제정, 교육권 보장 등 변하지 않는 장애여성 이슈에 대해 “지겹다”, “다른 이슈는 없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답답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바뀐 게 없으니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할 수밖에 없다. 앞서 밝힌 몇몇의 파편적 제도만으로는 여성장애인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성차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교육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이면서 여성장애인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어울림센터’에 교육 사업이 확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부처에서는 1년 안에 검정고시 합격률을 제시하라는 둥 단기 실적을 요구하고 있다. 일평생 공부라는 걸 해본 적 없는 사람이 뚝딱하고 결과를 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장애인이 처한 삶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는 행정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적어도 3년의 기간을 두고 충분한 지원을 통해 한 개인의 삶이 뿌리부터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지켜봐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야 할 때

이희정 전 사무처장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운동을 통해 제도화된 유형들을 살펴보면, 모성권, 성폭력과 관련돼 있다”면서 “여성은 임신, 출산, 양육을 하고 몸가짐을 잘 해야 한다는 성 고정관념이 얼마나 뿌리박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발표된 제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에서 역시 여성장애인 영역은 역시 임신, 출산, 양육지원과 성폭력 예방 및 피해자 지원에 집중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희정 전 사무처장은 “정부는 언제까지 여성의 성 역할을 고정되도록 두고 볼 것인지 의문이다”라면서 생물학적 성 역할을 뛰어 넘은 다양한 여성장애인의 이슈들이 받아들여져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효진 대표는 장애여성에게 필수적 지원을 한 가지 꼽으라면 ‘장애여성성인권진흥원’과 같은 기관을 통한 성인권 보장이라고 말했다. “성인권을 협소하게는 성폭력 문제 수준에서만 생각할 수 있지만, 상당히 포괄적 개념이다. 성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성폭력을 당하고도 그게 문제인지조차 인식하지 현실에서 장애여성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되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장애여성의 정책적 지원이 확대된다고 한들 결국 시혜적인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작성자정혜란 기자  sousms1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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