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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으면서도 다른 시청각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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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석아, 내다!” 키가 186cm나 되는 이 장신의 청년 왼쪽 귀를 향해 크게 말하면,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를 알아듣고 반가움에 덥석 저를 껴안습니다. 그러고는 저에게 오랜만이라고, 반갑다고, 그동안 잘 지냈냐고 수화를 합니다. 제가 깜짝 놀랄 만큼 그동안 못 본 사이에 수화실력이 부쩍 늘어난 이 청년은 현재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조원석입니다. ‘시청각장애인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손잡다’의 대표이기도 하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려는 11월의 어느 날, 모처럼 원석이를 만나고 왔습니다.

 

같은 장애 유형, 다른 특성

원석이와 저는 둘 다 시청각장애인입니다. 아직 법적으로 규정돼 있지 않은 용어지만, 그래도 우리 둘 다 시각과 청각에 동시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시청각장애’라는 뚜렷한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장애 유형이라도 그 틀 안에서 정도와 특성이 다른 것처럼, 시청각장애도 다양한 특성으로 나누어집니다.

저는 눈은 저시력, 귀는 고도난청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잔존시력이 조금 남아있어 단독보행은 물론 혼자 달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누군가가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합니다. 반면 원석이는 눈은 전맹입니다. 오른쪽 귀는 전혀 들리지 않고 왼쪽에 잔존청력이 조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왼쪽 청력을 활용하여 전화통화가 가능하기도 하죠. 시각장애를 맹과 저시력, 청각장애를 농과 난청으로 크게 나누는 것과 비교해본다면 시각과 청각에 동시에 장애를 가진 시청각장애의 경우는 그 분류가 더 다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청각장애는 그 장애의 특성에 따라 의사소통이나 통역을 받는 방법도 달라집니다. 위에서 저와 원석이가 반갑게 인사를 나눈 장면을 보면, 저는 원석이에게 음성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원석이는 저에게 수화로 의사를 전달합니다. 원석이의 잔존청력이 남아있는 왼쪽 귀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원석이는 제가 볼 수 있는 거리만큼 가까이에서 수화를 구사하는 거죠. 또 우리끼리 앉아서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는 노트북을 이용합니다. 저는 말을 하고, 원석이는 노트북에 제가 볼 수 있는 만큼 글씨를 크게 해서 타이핑을 치는 것이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이 노트북에 제대로 입력되고 있는지 전혀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원석이가 감으로 치는 타이핑 실력은 꽤나 수준급입니다.

우리끼리 대화는 가능하지만, 둘 다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역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가진 장애특성에 따라 통역을 받는 방법도 달라집니다. 저는 노트북이 있는 상황에서는 큰 글씨로 문자통역을 받는 방법을 가장 선호합니다. 긴 내용이라도 정확하게 통역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이동 중이거나 움직이는 등 노트북이 없는 상황에서는 손바닥 필담이나 근접수화로 통역을 받습니다. 원석이도 긴 내용을 정확하게 통역 받기 위해서는 문자통역을 선호하는데, 전맹으로 컴퓨터 화면의 글씨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한소네(점자정보단말기)를 이용합니다. 한소네를 노트북에 연결하여 노트북에 타이핑하는 내용을 한소네의 점자를 통해 통역을 받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 원석이의 왼쪽 귀에 음성으로 말해주거나 손바닥 필담, 원석이의 손을 잡고 수화로 내용을 전달하는 촉수화의 방법도 있습니다.

보통 둘 이상의 청각장애인들에게 통역하기 위해서는 수화통역사 한 명이 수화를 하면 청각장애인들이 다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청각장애인은 시각에도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사자 한 명당 통역을 해줄 사람 한 명이 필요합니다. 저와 원석이에게 모두 해당되는 통역방법이 손바닥 필담인데, 이 방법 역시 한 사람이 둘 이상의 시청각장애인에게 동시에 할 수는 없겠죠?

문자통역을 받더라도 저시력인 경우 볼 수 있는 만큼의 큰 글씨를 선호할 뿐만 아니라 선호하는 글씨체도 시청각장애인마다 다 다릅니다. 전맹 시청각장애인에게 문자통역을 할 경우에는 한소네 1대당 노트북 1대만 연결할 수 있습니다. 수화통역의 경우에는 시청각장애인에게 근접수화나 촉수화로 통역이 가능합니다. 근접수화의 경우 저시력인 시청각장애인이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수화를 구사하고, 촉수화는 전맹인 시청각장애인의 손을 잡고 구사하기 때문에 역시 시청각장애인마다 통역자의 통역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뷔페에서의 식사

시청각장애라는 장애 유형의 특성과 그에 따른 의사소통이나 통역방법을 이야기했지만, 시청각장애인도 장애인 당사자이며 더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시청각장애’라는 것에 특별함을 부여하기보다는 그냥 ‘누구나’ 삶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는 아주 소소하고 사소한 일상의 일부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그 시청각장애로 인해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한번씩 든든하고 배부르게 마음껏 먹기 위해 방문하는 뷔페, 이곳은 시청각장애인이 어떻게 이용할까요?

뷔페는 음식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접시에 담아 와서 먹습니다. 각 음식의 코너마다 어떤 음식인지 글씨로 적혀 있기도 하지만, 시력이 좋은 분들은 그냥 눈으로 딱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음식인지 아는 경우가 많지요.

저시력인 저의 경우에는 솔직히 음식들이 다 비슷해 보입니다. 음식마다 적혀있는 글씨를 제대로 읽기엔 너무 가까이 고개를 숙여야 하고, 또 어떤 음식인지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도 고개를 많이 숙여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 뷔페를 가면 처음 음식을 담을 때 동행한 지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우선 아무거나 접시에 담아옵니다. 담아온 음식들의 맛을 보고 어떤 음식인지 파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부분의 음식을 접시에 담을 때 그 음식의 위치를 잘 기억해두었다가 맛있으면 두 번째로 접시에 음식을 담으러 갈 때부터는 혼자서 잘 담아올 수 있게 됩니다.

한번은 제가 접시에 음식을 담아서 자리로 왔는데, 동행한 분이 이렇게 물어봅니다. “벌써 디저트를 드시게요?” 제가 담아온 접시의 한쪽 편에 새우깡 비슷한 과자가 몇 개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과자인 줄 알고 담아온 게 아니라 튀김인 줄 알았습니다. 감자튀김처럼 보였거든요. 저의 눈에는 튀김과 과자가 비슷하게 보였던 거죠.

지난겨울에는 스승님과 한식 뷔페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뭐라고 부탁을 하기도 전에, 스승님께서 같이 음식이 있는 곳을 다니면서 하나하나 어떤 음식인지 저의 손에 적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했죠. 그런데 저와 스승님 둘 다 한쪽 손에는 접시를 들고 있어서 계속 손에 글을 쓰면서 이동하기가 조금 불편했어요. 특히 접시에 계속 음식이 쌓일수록 무거워지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어떤 음식인지 정확하게 전달을 받으니까 제가 원하는 음식을 분명하게 알고 접시에 담을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원석이처럼 전맹의 경우에는 동행한 분과 함께 이동하면서 접시에 음식을 담습니다. 음식이 있는 곳을 한 바퀴 쭉 같이 가면서 어떤 음식이 있는지 모두 불러 달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같이 접시를 들고 음식들이 있는 곳을 한 칸 한 칸 이동하면서 어떤 음식인지 말해줄 때마다 담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음식을 새로 담으러 갈 때 동행인과 함께 가야 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뷔페는 친한 사람, 즉 서로 잘 아는 사람과 가는 게 편하다고 합니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가면 서로 취향도 다르고 먹는 속도도 다르니까 아무래도 맛을 즐기며 여유 있게 먹기에 불편함이 있겠죠?

 

좌충우돌 지하철 타기

제가 지난번에 서울역에서 인천의 모 역까지 혼자 지하철을 타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서울역에서 도우미 지원을 요청해서 지하철을 탔는데, 목적지인 인천의모 역에서 도우미가 저를 찾지 못해서 내리지 못하고 종점까지 가버렸지요. 지하철을 타기 전에 도우미에게 저의 장애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인천의 모 역에도 잘 전달해달라고 신신당부하고 탔는데도 목적지에 내리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결국 제 몸은 제가 챙겨야 하니까 스스로 잘 판단할 수 있어야 되겠죠. 대구에서는 지하철을 타면 내려야 하는 목적지까지의 지하철 역수를 마음속으로 외우며 세어 봅니다. 혹시 헷갈릴 경우에는 지하철 칸마다 위에 있는 안내 문구를 가까이 가서 보거나 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다음 역이 무슨 역인지 확인을 합니다.

그런데 경상도에서는 사투리를 쓰고 서울에서는 표준어를 쓰는 것처럼 대구와 서울의 지하철 시스템도 너무 다릅니다. 요즘 서울에 자주 가면서도 다음 역이 무슨 역이라는 안내 문구가 지하철 내부의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또 대구는 지하철이 1호선부터 3호선까지 있지만 서울은 그보다 훨씬 더 많고 복잡합니다. 사람도 정말 많이 타고요.

예전에 대구에서 지하철을 1시간 넘게 혼자 타고 이동해야 한 적이 있었는데, 지하철을 타기 전에 해당 역의 직원분이 저의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진을 제가 내려야 할 목적지의 역으로 전송했고, 그 사진 덕분에 제가 타고 있는 지하철의 칸에 서 있으니까 목적지 역의 직원이 쉽게 저를 발견해서 하차를 도와주셨습니다. 저처럼 시청각장애인인지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는 이런 방법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의 이러한 에피소드는 원석이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복잡한 서울에서 지하철을 혼자 타고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까요? 원석이는 혼자 지하철을 타야할 경우, 타기 전에 먼저 지하철역의 시스템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한다고 합니다. 본인이 출발하는 역에서 목적지까지 지나는 역의 정확한 수, 해당 지하철이 급행이면 어떤 역을 그냥 지나가는지 그럼 몇 번 만에 가는지, 환승해야 하는 구간은 어디인지, 하차해야하는 역에 스크린도어가 있는지 여부 등 꼼꼼하게 조사를 한 후 지하철을 탑니다.

도우미가 지하철을 같이 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혹시 목적지에서 기다리는 도우미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어쩌다 잘못 내릴 수도 있으니까요. 어떤 지하철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원석이의 목적지와는 반대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도 하고, 흰 지팡이가 지하철 문에 끼여 버리는 바람에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원석이가 저에게 들려준 여러 이야기 중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지금 타고 있는 지하철을 제대로 탔는지 모르겠거나 현재 무슨 역에 있는지 헷갈릴 경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방법입니다. 지금 여기가 무슨 역인지 물어보기보다는 ‘여기가 OO역이 맞는지’라고 질문을 한답니다. 즉 ‘네’ 또는 ‘아니오’ 중 하나의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인 거죠.

여기가 무슨 역인지 물어보면 대화가 길어질 수도 있고 알아듣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네’ 또는 ‘아니오’라는 대답을 구하는 질문이라면 답이 간결한 만큼 조금 더 쉽게 전달받을 수 있게 됩니다.

상대방의 말을 전혀 알아듣기 힘들지만 저도 이 방법을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또는 ‘아니오’라는 대답을 위한 질문이라면 상대방의 얼굴표정을 통해서라도(고개를 끄덕이거나 흔드는 등)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시청각장애는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에 규정된 15가지의 장애 유형에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즉 법적으로 인정되는 장애 유형은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또 시청각장애라고 해서 전혀 보지 못하고 전혀 듣지 못하는 특성만 있는 게 아니라 원석이와 저처럼 그 특성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뷔페에서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는 것처럼 누구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라도 우리 시청각장애인에게는 많은 노력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상조차도 시청각장애인들이 큰 걱정 없이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과 매뉴얼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헬렌 켈러하면 금방 떠올릴 수 있는 시청각장애에 대해 많은 관심 가져주세요.

작성자글. 박관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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