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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헬렌켈러법은 왜 필요한가?

시청각장애인지원법 발의

본문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이 받는 인종차별에 대해 인권운동을 했잖아요. 그래서 공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되었는데 그게 언제인지 아세요? 1964년이에요. ‘차별금지’에 대해 법이 제정된 후 그 연장선상에서 첫 번째로 만들어진 법이 바로 1968년 헬렌켈러법입니다.”

 

한국에도 헬렌켈러법이 필요하다

 

헬렌켈러법이 뭔지 아는가? 헬렌켈러 하면 금방 떠올릴 수 있는 장애유형인 ‘시청각장애’에 대한 법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제정된 ‘발달장애인 지원에 관한 법률’처럼 특정 장애를 대상으로 하는 법률이다.

미국에서 재활법(Rehabilitation Act)은 1973년, 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은 1990년에 각각 제정된 것을 감안하면, 시청각장애에 대한 지원 법률이 굉장히 빠르게 제정됐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시청각장애에 대한 관련 법률은 고사하고,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에서 규정하고 있는 15가지의 장애유형에 포함돼 있지도 않다. 법적으로 인정되는 장애유형이 아니기에 보건복지부에서 시행하는 장애인 통계조사에서도 제외되고 있어, 시청각장애인이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한국 헬렌켈러 위원회 위원장 김종인 교수(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 이사장, 나사렛대학교 교수)다. 김종인 교수는 작년 12월 3일 세계 장애인의 날에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시청각장애인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헬렌켈러법)’ 제정에 대한 발언을 했다. 이명수 국회의원이 대표발의를 한 이 법안은 올해 2월 11일 공식 발의되어 현재 국회에 상정돼 있다. 미국과 비교하면 한참 늦은 출발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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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인 교수

 

미국에서는 시청각장애를 ‘Deaf-Blind’라고 하나의 장애유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내 총 10개의 도시에서 헬렌켈러 센터를 운영하며, 시청각장애인이 가진 장애의 정도와 특성에 따라 맞춤형 지원을 제공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시청각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해 그 근거가 될 법안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런데 시청각장애가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장애유형인 만큼, 시청각장애는 시각장애나 청각장애에 대한 법적 근거를 통해 지원받으면 되는데 굳이 시청각장애만을 대상으로 따로 법률을 만들 필요까지 있느냐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시청각장애는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더한 ‘중복’장애가 결코 아닌 완전히 새로운 장애유형이다. 즉 더한 게 아닌 곱셈이다. 물감으로 파란색과 흰색이 섞이면 하늘색이라는 파란색도 흰색도 아닌 새로운 색깔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시각장애나 청각장애에 대한 지원법률로는 시청각장애를 지원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청각장애인에게 수어나 문자통역을 지원하는 경우, 수어통역사나 전문속기사 한 명이 통역하는 것을 다수의 청각장애인들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청각장애인은 시각장애도 있기 때문에, 수어나 문자로 제공되는 통역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시청각장애인 1명당 1명의 통역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법체계에서 장애인 1명당 1명의 통역사를 지원하는 규정은 따로 없다.

기자도 예전에 장애인직업능력개발원에서 직업교육을 받기 위해 상담을 받으러 갔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시청각장애인만을 위한 반이 따로 없으니 시각장애나 청각장애 특화반 중 어느 하나의 반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시각장애 특화반에서는 강사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하고 청각장애 특화반에서는 수어통역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그래서 활동지원사와 동행하여 노트북으로 문자통역을 받겠다고 했는데 안 된단다. 기업이나 사업체는 독자적으로 교육을 받은 장애인을 채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활동지원사와 동행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독자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다고 간주한 것이다.

장애인은 정당한 편의제공을 신청할 권리가 있고 법적으로 인정되는 장애유형에 맞게 제공된다. 시청각장애에 대한 편의제공 매뉴얼이 따로 없기 때문에 활동지원사로부터 문자통역을 받지만, 청각장애인 교육생들이 받는 수어통역과 비교해 ‘통역의 방법’만 다를 뿐이지 통역을 통해 교육을 ‘독자적으로’ 받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 시력과 청력을 모두 상실한 ‘전맹전농’의 시청각장애는 어떠할까. 시각장애인에게 음성으로 지원해주는 서비스를 적용할 경우 들을 수 없고, 청각장애인에게 문자나 수어로 통역해주는 지원을 제공하려 해도 볼 수가 없다. 같은 시청각장애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시청각장애라는 타이틀 내에서 가지는 특성과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를 고려한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통계조사에서 제외되고 있을 뿐 시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대한민국에 얼마든지 있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젠 후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다양해지면서 시각장애만 가지고 있다가 청각장애를 추가로 가지게 되는 경우, 청각장애만 가지고 있다가 시각장애를 추가로 가지게 되는 경우 등 앞으로도 시청각장애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이처럼 제대로 된 지원체계가 없어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시청각장애인들에게 헬렌켈러법은 대한민국 헌법에서 보장하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당사자의 의견도 중요

 

현재 국회에 상정돼 있는 헬렌켈러법은 크게 1)정보접근 및 의사소통, 2)활동지원사 양성, 3)통역사 양성 및 지원, 4)자조단체 결성 등의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얼핏 보면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시청각장애인에게 꼭 필요한 부분으로 잘 나누고 있는 듯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임의단체 ‘시청각장애인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손잡다’ 조원석 대표는 시청각장애인의 권익을 옹호하는 단체의 대표이자 시청각장애인 당사자로서 헬렌켈러법에 대해 당사자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점을 큰 아쉬움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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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원석 대표

 

사실 헬렌켈러법이 발의되기 전인 작년 4월 20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법체계에 ‘시청각장애’가 언급됐다. 당시 장애인차별금지의 날을 기념하여 장애인복지법 개정안에 시청각장애를 언급한 것이다. 물론 몇몇 일부조항에만 시청각장애에 대한 내용을 추가하는 수준에 머물러 시청각장애를 하나의 법적 장애유형으로 인정해주길 바라는 당사자들의 바람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당시 개정안 발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만큼은 당사자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처음 준비했던 개정안에는 시청각장애를 ‘시청각중복장애’, ‘시,청각장애’ 등 당사자들이 거부감을 표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당사자들의 의견을 상당부분 반영하여 ‘시청각장애’로 수정하게 됐다.

반면 이번 헬렌켈러법은 시청각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법률이라는 점에서 큰 상징성을 부여할 수 있지만, 시청각장애인 당사자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시청각장애에 대한 ‘활동지원사’와 ‘통역사’를 따로 규정한 것이다. 시청각장애인의 활동지원사라면 ‘활동지원’이라는 업무 안에 ‘통역’도 충분히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활동지원사와 통역사에 대한 규정을 따로 나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청각장애인이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활동지원사가 이동지원을 위해 시청각장애인과 병원까지 동행한다. 그리고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데 소통이 어려운 시청각장애인을 위해 통역사가 통역을 지원해준다. 이렇게 될 경우 시청각장애인은 무엇을 하든 활동지원사와 통역사 두 사람과 동행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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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2월 3일 시청각장애인 세미나에서 사용한 자료

 

현행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규정에 따르면 장애인 이용자가 활동지원서비스를 받는 중에 발생하는 비용은 장애인 이용자가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 그럼 시각장애인은 식사를 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등 비용이 발생하는 경우 활동지원사와 통역사의 몫까지 부담해야 할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서비스를 받는 시청각장애인 입장에서는 항상 두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하고 심적 부담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활동지원사를 양성한다면, 그 안에 ‘통역’은 필수적으로 포함돼야 할 것이다. 활동지원사로서 시청각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시청각장애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하고, 그럼 자연스럽게 제3자가 시청각장애인에게 하는 말을 활동지원사가 평소 시청각장애인과 소통하던 방법으로 통역해줄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청각장애인이 수어통역이 필요한 경우에는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기보다 농아인협회, 수어통역사센터 등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청각장애인의 경우처럼 시청각장애인에게도 오로지 ‘통역’만을 제공하기 위해 통역사를 양성한다고 해도, 결국 시각장애도 있어 통역지원이 필요한 곳까지의 이동, 통역지원신청을 하기 위한 절차 등에서도 추가적으로 지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청각장애인 당사자 입장에서는 활동지원의 매뉴얼 안에 통역을 포함하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다.

결론적으로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활동지원에는 통역도 포함되기 때문에 활동지원사와 통역사를 따로 나누어 제도적으로 비효율성을 야기하기보다,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통역·활동지원사’ 등의 방법으로 통합하여 운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헬렌켈러법의 공식 명칭은 “시청각장애인 지원에 관한 법률”이다. 하지만 그 명칭보다 “헬렌켈러법”이 더 이해하기 쉽고 가깝게 와닿는 것처럼, 현재 대한민국에서 시청각장애인은 장애인 중에서도 소수장애인이다. 본인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하고 있는 시청각장애인도 있다. 배가 고프면 배를 잡고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엉덩이를 잡는 등의 의사표현이 전부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국민이자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의 주체가 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청각장애인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헬렌켈러법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법이 실효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청각장애인 당사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더욱 필요할 것이다.

작성자박관찬 기자  p306k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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