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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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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2월 제정된 “한국수화언어법(이하 한국수어법)”은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동일한 언어라고 인정하고 있고, 공공기관은 한국수어를 통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법을 제정한 국회에서는 얼마나 이 법을 준수하고 있으며, 얼마나 적용 및 실행에 옮기고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수어법은 유명무실한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제대로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국회에서 하는 기자회견이나 상임위원회 회의, 국회의원들의 입법활동에 있어 수어통역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법을 제정한 국회에서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국회뿐만 아니라 청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의 각종 연설과 청와대 직원의 브리핑, 기자회견에서 수어통역이 함께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기억이 없습니다. 보건복지부나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 등 공공기관도 수어통역 서비스가 제대로 제공되고 있지 않습니다.

한번은 기자가 새벽에 해외축구를 시청하다가 의아함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경기의 하프타임 때 채널을 돌리는데, 새벽 5시에 재방송되고 있는 드라마에서 수어통역이 제공되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이 가장 많이 시청하는 저녁 9시 뉴스나 황금시간대 드라마에서는 수어통역을 보기 쉽지 않은 반면, 왜 새벽 시간대에는 수어통역이 제공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국수어법이라는 법적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수어를 ‘보편적 언어’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인식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청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공식언어가 수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정보접근의 통로로서 수어가 굉장히 유효하다는 것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청와대의 경우, 수어통역을 굉장히 낯설어 합니다. 대통령 옆에서 누군가 통역을 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워하죠. ‘대통령 옆에는 아무도 없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으로부터 장관이나 고위 공무원에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어쩌면 고정 관념이 아니라 ‘권위’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또 TV의 경우에는 ‘요약 자막’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젠 대중화된 ‘요약 자막’으로는 청각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은 정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 요약 자막은 일반 시청자들을 위한 것이지, 청각장애인을 위한 ‘실시간 자막’이 아니죠. 요약 자막으로 방송의 큰 흐름은 파악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가끔 흐름이 끊기기도 하고,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정보 안에서는 청각장애인 스스로 재해석을 해야 하고, 그럴 경우 정보를 왜곡할 가능성이 많아지며 넓은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보를 얻기가 어려워집니다.

국회에서 장애인 정책에 관련된 기자회견을 하게 될 경우, 누구보다도 장애인 당사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통역이 제공되지 않아 요약 자막에 의존하거나, 기자회견이 종료된 후 인터넷 뉴스 등을 통해서 내용을 접합니다. 장애인의 ‘알 권리’, ‘정보에 접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한국수어법과 더 나아가 대한민국 헌법이 있는 것인데, 이렇게 장애인의 정보접근권은 너무 취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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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 고용 컨퍼런스에서 수어통역하는 모습

국회 본회의에서는 많은 의원들이 발언합니다. 현재 국회 본회의에서 수어통역이 제공되고 있지 않지만, 제공된다고 해도 한 명의 수어통역사로는 본회의의 내용을 청각장애인에게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전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 국회의원마다 뒤에 수어통역사가 서서 통역하는 게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한 명의 수어통역사조차도 제공하고 있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수어통역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청각장애인만이 아닙니다. 청각장애만 가지고 있다가 시각에도 장애를 가지게 된 ‘시청각장애인’도 있습니다. 시청각장애인은 시각장애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어통역과 조금 다릅니다. 저시력인 시청각장애인에게는 볼 수 있는 거리만큼 가까이에서 통역하는 ‘근접수어통역’을, 전맹인 시청각장애인에게는 수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서로의 손으로 수어를 느끼면서 하는 ‘촉수어통역’을 해야 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여러 사람일 때 두 명 이상의 수어통역사를 두는 게 이상적이라면, 시청각장애인이 수어통역을 필요로 할 경우에는 시청각장애인 한 명당 한 명의 수어통역사(근접수어 또는 촉수어통역사)가 필요합니다.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예산입니다.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의 경우, 패럴림픽은 장애인이 많이 관람하러 오기 때문에 수어통역을 제공하고, 올림픽은 장애인이 참가하지 않으니까 수어통역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통역비를 누가 부담해야 하냐는 문제도 있습니다. 형사재판의 경우에는 공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통역비를 정부가 부담하지만, 민사재판은 개인의 문제이므로 재판의 당사자가 통역비를 부담해야 합니다.

‘실질적 평등’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상황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요? 가령 대통령이 하는 연설을 시청하는 국민 중에 수어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이 단 한 명도 없더라도, 수어통역은 제공돼야 합니다. 한국수어법에서 한국수어를 한국어와 동일한 언어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회나 정부에서의 공개회의나 기자회견뿐만 아니라 주민센터, 병원, 우체국 등 어떠한 곳에서도 수어통역이 필요할 경우 즉시 제공이 가능한 수어통역사의 배치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짓는 현실로부터 발생하게 된 이러한 문제들이, 번듯한 법이 있음에도 그 실효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실효성으로 국회와 청와대에서 수어통역이 제공된다면, 장애인들은 큰 자부심을 느낄 겁니다. ‘수어’라는 언어로서 전달이 된다는 자부심이죠. 즉 수어를 주 의사소통 방법으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들의 자부심을 키워준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또 입법기관과 집행기관으로서의 의무가 있는 국회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수어통역은 반드시 제공돼야 합니다.

 
작성자박관찬 기자  p306k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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