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일곱에 집을 나올 수 있었지 > 보도자료


마흔일곱에 집을 나올 수 있었지

그녀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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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채지민 대담전문기자

장애인들의 투쟁현장에 가면 종종 보이는 여성. 빛나는 회색빛의 백발 때문에 눈에 띄기도 했지만 나를 자리에 세운 것은 그녀의 호소력 짙은 발언이었다. 서러움과 당당함이 묘하게 섞인 목소리가 끌어당긴 것이다. 바로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활동하는 박명애 상임대표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서울역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사는 지역은 대구지만 장애인정책을 세우는 정부를 대상으로 한 투쟁이나 회의가 많아 종종 서울에 온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열여섯 즈음이다. 명애라는 이름이 이모들 이름하고 비슷한데다 좋지 않다고 해서 진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5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으니, 그 당시 정서나 관행으로는 그럴 만도 했다.

 

엄마는 평생 애를 잘못 본 사람이 됐지

박명애 씨는 지체장애 1급이다. 두 살 때 외할아버지의 제사를 치르기 위해 경남 사천에 있는 외가에 갔다가 열병이 났다. 더 있다 가라는 외할머니의 만류에 하루 더 묵던 날, 그녀의 온몸이 펄펄 끓었다. 열병이 난 것이다. 시골에는 병원도 없어서 한의원 같은 데 달려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루 더 외가에 있었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 후 중증장애인이 됐다.

그런 상태로 진주에 있는 집으로 오니 난리가 났다. 분명히 기차를 타고 떠날 때는 아기가 서서 손도 흔들고 방긋방긋 웃었는데, 돌아올 때는 목도 못 가누고 눈빛도 흐리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집안에서 처음 생긴 손녀라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을 온몸에 받았다. 다들 엄마를 탓했다. 당시에는 예방접종이 없어서 아기들이 열병에 걸리는 경우가 흔한 일이었으나, 모든 게 어머니 책임이 되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친가 어른들은 어머니를 ‘아이를 잘못 봐서 장애아로 만든 며느리’로 취급했다.

“그때가 62년 전이지. 시가집 식구는 내가 아픈 거를 집에서 본 적이 없는데 중증장애인이 된 애를 업고 왔으니……. 엄마는 평생 애를 잘못 본 엄마가 된 거지. 분명히 애를 떨어뜨리거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을 거라 생각한 거지. 내가 철들고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으니까.”

몇 달 전 돌아가신 그녀의 아버님은 최근까지도 그런 얘기를 했단다. 아버지는 그녀의 앞에서도 종종 그때 일을 어머니에게 끄집어내곤 했다. 그걸 들을 때면, ‘엄마가 얼마나 힘들까. 엄만들 장애인 딸을 갖고 싶었으려고 저렇게 탓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한 번도 아버지의 말에 대꾸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그녀를 돌봤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밥도 해주고 움직이도록 도와주고 말벗도 되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곁을 지켰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면 마음 이 불안할 정도였다.

 

라디오는 내 친구

여섯 살 때인가 할머니는 일을 하려고 박명애 씨를 업고 밖으로 나왔다. 동네 애들은 다 큰 애가 할머니한테 업혀 다닌다고, ‘앉은뱅이’라고 놀렸다. 졸졸 쫓아오면서까지 놀려댔다. 놀림에도 밖으로 나오는 건 좋았다. 밖은 정말 아름다웠다. 햇살을 맞으며 처음 본 그림자는 너무나도 신기했다. 걸어가는 대로 그림자가 따라오는 게 아닌가. 담장 앞뒤로 보이는 장미꽃이며 담쟁이며 얼마나 예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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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채지민 대담전문기자

그녀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으나 학교에 가지 못했다. 엄마는 학교에 가라는 말 대신 “너는 나하고 놀자” 했다. 영문도 모르고 그저 좋았다. 그러다 동생들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서야 학교라는 걸 알게 됐다. 동생들이 숙제를 하는 곁에서 한글을 깨쳤다. 4남매 중 맏이인 그녀는 동생들이 숙제하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알게 된 거다.

그리고 두 살 아래인 남동생의 친구들이 종종 집에 놀러왔다. 남동생 친구들이 그녀의 친구가 되었다. 때로는 동생 친구들 등에 업혀 마을 구경을 나가곤 했다. 논밭 구경도 하고 예쁜 꽃나무도 보았다. 옆집에도 갔다. 애들한테 업혀 나가는 게 하나도 부끄러울 나이도 아니었으니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동생 친구들이 나를 업고나가는 날은 신났지. 곡식 타작하는 것도 보고. 보리 고랑 사이를 지나 멀리 가기도 했어.”

그 모습을 아버지한테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불호령이 내려졌다. 떨어져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동생과 어머니를 혼냈다. 무엇보다 내성적인 성격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혼나는 모습이 싫었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는 한 달에 한번 물건을 차에 싣고 나갔다가 다 팔면 돌아왔다.

그녀가 제일 즐겨했던 일은 라디오 듣기였다. 그녀에게 라디오는 ‘친구’였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로 세상을 배워갔다. 무엇보다 라디오 연속극을 통해 펼쳐지는 세상은 상상만으로 즐거웠다. 그것마저도 부모님은 동생들 공부하는데 켜놓는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당시에는 라디오를 실컷 듣는 게 소원일 정도로 좋아했다.

“진옥아, 우리 중학교는 도서실이 정말 크고 책이 많다, 책을 빌려다 줄까?”

집에 있는 그녀가 애처로웠는지 친구들이 물었다. 그 후 친구들이 책을 빌려오면 밤을 새워 읽고 다음날 다시 새 책을 빌려왔다. 책을 빨리 읽는다는 친구들의 말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동네 친구들이 중학교에 진학하자 소설읽기에 빠졌다. 그때 읽은 <제인 에어>를 잊지 못한다. 원래 로맨스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주인공이 멋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주인공. 최근에 다시 읽은 <제인 에어>는 옛날 감성을 깨어나게 했다.

 

결혼은 독립할 기회

대구로 이사 오면서 여러 가지가 달라졌다. 텔레비전도 생기고 전화도 생겼다. 전화가 생긴 후 그녀는 아버지 사업전화를 받는 일을 했다. 스물다섯이 됐을 무렵 ‘나는 평생 이리 살아야 되는가?’ 처음으로 생각했지만 답을 내지 못한 채 그냥 흐지부지 끝났다.

그러다 집에 남동생을 만나러 놀러온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됐다. 종교도 같고 나이도 비슷해 몇 번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레 연애가 된 것이다. 1년을 만나다가 남자친구는 청혼을 했다. 아버지는 우리와 살아야 한다면서 결혼을 반대했다. 주변의 장애인친구들도 만류했다. 결혼하면 처음은 좋지만 대부분 나쁜 일은 다 네 탓이 된다며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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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채지민 대담전문기자

하지만 그녀는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연애감정이 달아올라서가 아니라, 이때가 아니면 독립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아버지는 자식을 내놓기보다 길들이는 편이라 더 그랬다. 철마다 피는 꽃을 보라고 그녀에게 꽃을 사줄 정도로 그녀를 아꼈다. 다른 남매 옷은 안 챙겨도 그녀 옷은 꼭 새옷을 사주곤 했다. 아버지는 많은 사랑을 주셨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굴레에 머물 수는 없었다.

“결혼이라는 말을 듣는데 탈출구가 생기는 느낌이었어. 결혼하면 핑크빛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 아버지한테 ‘나는 내 인생이 있어요’ 라는 말 한마디를 못했으니까.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밖으로 못 나가겠구나 싶었던 거지.”

결혼 후 잠깐 분가했다가 임신을 하고 다시 친정으로 들어왔다. 아기를 돌볼 수가 없어서다. 그녀의 어머니가 아기를 돌봤다. 장애 때문에 두세 번 유산을 하고 낳은 아기였다. 장애인 편의시설도 없던 시절 임신상태를 유지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하나만 낳고 싶었지만 그녀의 처지에서 낙태도 쉽지 않아서다.

그런데도 주변에서는 무슨 장애인이 애를 두 명이나 낳느냐고 수군대는 걸 들으면 울화가 치밀었다. 그럴 때면 정말 세상이 얼마나 이중적인가 실감했다. 그녀는 말한다. 저출산위기라며 아이를 낳으라고 여성에게 강요하지만, 정부가 바라는 아이는 장애인의 아이는 아닌 거 아니냐고. 그렇다. 비장애인여성에게 강요되는 출산은 장애인여성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마흔일곱에 세상으로 나오다

대구에 장애인야학이 생긴 건 2000년 3월 12일이다. 장애인의 날, 밖으로 외출했다가 대구에도 장애인야학(야간학교)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가기만 하면 집에는 데려다 준대.” 일단 야학에 가기만 하면 집에는 알아서 그쪽에서 데려다준다는 것이 아닌가. 귀가 솔깃해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학교.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다. 한 번만이라도 가봐야겠다 싶었다. 그녀의 나이 마흔일곱의 일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장 적극적이었다. 당시에는 장애인콜택시가 없어서, 일반 콜택시 회사에 일일이 전화를 해서 장애인인데 업어서 택시에 태워달라고 사정했다. 몇 군데를 전화해서 겨우겨우 하겠다는 곳을 만났다. ‘사랑 실은 교통봉사대’라는 콜택시였다. 수익의 일부를 심장병 어린이에게 전달하고 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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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슷한 시기에 생일을 맞은 박명애 대표와 박경석 대표가 한 후원 행사장에서 생일케이크와 함께 축하를 받고 있다. 사진. 채지민 대담전문기자

처음 간 야학은 정말 딴 세상이었다. 소풍도 가고 수학여행도 가고, 무엇보다 대화해주는 장애인학생들이나 선생님이 많아 좋았다. 한 번만 가보려고 했던 야학을 일주일에 세 번이나 다녔다. 비싼 택시를 타고 갈 정도로 즐거웠다. 그러다 전동휠체어가 생긴 후 지하철을 타고 갔다. ‘사랑의 리퀘스트’에 사연을 올려 전동휠체어를 받은 것이다. 처음 전동휠체어를 타던 그 아찔하고 땀나는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수동휠체어를 탈 때는 불편한 정도로 느끼던 것이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혼자 온몸으로 도로의 울퉁불퉁함을 느껴야 하니 아프기도 하고 잘못 굴러갈까 불안하기도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도 안전장치도 없는 네모난 리프트에 휠체어가 올려졌을 때도 끔찍했다. “도마 위의 생선”같았다. 초등학교 딸이 함께 갔지만 불안했다.

야학에 다니면서 장애인운동도 하게 됐다. 처음 간 집회는 생각보다 즐거웠다. 억울함을 풀고 오는 것 같았다. 집회만 가면 말도 술술 나온다. 세상을 만난 지 벌써 19년, 늦게 세상을 알아버린 그녀는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마음이 더 커졌다. 자신은 마흔여덟이 넘도록 집에서만 지냈지만, 후세대들은 장애로 인해 배제되는 일이 없기를. 장애인 자식으로 부모님이 한평생 눈물로 보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현재 그녀의 꿈은 동지들과 함께 오래오래 장애인운동을 하는 것이다. 차별이 만연한 사회를 바꾸는 데 주저하지 않는 그녀의 하얀 머리 휘날리며 쩌렁쩌렁 외치는 구호가 들리는 듯하다.

 

 
작성자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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