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소리]끝내 같이 살기를 거부당한 이땅의 장애형제들 > 기획 연재


기획 연재

[현장의 소리]끝내 같이 살기를 거부당한 이땅의 장애형제들

본문

 

▲신망애재활원의 모습

이 땅에 산적한 많은 장애문제 중에서 시낭애 재활원 상태가 내포하는 의미는 자못 각별하다. 장애우들 중에서도 빈민층이 겪어야 하는 온갖 모순이 중첩돼 있는 곳이 현재의 신망애 재활원이라고 볼 수 있다. 100여명이 넘는 장애우들이 특정 개인에게 의지하여 힘든 삶을 꾸려가고 있는데 보사부는 철저하게 방관자적인 입장만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회 전반에서 이어지고 있는 장애우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도 문제지만 한걸음 나아가 이제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마저 거부하는 왜곡된 경제원리가 그 바탕에 흐르고 있다는 점도 간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법과 원칙과 예산을 들먹이며 인간의 근본적 재활원, 그 현장을 가본다.

○가난한 장애우들의 삶의 공동체
신망애재활원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 503번지경춘선 철로변이다. 속칭사람들이 태릉이라고 부르는 육군사관학교와 서울여대 그리고 삼육대학 등이 있는 서울시 외곽지점이다. 삼육대학 앞에서 버스를 내려 맞은편 쪽을 바라보면 어울리지 않게 펼쳐져있는 몇마지기 씩의 소규모 논들 사이에 신망애재활원 안내 푯말이 초라하게 서있다. 재작년 5월의 청량이 신망애 사건과 그보다 앞서 일어난 강서구 신월동의 강서재활원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결국 장애우들의 삶의 터전이 가능한 곳은 이런 변방일 수 밖에 없는가!  라고 저절로 한탄을 할만한 인적 드물고 외진 한적한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공기가 비교적 맑다는 것이 위로가될까? 푯말을 따라 좁은 논둑길을 걸어 얕으막한 언덕을 넘었다. 드문드문 안내 푯말은 이어지고 있다. 골목 커브길을 돌자 가구공장에서 내어놨음직한 높게 쌓은 합판뭉치들이 앞을 가로 막는다. 한 대의 크레인과 또 한 대의 트럭이 합판을 옮겨 싣는 작업을 하고 있다. 별수 없이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인부에게 재활원 위치를 물었다. 인부는 표정없이 손을 뻗어 지척에 있는 한 지점을 가리켰다. 가구공장이 있는 위치에서 내리막길 막다른 지점이다. 난데없이 길게 여운을 남기는 기적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눈을 들어 쳐다보니 지축을 올리며 덜커덩 덜커덩 긴 기차행렬이 눈앞에서 허겁지겁 달아나고 있었다. 그 뒤로 두 줄기 선로가 햇빛을 반사하며 누워있는 모습이 확연히 눈에 다가온다.  어쩔 수 없이 언젠가 신망애회지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 재활원생 중 한 장애우가 기차에 치여 숨졌다는 아픈 사실을 실감한다. 비닐하우스용 보온담요가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일까. 유난히 을씨년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좁은 마당 양쪽으로 낡고 초라한 삼각건물이 길게 이어져 들어서 있다. 재활원은 예상 못한 방문객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한 때의 청년들이 원생들의 전송을 받으며 재활원을 빠져 나가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청년들 한 그룹은 이제 막 도착한 듯 원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몰려 들어간다. 그 밖에도 소규모로 찾아온 듯한 방문객들이 마당에서 서성거리며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 외부 방문객에 익숙한 듯 원생들 중 그 누구도 이상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한 원생을 붙자고 사무실을 물었다. 박춘화 원장은 때마침 자리에 없었다.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역시나 좁은 사무실 소파에 앉아서 관계자료를 구할 수 있을까 궁리해 보다가 탁자위에 놓여 있는 방명록에 눈길이 가다가 탁자위에 놓여 있는 방명록에 눈길이 가 실례인 줄 알면서도 호기심에 들춰보았다. 전국 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방문한 흔적들이 가득 남아 있었다. 그중에는 민족 문학 작가회의 소속 작가들 몇분이 남긴 자필사인도있다. 그 외에 방문객 개인들 대다수는 역시나 기독교인들이었다. 한가지 특기할만한 현상은 그전에도 방문객들이 없은 건 아니지만 방명록에 방문객들이 몰려 있는 시기가 다름 아닌 박춘화 원장이 MBC 인간시대 프로그램에 소개가 된 직후라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밖에 소란스럽도록 방문객들이 많은 것이 이해가 간다. 매스컴의 위력은 이렇듯 대단한 것이다. 좀처럼 오지 않은 박원장을 기다리며 앉아 있기가 무료할 즈음 뜻밖에 안면이 있는 장애우 한사람을 만났다. 볼일이 있었는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원생 박종선씨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절단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를 기자는 작년에 장애자 올림픽 사후처리 과정에서 파생한 출전선수들 취업문제 때문에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박종선씨는 재활원내 원생을 자치회 조직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다고 했다. 반갑게 해후를 한 다음 그의 안내를 받아 재활원 시설을 둘러보았다.

 
○법을 어길 수 밖에 없었던 그간의 과정이 신망애재활원 사태의 본질
먼저 밝혀둘 사실은 신망애 재활원은 우리가 일반적이고 인식하고 있는 복지시설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다수의 장애우 재활원이 국고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는 현실에서 신망애재활원은 45명의 장애우가 영세민보호 성격인 거택보호자로 지정받아 구리시에서 주는 약간의 혜택을 받고 있을 뿐 그 외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하고 있는 임의로 운영되고 있는 재활원이다. 현재 신망애재활원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중 핵심도 바로 이점이다. 현 보사부령 장애우 중 핵심도 바로 이점이다. 현 보사부령 장애우 시설 설치법에 따르면 정부의 허가없이 장애우들을 수용 보호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따라서 이유야 어쨌든 실정법 위반이라는 논란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얘기가 나온김에 최근 신망애 사태의 나머지 또 다른 핵심을 언급해 보면 현재활원이 자리잡고 있는 부지가 건축을 할 수 없는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 건축을 할 수 없는 땅에 건물을 지었으니 명백한 건축법 위반이기 때문에 철거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구리시 측의 입장 표명은 그래서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결국 법을 어길 수 밖에 없었던 그간의 과정이 신망애재활원 사태의 본질이 될 것이다. 이 부분은 뒤에 가서 자세히 서술하기로 한다. 3월초 현재 신망애재활원에는 남자 66명, 여자 39명 합해 총 105명의 장애우들이 생활하고 있다. 105명의 장애우들을 장애별로 보면 소아마비 33명, 전신마비 21명, 뇌성마비 8명, 간질장애 7명, 축추장애 4명, 시각장애 4명, 자폐증세장애 5명, 절단장애 5명, 청각장애 1명 나머지는 정신지체 장애우이다. 반 이상이 장애정도가 심한 중증장애우들이라는 게 박종선씨의 설명이다. 재활원내에는 열 네 개의 거처 숙소가 있다. 큰 방에서는 대략 일곱명, 작은 방에서는 서너명이 함께 지내고 있는데 비좁아 포아상태에 이르러 있다.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일반 재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애우부부용 숙소가 여섯 개나 마련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나중에 알고보니 박종선씨 자신도 결혼하여 그 부부용 숙소에서 살고 있었다. 차례로 시설을 둘러 보면서 자립작업장과 숙소, 그리고 이용시설을 소개 받았다. 먼저 원생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자립작업장은 시계벨 만드는 작업장과 악세사리 작업장 그리고 유일하에 완제품을 생산하는 가방 만드는 작업장등 세 개 파트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한 작업장에서 대략 여덞명의 장애우들이 하청 일감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었다.  며칠 사이로 인형만드는 일을 추가로 시작할 계획이란다. 일감이 꾸준하면 가령 가발 만드는 작업장같은데서는 한 사람이 최고 월 12만원까지 벌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괜찮은데 워낙에 하청일 이다보니 일감이 꾸준치 않아 흠이랜다. 자립작업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장애우들은 그래도 장애 정도가 덜 심한 편이다. 숙소에는 거동조차 못하는 장애우가 상당수 누워 있었다. 나이가 많이 든 할아버지에서부터 이제 다섯 살이 된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원생들 연령분포도 무척 다양하다. 숙소를 기웃거리자 많은 원생들이 아는체를 한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다. 비록 비좁고 초라한 숙소이지만 사람사는 내음이 흠씬 풍긴다. 꾸밀려고 애쓴 흔적도 곳곳에 자리잡아 때로는 앙정스럽게 때로는 투박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개성을 알아 볼 수 있는 가구들도 빼곡하게 놓여 있다. 부부숙소는더욱 더 치장을 잘해 놓아 웬만한 가정집 수준이다. 이용시설로는 식당이 제일 크고 그 다음이 교회, 그리고 일쥘에 세 번 수업하는 야학교실과 목욕탕 등이 있었다. 이중에 목욕탕은 유일하게 기름보일러를 설치하여 더운 물이 나오기 때문에 최고 좋은 건물이라는게 박종선씨의 설명이었다. 나머지 시설의 연료는 연탄을 주로 때고 있는데 하루 약 100여장이 든단다. 건물 자체가 비닐과 보온담요 등 인화성 물질이기 때문에 불이 날까봐 노심초사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형편이다. 나중에 박춘화 원장에게 들은 사실이지만 현재 재활원 운영은 앞서 언급한 45명의 원생이 거택보호자로 지정되어 구리시에는 주는 원생 1인당 한달 쌀 8킬로그램과부식비 2만원을 받는 것이 고정 수입이고 나머지는 교회 각 단체그리고 개인이 보내주는 후원금에 의존해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 청량리 사건과 그린벨트 그리고 무인가
사무실에서 박춘화 원장을 만났다. 한눈에 요즘 보기드문 강인한 여성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목소리도 무척이나 카랑카랑한게 힘이 넘저차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저간의 모진 세월이 그녀를 강하게 단련시켰으리라, 아직 미혼인 박원장은 거진 10년가까이 신망애재활원생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다. 말하자면 그녀 인생의 황금기를 고스란히 재활원에 바친 셈인데 10년 이란 어마어마한 세월이 흘렀건만 그녀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최근 사태의 와중에서도 그녀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정부의 잘못된 장애우 정책은 이렇듯 장애당사자가 아닌 한 비장애우 여성의 삶마저 유린하는 비정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그간의 신망애재활원 사태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아래는 신망애재활원이 생긴 초기에서부터 최근 상황까지를 서술한 것이다. 신망애재활원이 생긴 때는 1981년이다. 현재 신망애선교회 대표인 김양원 목사가 서울 종암동에서 특별한 거처가 없어 길이나 움막에서 생활하는 15명 가량의 장애우들을 데려다가 숙식제공을 하면서 조그마한 공동체를 꾸렸던 게 그 시작이다. 당시 우연히 기독교방송을 듣고 약간의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찾아갔다가 장애우들의 암울한 현실을 보고 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해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는 박원장 말에 따르면 초기에는 1년이면 거의 6개월 이사 갈 집을 알아보려 다녀야 했다고 한다. 비좁은 장소에 식구들은 계속 늘고 설상가상으로 동네 주민들이 정착하지 못하게 괴롭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민들은 왜 장애우들이 주택옆에 사느냐며 밤에 술을 먹고 찾아와서 행패를 부르기 일쑤였고 집값 떨어진다. 아이들이 흉내 낸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트려 식구들을 괴롭혔다. 한여름 같은 경우는 더워서 밖에 나가 바람 좀 쐬면 보기 싫은 몸을 가지고 왜 밖으로 나오느냐며 어처구니 없는 항의를 해오기도 했다. 심지어는 주민들이 식구들을 구타하는 일까지 발생, 반복이 되자 할 수 없이 이사를 가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처음의 종암동에서 전농동 다시 휘경동 다시 상봉동으로 전전하다가 85년도에 현재 재활원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에서 조금 위쪽 역시 갈매리 마을 양계장으로 쓰던 집을 임대해 들어간다. 그 때는 어느새 식구들이 50여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곳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라 주민들 반대가 없어 식구들이 안정을 찾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월 15만원의 임대료였다. 매달 그 돈을 지급할 능력이 당시에는 없었다. 식구들이 달라 붙어 건물을 수리해 산지 몇 개월 만에 월세가 누적돼 거기서도 쫓겨나야했다. 다행이 당시 식구들이 알고 지내던 교인 한 분이 재활원이 그 지경이 되자 안타깝게 생각하여 자신의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에서 천만원을 대출하여 정착 할 장소를 찾으라며 선뜻 건네주었다. 그 돈으로 구입한 땅이 현 재활원부지 대지 517평이다. 가까스로 땅을 구입하기는 했지만 건물을 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돈도 없었거니와 구입한 땅이 건축을 할 수 없는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합법적인 건축 허가를 받는 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 하였다. 그린벨트 지역은 건축설계부터 막히기 때문이다. 교육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예전의 경우를 보아 정부의 특별한 배려가 없는 한 설사 합법적인 땅이라도 시설을 건축 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시적으로나마 살집을 마련하기 위해 무허가 비닐하우스 건물을 짓게 된다.  잠시 위에서 언급한 예전이 경우를 돌이켜 보면 왜 박원장이 합법적인 건축허가를 받는 것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재활원을 이리저리 옮겨다닐 즈음 정확히 84년의 일이다. 당시 보사부장관을 지냈던 김정례씨와 어떤 인연으로 연결이돼 김정례씨 만을 믿고 복지법인 설립인가를 받기 위해 재산도 없으면서 보사부에 서류를 제출한 후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적이 있었다. 몇백만원의 돈을 빌려 경기도 진천면에 땅을 매입 하려고 계약까지 했는데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장애우들이 살집은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시 의정부에서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포천에서 다시 시도 가까스로 땅도 구입하고 건축허가까지 받았지만 이번에는 주민들 반대가 거세 끝내는 건축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서울에 있는 장애우들이 왜 여기까지 내려와서 살려고 하느냐며 주민들이 집단행동을 벌이는데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합법적인 건축은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결론을 내려야 했다. 현재의 땅에 밤새 비닐하우스 건물을 세웠다. 건물을 세운지 며칠 만에 구리시청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이제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제대로 살 집을 찾기까지 봐달라고 애원했다. 철거반원들은 차마 집 전체를 부술 수는 없었는지 건물 일부를 부수고 사진을 찍고 돌아갔다. 몇차례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어찌된 일인지 한동안은 아무일 없이 조용했다.


○ 구리시와의 실갱이, 고발
그런 와중에 문제의 청량리신망애 사건이 발생했다. 청량리 정신병원 뒤 주택가 땅 92평을 재활원이 독지가로부터 기증받아 소유하게 된 것은 1987년 말이다. 그 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몇날을 고심, 결국 식구들의 생활 안정을 찾기 위한 고정수입원 확보를 위해 상가건을 찾기 위한 고정수입원 확보를 위해 상가건물을 짓기로 한다. 당장 건축할 돈은 없지만 일단 이대분양을 하면 건축비가 나온다는 계산을 했다. 결정을 하자 건축은 급속도로 추진 되었다. 건축허가를 받고 설계를 하고 건축업자를 선정하여 곧바로 건축에 들어갔다.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문제가 터졌다. 예전의 뼈아픈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공사에 들어가기 전 건축업자에게 이 건물은 우리가 살 집이 아니라고 신신 당부를 했는데 건축업자는 주민들이 시끄럽다는 등의 항의를 하자 항의를 무마하기 위해 장애우들이 살 복지관을 짓는 것이니 봐달라는 식으로 발설을 해 버렸다. 당장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안 그래도 부근의 청량리 정신병원 때문에 너무나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중인데 또 장애우복지관이 들어오면 걷잡을 수 없이 집 값이나 땅 값이 떨어진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었다. 발원장이 나서서 장애우들과는 상관없는 상가 건물이라고 설득을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당장은 장애우들과 관계 없다고 하지만 건물을 다 짓고 나서 쳐들어 오면 그 때는 막을 수 없으니 애초부터 건물을 못짓게 하겠다며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몇차례 주민들과 실랑이를 벌렸다. 건축업자를 바꾸어서라도 건물을 지으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설득하다 도저히 안돼 88년 5월경 마지막 수단으로 실력행사를 시작했다. 초기에는 재활원 식구들로만 시위, 농성 등을 벌였다. 이 실력 행사가 확산되어 여러 장애우단체가 합세한 가운데 마침내 청량리 1동 동사무소 2층을 점거 한달간을 농성을 벌이기에 이른다. 신망애 사태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도 이즈음이다. 여론이 비등하자 서울 시장과의 면담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중에 주민대표와 협상, 서울시장이 만에 하나 이 건물을 짓고난 후 장애우들이 들어와 살면 서울시의 권한으로 이를 막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건축을 막지 않겠다는 합의를 하게 된다. 서울 시장은 주민대표와 박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각서를 써주었다. 사태가 해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다시 건축을 시작하려 하자 주민들 태도가 돌변하였다. 합의서는 주민 몇사람의 생각이지 전제 주민들 생각은 아니라며 절대 건축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엎칮데 엎친격으로 갈매리 재활원에 본격적으로 법적인 제재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전에도 계고장이 몇차례 오긴 했지만 건축 법위반으로 고발되어 경찰서에서 출석요구가 온 것은 그 때가 처음 이었다. 때마침 농성에 참여했던 식구들 건강도 좋지 않아 결국 청량리에 상가 건물을 짓는 것을 포기하고 물러서고 만다. 고발은 구리시에서 했다. 이면에는 다분히 감정적인 측면이 내재하고 있었다. 87년 10월경의 일이다. 부천에 있던 자립원이 경기도 관내 수동면에 신축건물을 지어 이사를 오게 되었다.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인데 160여명의 원생밖에 없었기 때문에 재활원 식구들을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구리시에서 제의를 해왔다. 대책을 세워준다는 차원에서 현재 재활원이 무인가니까 인간복지 시설로 원생들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자립원 측에서는 신망애재활원 원에 알고보니 자립원 측에서는 신망애재활원 원생들을 받는 조건으로 보사부에서 돈을 받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당시에는 그런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단순히 식구들을 좋은 시설에서 잘먹여 줄 수 있다는 전제하에 원칙적인 승낙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원생들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 원생들도 인격이 있는 사람이니 구리시에서 원생들과 인격이 있는 사람이니 구리시에서 원생들과 직접 면담을 해 가기를 원하는 사람만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박원장이 없을 때 구리시 사회과 직원이 재활원을 방문해 주로 지체장애 원생들과 면담을 했다. 설득했지만 원생들은 잘먹고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인격을 존중받으며 자유롭게 살고 싶기 때문에 자립원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거절을 했다. 기존 복지시설에 대한 원생들의불신은 이렇듯 대단했다. 결국 구리시의 제의는 흐지부지 되고 만다. 어느새 원생들이 80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던 때의에서는 두고두고 못 마땅해 했다. 시 측으로서는 나름대로 원생들을 좋은 시설로 보낼 대책을 세웠는데 원장이 장애우들을 이용하려고 안 보낸다고 비난을 해댔다. 박원장은 궃이 변명을 하지 않았다. 관심있는 사람들이 물어오면 식구들이 원하지 않아서 보낼 수가 없었다는 얘기만 했을 뿐이다.


○재판 벌금 700만원에 선고유예 2년 판결
남양주 경찰서에서 출석 요구서가 두 차례나 왔지만 박원장은 응하지 않았다. 세 번째 출석 요구서가 날아들었을 때 할 수 없이 경찰서엘 갔다. 조서를 꾸미겠다고 하여 그간에 있었던 사실들을 진술해 주었다. 이 때가 88년 9월이다. 얼마 안 있어 이번에는 의정부법원지청에서 출석요구서를 보내왔다. 진모 부장검사에게 불려가 다시 조서를 작성해야 했다. 검사는 조서내용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던지 바로 재판에 넘기지 않고 1년간의 유예기간을 배려해주었다. 그 안에 대책을 찾아 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량리 이  땅에 건물을 지을 수 없는 상호안에서 땅을 팔려고 내놨어도 좀처럼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로 나앉지 않는 한 특별한 대책을 세울 수는 없었다. 아무 대책없이 1년이라는 기간이 지나갔다. 89년 11월 말 역시 의정부 법원에서 재판 받으러 오라는 소환장이 날아들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서 걱정이 안될 수 없었다. 재판에 대한 경험도 없었고 행정법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한동안을 고민하다 아는 이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이는 일단 서면으로 재판연기 신청을 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이런저런 사정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법원에 등기로 부쳤다. 법원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렇다면 90년 1월에 재판을 받으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 때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축법 위반과 수용시설무인가라는 두 가지 죄명이 그녀의 뇌리를 파고 들며 못내 그녀를 괴롭혔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정확하게 지난해 12월 22일 저녁 박원장은 MBC TV인간시대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는 처음 박원장 개인에 한정하여 취재하려던 계획을 바꿔 법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춰 방송을 만들게 된다. 그러면서 1월의 재판과정까지 촬영하게 되었다. 이 과정이 박원장이 실형선고를 안 받고 2년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1월 12일 첫공판에서 박원장은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6개월 징역은 각오 하라고 변호사가 언질을 해주었다. 마침내 1월 25일 선고공판이 열린다. 판사는 박원장이 낸 탄원서와 TV프로그램보고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며 벌금 700만원에 선고유예 2년의 판결을 내린다. 법적인 문제가 비로서 해결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판결을 받고 보니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변호사도 선고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양성화 될 가능성도 있다고 부추겨 주었다. 박원장은 희망에 부풀었다. 1월 30일 경 박원장은 구리시 사회과에서 다녀가라는 방문요청을 받았다. 양성화 시켜 주려고 부르는 것만 같아 곧바로 달려갔다. 구리시 사회과 담당자는 그녀에게 선고유예 판결을 받은 것에 대하여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방송도 유심히 봤다며 말을 이어가는데 박원장이 기대했던 시설 양성화에 대한 가능성은 처음부터 무참하게 깨어지고 있었다. 담당자는 방송으로 재활원이 불법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졌기 때문에 더더욱 철거를 해야 한다. 방치하면 다른 사람들이 역이용 할 선례를 남겨 주기 때문에 3월 말까지 대책을 찾아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부득불 강제철거를 하겠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통고를 하는 것이었다. 박원장은 기운이 빠져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대책을 찾아 고심하고 있다. 하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는 걸 어쩌란 말이냐, 담당자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잘라 말했다. 우선 복지법인 설립인가를 빨리 받는 방법이 있고 그렇지 못하면 다른 법인 시설에 재활원이 흡수되는 방법, 즉 재활원생 중 거택보호자는 분산시켜 각각 타 수용시설로 보내고 그 외의 다른 원생들은 보호자에게 돌려 보내는 식으로 흩어지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담당자는 2월 10일까지 대책안을 서면으로 작성해 오라고 못을 박았다. 열흘의 말미에 대책을 세운다는건 도저히 불가능 했다. 거짓말이라도 하라는 건지 박원장은 답답한 마음 뿐이었다. 재촉전화가 몇차례에 걸쳐 걸려왔다. 하는 수 없이 박원장은 대책안이라기 보다는 건의서 형식으로 몇가지 바라는 사항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사회과 담당자를 찾아갔다. 박원장은 건의서에서 시설을 다른 곳으로 보낼 생각만 하지 말고 포용해 달라고 전제한 후 그린벨트를 해제해 양성화시켜 주는 길과 차선책으로 현재 재활원부지를 시가 수용하고 대신 그 땅만큼의 부지를 다른 곳에 마련해 건축허가를 받게 해달라는 요지의 대책을 제시했다. 사회과 담당자는 건의서를 보고 이건 대책안이 아니라 우리와 싸우자는 것이 아니냐며 화를 냈다. 결국 박원장은 대책을 세우기를 바란다면 좀더 기다려 달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었다. 최근인 3월 초까지 구리시에서는 아무 말이 없다. 시 또한 특별한 대책을 세우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철거를 강행할지 안 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강제철거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가난한 장애우들 삶이 암담하다
요즘도 신망애재활원에는 하루 평균 5∼6명의 가난한 지방 장애우들이 찾아와서 들어오고 저 상담을 요청해 온다. 무엇보다 무료 수용시설이기 때문에 많이 몰리는 것 같다. 신망애재활원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우들은 아무런 연구가 없는 장애우들도 있지만 반수 이상은 가족이 있는 장애우 들이다. 엄연히 갖고 살아 있으면서도 재활원에 몸을 의탁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신망애재활원생들의 비극이다. 예를 들어보자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는 한 남자원생은 집이 시골이다. 가족이 있고 넉넉한 집안인데 문제는 어머니가 서모였다. 할 일이 없어 집안에만 있으니까 서모가 계속 구박을 했다. 나이는 들고 할 일은 없고 그래서 시설에 들어가길 원했는데 가족이 있다고 다른 시설에는 받아주지를 않았다. 68세의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한 할아버지는 아들과 며느리가 엄연히 살아있다. 그러면서도 재활원에 들어오겠다고 찾아와서 떼를 썼다. 아들이 출근하면 며느리와 단 둘이 집에 있는데 답답해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부모가 직접 장애를 가진 자식을 데리고 찾아와서 내가 죽으면 돌볼 사람이 없다며 살아 있을 때  자식이 의지할 곳을 마련해 주고 싶다는 하소연을 하는 경우도 많다. 가난한 집안의 경우 형제중에 장애를 가진 장애우가 있는 경우에는 다른 형제들 결혼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스스로 도망치듯 재활원을 찾아오는 경우가 미일비재 하다. 이런 사연을 가지고 찾아오는 장애우들을 박원장은 정 딱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설득해서 돌려보낸다. 마음 아프지만 시설이 수용하기에는 한계에 도달해 있고 어쨌거나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장애우들에게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차례 찾아오는 장애우들을 상담하다보니 박원장은 정부의 장애우 정책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절감한다. 가장 큰 문제는 취업 능력이 없는 장애우의 경우 정부에서 대책을 세워줘야 하는데 모른체 방치해 놓고만 있다. 아쉬운대로 거택보호자로 지정해 생활대책을 세워줄 수도 있으련만 현재 시행되고 있는 거택보호자 제도를 보면 이것마저 요원하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안계시고 형제들로 부터도 버림받은 중증장애우의 경우 당연히 거택보호자로 지정 받아야 하는데 단순히 호적상 가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보호를 해주지 않고 있다. 즉 중증장애우의 경우는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결혼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호적상 분가를 할 수 없다는 실정을 정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의료보험 문제도 마찬가지다.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되고 있는 요즘 의무적으로 보험료를 내야 하는데 직장도 없고 정부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장애우에겐 보험료가 부담이 되고 있다. 납부금을 내기 어려운 장애우는 아무리 아파도 병원에 가서 제대로 진단 한번 받기조차 힘든 것이다. 장애우들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탁상행정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주고자 하는 보다 적극적인 행정이 이제는 이루어져야 한다.


○ 신망애재활원 건립이 목표
대외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신망애재활원의 목표는 신망애 꿈동산 건립이다. 이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 현재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다. 신망애꿈동산은 일종의 복지타운 성격을 갖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을 운영하는 제 소망은 식구들이 모두 스스로 일을 하고 성취감을 느꼈으면 해요, 단 돈천원이라도 자신의 노력에 의한 성과이어야만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을테니까요. 안타까운 것은 작업증력이 있는 장애우들이 얼마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나마 일거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구요. 물론 일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일을 맡기는 기업주의 요구와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상충돼서 제대로 합의점을 찾지 못할 때가 많아요. 우선 이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겟고 장차는 꿈동산을 건립해서 식구들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 해야지요." 박춘화 원장의 말이다. 재활원 내부의 일을 상당부분 책임지고 있는 앞서 언급한 박종선씨는 그린벨트가 해제되어 합법적인 건축허가를 받아 건물을 새로 짓고 사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꼽았다. 현재 다섯동의 건물이 전부 붙어 있어 화재 위험이 크며 지하수가 부족하여 식수난을 겪고 있단다. 재활원에서 자원봉사자로 헌신하고  있는 네 분중 식당에서 일하는 이동희씨를 만났다. 고향이 충주인 그녀는 3년째 재활원에서 원생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중이다. 아침 다섯시 반에 기상하여 저녁 아홉씨까지 꼬박 식당에서 원생들의 식사를 마련하는 일이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녀는 재활원 문제에 대해 이전해야 된다는건 알고 있지만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대책을 마련할 대까지 구리시에서 기다려줬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견해를 피력했다. 3월초 현재 신망애재활원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절박한 현안문제는 바로 강제철거 여부에 관한 논란이다. 철거가 그리 쉽지 않으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구리시에서는 3월말의 기한을 설정해 놓고철거를 강행하겠다고 공헌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늦은 시각이었지만 기자는 구리시청을 찾아가기로 했다. 박원장과 작별인사를 하고 원생들과도 인사를 하고 재활원을 빠져나왔다. 낮으막한 고개를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니 초라한 재활원 건물이 때마침 지나가는 기차 소음에 묻혀 덜컹 거리고 있다. 저 멀리서 노을이 달려오고 있었다. 착찹한 심정으로 길을 가다가 동네주민인 듯한 한 아저씨를 만났다. 달려가서 대뜸 재활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아저씨는 " 다같이 없는 사람들인데 뭘 어떻게 생각해 같이 살아야지 도와주지 못하는게 안타까울 뿐이야,"라며 오히려 묻는 기자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어느새 기자마저 불순한 선입견에 물들어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나보다 정말 부끄러웠다.


○ 현실적으로 강제 철거 어려워
구리시청 사회과 내부는 퇴근준비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어느새 다섯시가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 방문객을 보고도 아는체를 하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기자라고 하자 비로서 한던 일을 멈추고 자리를 안내한다. 실무자 김원모씨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기자는 단도직입적으로 강제철거여부를 물었다. 김원모씨는 동기는 순수하고 원장이 고생하는 줄은 알고 있지만 인가를 받지 않은 복지시설이기 때문에 부득불 철거해야 한다고 시우들이 살고 있는 한 철거가 곤란한 게 고층이라고 털어놓았다. 다른 시설 같으면 벌써 철거했겠지만 장애시설이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성화 시킬 계호기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 계획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시 방침은 재활원이 복지시설 설립인가를 받을 수 있는 지역으로 이사하길 바라지만 정 곤란하다면 타 장애우 시설에 원생들을 이전 수용 시켰으면 하는게 재활원 측에 바라는 부탁사항이란다. 거듭 3월 말 강제철거여부를 물었다. 김원모씨는 사회과 내에서 기한을 정해 놓고 철거를 한다는 계획은 수립한적이 없다며 철거 여부는 시 도시과에서 결정할 일이지만 시에서 철거 하겠다는 얘기를 꺼낸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고 철서사실을 부인했다. 기자는 내 친김에 도시과 단속계글 찾아갔다. 열람한 단속계 "재활원 3월말 한" 이라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3월말까지 이전하지 않으면 철거를 강행하겠다는 것인지 단속계 계장 이철수씨에게 물어보았다. 이철수씨는 인간적으로는 배려해 주고 싶지만 공무원으로서 직무유기가 되기 때문에 곤란하다며 철거를 하지 못한다면 다시 고발하는 형식으로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고발이 한번으로 끝나는 게 절대 아니란다. 계고장을 다시 보내고 그래도 재활원 측이 이전하지 않으면 2차, 3차 고발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된다면 형벌은 가증처벌이 되리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말 끝에 재활원이 이전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이철수씨는 말했다.


○정부 차원에서 가난한 장애우문제 해결해야
이상이 최근까지의 신망애사태의 전말이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정부의 특별한 조치가 없는 한 쉽게 신망애사태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없을 것 같다. 가난한 장애우들의 실정에 철저하게 무관심한 보사부, 최근까지도 재활과는 장애우에 한하여 자동차 등록세를 면제해 준다. 장애우들이 소유한 자동차에 LPG가스를 사용하게 해 준다 어쩐다로 탁상 행정만을 펼치고 있다. 현장에서는 가난과 주위의 냉대로 인하여 장애우들이 심각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제까지 장애우 공동체는 변방으로 쫓겨나야만 하는가? 왜 장애우들은 사회에서 떳떳하게 살지 못하고 시설에 수용 되어야만 하는가? 장애우들이 생계걱정을 안하고 살 수 있는 날은 그 언제인가? 최소한 이 물음들에 대한 답변을 정부는 해야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막강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정부가 가난한 자앵우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취재를 마치면서 기자는 다행이 문제의 청량리 땅이 팔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제는 생각되어 반가웠다. 현재의 재활원 부지와 청량리 땅을 처분한 자금을 합친다면 박원장이 말한대로 꿈동산 복지타운을 건립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기자는 신망애재활원이 하루속히 안정을 찾길 바라면서 한가지 간절한 바램을 가져본다. 앞으로 건립되는 꿈동산이 변방이 아닌 도심, 바로 우리들 사는 이웃에 건립되어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 갔으면 하는 이 바램은 기자만의 헛된 망상일까?

작성자조계식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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