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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장애해방이란 무엇인가?

제2장 장애우해방운동소사

본문

<·초기 장애우해방운동의 특징과 문제점>
 60년대 말에서 70년대에 들어서자 장애우 운동은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어용단체에 의한 청원운동이나 전장련 운동을 대표해온 대행적·융화적인 운동을 대신해 장기간 시설이나 가정에 은폐되어 왔던「중증장애우」가 중심이 되어 차별에 정면으로 대결을 계속하고,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자립하기 위한 투쟁이 점차 싹을 틔우기 사직했다.
 나는 이 시기의 운동을「장애우해방운동의 시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제 그 특징과 문제점, 그리고 장애우 해방운동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라끼(荒木) 재판투쟁과 후나까(府中) 요육센터 이전 저지투쟁>
 60년대말 장애우 스스로의 손으로 싸움이 시작된 두 가지 중요한 싸움이 있다. 그것은 아라끼 재판투쟁과 후나까요육센터 이전저지투쟁으로 확실히 이제까지의 장애우 운동과는 그 본질에 있어 완전히 다른 싸움이었다.
 그것은 이전까지의「구걸」이나「청원」과는 완전히 질이 다른「장애우 대한 차별」바로 그 자체를 문제삼은 싸움이었다.
 따라서 나는 이 두 가지 싸움을 장애우해방운동의 시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이들 투쟁 이전에도 장애우 자신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운 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장애연(장애우의 생활보장을 요구하는 연락회의)의 전 사무국장으로 있는 후다니찌(二日市安)씨가 자세하게 보고하고 있는「국립신체장애우센타투쟁」은 지극히 획기적인 싸움으로 후에 장애우해방운동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의 특징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뒤이어 계속 이제까지와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뒤이어 계속 이제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커다란 흐름을 이끌어낸 것은 역시 아리끼 재판투쟁과 후나까 요육센터투쟁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싸움을 장애우해방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라끼재판투쟁은 중증뇌성마비인 아라끼(荒木義昭)씨(전장련의 전 부대표간사)가 자신의 생활과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거부를 당하자 이 부당한 차별에 항의해 무면허 운전을 계속한 아라끼씨를 기소한 검찰측에 맞선 싸움이었다.
 이 재판투쟁을 통하여 아라끼씨는 특히 중증장애우가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당하고 있는 차별의 실태를 법정 내외에 밝히고 이러한 부당한 차별에 대해 장애우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립할 것을 분명히 선언한 것이었다.
 한편 아라끼씨의 정당한 투쟁에 맞서 기존의 장애우단체는 물론 당시 장애우 운동의「혁신」과「권리로서의 요구」를 내걸고 눈부시게 등장한 전장연(전국장애우문제연구회) 조차「비폭력 운동」을 내세우며 지원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싸움은 회를 거듭할수록 그 폭이 넓어져 결국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백여명에 가까운 장애우와 수백의 노동자, 학생이 연대를 이루기까지 했다.

 재판자체는「장애우라 할지라도 공공의 복지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차별은 감수해야 된다」는 최고재판소의 차별판결에 의해「패해」를 당했지만, 이 재판투쟁이 제기한 내용, 특히 장애우차별철저규탄의 질은 이후 장애우해방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후나까요육센터 이전저지 투쟁은 대규모 장애우 수용시설이 있는 동경도립 후나까요교육센터를 도측이 일방적으로 도심지에서 분리된 장소로 옮긴 것에 대해 센터의 원생이 이전반대를 들고일어난 것이다.
 무엇보다도 후나까 센터는 전혀 무시한 직원의 배치등 차별이 있었고, 이에 맞서 원생들이 단식투쟁을 벌인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저지투쟁은 상대가 동경도 전체일 뿐 아니라 그 벽이 두터운 1년 반에 이르는 도청 앞 천막농성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더구나 운동이 길어짐에 따라 운동내부의 모순이 드러나고 비장애우에 의지한 장애우의 활동이나 쟁애우간의 대립과 불신, 노선상의 대립이 나타나는 등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문제는 당시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아라끼 재판투쟁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특히 동경의 장애우 해방운동에 있어서 이 시기의 문제가 지금까지 꼬리를 끌어 운동의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
 더구나 이들 두 싸움의 배경을 생각할 때 먼저 당시 전국을 뒤덮었던 급진적인 학생운동과 다른 한편 협산·입관투쟁 등에서 보여주었던 차별규탄투쟁의 영향을 보고도 놓친 것은 잘못이다.
 결국, 장애우 해방운동의 시작은 부당한 차별과 억압에 대한 장애우 자신의 분노에 찬 싸움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동시에 객관적으로는 이러한 다른 조건들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관서장애우해방위원회의 결성>
 1970년 7월7일 화교청년투쟁위원회의(화청투) 고발은 일본 좌익운동과 계급투쟁사상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 모든 운동체에 질적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억압국 국민의 차별성을 예리하게 규탄한 고발은 이제까지 표면적인 전투성에 의거한 차별의 문제 등에 관심을 보여온 좌익운동에 문자 그대로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한 것이었다. 또, 이 고발을 전후해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쓴 부락청년 이시가와(石川一雄)씨를 되찾는 싸움이 차별규탄투쟁, 계급투쟁이라는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장애우해방운동 특히 관서장애우해방위원회는 이러한 정황의 결과로 결성되었다. 장애우 해방운동은 이미 60년대 말부터 앞에서 말한 아라끼 재판투쟁, 후나까요육센터 이전저지 투쟁을 시작으로 동경을 중심으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관서지방에서의 구체적인 투쟁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중에 앞에서 말한 고발을 받아 일직부터 입관투쟁으로 싸움을 시작하고, 협산투쟁에도 적극적으로 싸워온「혁공동중핵파」가 당시 용곡대학에 있던 나와 여러 장애우 동지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들 의료전선의 의사와 간호학생을 늘렸으며, 71년 봄. 장애우 해방운동의 조직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으며 그 해 10월 3l일 우리들과 함께 관서장애우해방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과제로서 동경의 아라끼 재판투쟁과 정확히 71년 4월에 일어난 오오사까학예대회의 장애우 입학차별문제, S군 지원투쟁의 두 가지로 정했으며, 이와 함께 시각, 청각, 지체, 정신지체, 정신 장애의 5개 소위원회를 설치하고 학습회와 일상활동, 그 위에 시설에서의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조직의 성격에 대해서는 충핵파의 지도를 받아들여 끝까지 대중조직으로 남았고 타당 파나 무소속 사람들의 참가를 적극적으로 불러일으키며 독자성을 확인하는 등 신중하게 조직을 운영했다.
 물론 당시 커다란 모험을 향한 오끼나와·뉴우간·교오야마·산리쪼오 등 정치투쟁도 적극적으로 뛰어 들었고 중핵파와는 구별된 해나가는 방침이 확인되었다.

<·관서장애우해방위원회의 분열은 왜 일어났는가>
 그런데, 71년 12월에 일어난 혁마루파에 의한 중핵파 두 사람의 도리에 어긋난 학살과 72년 5월 오끼나와 투쟁의 패배는 중핵파의 위기감과 초조감을 가중시켜 대중운동에 대한 방치을 급격히 전환시킨 것이 되었다.
 말할나위없이 72년에 들어와 그들은 S군 지원투쟁과 아라끼재판투쟁을 중심축으로 삼고, 오끼나와·뉴우간·교오야마·산리쪼오 등의 정치투쟁을 우선으로 해 장애우의 일상적인 활동보다 정치적인 과제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또,「장애우해방전선도 혁마르센 멸망을 내 결어야 한다」든가「흰 헬멧을 쓰고 중핵파의 집회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교조적·당파적 대응이 강했다.
 더구나, 정보의 수단과 학습의 기회를 빼앗기고 있는 장애우에 대해 기본적인 학습의 보장 없이(다른 당파의 내용상의 차이 및 여러 조직의 내용도 포함해)오로지 그들의 기관지「전진」의 구독만을 시킨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6, 7월에 접어들어 더욱 심해졌으며, 7·7 뉴우간투쟁의 투쟁방법을 따랐으며,「중핵파의 집회에 참가해야 한다」며 양보를 하지 않아 결국 그 날은 중핵파와 참가하는 부분과 베평련 등의 대중단체 집회에 독자적으로 참가하는 부분 등 둘로 나뉘어 싸우기까지 했다.
 또 동경의 아라끼재판투쟁의 경우도 같은 모양의 대응이 됐는데 예를 들면 아라끼씨에게 흰 헬멧을 뒤집어 쓸 것을 강요하거나 아라끼재판투쟁에 관한 삐라를 시작으로 느닷없이「오끼나와 탈환·혁마르센타도」의 표어를 쓴 것이었다.

 이에 대해 관서장애우해방위원회 내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당시 정신지체우문제소위원회가 싸우고 있던 A시설 원생의 가정방문을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8월에는 그 시설의 원생 십여명과 야영을 하는 등 공투관계가 이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열하게 9월이 되자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용곡대학에서 열리던 회의를 집행부에서 일방적으로「복지회관에서 열라」는 통지를 보내 공공연히 분열을 선언했다.
 우리들은 중핵파의 이러한 조직원칙을 무시한 분열 책동을 규탄하고 당일 50여명의 무장방위대가 지키고 있는 그들의 분열집회장에 여러 명의 대표를 집어넣어 그 집회의 근본취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추궁에 만족할만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고,「회의에서는 말할 수 없다」든가「그러한 문제는 알지 못한다」는 등 성실하지 못하게 대답했으며, 후에 그들 중 일부가 우리에게「일화견주의」라는 꼬리표를 달아 속일뿐이었다. 
 우리들은 그들을 철저히 규탄하고 그들의 자기비판을 요구했지만 답변을 하기보다는 단념하고 물러날 뿐이었다.
 이후 그들은 A시설의 경우「전면 대결」로 불렀으나, 결과적으로는 한사람의 원생을 끌어들이기 위해 원내에 어떤 운동을 만들어 갈 것인가라는 결정적으로 불충분해 남아있는 원생들에게 지금까지 암흑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또 그들은 우리들과 같이 관서장애우해방위원회의 이름으로 활동을 계속했으나 실제로는 관서에서의 활동을 거의 방치하고, 관동에서 그들의 집안조직에 있는 관동장애우해방위원회와 함께 동료적인 싸움을 할 정도로 정치투쟁에만 치우쳐 있었다.
 어쨌든 관서지방의 장애우해방운동은 처음부터 이렇게 격렬한 노선논쟁을 통해 형성된 것이지만 그 후 우리들은 장애우자신의 손으로 대중운동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개별적인 싸움을 젊어지고 주체형성을 위해 힘차게 나아갔던 것이다.

<·가따헤이(片平) 투쟁과 그 밖의 개별투쟁>
 관서에 있어서 개별투쟁의 선구가 된 것은 장애우의 노동권리를 둘러싼 가따헤이 투쟁이었다. 가따헤이 투쟁은 오오사까 부립양호학교의 사무직원에 아르바이트로 고용되어 있던 뇌성마비장애우 가따헤이(片平敏昭)씨가 전교장의 계속 고용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한이 끝났음을 이유로 일방적인 해고를 당한 것에 대한 해고철회 싸움이었다.
 이처럼 장애우의 현실을 무시한 차별사건이 장애아 학교에서 일어난 것에 우리들은 분노했다. 내가 속해있는 관서장애우해방위원회도 중핵파의 정치주의와 분열을 징계하면서 뒤늦게나마 이 투쟁에 가담해 중추적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이 싸움의 의의는 말할 것도 없이「장애우의 노동권 보장」을 문제시한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이 투쟁을 통해 노동운동과의 연대가 처음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도 묵과할 수 없는 성과이다.
 더욱이, 투쟁이 고양됨에 따라 부락해방동맹과의 연대를 실현했으며, 이는 이후 반차별공동투쟁의 첫걸음을 이룩하는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동시에 이 투쟁은 개별투쟁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이 싸움에 참가했던 사람은 모두 한결같이 다른 장애우의 노동문제와의 결합을 염두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따헤이씨가 정식직원이 된 뒤에는 결국 거의 재판투쟁으로 집약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후 오오사까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점차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개별투쟁-예를 들어 국철 역에서 떨어져 두 다리를 전동차에 치어 국철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오오하라(大原) 투쟁이나 전기공사의 취직차별에 맞선 투쟁, 더욱이 동경에는 연장아인 장애우 이와다떼(岩楯惠美子)양의 취학투쟁 등-거의 대부분 부분적인 지원에 그쳐 그 결과 개인의 인격이나 주체형성의 정도에 따라 운동이 규정되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정세는 74년의 오일쇼크를 계기로 급속하게 악화되었으며「복지환상의 시대」에서「복지직시의 시대」에로의 변화를 계속했다.

 이미 전장련의 모든 요구노선도 사회 일반의 지지를 얻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운 정세를 깨달으면서 우리들 해방운동측의 개개의 운동체 사이에도 통일을 바라는 싹들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아오이지회의 역할>
 장애우해방운동의 전진과 전국적 확산으로부터 70년대 후반의 전장련 결성에 이르는 운동이 되었던 보다 중요한 역할을 이룩한 운동이 바로 아오지회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아오이지회는 1957년 동경에서 뇌성마비장애우들의 친목단체로 발족했다. 그들 역시 다른 장애우단체와 마찬가지로 청원운동을 시작했지만 그것은 상당부분 전체와 거리가 있었고 또 융화적 청원운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발족후 5∼6년이 되면서부터 특히 시설에도 나갈 수 없고 외출도 생각하지 못한 중증장애우들이 이러한 운동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1964년 이 모임을 돕고있던 오사라기아끼라(大佛空)라는 승려가 자신의 절을 모임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십 수명의 중증뇌성마비장애우에게 개방해「마하라바촌」이라는 일종의 불교적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마하라바촌」의 사상적 중심이 된 불교는 현재 일본에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것과는 흐름이 다른 고대 인도의 소승불교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현세에 있어서 일체의 권력을 부정하고 인간존재의 깊은 곳까지 철저하게 파고 들어가는 우상숭배를 부정하는 극히 관념적인 것이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뇌성마비장애우는 뇌성마비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을 계속하면서「비장애우」사회와의 다툼을 포기하고「비장애우」를 만들어내는 현대문명에 대한 고발을 시작했다.
 이 공동체는 5년이 지난 1969년에 거의 해체되었으며, 그 주요 구성원은 가미나까와(神宗川)현에 살면서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1970년 가미나까와현에서 일어난「중증장애아」살해 사건의 부모에 대한 감형탄원운동에 항의하는 행동을 했으며 이후「뇌성마비여 안녕」이라는 영화를 통해 아오이지의 사상을 전국에 알리는데 성공했다.
 특히 관서의 경우 상영운동중에 뇌성마비 젊은이들과 이를 강력하게 지원한 비장애우와의 연대가 이루어져 운동은 놀라운 발전을 계속했다. 72년 한해동안 오오사까, 교오또, 나라 등 관서지방 다섯 개현에 조직을 결성하고 그들은 통합해「아오이지 관서연합회」를 결성했다.

 한편, 아오이지 내부에서도 조직확대와 사상의 확립이라는 대립이 생겼으나 관서의 경우에는 규우슈우 등에 점차적으로 조직이 만들어졌다. 또한 이때부터 아오이지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동경 부분은 사상문제가 애매해져 차차 독립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73년 12월「일본 뇌성마비자협회 전국아오이지회총연합회」가 만들어 졌으며, 초대회장에 히로쯔까씨가 선출되었다.
 결성전후 몇 년간은 아오이지운동의 최 전성기로 그 중에서도 우생보호법개악저지투쟁과 1977년 버스점거투쟁은 그들 투쟁의 날카로움을 여지없이 발휘한 것이었으며, 이밖에도 가정방문, 영화상영, 비장애우의 조직화 등 일상활동에도 뛰어났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초기 장애우해방운동은 개별적·소모임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으나 마침내 투쟁을 통해 장애우 스스로가 개별운동체의 허약함과 이론적 미숙을 통감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장애우해방운동은 개개의 장애우 스스로에 의한 차별과의 싸움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운동이 모든 장애우의 해방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동시에 많은 문제점도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운동이 특정 장애우의 이해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고립·분산화 경향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또한「기존의 것은 모두 부정」하는 관념론에 빠지게 된 것이다.
 더욱이 몇몇 정치당파에 끌려 다님으로써 비조직적·비정치적인 집단이 되었으며, 장애우 개개의 장애 차이와 생활정도의 차이를 고려하지 못해 조금이라도 표면적인 차이가 드러나면 공동관계가 깨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이유는「어떻게 해야 나를 포함한 장애우해방을 실현할 것인가」라는 관점이 약했으며, 분파주의와 교조적인 교정관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입장과 관점만을 절대시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사상을 점검하고 운동에 관해 서로 비판을 주고받으며 함께 승리에 대한 전망을 세우는 자세가 부족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위기에 허덕이는 제국주의자의 장애우에 대한 공격은 날로 강화됐으며 우리의 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배집단과 같은 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전장연은 모든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 우리를 적대시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측에서도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해 관동의 경우 1975년 여름「관동장애우연락회의」를 결성했다.
 한편 관서에서는「관서장애우해방위원회」와「재가뇌성마비장애우」를 조직화해 차별과 싸워가면서 1975년 "제8양호학교 건설저지투쟁」을 계기로「관서아오지회」와 공투관계를 수립했으며 75년 12월 마침내 장애우 해방을 위한 전국조직준비회를 결성하게 되었다.(계속)

글/구스노끼 도시오(일본 전장련 대표간사)

  

작성자구스노끼 도시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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