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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 끝나지 않은 원진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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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1일 원진레이온 굳게 닫힌 철문 앞에서는 또 다시 한 노동자의 주검을 놓고 직업병 인정을 요구하는 유족들과 이를 저지하는 경찰간에 한바탕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미 70여명의 직업병 환자와 수백명의 판정대기자가 기다리고 있는 공해공장 원진의 비극은 언제나 끝날 것인가.

<·또 다시 한 노동자가…>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또 다시 한 노동자가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회사측과 노동부의 무성의한 태도로 직업병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80일 가까이 차디찬 영안실에 누워 있다가 이제 영영 가족의 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직업병 없는 새 날을 기약하며 오늘의 슬픔과 억울함을 함께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려 합니다."
 남녘의 꽃 소식에 새 봄을 준비하던 지난 3월 31일, 망우리 고개 밑 제세병원에서는 이황화탄소 중독 판정여부로 회사측과 마찰을 빚고 있는 고 김봉환(53세)씨의 영결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원가협, 원노협 등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직접)피해자들과 구리노동상담소, 노동과 건강 연구회 등 약 5∼60여명의 조문객들은「산재추방」「직업병 인정」등이 씌여진 붉은 머리띠를 동여맨 채 병원 주차장에서 "직업병 은폐하는 악덕기업주 백영기를 구속하라"며 구호를 외치는 등(침통한 속에)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지난 77년 원진레이온에 입사한 고 김봉환씨는 입사 후 차츰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해 두통과 소화불량, 손발이 저리는 등 이황화탄소 중독초가 증상을 보여 83년 원진레이온을 그만 두었으나 당시는 직업병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고 설사 직업병이 있어도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퇴직 후 건물 경비 등으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던 김씨는 두통, 마비증세에 시달리다 마침내 89년 쓰러졌으며,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김씨는 원진레이온 직업병 문제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자신의 병도 원진레이온 근무시절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진료를 받은 결과 90년 10월 사당의원(원장 김록호)에서「이황화탄소 중독의 증세 및 고혈압」이란 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자신의 병이 직업병임이 밝혀지자 원진 측에 산재요양을 요구했으나 회사측은 김씨가 근무하던 원액2과는 유해 부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절대로 요양신청을 해 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회사측이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김씨는 노동부에 산재요양 신청허가를 요구했으나 노동부 역시 회사를 두둔하며 요양신청서 접수조차 거부, 계속적인 싸움으로 마침내 91년 1월 5일 노동부로부터 요양신청서 접수를 통보 받았다. 그리고 바로 그 날 오후 10시30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직검사를 거부한 고대병원>
 1월 5일 고 김봉환씨가 갑작스레 죽은 뒤 김씨의 유가족,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 노동자협의회(원노협)등 10개 단체는 이 사건의 진상은 물론 더 이상의 직업병 피해자 발생을 근절하기 위해「원진레이온 직업병 사망사건 대책위원회」(대책위)를 구성하였다.
 대책위는 김씨의 죽음이 직업병 때문이라는 정확한 진단을 위해 고대 병리학 교실에 부검을 의뢰하고 부검 시 직업병 4인 판정위원회(회사측 2인, 대책위 측 2인) 참관과 판정을 맡길 것을 회사측에 요구해 왔다.
 대책위는 이와 함께 산재요양 신청서 접수를 미뤄 김봉환씨를 죽음으로 내몬 노동부의 책임을 추궁하고 정확한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노동부 의정부지방사무소에 항의 방문을 했으며,「조속한 산재처리」와「작업환경 개선」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원진레이온에 부검, 4인 판정위의 참관과 판정 등 유족 측의 요구조건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소위 비 유해부서라고 주장해온 원액 2과 근무자 김씨가 직업병으로 밝혀질 경우 몰고 올 파문을 우려해 유족과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부와 짜고 고대병원 의료진으로 하여금 조직 검사를 거부하도록 했다. 
 한편 유족은 회사와의 합의사항만 믿고 1월 11일 국립과학 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실시 신장조직을 가지고 고대병원 병리학과로 찾아갔으나 고대병원 의료진은 초진 병원인 사당의원(원장 김록호)의「이황화탄소 중독의 중 및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무시하고 병사를 변사로 우기면서 조직검사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회사측의 행위에 분개할 대책위는 1월 13일 결의문을 통해 10여명에 이르는 직업병 사망자와 69명의 직업병 환자, 아직도 판정을 기다리는 수십명의 노동자 등, 고 김봉환씨의 죽음과 그간 원진레이온에서 발생한 직업병 참상은 실로 심각한 수준을 넘어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절박한 생존의 위협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고, "더 이상 직업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작업 환경에 개선이나 노동자의 정당한 치료와 보상의 권리마저 져버리고 있는 시점에 우리의 산재현실의 극복은 더 이상 회사측과 정부당국의 손에만 맡길 수 없으며… 스스로 단결된 힘으로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 국민과 더불어 함께 싸워 나갈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계속 4인 판정 위원회의 소집요구를 거절하고 시간을 끌면서 사건이 잠잠해지기를 기대려 왔다.
 이에 격분한 유족과 대책위는 1월 24, 25일 이틀 간 원진레이온에 찾아가 항의 농성을 벌였으나 백영기 사장은 상무에게 위임장 하나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려 분노한 김씨의 미망인과 원노협 이정재 회장이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26일 오전 회사측과 재협상을 하기 위해 회사로 찾아간 유족과 대책위 측은 약속을 어기고 정문을 봉쇄한 채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는 모습에 분개, 몸싸움 끝에 경비실 창문을 부수고 회사 안으로 들어가 어렵게 협상을 재개했으나 회사측은 여전히 4인 판정위원회를 거부하고 오직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만을 고집하면서 민사보상도 검사의 결정이 있어야만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해 다시 협상이 깨지고 말았다. 

<·원진에 비 유해부서란 없다>
 "직업병 판정은 일반 병사와는 달라 전문적 지식 없이는 판정이 불가능한데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직업병을 전문으로 판정하는 곳이 아니다. 더구나 직업병 문제는 88년 이후 회사측과 직업병 피해자측이 합의한 합의 각서에 의해 판정하는 것이지 민사상의 일에 검찰이 개입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고, "그동안 원진레이온 직업병 판정을 위해 회사측과 피해자측의 의사들로 구성된 4인 판정위원회가 있는데도 계속 검찰을 고집하는 것은 고 김봉환씨의 죽음을 직업병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회사측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와 함께 대책위는 "현재 회사측은 방사과, 정비과, 운반·포장과 및 원액이탄과 만을 유해부서로 규정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규정한 유해부서는 이황화탄소 가스에 직접 노출되는 부서이며, 많은 중독환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나 "원진레이온은 한 건물 내에 방사, 후처리, 정련, 운반, 포장, 정비과 등 여러 부서가 있으며 각 부서는 허술한 미닫이문에 의해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이황화탄소 가스는 부서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고 있다"고 밝히고, 사례로 후처리과, 원액, 원동, 소방과 등 약 170여 명의 많은 노동자들이 판정을 받기 위해 대기 중에 있는 것은 "이미 원진레이온에는 유해부서 아닌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에도 회사측이 유해부서와 비 유해부서로 구분한 것은 직업병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며 노동자는 죽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책위가 밝힌 각 부서별 이황화탄소 중독 판정자 및 중독판정대상자(현직·퇴직 노동자 포함)

<중독판정자>

방사과

43명

정  비

4명

이탄

1명

원동

1명

후처리

 

 

 

 

 

총인원

69명

 

<정밀검사 대상자>

방 사 과

116명

정    비

12명

후 처 리

43명

정    련

1

원    액

3

이    탄

1

산수정비

1

화공정비

1

총 인 원

178명

 

 그러나 회사측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보이지 않은 것은 물론 규탄대회 이후 정문과 후문에 철조망을 설치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사를 교도소로 착각하는 모양"이라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한편 회사측의 계속되는 반 노동자적 작태에 격분한 고 김봉환씨 미망인 방희녀씨는 2월 11일 진정서를 통해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은 명백한 살인임에도 회사측은 오히려 판정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을 빌미로 유가족과 대책위 사람들을 고발하는 적반하장식 반언륜적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밝히고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다.


 <·독가스나 싫다는데 경찰봉이 웬 말이냐>
 이처럼 회사측이 직업병 인정을 거부하며 시간을 끌자 유족과 대책위 측은 마지막으로 이날 생전에 고인이 일했던 회사에서 영결식을 갖기 위해 가족과 대책위 그리고 조문객들의 오열 속에 원진레이온으로 향했다.
 그러나 생전(?) 처음일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도착한 공장의 철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으며 주민들은 "경찰차 세대가 안으로 들어갔다"고 말해 영결식을 원천봉쇄 하겠다는 회사와 정부측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과 차디찬 먼지바람 속에서 김봉환씨의 운구를 철조망으로 휘감긴 철문 앞에 내려놓고 오열 속에 한송이 한송이 국화꽃으로 가지런히 고인의 명복을 빈 조문객들은 굳게 닫힌 철문 앞에서 다시 한번 회사측에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사내 영결식을 허용하고 직업병 판정을 위한 올바른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으나 차디찬 먼지바람만 코끝을 아리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오후 교대 근무자의 출근마저 막아가며 한사코 문 열기를 거부했던 회사측은 대책위 측이 가두홍보를 위해 큰길가로 행진을 시작하자마자 쪽문을 열고 백여 명의 전경들이 뛰쳐나와 큰길로 통하는 길 입구를 막아서서 더 이상 행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책위 측의 일부가 다시 공항 쪽으로 방향을 돌리며 전경들 때문에 채 닫지 못한 쪽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피킷과 방패로 서로 뒤엉켜 아비규환을 이루며 정문돌파를 시도했던 대책위 측 사람들은 곧 하나, 둘씩 경찰에 질질 끌려 나왔으며 이 와중에 이황화탄소 중독 노동자가 대부분인 대책위 측과 조문객들 중 여럿이 경찰봉과 방패에 맞아 실신하거나 피를 흘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일요일에도 특근 중이던 원진레이온 노동자 수십여명까지 합세해 "너희 놈들도 이 공장에 몇 달간만 일해봐" "독가스가 싫다는데 경찰봉이 웬 말이냐"는 강력한 항의와 구호 속에 경찰과 대치한 조문객들은 김씨의 죽음을 애도하듯 때 아니게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겠다"고 결의하고는 철야 농성을 위한 비닐 천막을 쳤다.
 한편 4인 판정위원회의 대책위 측 전문가이며, 고 김봉환씨가 처음 이황화탄소 중독의증 임을 밝혀낸 김록호 원장은 "한 부서의 독가스는 결국 밖으로 나와 지역사회의 공해가 된다"고 밝히고 "두산전자의 페놀 수돗물 사건처럼 원진의 문제도 공해추방이라는 더 큰 시민운동으로 확산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차디찬 눈보라 속에 서로 어깨 걸고 앉아 "산업재해 추방하여 건강한 세상 쟁취하자"는 조문객과 노동자들의 외침에 굳게 닫힌 철문 앞 군화 발에 어지러진 국화꽃송이 속 김봉환씨의 영정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제2, 제3의 김봉환씨를 양산>
 그러면 지난 80년 초 이황화탄소라는 맹독성 가스가 처음 직업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진 이후 이미 직업병 판정자만 70여명이나 돌 정도의 대표적인 공해공장(원진레이온)이 노동부 등 관계부처의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계속 사원모집 공고를 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는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두산전자에 내린 단 한 달의 조업정지 기간조차 연관산업에 미칠 여파 운운하며 이를 철회한 정부당국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과연 이 땅에서 공해 공장의 퇴치가 가능할 것인가 하는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황화탄소는 단 한번만 폐속에 들어가도 최면작용과 그 후유증이 생길 정도의 맹독성 화공약품으로 그 위험성 때문에 이미 70년대 이후 서구와 일본 등에서는 원진레이온 같은 원시적인 공장의 가동을 중시시킴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공장의 굴뚝을 높이기만 하는(주민들의 항의를 무마하기 위해)얄팍한 속셈으로 문제를 감추기에 급급한 회사와 이러한 공해공장에 표창장을 주는 정부당국의 행태는 앞으로도 제2, 제3의 김봉환씨를 양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말없이 누워있는 김봉환씨와 철조망에 뒤덮인 공장철문 그리고 수많은 군화와 방패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삶의 기쁨이니, 신성한 것이니, 하는 소리들이 얼마나 공허한 사탕발림인가 곰곰이 되씹어 보게된다.

글/전흥윤

 

작성자전흥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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