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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 원폭 46년 히로시마에서 서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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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6일 아침 8시15분.
이 날은 인류최후의 무기로 불리는 "원자폭탄"이 처음 실전에 사용된 날이며 원폭피해자의 지옥 같은 삶이 시작된 날이다. 그 후 46년,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모두에게 버림받은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일그러진 삶은 날로 높아만 가는 한반도의 핵전쟁 위험성과 함께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지난 46년 간 어둠 속에서 고통의 삶을 살아온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어제가 우리 모두의 내일이 될지도 모르는 지금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날 아침>

 1945년 8월6일 전쟁 막바지의 광기로 가득 찬 남태평양. "에놀라 게이(즐거운 에놀라)"를 비롯한 세 대의 B-29 폭격기가 칠흙 같은 어둠을 뚫고 테니안 섬을 출발 유황도를 거쳐 6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히로시마 상공에 소리 없이 도착했다.
 아침 8시15분 출근과 등교로 여느 날과 같은 전쟁 중의 하루를 바쁘게 시작하던 히로시마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폭탄 공격을 받았다.
 네바다 사막에서 핵실험에 성공한지 불과 20일 뒤였다. 길이 3미터, 폭 70센티미터 그리고 무게 4톤의 히로시마형 원자폭탄은 약 6백미터 상공에서 폭발과 함께 순식간에 발화점의 온도가 수 백만 톤까지 올라갔으며, 백만 분의 일초도 안돼 주위의 공기가 백열상태로 뜨거워져 빛나는 공 모양의 불덩이가 나타났다.
 불덩이의 직경은 약 29미터까지 퍼지고 온도는 30만도 가까이 내려갔으나 30여리 떨어진 곳에서 불덩어리를 본 사람은 여전히 햇빛보다 10배 이상 밝은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찌르는 강력한 빛에 뒤이어 강렬한 열선과 방사선이 사방으로 퍼지고 주위의 공기가 크게 부풀면서 폭풍우가 몰아쳤다.

 폭발과 함께 방사능을 가진 구름기둥이 하늘을 뒤덮으며 9천미터 상공까지 치솟아 버섯처럼 옆으로 퍼져나갔다.
 폭발 후 20분이 지나면서부터 사방 50리까지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두 발의 폭탄으로 히로시마·나가사끼가 초토화된 것은 물론 당시 두 도시에 살고 있던 약 74만의 시민 중 20만명 정도가 즉사했다. 그 가운데에는 징용 등으로 끌려왔던 한국인도 4만명이나 되었다.(당시 두 도시에 약 7천만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음)
 당시 히로시마에 살고 있던 이순옥씨(당시14세)는 그 날 아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날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일이 있어 식사도 안하고 밖으로 나가셨는데 돌연 "번쩍"하고 빛이 비췄어요. 순간 벼락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집이 무너져 나와 엄마 그리고 여동생 셋은 그만 깔리고 말았어요. 그때 나는 거의 죽는 줄 알았어요. 위에서 떨어진 유리 파편에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돼 피를 흘렸습니다. "엄마, 엄마…"하고 아무리 울면서 불러도 어머니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는 그때 머리위로 떨어진 커다란 기둥에 맞아 벌써 죽고 말았던 거예요."

<비극의 시작>

 1945년 8월15일 마침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라는 미국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임으로써 태평양전쟁은 막을 내리고 식민지 조선은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대부분의 한국인은 고향으로 돌아가 되찾은 나라에서 새 삶을 일구며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피폭자들은 자신의 몸이 예전과 다르게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새롭게 태어난 아이들은 온 몸이 털로 뒤덮이거나 얼굴이 일그러지는 등 "이상한 모습으로 태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피폭자는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는 지 알지 못하고 그저 "내 탓"이라고 여겨 쉬쉬할 뿐이었다.
 일본으로부터는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으며, 나라안에서는 "조국을 버린 배신자"로 따돌림당해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던 원폭피해자의 치료와 보상문제는 1965년 굴욕적인 한·일 회담으로 얻어낸 5억 달러를 끝으로 전후 보상처리를 모두 마무리지어 외교적으로 더 이상의 요구를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정부는 당시 전후처리 비용으로 받은 5억 달러로 과연 무엇을 했는가. 당시 일본정부가 준 유·무상 5억 달러는 10년에 걸쳐 찔금찔금 나눠줬을 뿐 아니라 사용방법까지 "경제개발"로 한정한 치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는 이 돈으로 포항제철 건설에 6천만 달러를 투자하는 등 광·공업 생산기반 설비에 약 55%를 썼다. 이처럼 전후 배상금은 한국의 산업진흥에 대부분 지출되었으며 실질적인 전쟁 피해자인 원폭피해자나 징요자들에게는 전혀 배상이 되지 않았다.
 일본정부의 뻔뻔스런 태도와 한국정부의 무책임이 합쳐져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져가던 원폭피해자 문제는 1962년 봄, 당시 개최 중이던 한일회담에 일본당국과 한국 행정부, 외무부에 배상문제를 호소한 곽귀훈씨와 63년 부인과 함께 히로시마에 와 치료를 받고 있던 이종욱씨가 한국정부와 미국대사관, 일본신문사 등에 진정서, 탄원서를 내고 보상을 요구하면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원폭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치료에 대해 처음 법적으로 요구한 사람은 바로 손진두씨였다.

<손진두 소송으로 살아난 원폭피해자의 권리>

 손진두씨는 히로시마의 피폭자로 1970년 12월 사가현에 밀입국해 원폭병의 치료를 요구했으나 일본정부는 입국관리령위반으로 손씨를 체포했다.
 1971년 10월 복역중이던 손씨는 병세가 악화되어 입원하고 있던 후꾸오까 동산병원에서 피폭자 건강수첩의 교부를 신청했으나 후꾸오까현은 이를 각하 시켰다.
 이에 손씨는 각하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으며 1974년 3월 후꼬오까 지방재판소의 1심과 2심에서 각각 승소했으나, 이에 불복한 우꾸오까현의 상고로 최고재판소까지 올라갔다.
 1978년 3월 마침내 최고재판소는 후꾸오까현의 상고를 기각, 손씨의 승소를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재판장인 기시 판사는 "…(손진두씨가) 우리나라에 거주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피폭자건강수첩의 교부를 각하 하였다. (그러나) 피폭자인 이상 원폭의료법 적용의 예외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피상고인이 피폭당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후 평화조약의 발효에 의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일본국적을 포기한 사정을 감안하면 (일본의) 국가도의적 의무가 있다"고 판시해 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일본의 배상책임과 치료의 길을 열어 놓았다.
 "손진두 소송"은 일본의 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책임은 물론 한국인 피폭자의 권리의식에도 커다란 자극을 주어 스스로 권리회복을 위한 많은 단체가 생겨났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

 "손진두 판결"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1979년 6월 한국과 일본의 여당간에 원폭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각서가 교환되었다. 여기서 합의된 세 가지 항목은
 첫째, 한국의 의사를 일본에 파견해 기술훈련을 한다. 둘째, 원폭의료전문에 일본의사단을 한국에 파견해 재한 피폭자의 도일치료(연간 60명, 2개월 이내를 원칙으로 최고 6개월 한도로 한다). 일본은 피폭자 건강수첩의 교부에 최대한 편의를 제공한다.
 그러나 공화당 구태회 정책위의장과 자민당대표 기하라가 서명한 합의문 가운데 실제로 시행된 것은 도일치료 뿐이었다.
 1980년 11월 제1진이 치료를 받기 위해 일본에 간 것을 시작으로 86년 말 기한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도일치료는 경제적 이유로 일본에 갈 수 없는 중증, 고령자들의 문제와 함께 계속적인 치료를 받을 수 없는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많은 피폭자들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 서둘러 도일치료를 중단한 정부는 그 이유를 "우리의 예산으로도 충분히 치료보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1986년 정부예산을 살펴보면 합천진료소에 3천7백만원, 치료보조금으로 2천2백80만원 그리고 도일치료비로 3천3백60만원이 들어 있을 뿐이다.
 이는 지난해 일본 원폭피해자의 치료와 생계보조비를 위한 예산이 1천3백억엔(우리 돈으로 약 8천억원)그리고 히로시마시의 예산만도 3백84억엔(2천3백억원)인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턱없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욱이 일본의 경우 전후 40여년이 지나 대부분의 피폭자 대책이 치료보다 생활보장 등 경제적인 문제 해결로 옮아가고 있음에 비해 우리는 그저 "피폭 1세대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일본정부는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국인 원폭피해자에게 의료비로 40억엔(약 24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올 8월 1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인원폭희생자추도식"에 참석한 야나기 일본 대사는 "올해 예산으로 17억이 상정되었으며 이것이 즉시 실행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고 있다"고 말해 참가자들의 분노를 산바 있다.
 이러한 일본측의 오만한 태도와 정부의 수수방관에 대해 대부분의 원폭피해자들은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이제 어떠한 말도 더 이상 믿지 않겠다. 당장 우리 앞에 현금으로 전액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대를 이어 나타나는 검은 그림자>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원폭의 무서움에 진저리치게 되는 것은 2대, 3대에 걸쳐 끈질기게 나타나는 알 수 없는 후유증을 경험하면서부터였다.
 피폭 2세, 3세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이상한 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것은 이들 피폭 2세가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이 다른 어떤 장애우보다 심해 사회와의 접촉을 철저히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고열과 온 몸을 휘감는 통증과 싸우다 84년 9월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끝내 스물 셋의 젊음을 마감해 버린 황의태씨의 경우는 피폭 2세의 정신적·육체적 상황이 다다른 막다른 골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의학적으로 피폭 2세의 여러 가지 증상이 원폭과 관련된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어느 곳에서도 발표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1983년 교회여성연합회가 펴낸 "한국인 원폭피해자" 실태조사에 의하면 4백93명의 조사대상 피폭 2세 중 정신적·육체적 이상자는 정신지체가 22명, 간질 6명, 신체장애 25명, 안면근육이상, 수족마비가 각각 6명으로 나타나 전체의 14%인 65명이나 되었다.
 더욱이 이 중에는 여자들의 불임과 월경불순 등의 내용이 빠져 있어 실제로 정신적·육체적 이상자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제까지 피폭자 2·3세에 대해 단 한번의 역학조사조차 하지 않고 있어 원폭피해자 문제에 대한 정부측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피폭 2세는 대부분 어려운 가정환경(월수입 10만원 이하가 236명으로 전체의 86%)과 피폭자 2세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주위의 오해와 편견에 대해 60%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은 물론 핵전쟁 금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14%)는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히로시마에서 서울로>

 이제까지 철저하게 개인적인 아픔에 머물러 있던 원폭피해자문제는 정신대, 징용자의 배상문제 등 일본에 대한 전쟁피해보상요구와 맞물려 나라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문제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과거" 문제는 단순한 과거에 머물지 않고 바로 오늘 우리의 문제로 점차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미국은 북한 영변의 핵발전소 재처리 시설을 둘러싸고 원폭개발 가능성을 주장하며 핵사찰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으며, 북한측이 핵사찰문제와 함께 남한내의 핵무기철수를 주장하자 휴전이후 단 한번도 있다, 없다 밝히지 않았던 핵무기를 "한반도가 아닌 바다로 옮길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이는 바로 남한 내에 핵무기가 설치되어 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하는 것이며 동구 사회주의의 변화와 더불어 조성된 평화의 기운에 힘입어 핵무기 감축과 폐지가 급속히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오직 한반도에서만은 "핵전쟁"의 위험성이 날로 높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환경오염의 위험성 때문에 축소되거나 폐기처분되고 있는 핵발전소를 앞으로 50여개나 더 지을 계획이라고 밝혀 한반도는 가히 "핵의 천국"이 되고 있다.
 46년 전 히로시마·나가사끼의 비극이 이제 남북한 7천만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는 바로 오늘의 문제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한국인원폭피해자위령비"는 바로 46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계속되고 있는 핵, 아니 제국주의 열강의 발아래 놓여 있는 한반도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글/전흥윤
    

 

작성자전흥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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