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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장애우 추행, 그리고 도처에 널려있는 인권유린의 덫

충남 천원군 영락교회 김만국 목사의 충격적 범죄

본문

장애우들의 인권이 처참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말뿐인 수용시설에서 한갓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된 채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장애우들이 실상이 속속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는 이 때에 이번에는 한 현직 목사가 여성장애우를 여러 차례 걸쳐 추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추행사실을 외부에 알렸다고 마구 두들겨 패 전치 4주의 중상을 입힌 경악스러운 사건이 발생해 할 말을 잊게 만들고 있다.

이번 사건이 주는 의미는 다름 아닌 장애우 인권유린이 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여건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에 있을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국가의 공적 책임을 민간에 떠넘겨 수 많은 사이비 사회사업가들을 양산해 왔다. 그들은 장애우들을 자신의 축재의 수단으로만 이용해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철저하게 방관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장애우들이 격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고도 모자라 이제는 인간의 가장 숭고한 가치인 성 마저 유린하고 짓밟는가? 장애우들에게 동물적인 삶을 강요하며 굶주림과 억압, 살인적인 구타를 가한 김만국 목사, 그는 반드시 400만 장애우의 이름으로 규탄 당하고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충격적인 추행, 구타

충남 천안 경찰서는 지난 7월 16일 자신이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용하고 있던 장애우 이경희(가명 22세)양을 강제 추행하고 마구 때려 전치 4주의 중상을 입힌 김만국 목사(40세 샬롬한가족선교회 대표, 충남 천원군 성환리 영락교회)를 보호자 간음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이 밝힌 김만국 목사의 충격적인 범죄사실은 다음과 같다.

피의자는 천원군 성환읍 성환리 261-2 00 000장로회 성환 영락교회 목사로 종사하고 사회복지사업으로 신체 장애우등을 위탁보호하고 있는 자로서 1979년 2월 8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절도죄로 벌금 7만원, 1980년 1월 20일 같은 지원에서 병역법 위반으로 벌금 3만원의 형을 받은 전과자인바,

가. 1989년 10월 31일 23:00분경 충남 천원군 성환읍 성환리 261-2 피의자의 00 000장로회 성환영락교회 사무실에서 피의자가 위탁보호하고 있는 우수족 장애우 피해자 이00(여, 당시 21세)을 목사라는 신분의 지위를 이용하여 그곳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입에 키스를 하고 00을 만져서 애무하고 그녀를 일으켜 세워서 뒤로 밀어 그곳 바닥에 눕혀놓고 00을 벗긴 후 그녀의 0위에 올라가 1회 성교하여 간음한 것을 비롯하여 같은 해 11월 2일부터 같은 해 4월까지 매일 23:00분 경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각 1회씩 그녀를 간음하고, 1990년 1월 말 23:00분 경과 같은 해 2월 중순 22:00분 경, 같은 해 3월 23일 20:30분 경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각 1회씩 간음하여서 업무상으로 피의자의 보호를 받고 있는 위 이00을
목사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간음하고

나. 1990년 1월 20일경 22:00분 경 전항과 같은 장소에서 피의자의 00를 꺼내어 위 이00의 0에 대고 그녀의 머리를 잡고 강제로 00을 핥으라고 흔들어서 폭행을 가하여 그녀로 하여금 피의자의 00를 그녀의 입에 넣고 00하여서 위 이00를 추행하고

다. 같은 해 2월 15일경 22:30분 경 전항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위 이00을 추행하고

라. 같은 달 20일경 20:00분 경 전항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위 이00을 추행하고

마. 같은 해 3월 15일 22:00분 경 전항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위 이00을 추행하고

바. 같은 해 3월 23일 21:30분 경부터 같은 날 22:00경까지의 사이에 전항과 같은 장소에서 위 이00 이 전항과 같은 피의자와의 관계가 있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그녀가 존경하고 있는 신부에게 보냈다는 말을 그녀로부터 듣고 그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였다는 이유로 직경 약 3센티미터, 길이 70센티미터의 나무대기로 그녀의 머리를 약 10회, 양발바닥을 약 30회 주먹과 발로 어깨와 가슴 등을 약 15회 구타하여서 그로 인하여 그녀에게 치료기간 미상의 두부타박상등의 상해를 가하고

사. 같은 해 6월 22일 10:00시경부터 같은 날 10:40분 경까지의 사이에 전항과 같은 장소 내 위 이00의 침소에서 그녀가 전항과 같이 피의자와의 성관계를 외부사람에게 발설하였다는 이유로 직경 약 3센티미터, 길이 약 50센티미터의 나무막대와 주먹과 발로 그녀의 얼굴과 어깨 팔, 허벅지, 양발바닥 등 전신을 수십 회 구타하여서 그로 인하여 그녀에게 요치 약 4주일간의 치료를 요하는 후두부 타박상 및 내출혈 등의 상해를 가한자로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는 자임


가슴을 도려내겠다 팔 다리를 잘라 버리겠다 폭언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칫 김만국 목사에 의해 무마될 수도 있었던 이번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날 수 있었던 데는 한 숨은 봉사자의 노력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자신 교회 집사이기도 한 평택에 사는 이정란(여, 41세)가 발 그 당사자이다. 그녀는 피해자인 이경희 양을 영락교회에서 구해내 보호하며 김만국 목사에게 잘못을 시인할 것을 요구, 한때 김목사 측에 의해 배후조정자로 매도당하며 공갈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여기서 이번 사건이 알려지게 된 계기를 피해자인 이경희 양과 문제의 영락교회 출석교인인 지체장애우 이성애 아주머니 그리고 4년 전 한 종교방송에서 하루 밥 세끼 먹을 것을 한 끼를 줄여 우표와 편지지를 사서 자기들처럼 불행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전해고 있다는 영락교회 소개의 말을 듣고 영락교회를 돕기 시작했다는 이정란 씨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해 보기로 한다.

사건의 발단은 6월 20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날도 영락교회를 방문해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갈 채비를 하던 이정란 씨를 경희 양이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이정란 씨에게 경희 양은 조심스럽게 부탁드릴게 있다고 운을 떼었다.

이정란 씨가 무슨 부탁인지 말해 보라고 하자 경희 양은 아빠한테 전화를 하려고 그러는데 돈이 없다면서 "아주머니 돈 가진 거 있으면 조금만 주실래요"하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만원이 있었는데 유전도사(김만국 목사의 처 유모 씨의 남동생)가 보관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등록증과 함께 뺏어갔다는 것.

이정란 씨는 마침 가진 돈이 3천 원 밖에 없었기 때문에 3천 원을 건네주며 무슨 일 때문에 전화를 하려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경희 양은 김목사 한테 당했다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정란 씨는 말뜻을 몰라 무슨말이냐고 재차 물어보았다. 그러자 경희양은 그 동안 김목사가 강간한 사실을 자세히 털어놓은 것이었다. 이정란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커다란 충격을 맛보았다.

그날은 경희양의 말만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인 21일 이정란씨는 재차 영락교회를 찾아가 경희양의 말에 대한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교회가 설립 될 당시부터 기거한 뇌성마비 장애우 김은혜양에게 목사님에 대한 추문이 돌고 있는데 사실이냐고 물어보았다.

김은혜양은 처음에는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러나 이정란씨가 성경구절을 들먹이며 진실을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고 재차 설득하자 그제서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김은혜 양은 예전에도 몇몇 사람이 목사님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당하고 난 후 바른말을 했더니 목사님이 때려서 쫒아 내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은혜양은 자기가 얘기했다는 사실을 절대 밝히지 말아 달라면서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이정란씨는 몸서리쳐지는 두려움을 느끼며 어떻게 영락교회를 빠져나왔는지 모르게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22일 오전 10시경 부근 동네에서 영락교회를 다니는 이성애 아주머니는 그 날도 집안의 우환 때문에 기도를 하려고 영락교회엘 갔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난데없이 고함소리가 터져 나와 이성애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야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 고함소리는 김목사가 경희 양을 다그치는 거친 목소리였다. "너 이 집사에게 뭐라고 그랬어…"

잠시 후 경희 양의 방에서는 울부짖음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성애 아주머니는 황급히 경희양의 방으로 달려갔다. 김 목사가 마치 미친 사람처럼 경희 가슴을 도려내겠다 팔다리를 잘라 버리겠다는 등의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하며 몽둥이와 주먹과 발로 경희 양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있었다.

이성애 아주머니는 김 목사에게 이성을 찾으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희 양이 숨이 꺽 꺽 넘어가는데도 김 목사는 때리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30분은 족히 넘었을 것이었다. 김 목사의 구타는 경희 양이 고통과 두려움으로 인하여 팬티에 대변을 누는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자 비로서 멈추었다.

이날 김 목사의 구타로 경희양은 머리가 흐물흐물해지고 얼굴에 멍이 들고 전신이 부어 올랐으며 양 발바닥도 새까맣게 멍이 들어 부어오르는 심한 증상을 입게 되었다.

경희양을 구타한 후 김목사는 평택의 이정란씨를 찾아갔다. 김목사는 이정란씨에게 다짜고짜로 경희는 정신이상자이니깐 경희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정란씨는 순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김목사에게 "그렇다면 이 추문이 왜 이렇게 퍼졌을까요?"물으면서 "만약 목사님이 결백하다면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 그렇지 않다는 걸 밝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 목사는 "내가 이렇게 추문을 듣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서 보내신 것 같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자"고 악수를 청해 왔다.

그 날 저녁 이정란씨는 아무래도 불안한 심정을 떨쳐버릴 수 없어 늦은 시각이었지만 영락교회를 찾아갔다. 먼저 김 목사를 만나 "목사님 이 일이 사실이라면 회개를 하셔야겠습니다"라고 운을 떼어 보았다.

김 목사는 정색을 하며 맹세코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었다. 이정란씨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현장을 목격한 것도 아니어서 그냥 돌아나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막 대문을 나서려는 이정란씨에게 경희양일 벌벌벌 떨면서 헐레벌떡 달려나오더니 "아줌마 나 이렇게 매 맞았어요 아줌마 가고 나면 나 또 매 맞을거예요. 또 매 맞으면 난 이제 살 수 없어요. 은혜랑 같이 약을 먹고 죽을 거예요. 제발 살려주세요…"사정하며 붙잡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을 정도로 처참하게 짓이겨진 경희양 몰골을 대하자 이정란씨는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정란씨는 김 목사에게 가 사정했다.

"경희가 매를 맞고 공포심에 떨고 있으니깐 저희 집에 데려가서 2-3일 안정을 취하게 한 후 다시 데려오겠습니다"라고 , 그러자 김 목사는 벌컥 화를 내면서 "내가 어떻게 이 아이들을 모았는데 이 집사 마음대로 데려가느냐 안 돼!"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정란씨는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서 "이런 아이를 두고 내가 어떻게 갑니까 저는 못 갑니다. 여기서 자고 가겠습니다"라고 대꾸하여 고집을 부렸다.

그날 밤 이정란씨는 경희양 방에서 경희양을 보듬고 누웠다. 경희가 매를 맞게 된 계기가 자신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23일 새벽 여섯시 경 밤새 방 앞에 의자를 놓고 감시하던 김 목사가 자기 집으로 간 것을 확인한 이정란 씨는 경희 양을 데리고 몰래 영락교회를 빠져나왔다. 우선 경희를 치료해 주기 위해 평택에 있는 노 외과에 경희양을 입원시켰다. 의사는 경희양이 전치 4주의 증상을 입은 사실을 확인했다.

25일 월요일 김목사가 유 전도사를 대동하고 이정란씨를 찾아왔다. 김목사는 대뜸 화를 내며 "경희 보호자는 나다 무조건 경희를 내놓아라"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정란씨도 울화가 치밀어 "경희가 맞아서 공포에 떨고 있는데 아무리 법적 보호자면 뭐하냐"고 항의했다.

그래도 김목사는 경희를 내놓으라며 강짜를 부렸다. 나중에는 안 내놓으면 유괴죄와 명예훼손죄로 집어넣겠다고 공갈 협박까지 했다. 이정란씨는 김목사의 요구대로 경찰서에 가서 진실을 밝히자고 대꾸했다.

이정란씨는 경희양을 데려와 김 목사와 함께 택시를 타고 성환 경찰서로 갔다. 성환 지서 소장은 경희양 진술을 듣자 경희양 말이 사실이라면 기 목사를 유치장에 가두라고 지서 순경에게 지시했다. 다급해진 김 목사는 전화통을 붙잡고 누군가와 한참 통화를 했다.

잠시 후 같은 충정지역 장애인선교단체연합회 회원인 온양의 현모 목사라는 사람이 경찰서 문을 밀고 들어섰다.

현모목사는 경찰서 소장과 장시간 귓속말을 나누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현모 목사는 김 목사 말만 듣고 경희양이 정신이상자이고 과대망상증 환자라는 증언을 경찰서 소장에게 했다고 한다. 현 목사의 말을 들은 경찰서 소장은 그렇다면 경희양을 보호자에게 넘겨야겠다면서 경희양의 아버지 이모씨를 수소문해 찾게 했다.

얼마 후 경희양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봉고차를 몰고 도착했다. 경희양의 아버지가 경희양을 태우고 병원에 가려고 하자 김 목사는 예의 자신이 경희양의 보호자라며 경희양 다리를 끌어 당겨 한 시간여를 실갱이를 벌여야 했다.

결국 경희양 아버지가 나보다 확실한 보호자가 어디 있냐고 화를 내면서 당신이 정말 보호자라면 같이 천안 경찰서로 가자고 하자 움찔해진 김목사는 그 제서야 경희양을 놓아주었다.

경희양 아버지는 수원 모병원에 들러 경희양을 응급처치를 한 후 천안 경찰서로 달려가 김만국 목사를 고발했다.


추행당한 장애우 또 있다

피해를 입은 이경희 양에 대하여 김만국 목사는 경희양이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자가 병원에서 만나 확인한 바에 의하면 경희양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하
는 클래식 음악을 즐겨듣고 시를 쓰는 특출난 취미를 가진 장애우였다. 그녀는 김 목사가 장애우 사업을 하기 위해 만든 샬롬한가족선교회 회지에 일상생활 속에서라는 수필과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그녀가 쓴 시를 한 편 전재해 본다.

봄비
어둠이 개이지 않은
정적 어린 새벽
창호지 문밖을
똑똑 두드리는 빗소리가
명랑하게 들린다.

메마르고 얼어붙은 대지여
드높고 청명한
3월의 하늘이 되기 전에
어서들 오랫동안 동면하는
흙 속과 지상의
모든 생명에게 소생의 봄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알리려므나
90.2.18


경희양이 영락교회에 수용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곁아 경희양의 부모는 경희양이 여덟 살 때 서로 합의 이혼을 했다. 그때부터 경희양은 외가에서 자랐는데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교통사고를 당해 반신불수의 장애를 입게 되었다. 3년여에 걸쳐 병원이 입원해 있는 동안 그녀의 아버지가 헌신적인 간호를 했다. 그러나 입원기간이 길어지자 그녀의 아버지도 지쳐 쓰려져서 더 이상 병구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외가 쪽에서 서둘러 경희양을 퇴원시켜 한 달에 5만여 원의 돈을 주기로 하고 89년 3월 18일에 경희양을 영락교회에 보냈다고 한다.

경희양의 증언에 따르면 김 목사는 작년 10월 31일 밤 11시경 선교회 사무실에서 처음 강제로 욕을 보인 다음 그 후에도 수시로 주로 한 밤중 자고 있는 경희양을 깨워 협박을 일삼으며 자기 욕심을 채웠으며 그 횟수는 경찰서에서 진술한 횟수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건망증이 있어서 확실한 횟수는 기억 못하지만 몇 차례 당한 일자는 그녀의 수첩에 메모해 두었다며 수첩을 꺼내 보여주었다. 가관인 것은 김 목사는 경희양이 반항을 하면 자신이 보호자의 입장에서 널 행복하게 해 주겠다며 지금은 도망쳐서 영락교회에 없는 정신지체장애우 임모씨(집안이 윤택하다고 한다)와 결혼을 시켜주겠다며 말도 안 되는 회유를 하곤 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김 목사에게 당한 장애우가 자신만이 아니라는 그녀의 주장이다. 정신지체장애우인 장모(19세)양도 김 목사에게 불려가 추행을 당해 장양이 목사님이 자꾸만 나랑 몸을 섞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예전에 영락교회에 황모라는 여자 전도사가 있었는데 김 목사와 불륜의 관계가 있는 것을 알고 김 목사 부인인 유모씨가 쫓아낸 전례도 있다는 것이다.


지능이 있기 때문에 신사적인 대접을 해 주는거니까 발바닥을 내놓아라

영락교회는 성황 버스터미널에서 평택 쪽으로 백여 미터를 걸어가다 오른쪽 골목으로 꺽어 들어 이백여미터를 더 올라가야 하는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86년 김 목사가 처음 교회 간판을 내 걸었을 때에는 일반 신도들도 몇 명이 있었지만 현재는 일반 신도 없이 스물 세 명의 장애우만 수용하고 있다.

수용돼 있는 장애우는 대부분 가족이 있는 장애우들인데 지체 장애우 5명, 어린아이 4명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정신지체 장애우들이다. 이와 관련 성환지역 모교회 사모는 김 목사가 부잣집 장애우 가족에게 30만원, 50만원, 100만원 이상의 돈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성환 지역에 파다하게 퍼져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교회 운영은 장애우 가족들이 매달 부쳐오는 돈과 전국 각지의 교회와 개인들이 송금해 오는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실 가족들이 보내오는 액수보다는 후원자들이 보내주는 후원금 액수가 더 엄청나다는 것이 한 관계자의 귀띔이다.

이외에도 "우리가 이런 몸으로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으려고"(김은혜양의 말) 전국 교회에서 차를 대절해 수시로 영락교회를 방문, 많이 올 때는 하루에 두 번 세 번 겹쳐, 오는 손님들 치르기가 번거로울 정도로 비장애우들이 많이 찾아와 후원물품과 후원금을 떨구고 간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락교회 측이 밝힌 장애우 일인당 한달 생활비는 6만여 원에 지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수용되어 있는 장애우들이 매일 먹는 식단을 잠시 살펴보면 아침은 밥 깍두기 김장김치 고추장, 점심은 김치 두 가지에 라면 아니면 밥, 저녁은 김치외에 혹가다 미역줄거리볶음이나 동태국이 나온다고 한다.

하루일과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예배를 드리고 식사와 청소를 하고 난 후 여자들은 주로 빨래를 하고 남자들은 인접해 있는 밭에 나가 김장채소, 가지, 고추 등을 심고 가꾸는 밭일을 하곤 한다. 점심 먹고 또 일을 하며, 오후 일곱시 쯤 다시 예배를 보고 각자 흩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영락교회 측은 그동안 장애우 몇 명이 실종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대문을 걸어 잠그고 장애우들의 바깥출입을 철저히 통제, 장애우들을 가두다시피 수용하면서 가혹한 인권유린 행위를 저질렀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김목사의 처남 유전도사와 지체 장애우 최모씨에 의해 주로 자행된 구타는 앞서 언급한 경희양의 경우 올 초 어느 날 목사가 추행한 사실을 외부에 알렸다는 것을 이유로 유전도사가 막때리고 발바닥을 70여 차례나 때려 경희양에게 화장실을 못 갈 정도의 심한 상처를 입힌 것을 비롯해(경희양에 의하면 유 전도사는 자신을 때리면서 지능이 낮은 장애우들은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개 패듯이 패지만 너는 지능이 있기 때문에 신사적인 대접을 해주는 거니까 발바닥을 내놓으라고 했다고 한다. ) 장애우들이 예배를 안 드리려 할 경우나 밖에 나가려고 할 때 그리고 오줌을 쌀 경우 각각 죄목을 정해 20여대씩을 때렸다고 한다.

장애우들을 때릴 때는 얼굴을 때리면 상처가나 손님들이 방문해 발견하면 골치 아프다며 머리와 발바닥
을 주로 구타한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는 일요일날 장애우들을 모아놓고 오줌 안 싸게 기도하라고 해놓고는 뒤에서 무수히 구타, 오죽했으면 이성애 아주머니가 일요일만은 제발 때리지 말라고 통사정을 했을 정도였단다.

기자는 이 같은 증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7월 19일 오후 영락교회를 찾아갔다. 김목사는 경찰서에 구속되어 부재중이었고, 대신 유전도사와 김목사의 부인 유모씨가 기자를 맞았다.

대문께에서 유전도사는 취재에 응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돌아가라고 기자를 거절했다. 그는 이어 여론 때문에 김목사가 구속됐다며 관리자의 입장에서 아이들을 지키고 싶으니까 이번 사건이 끝나거든 오라고 말했다. 기자가 기사를 일방적으로 쓸 수 없어 찾아 왔으니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사정해 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기자는 취재를 안 한다는 조건 하에 간신히 영락교회 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선교회 사무실에서 어렵게 말을 돌려가며 유전도사에게서 얻어낸 말은 다음과 같다.

장애우 일인당 한 달 생활비가 6만여원이라는 것, 뒤에서 이번 사건을 조정하는 사람이 잇다는 것, 합의를 봐야하기 때문에 협조를 못해주겠다는 것, 이번 사건이 일단락되면 일간지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는 것과 김 목사는 주로 전국 교회를 돌아다니며 간증과 헌신 예배 인도를 하며 숙식을 제공받기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교회에 일요일만 내려왔다는 사실 정도였다.

그러면서 유전도사는 합의를 보기 위해 변호사를 만나러 가야한다며 자신의 처와 사무실에 있는 최모씨에게 취재가 될 만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서는 황급하게 자리를 떴다.

기자는 숙소를 찾아가 뇌성마비 장애우인 김은혜 양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눈지 10분 정도 됐을까 갑자기 예배를 드려야 한다며 한 건강한 정신지체 장애우가 오더니 김은혜양을 데려갔다. 평상시에는 오후 7시경에 드린다는 예배를 5시도 채 못돼서 드린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힐 뿐이었다.

시설이 허술해야 후원금이 많이 들어온다

구속된 김만국 목사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로 철저하게 사람들을 속여왔음이 드러나고 있다. 대외적으로 버려진 장애우들을 돌보는 의로운 목사로 행세해 왔지만 실제로는 장애우를 돌본다는 미명하에 전국 교회와 2백여 명의 후원자들로부터 막대한 후원금을 받아 자신의 배를 채우는데 사용했음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86년 11월 5일 빚 2천 5백만원을 얻어 시작한 교회와 장애우 사업을 3년이나 지난 현재 빚을 청산한 것은 물론 드러난 재산만 해도 5백여평의 밭과 3천 5백만원 상당의 개인 주택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수완을 발휘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 목사는 수용되어 있는 장애우들 사진을 가지고 전국 교회를 돌아다니며 장애우들 24명을 내가 보호하고 있다고 큰 소리를 치면서 후원금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자신의 교회가 서울의 유명한 모 교회의 성환지교라고 사람들을 속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 목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타락한 인물인지를 한 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평택의 00고등학교를 중퇴 취직을 하기 위해 한 후원자의 소개로 김 목사를 만났다는 박모양은 지난 5월 김 목사를 만나 겪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모가 장애우 선교회에서 일해 볼 마음이 없느냐고 소개를 해줘 좋은 일 같아 김 목사를 만났어요. 그때가 점심시간이었는데 평택시내에서 만난 김 목사가 대뜸 저더러 자신은 아침도 안 먹었으니까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자고 그러더군요. 저는 마침 점심을 먹고 나왔기 때문에 거절을 했어요. 그러자 김 목사는 그렇다면 앞으로 자신의 교회에서 일하다가 스트레스가 쌓이면 볼링장에 가서 볼링을 치라면서 평택 시내에 있는 볼링장엘 데려가는 거였어요.

볼링장에 가서 볼링을 치는데 저는 처음이라 못 치니까 김목사가 짜증을 내더군요. 볼링장을 나와서 거리를 걷는데 갑자기 김 목사가 너 금반지 끼고 싶지 하면서 주머니에서 만원 짜리 뭉치를 꺼내 금반지 하나 해줄까 하더군요. 저는 필요 없다고 거절을 했어요. 그러자 용돈이 필요하지 그러면서 돈을 주는 거였어요. 저는 돈도 거절을 했지요.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아세요.

나는 사모한테 정이 전혀 없는데 너는 나만 사랑할 수 있겠지. 네가 고아원을 원한다면 내가 하는 사업을 분리 시켜서 고아원을 차려줄 수도 있어. 이러는 거였어요. 저는 기가 막혔지만 이모의 당부도 있고 해서 교회까지 따라 갔어요.

교회를 둘러보고 나서 제가 물어봤지요. 장애우 사업을 한지 얼마나 되느냐구요. 한6-7년 된다고 대답을 하더군요. 그래서 그러면 후원금이 많이 들어오겠네요. 연이어 묻자 김목사는 미국에서 천불도 오고 만 불도 오고 그러는데 천만 원이 들어오면 유 전도사 주머니에 5백만원이 들어가고 자기가 나머지 5백만 원을 갖는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제가 돈이 많이 들어오는데 왜 수세식 화장실 하나 없이 시설이 초라하냐고 따지듯이 얘기했지요. 그랬더니 김 목사가 뭐랬는지 아세요.

이렇게 하고 살아야 후원금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집 지을 돈이 있어도 일부러 집을 안 짓는다는 거였어요"


수용되어 있는 장애우들의 법적인 보호자는 정신지체 장애우 아주머니

또한 김 목사의 사생활에 대해 한 관계자는 김 목사는 원래 서울 모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는데 복잡한 여자관계 때문에 쫓겨났고, 평택에서도 모 식품회사 딸과 관계를 가져 빈축을 산 적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실제로 김 목사는 무슨 이유에선지 89년 2월 17일 자신의 주민등록을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4가로 혼자 옮겨 놔 이 부분에 대해 짙은 의혹을 품게 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김 목사는 자신이 수용되어 있는 장애우들의 법적 보호자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놀랍게도 주민등록상에는 세대주가 정신지체 자애우인 최민자(46세)씨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희양을 포함해 13명의 장애우가 김 목사가 아닌 최민자 씨의 동거인으로 세대별 주민등록표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만약 불의의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 모든 책임을 정신지체 장애우인 최민자씨가 져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돼 기자를 아연실색케 만들고 있다.

김 목사 측은 현재 치료비와 보상금을 줄 테니 조속히 합의를 하자고 경희양 아버지를 조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 경희양 아버지 이모씨는 법대로 하겠다며 김목사 측의 제의를 거절하고 있다. 지금도 오래 앉아 있으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온다는 경희양은 기자에게 김 목사가 왜 그렇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마지막으로 기자는 김 목사의 해명을 듣기 위해 천안 경찰서를 찾아갔다. 어렵게 면회허가를 얻어 철창을 사이에 두고 김목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먼저 기자는 김 목사의 해명을 듣기 위해 천안 경찰서를 찾아갔다. 어렵게 면회 허가를 얻어 철창을 사이에 두고 김목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먼저 기자는 김 목사에게 범죄 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김 목사는 "내게 지금 중요한 것은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내가 데리고 있는 장애우들이다"며 사실의 확인을 회피하였다.

기자가 재차 경희양을 추행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김목사는 "경희는 과대망상증이 있는 아이다. 더 이상 대답하기 싫다. 지금 점심을 먹어야 되니까 내가 나 간 뒤에 다시 보자"고 벌컥 화를 내는 것이었다. 사실 확인을 안 해주면 기사를 일방적으로 쓸 수밖에 없다고 하자 "마음대로 써라. 그러나 나중에 명예훼손죄로 고발당할 각오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자는 몇 가지 사실을 더 확인하려고 재차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김 목사는 "지금 피곤해서 지쳐 잇다. 나는 말을 안 한다면 안 하는 사람이다"라고 소리치며 돌아서는 것이었다.

기자는 김 목사의 등뒤에다 대고 김 목사가 뻔히 알고 있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경희양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합의를 본다고 가족들이 들락 날락 거린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김 목사의 대답은 명백히 거짓말임이 분명했다.

장애우가 돈을 벌게 해 주는 기계인가?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끝간데 없는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언제까지 장애를 가졌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이렇게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지 울화통이 치밀었다. 사실 이 사건을 접하기 전만 해도 전국에 산재해 있는 장애우 신앙공동체에 대한 기자의 시선은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정부의 지원이 전무한 상태에서 고생하며 장애우들을 돌보는 많은 참 종교인들에게 기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끝없이 보내주고 싶었다.

이는 비단 기자만이 아니라 장애우 문제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심정일 것이다. 때문에 이번 사건을 장애우 신앙공동체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로 파악하지 않고 단지 김만국 목사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해 버린다 해도 기자는 아무 이의가 없다.

그러나 훤히 눈에 보이는 검은 함정들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후원금을 받아내기 위해 장애우들을 마치 동물원 원숭이처럼 비장애우들에게 구경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교회를 돌며 장애우를 팔며 비장애우들에게 상대적 우월감을 맛보게 해 주는 파행적 행태들, 또한 버젓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후원금의 쓰임 내역이 전혀 밝혀지지 않은 채 인권유린의 덫만 도처에 널려 있는 이런 절망적 상황들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내친 김에 이번 기회를 빌어 기자는 현재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해 가고 있는 장애우선교단체연합회에 간곡하게 부탁드리고 싶다. 조직확장도 중요하지만 우선적으로 공동체내의 인권유린을 감시하고 시정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달라고, 또한 사이비 사회사업가들이 발붙일 수 없는 건강한 풍토를 조성해 달라고.

이제 착찹한 심정으로 종교인들에게 분명하게 물어보자.

장애우가 천국행을 보장해 주는 면죄부인가?
나아가 돈을 벌게 해주는 기계인가?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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