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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날갯짓, 청년들이 기대어 쉴 나무가 되다

함께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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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지 못하는 펭귄에게 날개가 꼭 필요할까. 하늘을 나는 새와 달리 펭귄의 날개는 짧고 단단해 비행에는 쓰이지 않아 언뜻 보기에 쓸모없어 보이지만, 물속에서는 추진력을 주고 땅 위에서는 균형을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원시 장안구에는 ‘펭귄의 날개처럼 쓰임과 쓸모를 찾지 못했을 뿐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는 믿음으로 마음이 힘든 사람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기대어 쉴 수 있는 공동체, ‘펭귄의 날갯짓’이 있다.
 
힘들면 누구든지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 친구네 집
 
1호선 성균관대역에서 도보 10분 정도를 걷다 보면 건물 1층에 포스터가 눈에 띈다.
 
‘마음이 힘든 청년 누구나 친구네 집으로 놀러오세요!’
‘펭귄의 날갯짓은 정신질환 및 고립·은둔 청년과 함께 합니다’
 
처음 ‘친구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기자에게도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축 처진 분위기는 아닐까?’, ‘나의 방문이 불편하지는 않을까?’와 같은 걱정이 뒤따랐다. 한편으론 ‘고립된 청년들을 위한 공간이라면 사람이 한 명도 없지는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풍경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네 명의 청년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고 표정의 변화가 크게 있진 않았지만,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공간 한쪽에는 큰 TV와 소파, 다양한 책들과 게임 그리고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고, 인형과 모래시계, 따뜻한 조명이 켜진 상담실이 마련돼 있었다. 춤을 마친 청년들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오늘 상자 님 볼 수 있어서 진짜 반가웠어요. 다음엔 또 언제 나오세요?”
“아 그러게요. 프로그램 또 언제 하죠?”
“다음 주엔 독서모임이 있어요”
“아.. 네. 일단 아직 모르겠어요. 다음 주에 제 상태가 어떨지”
“네. 그렇죠. 그럼 그때 볼 수 있으면 또 만나요 우리”
 
우울한 사람들의 독서 자조모임에서 쉼터가 되기까지
 
‘친구네 집’은 펭귄의 날갯짓에서 보건복지부 ‘지역재활서비스 확충 사업’의 지원을 받아 2024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동료지원쉼터이다. 서울에는 관악, 송파 등 몇몇 동료지원쉼터가 있었지만, 경기도에는 작년부터 ‘친구네 집’과 ‘경기동료지원쉼터’가 생겼다.
 
펭귄의 날갯짓이 처음부터 쉼터였던 것은 아니다. 공동대표 박소현 씨가 자신의 우울 경험을 나누기 위해 2022년 독서 자조모임을 만들었고, 당시 공황증세로 퇴사 후 책이라도 읽으려 했던 이광호 씨가 같은 해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작당이 시작되었다.
 
비슷한 정신적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두 청년이 머리를 맞대며 모임의 활동내용들을 채워갈 때 가장 중요시 여긴 것은 첫 번째도 재미, 두 번째도 재미였다.
 
“사회에서 아무도 우리를 고용해주지 않으니까 그럼 우리가 일을 벌리자, 그리고 어차피 우리가 만들어서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재미있는 거 다 해보자. 이 마음이 가장 컸어요.”라고 이광호 대표가 전했다.
 
△펭귄의 날갯짓 <상실 경험 청년 자조모임> 모습 (출처. 펭귄의 날갯짓 네이버 블로그)
 
그림책을 통해 ‘사랑스럽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 ‘외로움을 이해하는 보드게임’ 진행, 정신질환 관련 도서를 읽고 각자의 의견을 나누는 팟캐스트 운영, 과천, 군포, 수원 인근의 공원과 천길을 따라 함께 걸으며 이야기 나누는 산책 자조모임 등 다양한 시도가 이어졌다.
 
비슷한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재밌으려고 만든 모임, 사회적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서로를 위로하는 이 느슨한 연대는 방 안에만 있던 수많은 외로운 청년들의 마음 문을 열었다.
 
밖에서는 외계인같이 느껴지던 나의 존재가 이해받는 공간
 
고등학생 때 조울증 진단을 받은 상자(가명, 32세) 씨는 작년부터 우울증세가 심해져 집 밖을 나가지 못하다 어머니의 권유로 이곳을 찾았다.
 
“최근에 우울감이 깊게 찾아오니까 원래 학생들 수학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도저히 안 돼서 일 그만두고 약도 먹고 상담도 받았어요. 노력을 많이 해봤는데 쉽게 잘 회복이 안 되더라고요. 계속 집에만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지나가다가 포스터를 보셨는지 집 근처에 이런 데가 있으니까 한번 가보라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상자 씨는 어머니의 권유에도 이곳을 오기까지 마음 문을 여는 과정, 집 밖을 나서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게 진짜 모순이에요. 집 밖에는 진짜 나가기 싫거든요. 근데 사람은 또 만나고 싶어요. 집 밖을 못 나가겠는 이유가 생각이 정말 많아서예요. 제 별명이 상자인데, 어렸을 때 제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선생님들이 여준 이름이거든요. 그만큼 어딜 나가기 전부터 제가 벌써 시뮬레이션을 혼자 다 돌리고, 혼자 지치고, 상처받고, 피곤하고.. 누가 이러진 않을까, 저러진 않을까 이런 생각들로 나가질 못하겠었어요.”
 
그럼에도 그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 모두가 이상하다고 말했던 내 성격이 이곳에서는 괜찮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끼리 느끼는 기류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비정신질환자들은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자극들이 있는데 그게 저한테는 정말 크게 와닿거든요? 이런 감각들이 지속되니까 이 지구상에 나만 외계인 같다는 생각을 오래 했었어요. 제가 가진 감정들을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했을 때 ‘응? 난 안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생각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이런 식의 반응들을 늘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여기 오니까 똑같은 얘기를 했을 때 ‘맞아요. 그 느낌 뭔지 알아요. 저도 그랬어요.’ 이런 반응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아 나 혼자 외계인이 아니구나’ 하며 안심이 되고 좋았어요.”
 
지역의 정신건강복지센터의 권유로 이곳을 알게 된 20대 청년 나라 씨도 비슷한 마음을 전했다. 정서적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을 온라인에서는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오프라인에서 직접 마주하고 대화할 기회가 많지 않아 이 공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재미만을 추구하던 자조모임에서
모두가 안전해야 하는 쉼터로
 
자조모임의 형태로 시작된 펭귄의 날갯짓은 다양한 지원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현재는 임의단체로 운영 중이며 사회적협동조합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초기에는 재미를 중심에 두며 자유롭게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지만, 이용자가 늘고 다양한 기관과 연계되면서 지금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
 
쉼터 한켠에는 ‘서로 존댓말을 사용합니다’, ‘상대방의 요청없는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은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거절하고 거절받을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와 같은 규칙이 비치되어 있다. 상담실에는 ‘동료지원상담 동의서’가 비치되어 있으며 상담 시간, 비밀보장, 녹음 및 녹취 동의 등에 대한 규정도 마련됐다.
 
△ 비치되어 있는 동료지원상담 동의서
 
이광호 대표는 이러한 규칙들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과도 일부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친구네 집’ 쉼터의 일부 규칙은 보건복지부의 지침을 따른 것인데 그 예로, ‘자해와 타해가 심한 경우에는 정신건강복지센터나 보건소 등 더 적합한 곳으로 안내’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제한을 두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특정 병명이라든지 자해나 타해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의 여지로 인해서 쉼터 공간 사용이나 입장을 제한했던 적은 없어요. 프로그램도 청년 중심으로 운영되기는 하지만 부모님 등 연세가 있으신 분들도 많이 오셔서 상담도 받고 쉬시기도 하세요.”
 
‘정신건강 수도’이자 경기도 내 청년 인구가
가장 많은 수원, 지역과 함께할 일 많아
 
수원은 경기도에서 청년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2019년 경기도 행정안전부 통계 기준)이자 수원시 정신건강 증진 조례에 따라 시민의 정신건강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정신건강 수도’를 운영하는 지역이다.
 
초기에 수도권 중심에서 자조모임 활동을 하던 펭귄의 날갯짓도 자연스럽게 수원에 정착하게 됐다. 실제로 많은 청년들이 성인정신건강복지센터와 자살예방센터, 그리고 수원시 전 연령 시민들을 대상으로 정신질환 예방과 평생정신건강통합 관리를 하는 행복정신건강복지센터 등을 통해 이곳과 연결되고 있다.
 
또한 성균관대학교 등 인근 대학에 직접 홍보 포스터를 붙이고, 지역 카페나 공유공간에서 독서·스터디모임을 열며 지역사회와도 인연을 맺고 있다.
 
“한 번은 저희가 인근에 ‘하우짓’ 카페에서 독서 모임을 한 적이 있어요. 저희 활동을 보더니 카페 사장님께서 본인이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해보고 싶다고 먼저 제안을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여러 가지를 고민하다가 일자리 연계를 해주셨던 적이 있어요. 직업 훈련처럼 카페에서 원데이로 커피 내리는 법을 알려주시고 단기로 일해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죠.”
 
어떤 날은 지역의 정신병원 1층에 위치한 카페에서 프로그램을 하다가 그 병원을 이용하고 있는 정신질환 당사자와 간호사가 우연히 함께 합류한 적도 있다. 또 한 번은 세월호 유가족 어머님들과 인연을 맺게 되어 함께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심리적 재난 상황을 경험한 청년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언제나 마음이 힘든 자들이 쉬었다 갈 수 있는
나무와 같은 곳이 되고 싶어
 
펭귄의 날갯짓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목적과 이유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잠시 쉬었다 가는 정거장으로서, 또 누군가는 오래도록 정을 붙이고 싶은 안전한 울타리로서 이곳을 찾는다.
 
이곳을 1년 조금 넘게 다니고 있는 상자 씨는 두 가지 생각을 다 해보았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천천히 쉬어가는 법을 연습한다고 전했다.
 
“저는 항상 욕심에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죠. 완전히 회복해서 다시 일도 하고 싶고 돈도 벌고 싶은데 너무 서두르는 건 욕심인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극단적인 예로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불편해졌는데 다시 전력 질주를 하는 건 어렵잖아요. 그런 거랑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싶어요. 여기서 천천히 쉬어가며 적응하는 방법을 찾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친구네 집’ 쉼터에서 동료지원활동가로 근무하고 있는 토끼 씨(가명, 20대)는 본인의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는 일터가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제가 특별히 대학에서 전공한 것도 없고 그래서 조금 위축돼서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제가 비슷한 어려움을 가진 분들에게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도 많고, 같이 하고 싶은 활동들에 대한 아이디어가 샘솟아요. 이게 나름의 제 자부심이 되었어요. 사회에서는 제 아픔이 흠이지만 여기서는 전공이고 자부심인 거죠.”
 
펭귄의 날갯짓은 정신질환이나 진단명과 상관없이, 그저 ‘지치고 힘든 사람이라면 누구든’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나무 같은 공간으로 뿌리내려가고 있다. 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번아웃을 겪고 문득 이곳을 찾았던 어느 이용자의 “여기서는 제가 치료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쉴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은 이 공동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더욱 분명히 해준다.
 
비행하지 못하는 펭귄의 날개가 물속에서는 힘찬 추진력이 되듯, 이곳은 사회 속에서 소외되는 청년들에게 다시 삶을 이어갈 작은 힘을 건네고 있다. 언제든 기대어 쉴 수 있는 나무로 펭귄의 날갯짓은 오늘도 청년들의 하루를 곁에서 지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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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날갯짓의 활동이 궁금하다면, 031-278-3472로 연락하면 된다. 동료지원쉼터 ‘친구네 집’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화산로187번길 1 301호에 위치해있으며, 화요일부터 토요일, 9시~18시 사이에 방문이 가능하다.(일,월 휴무) 동료지원가 상담 및 프로그램은 펭귄의 날갯짓 카카오톡 채널,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을 통해 신청이 가능하다.
작성자글과 사진. 김영연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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