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모르겠어, 어디로 가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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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어, 어디로 가야할지….”
-청각장애우 이인섭·하와수씨-
청각장애우인 이인섭씨와 하와수씨는 지상의 방 한 칸을 마련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다. 살고 있는 집이 헐리게 돼 이제 거리에 나앉게 된 이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막막해 하고 있다. 풍요의 시대에 몸을 누일 방 한 칸이 없이 애태우는 가난한 두 장애우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태곤 (함께걸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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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시 중앙동, 숲이 우거진 관악산 중턱 허름한 외딴집에 사는 장애우 이인섭씨와 하와수씨는 하늘 아래 비를 피할 방 한 칸을 간절히 소망한다. 이들에겐 다 쓰러져가는 판자집도 족하다. 그저 쫓겨 다니지 않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다면 하다못해 토굴집이라도 이들은 감지덕지할 것이다.
두 사람은 지금 살고 있는 방에서 쫓겨나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무허가 건물이었던 집이 허가가 나면서 집주인이 새로 집을 짓겠다며 나가 줄 것을 요구하고 있어 이들은 조만간 방을 비워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어디로 가나. 현재로서는 두 사람이 갈 곳은 이 땅 어디에도 없다.
올해 예순두 살인 이인섭씨는 양로원에 들어가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나이가 양로원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이인 예순 다섯 살이 되지 않았다고 관청에서는 그의 다급한 사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탁상행정의 진형적인 표본이다.
하와수씨는 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자유인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방에서 쫓겨나면 과천 어디쯤에다 비닐하우스를 치고 살지언정 규제가 뒤따르는 시설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가 가진 석은 두둑한 배짱 하나뿐이다.
두 사람이, 코 앞에 골프연습장이 있고 도심에서는 보기 드물게 숲이 우거져서 전원주택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어울리지 않는 보금자리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십 년과 삼 년쯤 된다. 이 곳에 먼저 들어와 산 사람은 하와수씨였다. 하와수씨는 어디서 흘러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이십여 년 전부터 과천에서 살았다. 역시 관악산 줄기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살다가 불이 나 비닐하우스가 몽땅 타는 바람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그를 관악산 관리인이 딱하게 여겨 후원자를 연결해 줬고, 그 후원자가 지금 살고 있는 방을 소개해줬다.
이인섭씨는 삼 년 전에 조계사 내 청각장애우를 위한 모임 원심회 회장 덕신스님의 배려로 이 곳에 오게 됐다. 덕신스님이 간곡하게 그의 딱한 사정을 집 주인에게 설명하고 설득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곳에 다다르기까지 두 사람은 무척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던 삶을 살아왔다. 장애우로서 험난한 세상을 살자면 누군들 사연이 없겠는가마는 특히 두 사람은 나이가 말해주듯 유난히 질곡이 많았던 한 세상을 헤쳐 나와야 했다.
두 사람의 살아온 삶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 사연을 얘기하기에 앞서 두 사람의 장애를 설명해보면 먼저 하와수씨는 듣고 말하는 기능이 상실된 청각장애우에다 한쪽 팔이 절단된 지체장애를 가지고 있고 여기에다 기억상실증까지 겹친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인섭씨는 하와수씨보다는 덜한 청각장애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인섭씨 역시 관절염 등의 질병과 노환에 시달리고 있어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인섭씨는 삼팔선 너머 강원도 금화에서 일천구백삼십삼년 부 이종원씨의 사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장애를 가지지 않았는데 육이오 때 피난 내려오다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청각에 장애를 가지게 됐다. 전쟁통에 가족을 잃어버리고 혼자 다방에서 허드레 일을 하며 지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아버지를 다시 찾았지만 이 해후는 그 후 그에게 득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끼치는 원인이 됐다.
아버지는 새 장가를 들어 계모하고 같이 살고 있었는데 생활능력이 없었기에 그가 생활비를 대줘야 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청년시절 부평 미군부대 근처에서 깡통 펴는 일을 하다가 미군부대가 이전하는 바람에 그 일도 계속하지 못하고 노가다로 나서야 했다. 그 때부터 사십여 년, 그는 노가다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한세월을 보냈다. 그는 바라시 (집 지을 때 판자로 골격을 세우고 시멘트를 붓고 난 뒤 마르면 판자를 뜯어내는 일) 전문가였다. 이 기술을 배워 그는 셋방으로 떠돌던 아버지 집도 지어주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축 때는 청각장애우들 삼십여 명을 거느린 오야지 대우를 받으며 건축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서른여섯 살 때, 당시 삼양동에 살고 있던 그는 결혼할 마음이 없었는데 동네 아주머니가 “혼자 살면 어떡하냐, 내가 괜찮은 여자를 소개해 줄테니까 결혼해라.”라고 부추기는 바람에 같은 처지의 한 청각장애 여성과 결혼을 했다. 그 여자와는 슬하에 순옥, 순애 두 자매를 두고 십여 년을 같이 살았다. 그런데 여자가 바람이 나 가출을 밥 먹듯이 하는 바람에 결국 이혼해야 했다.
“여자가 바람나서 자꾸 나가더니 나중에는 남자가 생겼다고 이혼을 해달라는데 어떻게 해. 이혼해 주고 말았지.”
이혼 후 도저히 혼자서 두 딸을 키울 수 엇었던 그는 눈물을 머금고 두 딸을 입양기관을 통해 미국에 보냈다.
그런 다음 거처를 구로동으로 옮긴 그는 일을 나가 번 돈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 살고 있던 계모의 장사밑천을 댔다. 장사밑천을 대며 “계모의 장사가 궤도에 오르면 내 생활도 펴지겠지.”라고 희망에 겨워하던 그는 얼마안가 그 희망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보의 장사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로 밑천을 대고 또 대도 한정 없이 돈만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계모와 대판 싸움을 하고 그는 결별을 선언했다. “나는 안 그랬으면 큰 부자가 됐을 텐데 계모 때문에 망했다.” 그의 하소연이다.
계모와 헤어진 후 그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 그는 관절염이라는 질병으로 인해 더 이상 공사판을 기웃거릴 처지가 못 됐다. 할 수 없이 그는 볼펜장사와 지탄을 받는, 장애를 팔아 돈을 구걸하는 모금함을 들고 다니는 신세로 전락해야 했다. 일정한 거처가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폐결핵까지 앓고, 그는 망가진 몸으로 흘러흘러 청각장애인복지회를 찾아갔고 거기서 원심회를 알게 돼 덕신스님의 소개로 지금 살고 있는 방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는 얼마전에 두 딸을 입양시켰던 입양기관에 찾아간 적이 있다. 혹시나 두 딸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찾아가 물어보니 이제 스무 살과 열여덟 살이 된 두 딸은 미국에서 하나는 대학엘 다니고 하나는 회사에 다닌단다. 그 딸들이 혹시나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까. 그것이 이인섭씨의 남아 있는 유일한 소망이다.
하와수씨는 올해 쉰 살이다. 아니 이 나이는 어쩌면 틀린 나이인지도 모른다. 나이뿐만이 아니라 그의 하와수란 이름 석자까지도 본명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의문은 상당부분 타당성이 있다.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무엇을 하고 살아왔는지,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백치 상태에 가깝다. 그의 과거는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와수씨는 올해 일월 사일 수원지방법원에서 그의 호적의 기초가 되는 성(性) 및 본관 창설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한 달 전 비로소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다. 이 말은 그가 한평생 호적이 없다가 비로소 올해 그 자신을 과천 하씨의 시조로 해서 호적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만약 그가 결호해서 자손이 생긴다면 그 자손들은 본관이 과천 하씨로 기록될 것이다.
호적과 주민등록도 없이 어떻게 삶이 가능했는가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하와수씨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럼 어떡하란 말인가. 난들 만들기 싫어서 안 만들었나. 그렇게 대답하면 그 누구도 하와수씨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십여 년 전 한 사내가 과천 관악산 줄기로 흘러들어 왔다. 그 사내는 빈터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곤궁한 삶을 시작했다. 주민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먹고 사는지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말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한쪽 팔도 없고, 집도 없고, 가족도 없는 한 불쌍한 장애우가 갈 곳이 없어서 저러고 있구나. 사고나 치지 말았으면, 그렇게 생각만을 했을 뿐이다.
하와수는 그렇게 과천 주민이 됐다. 그는 동네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밥을 얻어먹고 노가다판에서 일을 해주고 막걸리를 얻어먹으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이렇듯 먹는 것만 해결된다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다. 정 먹을 것이 없으면 공터에 고추를 심어 팔아먹기도 하고…
그런 살을 이어가다가 앞서 언급한 대로 그는 살고 있던 비닐하우스가 불에 타버려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옮겨 왔다. 거처는 옮겨 왔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곤궁했다. 도대체 나아질 건덕지가 없었다는 표현이 맞는 말이다.
이쯤에서 그가 싫어할지 모르지만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 보자. 정말 그는 과거를 기억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에게 과거에 뭘 했냐고 물어보면 그는 뜻밖에도 해양경찰대 마크를 선명하게 그려 내보인가. 그렇다면 그는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 장애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는 의복으로 군인옷을 즐겨 입는다. 몸에 함장 문신을 가지고 있고, 길거리에서 군인들을 만나면 반가워하며 비행기가 머리 위로 지나가면 매우 언짢은 표정을 짓는다.
이로 미루어 그는 바다에서 근무하다가 폭격 사고를 당해 장애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추측이 맞는다면 그는 분명히 원호대상자이다.
국가를 위해 복무하다가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면 그는 당연히 국가에서 주는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부대에서 근무했는지 하다못해 지역조차도.
그의 고향과 가족에 대한 단초도 한 때 추측이 가능했던 때가 있었다. 그는 사 년 전 주위 사람들 도움으로 텔레비전의 헤어진 가족을 찾는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다. 그때 그 프로그램을 보고 충남 공주에서 한 사내가 자신이 동생이라며 찾아왔다. 하와수는 그 사내를 붙잡고 반가움의 눈물을 흘리며 껴안았다. 그 사내가 내민 사진에서 아버지라고 정확하게 얼굴을 찍어내기도 하고.
그런데 그랬음에도 그 사내는 “아무래도 우리 형이 아닌 것 같다.”고 도리질을 하며 얼이 빠져 있는 그를 놔두고 냉정하게 돌아서 가 버렸다. 주위 사람들 추정에 따르면 형이 맞긴 맞는데 찾고 보니 그가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아무래도 짐이 되겠다 싶어 사내가 그를 놔두고 가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하와수씨는 그래도 고향을 가지게 됐다. 그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그 사내가 살고 있다는 공주를 자신의 고향이라고 적어주곤 하는 것이다.
이렇듯 장애뿐만이 아니라 심적으로도 고통을 겪고 있는 하와수씨에게도 한 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 년 전이었다. 그는 한 여자를 만났다. 동네 주민들이 왜소한 체구에 쓸쓸해 보이는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억하는 한 여자, 그녀는 과천 아파트 공사장 함바집에 고용돼 밥을 해주고 있었다고 한다. 하와수씨는 관악산에 놀러온 그녀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서로 궁합이 맞았는지 그 얼마 후 두 사람은 같이 살게 되었다. 생전 처음 여자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그는 생활에 활력을 얻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생활도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처음에는 살갑게 굴던 여자가 점차 본색을 드러내면서 그의 말에 따르면 “매일 술을 마시고 빨래는 물론 밥조차 하지 않고 노는 것만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는 몇 차례 달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다가 “그래도 말을 듣지 않아 내쫓아 버렸다.”고 쓸쓸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생활보호자로 지정돼서 취로사업을 나간 덕분이다. 한 달에 많으면 십오 일 취로사업을 나가는데 일당으로 일만오천원을 받아 그 돈으로 생활을 이어간다고 한다.
취로사업을 나가지 않는 날이면 하와수씨는 뱀을 잡으러 다닌다. 새벽에 일어나서 주로 청계산엘 가는데 “뱀 잡는데는 기술자”라고 스스로 자위한다. 허탕 치는 날도 있지만 하루에 많을 때는 대여섯 마리를 잡아 그는 과천시장에 있는 건강원에 내다판다. 예전에는 한 마리에 만 원씩 받았는데 지금은 뱀 값이 올라서 이만 원을 받는다. 짭짤한 수입이 되는 편이어서 하와수씨는 이인섭씨더러 같이 가자고 그러지만 이인섭씨는 다리가 아파 따라 나서질 못하고 있다.
이인섭씨는 대신 얼마전까지 화장지 장사를 했다. 장애우 단체에서 파는 화장지를 받아 팔았는데 이문이 괜찮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최근 그 장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인즉슨 다리가 아파 방문 판매는 하지 못하고 리어카에다 화장지를 싣고 시장에 가서 팔았는데 번번이 단속반원들에게 내몰려 이제는 장사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인섭씨는 취로사업이 없는 날이면 할일 없이 집 앞 마당을 서성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은 한 집에서 살지만 방은 따로 쓰고 있다. 밥도 따로 해먹고 빨래도 따로 한다. 두 사람은 어떤 대 서로 다투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인섭씨가 그래도 수화에 능숙한 반면 하와수씨는 수화를 배우지 못해 의사표현이 무척이나 서툴다. 그래서 서로 간에 오해가 싹트기도 한다.
이인섭씨는 툭하면 하와수씨에게 “저 야마, (멍청하다는 뜻)”라는 표현을 쓴다. 반면에 하와수씨는 서툰 손놀림으로 이인섭씨가 신경질이 많다는 표현을 해 보인다. 두 사람은 가끔 주먹다짐도 하는 모양이어서 이인섭씨는 “왜 싸우나 모르지. 나는 그런적 없는데 쟤(하와수씨)가 왜 눈치 보냐며 내 목덜미를 잡잖아. 그래 말로 해라 말로 해 그랬는데 내가 힘이 없다고 발로 차잖아. 그래서 두어 번 싸웠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툼도 오래지 않아 더 이상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게 될 처지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헐리게 되고 이들이 거처할 방을 구하지 못한다면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인섭씨는 그동안 오십만 원 가량의 돈을 모아놨다고 한다. 그러나 이 돈으로 방을 얻기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는 표현이 맞는 말이다.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은 하와수씨이다. 하와수씨는 모아놓은 돈이 하나도 없다. 집이 헐리면 예전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살던 곳에다 다시 비닐하우스를 치고 살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가능할지가 의문시 되는 것이다. 설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할지는 충분히 예사되고도 남는다.
“모르겠어, 어디로 가야할지.”
집이 헐리면 어디로 갈 계획이냐는 질문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두 사람. 그들의 두 눈은 바로 앞 가까이 골프연습장에서 한가롭게 골프채를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내내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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