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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마음이 편해 구도를 닦습니다."

신기료쟁이 이충걸씨

본문

                      "마음이 편해 구도를 닦습니다."
                             신기료쟁이 이충걸씨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치며 파란 많은 인생을 살아야 했던 소아마비 장애우 이충걸씨, 그가 불혹의 나이에 정착한 곳은 부산에 있는 한 오피스텔의 구두닦이센터이다. 행상으로 시작해서 수세미장사, 자가용영업과 운전강사를 전전했던 그의 인생역정은 장애우가 제대로 된 직업을 갖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정부에서 발표한 장애우 운전 일종 면허 허용을 바라보며 격세지감을 느끼는 한 장애우가 있다.
 지금 부산 문현동 한 오피스텔 빌딩 주차장 한켠에서 신기료쟁이로 일하고 있는 이충걸씨. 그가 일종 면허 허용에 유달리 큰 감회를 갖는 것은 이 일을 시작하기 전 무려 십여 년을 장애우를 상대로 운전교습을 시키는 일에 매달려 왔기 때문이다.
 비약하자면 그는 장애우 운전역사의 산 증인인 셈인데 일종 면허는 꿈도 못 꾸고 겨우 이종 면허가 허용된 팔십 년대 중반, 부산에서 처음 면허를 딴 장애우 세 명 중 한 명이었다.
 그 당시에는 장애우들이 운전면허를 발급 받으면 감격해서 울었다나.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같은 아득함이 느껴지는 그 시기부터 시작해서 최근까지 그를 거쳐 운전면허를 획득한 장애우는 거진 일천여 명에 이른다.
 이런 숫자가 허풍으로 들리지 않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장애우에게 운전을 가르치는 학원이 생긴 것은 얼마 전 일이고 초기에만 해도 장애우들이 운전을 배우려면 먼저 면허를 딴 장애우를 선택해서 배우곤 했는데 그나마 면허를 가진 장애우가 얼마 되지 않아서 특정인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 그의 직업은 팔자에도 없는 운전강사였다. 공터에다 코스를 그려놓고 장애우들에게 열심히 운전을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장애우에게 자동차가 대중화 되고 일종 면허 허용까지 가시화 된 지금, 그때 그가 한 역할은 하나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가 아니어도 운전을 가르치는 장애우들이 많고, 학원까지 생기면서 그에게 운전을 배우겠다는 장애우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그는 직업을 전환해야 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두 말 할 필요없이 자본이 없으면 밑바닥 일을 전전해야 하는 것이 이 사회의 법칙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구두를 닦고 있다. 하루 삼사만원을 손에 쥐기 위해서 그는 이른 아침부터 아내가 찍어다 주는 구두에 호호 입김을 불어 광을 내는 일에 열심이다.
 이렇게 광을 내다보면 언젠가는 내 삶에도 서광이 비취겠지, 그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올해 마흔다섯살인 소아마비 장애우 이충걸씨, 그는 누구 못지않게 힘든 삶을 살아왔다. 이제 그의 고단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부산 토백이다. 동래가 고향인 그는 삼형제 중에 장남으로 태어나 돌 전에 소아마비 후유증을 앓아 장애우가 됐다. 별 어려움 없이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그가 브니엘상고를 졸업할 무렵 지하수 개발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올라앉으면서 그의 삶도 어긋나기 시작했다.
 기울어 가는 가세는 그로 하여금 이른 나이에 방황을 시작하게끔 만들었고, 그는 동네 건달들과 어울려 장애를 비관해서 술을 먹고, 살아갈 일이 막막해서 또 술을 먹고, 그렇게 술로 세월을 보냈다. 술에 취하면 마음 한구석에는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조바심이 들었지만 벗어나고 싶어도 자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조바심을 술잔에 묻어두고 진저리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느 때부턴가 자살을 꿈꾸기 시작했다. 자포자기로 내몰린 인생 살아서 무얼 하나, 그 생각 끝에 그는 세 번의 자살을 결행했다. 한 번은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고, 두 번째는 동맥을 끊고, 세 번째는 술을 먹고 동래여고 뒷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극한적인 자살 시도는, 그러나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죽음 일보직전에서 살아나기를 되풀이하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생각을 바꾸었다.
 "아 내가 죽으려고 해도 안되니까 이젠 한번 살아봐야겠다."
 그렇게 해서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장사가 번데기 장사였다. 목발 두 개 중 하나만 짚고 손수레를 겨우 밀고 다니면서 시작한 번데기 장사는 처음에는 "번데기 사세요."라는 말이 안 나와 애를 먹었지만, 차츰 요령이 생기면서 그런 대로 밥벌이는 할 수 있었지만 결국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얼마 하지 못하고 그만둬야 했다.
 번데기 장사를 그만둔 그는 그때 돈 사천 원을 주고 큰 손수레를 하나 사서 건달로 떠돌던 시절 안면을 익힌 어느 다방 입구에서 이번에는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포장마차는 번데기 장사보다 확실히 장사가 더 잘됐다. 하지만 노점 단속반 등살 때문에 애를 먹어야 했기 때문에 마음고생은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장사를 하는데 갑자기 우지직, 자신의 포장마차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로 단속반이 들이닥친 것을 직감한 그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서 옆에 있던 부엌칼을 들어 불문곡직하고 그림자를 향해 내질렀다. 불시에 포장마차 안에서 칼이 튀어나오자 단속반원들은 혼비백산에서 도망쳤다. 그는 포장을 걷고 뛰쳐나가 "씨발놈들 다 죽여 버린다."고 고함을 쳤다. 그 순간 그가 목발을 짚은 장애우인걸 알게 된 단속반원들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저씨 미안합니다. 아저씨가 몸이 불편한지 몰랐습니다. 다음부터는 단속 나오면 미리 알려줄 테니까 잠시 치워주기만 하십시요." 그날 이후 그는 단속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랬는데 포장마차도 얼마 안가 문을 닫아야 했다. 외상이 많이 깔리면서 자본이 부족한 그는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포장마차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던 것이다.
 장사에서 별 재미를 못 본 그는 기술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몸이 불편하니까 이럴수록 기술을 가져야지 자립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가 들어간 곳이 부산 양지재활원 시계수리과였다. 그곳에서 일 년여 시계수리 기술을 배운 그는 칠십팔년 재송동 해운대 경찰서 옆에 있는 정금사라는 시계방에 기사로 취직했다.
 바로 이 시기 그에게 중요한 변화가 찾아온다. 아내가 될 변재영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 변재영씨는 깨진 시계유리를 갈러 그가 기사로 있는 시계방에 들렀다. 그때 그는 나름대로 손님을 대하는 요령을 터득해 실습하는 중이었는데 요령이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친절하게 대하고, 수리하는 시간도 벌 겸 꼭 커피를 끓여 내놓았다. 그런 다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것뿐 첫날은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없었다.
 두 번째 변재영씨가 고장난 시계를 고치러 다시 그를 찾아왔을 때도 특기할 만한 상황 진전은 없었다. 겨우 말을 터놓고 하는 아는 사이로 발전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그는 아는 사람과 동업을 하기로 하고 동상동에 있는 한 시계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되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변재영씨와의 인연이 거기서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하루는 도장포에 주문 들어온 도장을 맡기러 갔던 그가 우연히 정금사 점원을 만났다. 정금사 점원은 그에게 "어떤 여자가 찾으며 안부를 묻던데요."라고 일러주었다. 그는 그 여자가 변재영씨라는 걸 단박에 알았다. 그래서 그 점원에게 "다음에 또 그 여자가 찾아오면 나 있는 데를 꼭 가르쳐줘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아침 그는 여느 때처럼 가게문을 열고 손님 받을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저만치서 한 여자가 그의 가게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바로 변재영씨였다. 팔 개월 만에 다시 변재영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 변재영씨는 자주 그의 시계방에 들렀다. 만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정이 들었고, 정은 깊어지면서 사랑으로 발전했다.
 그렇다면 변재영씨가 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당사자인 변재영씨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말하는 그의 말을 들어보면 "내 목발이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내가 안돼 보이니까 이 사람이 동정심을 갖고, 그 동정심이 변해서 사랑이 된 거죠."
 만약 사랑만으로 결합할 수 있다면 이 가난한 연인에게 그보다 더한 축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기 십상이고, 장애를 가진 채 가진 것 없고 학벌도 없는 그를 변재영씨 집에서 받아들일 리 만무였다. 아니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변재영씨는 얼마 안 가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아기를 임신했다. 그렇지만 변재영씨 가족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변재영씨는 세 번을 머리끄뎅이를 잡힌 채 끌려가야 했는데 한 번은 임신 삼개월째 배가 불러와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어 가출해 그의 집으로 도망쳐온 변재영씨를 가족이 달려와 데려갔고, 두 번째도 다시 가출한 변재영씨를 막무가내로 끌고갔다. 세 번째는 임신 구개월째 된 변재영씨를 끌고 가서 그는 분노가 치밀어 변재영씨 집을 찾아갔다.
 막상 변재영씨 집을 찾아가자 분노 대신 기가 죽은 그가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사정하자 변재영씨 부모는 "임신 구 개월이 돼도 좋다. 다른 집에 재혼을 시키는 한이 있어도 너 보다 좋은 사람한테 보낼 수 있으니까 절대 너한테 안 준다."고 심하게 역정을 냈다. 그는 완강한 변재영씨 부모님 태도에 눈물을 머금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얼마 안가 변재영씨가 다시 가출해 그를 찾아왔다. 그는 변재영씨 부모가 집으로 찾아올까 싶어 변재영씨를 외삼촌 집에 숨기고, 그것도 맘이 안 놓여 울산에 있는 한 암자에 변재영씨를 꼭꼭 숨겨놓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이 하나를 낳고 두 사람은 팔십일 년에 결국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장인 장모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아 서러웠지만 사랑의 결실을 맺은 기쁨이 그 서러움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두 사람은 그의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즈음 그는 시계수리 일을 그만둬야 했다. 전자시계가 쏟아져 나오고 설상가상으로 동업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양산업을 기술로 택한 자신의 선택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시계수리 일을 그만둔 그는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한 자동차 정비공장에 취직했다. 그는 공장 자재과에서 공구를 내주고 수거하는 일을 했는데 얼마 안 가 공장장이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챙기는 것을 지적한 게 빌미가 돼 공장장과 대판싸움을 벌이고 그 공장을 그만뒀다. 다시 취직한 염색공장에서도 창고 열쇠를 달라는 부장과 다툼을 벌여 공장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세 번째 취직한 곳은 가야에 있는 조그만 신발공장이었다. 처음 먹고 살 게 없어서 취업을 시켜 달라고 찾아간 그에게 사장은 그의 장애를 이유로 채용을 거부했다. 굴하지 않고 계속 찾아갔지만 사장은 완강하게 그의 밥벌이를 거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그가 취업을 위해 찾아갔을 때 마침 오바로꾸(갑피 실 푸는 작업)일을 하던 여공이 결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급해진 사장은 "사람이 나올 때까지 며칠간만 일해 달라."고 그를 붙들었다. 그래서 그는 임시직으로 신발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여공이 하루 꼬박 일할 물량을 오전에 끝내 버리는 억척을 부려 마침내 소원했던 정식사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닌 지 육 개월 반에 신발공장이 망해버리는 바람에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거리에 서야 했다.
 그즈음 그의 집안 사정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부모님과 같이 살던 단칸방마저 월세가 다섯달이나 밀리는 바람에 집주인이 "나가달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가 사정했지만 집주인은 막무가내였다. 한 술 더 떠 집주인은 말로 안되자 한밤중에 곡괭이를 들고 들어와 그의 방구들을 찍어서 파해치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결국 식구들은 그 방에서 나와 뿔뿔이 흩어져야 했는데 부모님을 외삼촌에게 돈 십만 원을 빌려 또 다른 달세방을 얻어가고 그는 수중에 달랑 돈 오천 원을 들고 아내와 방을 얻으러 다녀야 했다. 그는 방을 얻기 위해 부산시내 변두리를 헤맸는데 양정 일동 산동네에서 싼 방이 있다는 전단을 발견했다. 그는 아내에게 "전단에 적힌 방을 보고 오라."고 일렀다. 부지런히 산동네를 올라갔다온 아내는 "그런대로 방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는 "방세가 얼마냐."고 물어 보았다. 아내는 "보증금 삼 만원에 월세 이만오천 원짜리 방"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방세가 너무 싼 게 믿기지 않아 직접 산동네를 올라가 보았다. 아내 말이 맞았다. 그 방은 흑벽돌로 지은 토담집 한켠에 있는 허름한 방이었는데 부엌도 있었다. 그는 두말하지 않고 선금으로 오천 원을 걸었다.
 그런 다음 산동네를 내려와서 보증금 삼만 원을 빌리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벌렸다. 마침 친구가 돈을 빌려 주겠다고 했지만 어찌된 날인지 약속한 날에 친구는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다급해진 그는 집 주인에게 "며칠 안에 꼭 보증금을 주겠다." 사정하고 먼저 이사를 했다. 그런데 여전히 돈을 빌려주겠다고 한 친구는 차일피일 날짜를 미루고 있었다. 그는 별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꼬박 밤 열두 시가 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도둑고양이처럼 살짝 방에 들어가서 자고 새벽에 도망 나오는 절박한 생활을 한동안 해야 했다.
 얼마 후 친구가 돈을 빌려줘 방 문제는 해결했지만 이번에는 먹고 사는 것이 커다란 짐으로 다가왔다. 아내는 마침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으므로 돈을 벌러 공장에 다닐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는데 나이와 장애 때문에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그는 방에서 천정을 바라보며 낙심만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돈을 빌려준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는 그가 처해 있는 형편을 보더니 "이렇게 사느니 남 보기에는 추하게 보여도 그 일을 하면 먹고 살 수는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귀가 솔깃해진 그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 보았다. 친구는 "시장을 기어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수세미장사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쨌든 먹고 살 수 있다는 친구 말에 앞뒤 재지 않고 "그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그는 수세미장사, 속칭 "기바리" 일을 하게 됐는데 수세미 장사라는 것이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어떤 장애우는 하겠다고 그래서 막상 시장에 내려놓으면 하루종일 한 개도 못 팔고 멀뚱히 앉아서 눈물만 흘리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장애우는 창피하다고 앉아서 휘파람만 불다가 돌아오는 장애우도 있었다. 그만큼 용기를 낸다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는 첫 날 대구 칠성시장에 장사를 하러 가게 되자 그 추운 겨울날 카세트도 없이 입으로 노래를 부르며 꼬박 시장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그에게는 창피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그 날 돈을 못 벌면 식구들이 굶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이렇게 수세미장사를 시작한 그는 얼마 안 가 같은 장사를 하는 동료들과 "대한자립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이 있기 전 장애우들은 개인적으로 흩어져 장사를 했는데 "우리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뭉치자."라고 만든 모임이 "대한자립회"였고, 말하자면 "대한자립회"가 시장을 기며 수세미장사를 하는 장애우들의 효시인 셈이다. 그는 초창기 "대한자립회"에서 부회장을 맡았다. 그러면 "대한자립회"는 무슨 일을 했을까.
 한창 때 "대한자립회"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전국적으로 다니며 "대한자립회" 회원이 아닌 장애우가 수세미 장사를 하면 잡아다가 부산에 데려와서 한 달간 합숙과 교육을 시켜 회원을 만들어 내보내고, 모임도 전국적으로 확대해 서울과 대구 등 대도시에 지부를 만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부산 조방앞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이 사무실에는 늘 장애우들로 북적거렸다. 수세미장사를 하는 장애우들 뿐만 아니라 다니다가 구걸을 하는 장애우들이 눈에 띄면 데리고 와 목욕시키고 설득을 해 한 달 동안 훈련을 시킨 다음 장사를 하러 내보내곤 했다.
 수세미장사는 근교를 다니는 패가 있고 주로 먼 지방을 다니는 패가 따로 있었다. 그는 먼 지방을 다니는 패에 속해 있었다. 그가 지방을 선호하게 된 것은 부산 근교 시장엘 가면 한 시장에 여러명의 장애우가 장사를 하고 있어 벌이가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방으로 뛰면 여관에서 잠을 자야하고 차를 대절해서 가야 했기 때문에 경비는 곱으로 들었지만 어쨌든 혼자 장사할 수 있어 그만큼 벌이가 괜찮았다. 그래서 그는 장이 서는 날을 알아내 봉고차 한 대 가득 물건을 싣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한 번 부산을 뜨면 보통 이십오일을 꼬박 지방을 다니며 장사를 했는데 얼굴이 팔리지 않다 보니 "아유 저 아저씨 인물도 좋고 덩치도 좋은데 참 안됐다. 너무 불쌍하다."며 사람들이 너도나도 물건을 팔아줘 그런대로 타향에서의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그는 지방을 거쳐 서울 이문동 "대한자립회" 서울 지부에 거처를 정하고 한동안 장사를 하기도 했다. 서울은 장사가 비교적 잘되는 편이었지만 정이 들이 않아 얼마 후 그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런 식으로 사 년여 수세미 장사를 한 그의 수중에는 겨우 일백만 원짜리 전세방 하나가 남았다. 돈을 많이 벌긴 했지만 모이지가 않아서였다. 무거운 손수레를 밀고 하루에 몇 바퀴씩 시장을 돌아야 하다보니 일이 힘들어 저녁에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먹고, 버는 것에 비례해 그만큼 경비도 많이 지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수세미장사는 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비나 눈이 오는 날은 쉬어야 했고, 한여름에는 지열이 뜨거워서 엉덩이가 익어 못나가고, 한겨울에는 땅이 얼어 다리가 펴지지 않아 못나가고, 이래저래 쉬는 날을 빼면 장사를 나가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돈을 모으기가 그만큼 힘들었던 것이다.
 그가 수세미장사를 그만둔 것은 마침 장애우에게도 운전면허를 발급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서울 이문동에 있을 때 그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때가 팔십오년이었다. 그가 처음 운전면허를 딸 필요성을 느낀 건 수세미장사를 하는데 기사 수고비를 주지 않고 자신이 직접 차를 몰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면허를 발급 받자 생각이 바뀌었다. 붐이 일면서 장애우들이 그에게 운전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하는 건수가 많아지면서 교습비로 얼마의 돈을 받게 되자 그는 미련없이 수세미장사를 그만뒀다. 그런 다음 빚을 내서 포니를 한 대 구입해 장애우들에게 운전교습을 시키는 한편으로 나라시(자가용 영업)일을 시작했다.
 자가용 영업을 하려고 부전시장 즉결재판소 앞에 진출한 그는 처음에는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패거리들의 텃세 때문에 많은 애를 먹어야 했다. 그가 "봐라 내 몸이 이래서 먹고 살려는데 같이 먹고 살자."고 사정했지만 패거리들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후진하면서 그의 차를 박아버리고, 지나가면서 송곳으로 차를 긁어 버리는 등 갖가지 행패를 부렸다. 다툼을 벌이기도 몇 차례, 그가 좀처럼 물러서지 않자 결국 패거리들이 그를 받아줬다. 그는 술을 한 번 진하게 사고 그 패거리들의 동료가 될 수 있었다.
 법으로 금지된 자가용 영업은 한 번 손님을 태우면 일반 택시요금의 두 배를 받았다. 요금이 비쌌음에도 사람들이 자가용을 이용했던 건 영업용 택시가 짐을 실어주려고 하지 않고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 걸 꺼리는 반면에 자가용 영업은 군말 않고 손님이 가자면 어디든지 갔기 때문이다. 그는 낮 밤을 가리지 않고 자가용 영업을 했다. 한번은 경찰의 함정단속에 걸리기도 했지만 그가 장애우라고 봐줘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자가용 영업을 계속하던 그는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자가용 영업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 사업이라는 게 성인 오락실 운영이었는데 경험도 없이 시작한 사업이다 보니 얼마 안 가 빚을 지고 문을 닫아야 했다.
 어려웠던 시절 수세미장사를 시작하고 운전을 배워 교습과 자가용 영업으로 돈을 얼마정도 모았던 것이 모두 다 백일몽으로 끝나고 다시 빈털터리로 거리에 내몰린 것이다. 어느새 여건도 변해 더 이상 운전교습과 자가용 영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지금의 신기료쟁이가 된 것은 사 개월 전 어느 날 친한 친구를 만나 "이젠 운전도 장애우들이 당장 필요한 사람은 다 배웠고, 또 십 년하고 나니 싫증도 나고, 이젠 다른 직업을 가져야겠는데 누가 구두닦이를 하는걸 보니 그거 괜찮겠더라. 나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됐다. 마침 그 친구가 문현동 오피스텔에 인쇄물을 납품하고 있어서 그 친구 소개로 이 건물 구두터에 들어올 수 있었다.
 경험이 없다보니 처음에는 구두를 닦으면서 손이 벌벌 떨려 애를 먹고, 수선도 제대로 할 줄을 몰라 당황하곤 했지만 사 개월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는 어느 정도 일에 익숙해져 적어도 서툴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소망이 있다면 여기서 하다가 지나가는 사람들 구두도 닦을 수 있는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내년 유월쯤 밖에서 구두터를 얻어 볼까 하는데 돈 때문에 잘될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웃었다. 슬하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어 학비를 대야하고, 이 일로는 생계를 이어가기도 빠듯하지만 다른 어떤 일보다 마음이 편해 이 일을 앞으로 계속하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수세미장사와 불법 자가용 영업, 불법 운전교습, 그가 이런 직업을 거치면서 느껴야 했던 그 마음 졸임을 헤아린다면 비록 남들이 천하다고 생각하는 신기료쟁이지만 눈 비 오는 날 쉬지 않아도 되고 마음 졸임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일이야말로 그에게 안성맞춤의 직업이지 않겠는가.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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