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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사람이 그리운 앉은뱅이 꽃

뇌성마비 장애우 시인 이흥렬씨

본문

 

 

▲이흥렬씨

 

  한 시인을 만나보자. 시인은 자신을 발가락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손대신 발가락 사이에 펜을 끼워 시를 쓰기 때문에 그는 발가락 시인이라고 불린다. 그렇게 시를 써온 지 어언 십 칠 년, 시인이 어렵게 발가락으로 써온 시는 "앉은뱅이 꽃"이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묶여져 나왔다. 그리고 이제 시인의 마흔 세 살 삶은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늦어도 구월이면 시인의 삶을 극장에서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살아있는 시인의 일대기가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었던가.
  짧은 기억에 의지하면 살아있는 시인의 일대기가 영화로 만들어진 적은 아직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시인의 삶은 어떤 연유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을까.
  시인은 장애우이다. 그리고 적어도 대구에서는 제일 유명한 장애우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시인의 삶은 영화로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여러 차례 언론매체에 소개됐다. 그래서 유명해지게 됐다. 유명세를 탄 끝에 영화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지금 사는 모습은 유명세와 상관없이 무척이나 초라하다. 그렇다. 시는 돈이 되지 않는다. 시인은 가난하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인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수용시설 재활원 한 켠의 남루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다.
  대구시 수성구 시지동 자유재활원 내에 있는 생활관 한나실, 두 평이 채 안되는 작은 공간에 시인은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시인은 시를 쓴다.
  사람들이 잠든 시간에 홀로 깨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뭇사람들의 의식을 깨우기 위해 발가락으로 한 자 한 자 영혼의 울림을 토해낸다. 누가 있어 시인의 고통을 위로할까. 누가 있어 힘들게 발가락으로 시를 쓰며 문득 문득 설움에 젖는 시인의 쓰린 가슴을 어루만져줄 것인가.
  시인은 늘 혼자 깨어 있다. 이제 시인의 이름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다. 시인의 이름은 이흥렬이다. 그는 중증 뇌성마비를 가지고 있다.
  발가락 시인으로 이름을 얻기 전까지 그는 이 땅의 가난한 중증장애우들이 사는 보편적인 삶을 살아왔다. 가난으로 인해, 그리고 장애가 심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사람들의 손가락질 때문에 외출도 못하고, 출구 없는 캄캄한 미래 때문에 절망하는 삶의 모습이 중증장애우들의 삶이라고 산정할 수 있다면 시인의 성장과정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시인은 지금으로부터 사십 이 년 전 경남 고성에서 일곱 남매 중의 다섯번째로 세상에 나왔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학교에는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농사를 지어 근근히 먹고살았던, 가난했던 집안 형편에서 중증장애우였던 그가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다행히 아버지가 대구 제일모직 공장에 취직되어 식구들이 모두 대구로 이사와 정착하게 되었지만 식구들 중 그의 미래를 염려해 그를 학교에 보내자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집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열 살 때 집에서 압정 만드는 일을 했다. 압정은 뭔가. 메모지를 꽂을 때 쓰는 사무용품이다. 그의 아버지가 부업으로 시작한 압정 만드는 일을 하게 되면서 그는 비로소 왼쪽 발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압정을 찍어내는 자동기계가 없었다. 일일이 쇠판을 찍어 거기다 침을 꽂아 압정을 만들어내곤 했는데 그는 판에다 침을 꽂는 일을 했다. 하지만 말이 쉽지 발가락만을 사용해 가느다란 철침을 꽂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그는 일을 하면서 무수히 많이 철침에 발가락을 상해야 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보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이 숙달되면서 그는 왼쪽 발가락을 자유자제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이후 그는 손대신 왼쪽 발가락만을 사용해 밥도 먹고, 빨래도 하고 컴퓨터도 칠 수 있게 됐다.
  왼쪽 발가락을 사용해 할 수 있게 된 일에는 바둑 두는 일도 있었다. 그는 소년기에 바둑에 관심이 많았다. 장차 프로기사가 되는 게 꿈일 정도로 그는 바둑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면 바둑은 어떻게 두었는가.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바둑판과 알을 구입할 수 없었던 그는 손위의 형이 달력 뒷면에 펜으로 그어 만든 바둑판에 압정을 이용해 바둑을 두었다. 즉 침을 꽂은 압정은 백돌, 침을 꽂지 않은 압정은 흑돌로 구분해 형을 상대로 바둑을 두었다. 그런데 바둑을 두려면 반드시 숫자 개념을 익혀야 했다. 그는 어려웠지만 달력에 인쇄된 날짜를 보고 혼자 숫자를 익혔다고 회고한다. 그러면 숫자를 익혔으니까 바둑 두는 데 문제가 없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바둑실력이 늘려면 공부를 해야 했다. 프로기사가 되려면 바둑실력이 향상되어야 했고 그러려면 따로 스승이 없었던 그로서는 바둑책을 보고 바둑수를 연구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학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던 그로서는 바둑책에 쓰여 있는 한글을 알 리 만무했다.
  "그때가 열일곱 살이었는데 답답해서 한글을 배우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했어요. 누구한테 가르쳐달랄 수도 없고 해서 한글을 혼자 깨우쳤는데 사람이 하려고 하니까 지혜가 생기더라구요. 밑에 동생들이 학교에 갔다와서 책을 보거든요. 그때는 동생들이 어려서 책을 소리를 내서 읽었어요. 그걸 보고 소리를 기억해놨다가 동생들이 밖에 나가고 집에 없으면 동생들 책을 꺼내 가지고 혼자 기억을 되살려 동생들처럼 소리를 내서 글자를 읽었어요. 기억에 의지해서 아, 이게 그 글자구나. 그렇게 읽기를 되풀이하다보니 육개월만에 나도 모르게 한글을 깨우치게 됐어요."
  그러면서 그의 바둑실력은 눈부신 발전을 했다. 한때는 아마추어 일급 실력이 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의 바둑실력은 늘었다. 그러나 바둑을 열심히 둬 장차 프로기사가 되겠다는 그의 장밋빛 꿈은 얼마 안가 무너졌다. 그는 주로 동네의 고수들과 바둑을 뒀는데, 상대가 그가 왼쪽 발가락으로 바둑을 두는 걸 보고 "기분 나쁘다"며 그와의 대국 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 상황이 되풀이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프로기사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바둑을 놓게 되면서 그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맛보았던 절망감을 그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별수 없이 그는 다시 압정을 만드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아참, 그 무렵 압정을 만드는 일 외에 그가 새로 시작한 일이 있다. 부모님이 부업으로 새로 손댄 종이봉투 만드는 일이 있었다. 그 일도 하면서 그는 무기력하게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집안에서 지내던 그는 나이 스물여덟 살 때 처음 바깥 외출을 한다. 사람이 단 한번의 외출없이 스물일곱 해 동안 집안에서만 지냈다는 게 믿기 힘들지만 앞에서 언급한 중증장애우의 현실을 고려하면 전혀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내가 난생 처음 외출하게 된 게 언제냐면 스물여덟 살 때였어요. 그전에는 동네도 못 나와봤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사람들의 장애우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좋지 않아서 장애우들을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가족들도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은 거죠."
  그의 외출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케이비에스 라디오 장애우 대상 프로그램 "내일은 푸른 하늘"에 몇 차례 수기를 써서 보낸 것이 계기가 됐다. 그 방송을 들은 사람들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고, 그 중에서 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편지로 사귀면서 "샘터뭉침회"라는 봉사모임을 알게 된다. 그 모임에 참여하느라 외출을 하게 된 것이다. 일단 한 번 외출을 시작하자 그의 바깥 나들이는 잦아졌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려 주로 대구에 있는 복지시설을 방문했고, 그 중에 한 곳이 그가 지금 살고 있는 자유재활원이었다.
  여기서 자유재활원에서의 그의 생활을 얘기하기 전 그가 시를 쓰게 된 계기를 알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에 따르면 그가 처음 시를 쓴 것은 역시 스물여덟 살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일기를 썼어요. 왜 일기를 썼냐면 내가 생활하다가 문득문득 느껴지는 감정들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깝더라구요. 그래서 일기를 쓰게 됐고, 그때는 시라고 생각하지 않고 썼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일기가 시가 되어 있었어요."
  시인은 발가락에 펜을 끼워 종이에다 열심히 시를 썼다. 그때는 그게 시를 쓰는 유일한 방법인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의 나이 서른두 살 때 봉사모임의 일원으로 방문한 자유재활원에서 그는 생전 처음 타자기를 보게 된다.
  원칙에 따르면 그는 자유재활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부모님이 다 생존해 계셨고 형제들도 있어 주로 무연고자를 수용하는 재활원 입소 대상자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재활원에 들어갔다. 어떻게 들어 갈 수 있었을까.
  "원을 방문했을 때 원장님하고 단 둘이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내가, 재활원에서 딴 것들은 눈에 안 띄는데 타자기가 유난히 눈에 띈다고 얘기했어요. 원장님이 왜 타자기가 눈에 띄냐고 물어보길래 내가 장차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죠. 내 대답을 듣고 원장님이 손이 불편한데 어떻게 불편한 손가락으로 타자를 칠 수 있겠냐고 하길래 손가락이 아니라 발가락으로 배우고 싶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원장님이 와서 어디 가능성이 있는지 시험을 해보자고 말했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재활원에 들어왔어요."
  지금까지 살아왔던 환경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게 된 그는 우선 타자를 배우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타자기의 활자판이 손가락 기준에 맞춰 배열되어 있다보니 발가락으로 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지만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타자기에 매달려 지낸 그는 타자기를 처음 대한지 정확하게 이주일 만에 능숙하게 타자를 칠 수 있게 됐다.
  타자기를 칠 수 있게 되자 시를 짓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주로 밤 시간을 이용해 시를 썼다. 그렇게 쓴 시가 차곡차곡 쌓일 무렵 그는 또 다시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그가 원에 들어온 다음해에 벽돌공장이 생겼는데 그곳에서 일을 하겠다고 자원해 관철시킨 것이다.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우가 어떻게 벽돌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재활원에 간 건 먹고 놀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뭔가 이루고 자립을 하기 위해 원에 들어갔는데 그럴려면 불가능하다고 보여지는 일도 극복해야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자원해서 벽돌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아침 아홉시에 출근해서 발가락으로 호스를 잡고 벽돌에 물도 뿌리고, 동료들이 하루에 몇 장의 벽돌을 찍었는지 체크하기도 하고, 동료들에게 간식도 나눠주면서 오후 다섯시까지 열심히 일을 했어요. 그렇게 일하고 한 달에 칠만원을 받았죠. 그 일을 삼년 했어요."
  그가 성취감을 맛보았던 벽돌공장 일을 그만둔 건 순전히 시를 쓰기 위해서였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벽돌공장에 다니게 되자 피곤해서 밤 시간에 깨어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공장을 그만두고 오로지 시만 썼다.
  그렇게 꼬박 시 쓰는 일에 매달리기를 삼 년,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 때인 일천구백구십일년 마침내 그는 천 시집을 내게 된다. "앉은뱅이 꽃"이라는 제목의 이 시집은 그를 하루아침에 유명하게 만들어줬다. 어느날 눈을 떠보니 유명해졌다는 표현은 바로 그를 두고 한 표현인 것 같다.
  여기저기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고, 지역 텔레비전 방송 "영남시대"에서는 삼십분 특집을 만들어 그의 사는 모습을 방영했다. 그가 이렇게 유명해진 건 발가락으로 시를 썼기 때문일까?
  그런 면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독학으로 시를 공부해 쓴 그의 시들이 일정부분 작품성을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유명해졌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의 시를 읽어본 주위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시가 무척 아름답고 서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시집을 내고, 유명세를 타게 된 시인은 구십이년에 장애인문인협회 대구경북지회를 만든다. 그리고 "오솔길사랑회"라는 봉사단체도 만들어 지금 봉사활동에도 열심이다.
  이제 시인의 살아온 이야기가 아닌 사랑과 좌절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시인에게 "삼"이라는 숫자는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이 모두 "삼"이라는 숫자에 담겨있다.
  먼저 시인은 살아오면서 세 번의 자살 기도를 했다. 죽음을 꿈꾸었던 당시를 시인은 이렇게 회상한다.
  "내 나이 열여덟 살이었어요. 프로기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되자 사는게 의미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매일 어떻게 하면 빨리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죽으려고 했죠. 두 번째 죽으려고 했던 건 집이 너무 가난했고, 가난한 집이 집에서 내가 평생을 이렇게 의미없이 살아야 한다는게 괴로웠기 때문이었어요. 희망이 없다는게 정말 참기 힘들었죠. 마지막 자살 기도는 재활원에 와서 했어요. 원 생활에 적응 못해 죽으려고 약을 사모았죠. 세 번 모두 죽겠다고 결심은 강했는데 막상 실행하려니까 잘 되지 않았어요. 결국 죽을 결심으로 어떻게든  한 번 살아보자고 결심했죠.“
  자살 기도가 그에게 아픔으로 남아 있다면 그를 스쳐간 세 여인은 그의 가슴에 그리움의 대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스물여덟살 때 첫사랑을 했어요. 펜팔을 하면서 알게 된 그녀는 당시 서울에서 봉제공장에 다니고 있었죠. 일주일에 두세 통씩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의 감정을 느꼈어요. 몇 번 직접 만나기도 했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짝사랑을 했어요. 그녀는 사귄지 이 년만에 다른 남자한테 시집을 가버렸죠. 두 번째 만난 여자는 자원활동자였어요.그애는 거의 매일 찾아 와서 빨래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외출도 도와줬는데 지금은 울산에서 살고 있어요. 내게는 고마웠던 여자로 남아 있죠. 또 한 여인은 여고교사였는데 일 년을 사귀면서 결혼얘기까지 나왔었어요. 그랬는데 여자 부모님이 결사적으로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헤어져야 했어요. 지금은 어디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여자와 헤어질 때 정말 가슴이 많이 아팠죠. 하지만 괴로워하지는 않았어요. 신앙의 힘으로 실연을 극복했죠. 그때 가진 내게 더 좋은 사람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을 지금도 버리지 않고 있어요.”
  그는 마지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무심히 실연의 상처를 얘기한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까. 어쨌든 아픔과는 상관없이 그의 사랑은 시로 남아 있다. 시인의 ‘사랑’이라는 시를 옮겨본다.
‘내일이면 또 다시 그리울 사랑/내가 좋은 사랑/ 손으로 잡으면 수줍어 녹아버리는 사랑/ 내가 좋아하는 사랑/ 그대를 보면 여릿한 마음/ 내일이면 먼 발치에서 헐벗은 기다림의 사랑/ 내가 아파하는 사랑/ 거짓과 위선의 속삭임을 씻는 사랑/ 내가 잃었던 사랑/ 그대를 대하면 애절한 사랑/ 그대 오시는 날/ 내 풋풋한 첫사랑을/ 하얀 고백으로 남을 사랑’
  시인은 요즘 또 다시 사랑이 다가오면 절대로 놓치지 않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고 수줍게 말한다. 그 준비라는 게 조금씩 돈을 모으고, 독학으로 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정도지만 이렇게 작은 준비도 시인에겐 벅찬 일임에 틀림없다.
  뇌성마비 장애우 시인 이흥렬, 그는 늘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하켠에 켜켜이 쌓아두고 산다. 비단 여인에 대한 그리움만은 아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상대가 누구라도 그는 사귀고 싶어한다.
  왜냐면 시인은 속성상 언제나 무척 외롭기 때문이다.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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