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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백발의 영원한 언니,말리 홀트 여사

41년 간 한국의 버려진 장애아동 위해 헌신

본문

[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백발의 영원한 언니, 말리 홀트

41년 간 한국의 버려진 장애아동 위해 헌신

 

 

  1950년대 6·25 한국전쟁이 지나간 한반도 남단의 버려진 고아들을 감싸안은 홀트아동복지회의 설립자 해리 홀트 1964년 위대한 고아의 아버지 해리 홀트씨는 이 땅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뒀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딸 말리 홀트여사에 의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지금은 신도시가 된 일산에 있는 홀트복지타운의 동산 한켠에는 해리 홀트씨의 묘소와 말리집이란 작고 소박한 집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말리집"은 홀트씨의 둘째딸인 말리여사 아니 말리 언니가 살고 있는 공간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사람이 언니라니. 그러나 말리여사를 아는 모든 이들은 하나같이 그를 말리언니 또는 말리누나라고 부른다. 이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친동생처럼 보살피고자 하는 그이의 의지에 의해 불러지는 호칭이다.
  꼬박 41년 간을 동방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아버지가 못다 한 사랑을 실천해온 말리여사에게서 전후 한국의 고아들이 처해있던 상황과 무엇이 평범한 농부였던 홀트씨를 "고아의 아버지"로 변화시켰는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 함께 걸어온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말리집을 찾았다.

 

 

 

▲말리홀트씨


 

 

 

  40여 년 전 아버지 해리 홀트씨와 한국에 오신 후 지금까지 고아들, 특히 장애아동들을 위해 살아오신 걸로 아는데 당시 한국에 오기로 결심하게 된 과정에 대해 들려주시죠.
  원래 아버지는 남부 다코타에서 밀농사를 하셨죠. 그러다 가뭄이 3년 간 계속되자 오레곤주 크레스웰 외곽지역으로 이사해 제재소와 목장을 운영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55년 어느 날 한국의 전쟁과부들과 고아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하고 있던 성공회 회장 보브 피어스박사가 유진시로 강연을 하러 왔어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저희 가족들은 모두 강연을 들으러 갔죠. 강연을 통해 한국의 실상을 알게 된 아버지는 얼마 후 한국의 혼혈고아들을 입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인근에 있는 병원 부설 간호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강연에는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살고 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던 때였죠. 마침 강연에 다녀오신 어머니가 전화로 그 소식을 알려주면서 "한국의 상황이 몹시 참혹한데 구호활동에 자원하는 사람들이 크게 모자란다더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그 즉시 저는 한국에 가서 구호활동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부모님은 기꺼이 허락하셨습니다. 아버님은 곧 한국으로 가시고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자격증을 딴 후 1965년 6월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아버지 해리 씨와 가족들이 8명의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텐데요.
  네, 쉽지 않았어요. 당시 미국의 입양에 관한 법은 한 사람이 2자녀 이상을 입양할 수 없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버지는 동생들을 데려오기 위해 일단 법 개정운동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국회의원들도 법을 한 번 개정하려면 보통 2년 이상이 걸리는데 그 당시 아버지는 단 2달만에 법을 개정해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다행히 사업이 잘 되던 중이고 비교적 집도 크고 살림도 넉넉해서 다른 어려움은 없었어요. 물론 식구들 모두 아버님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찬성했습니다. 우리 식구는 아버지 해리와 어머니 버다 사이에 오빠 스튜어트와 언니 완다 그리고 저와 밑으로 베티 동생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정이 많고 착하잖아요. 그래서인지 베티는 유난히 정이 많아요.
 

 

  처음 한국에 오셔서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한 시절에 대한 감회가 크실텐데요, 어떻습니까.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제 나이가 만 스무 살이었는데, 어린 제가 보기에도 한국사람들의 실상은 정말 참혹했습니다. 곳곳에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머리를 빡빡 깎인 채 굶주리고 있었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도 자주 일어났죠. 드럼통으로 만든 버스며 터덜터덜 대던 군용 집차들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처음 한국에 올 때는 3개월 동안 봉사활동을 할 생각으로 대학에 입학신청을 해놓고 왔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수많은 아이들이 아프고 굶주리고 있었고 그들을 돌볼 일손은 무척이나 부족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먼저 와서 일하던 미국인간호사가 본국에 들어가게 되어 한국인 간호사 한 분과 제가 그 많은 아이들을 다 돌봐야 했어요. 결국 대학입학을 뒤로 미루고 4년 동안을 눌러앉아 아이들을 돌봤죠. 지금도 제 앞에서 가난과 혼혈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국사람의 시선 때문에 울면서 자신의 아이를 미국으로 보내던 엄마들과 구호 물자가 달려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죽어갔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버님을 비롯한 말리여사님 일가족이 사재를 털어 지금의 홀트아동복지회를 설립하셨는데, 홀트를 설립하던 당시의 이야기도 좀 들려주시지요.

  동생들의 입양을 마치고 아버님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가정을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괴로워했습니다. 몇 달간의 고민 후에 아버님은 한국의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56년 3월 구세군본부에서 해외입양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제 생일이 12월 24일인데 생일 훨씬 이전인 11월에 이미 한강이 얼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었지요.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렇게 혼혈아이들에게 가정을 마련해주기 위한 사업을 해오다 1960년 12월에 재단법인 홀트해외양자회를 설립했습니다. 지금의 홀트아동복지회의 전신이죠.
  1961년 무렵일 것입니다. 돌봐야 할 아이들이 급격히 늘어나는데 특히 장애아동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장애아동 120명을 포함해서 750명에 이르렀지요. 장애아동들의 입양은 비장애아동들보다 무척 어렵습니다. 따라서 입양이 되지 않고 남아있는 장애아동들을 위한 재활치료와 필요한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넓은 부지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부지를 찾던 아버지가 자리를 잡은 곳이 지금의 이곳 일산 탄현리였습니다. 이곳의 농장부지 7만여 평을 구입하여 새로운 집을 짓고 특수교육과 물리치료 등을 시작했어요. 그것이 지금의 홀트일산복지타운이 된 것입니다.

 

 

  40여 년 동안 한국의 경제상황이나 사회환경이 많이 달라졌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정말 너무나 많이 달라졌어요.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미국과 차이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모두들 지신의 자동차도 가지고 있고 아파트도 정말 많이 달라졌지요. 예전에는 부모가 뻔히 있으면서도 너무나 가난해서 자식들을 입양 보내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경우는 찾아 볼 수 없어졌습니다. 버려지는 아이들도 많이 줄었지요. 그래서 건강한 아이가 버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대부분의 기아들이 장애아동입니다. 우리 홀트에 들어오는 아이들의 50% 이상이 장애아동입니다.
 

 

  경제나 사회적 환경이 좋아졌는 데도 장애아동의 대부분이 해외로 입양되거나 시설에 남아있어야 하는 현실인데, 입양 특히 장애 아동의 입양을 기피하는 한국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최근에는 국내입양도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단지 한국사회의 고아들에 대한 태도와 특성 때문에 비밀에 부쳐지고 있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가 입양된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아직까지 문제가 많습니다. 저희 홀트는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이 자신들이 태어난 나라와 출생배경을 알고 싶어할 경우 고국방문과 가족 찾기를 주선하고 있는데, 이들이 국내에 들어오면 모두들 편견을 가지고 고아로만 보는 시선 때문에 고민하더군요. 더 이상 이들이 고아는 아니거든요. 사랑하는 우리의 아들이고, 어느 가정인가의 귀한 자식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적하신 대로 장애아동을 입양하려는 한국인 부모들은 거의 없습니다. 장애우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이 아직 미국이나 구라파에 비해 부정적이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2년 전 입양특례법이 개정돼서 기아나 미아의 경우는 해외 입양이 금지됐습니다. 나중에 부모들이 아이를 찾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기아 즉 버려진 아동의 상당수는 장애아동입니다.
  그렇지만 말씀드린 대로 이들에 대한 국내입양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대부분은 기아가 된 장애아동들이 시설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되어 가정의 사랑을 느끼기 어렵게 되었지요. 그래서 최근에는 대부분의 장애아동은 위탁양육이라는 제도를 통해 유료로 아이를 맡아 기르는 가정에서 양육됩니다.

 

 

  이곳에 오니 모두들 선생님을 말리언니로 부르는데 환갑이 지난 선생님을 그렇게 부르는 데는 어떤 연유가 있는지요.

  그저 별다른 뜻은 없고, 많은 사람들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어도 언니나 누나는 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 특히 가족이 없는 사람들에게 친언니 또는 친누나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생각에서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더니 언젠가부터 모두들 그렇게 불러요. 저도 말리언니라는 말이 듣기 좋습니다.

 

 

  요즘 주로 어떻게 지내십니까?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쓴 다음에는 여기 말리집 식구인 수희와 예지랑 함께 밥을 먹습니다. (말리 집에는 올해 18세의 수희와 갓 돌이 지난 예지와 보육사 문은정 씨가 함께 살고 있다. 수희는 특수 휠체어를 사용해야하는 전신장애와 정신지체의 중복장애우이며, 예지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대두증의 정신지체장애아동이다. 예지 역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특수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태어나서 바로 부모한테서 버려져 임시보호소에 있는 것을 말리여사가 데려와 돌보고 있다.) 그리고는 퇴소한 원생들에게 생기는 출산이나 결혼과 같은 대소사를 돌보고 아픈 원생들을 돌보거나 특수 휠체어를 주문하는 등의 일을 합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오는 자원활동자나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이곳으로 자원활동을 하러 오면 통역을 비롯해 그들을 지원하는 일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가정을 찾아주는 일을 하시면서 정작 선생님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오셨는데, 결혼을 생각해 보신 적은 없으셨습니까?

  결혼에 대해 특별히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혼에 대한 꿈이 없었습니다. 그저 주님이 내가 할 일을 주시고 돌보아 주셨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도 생전에 "말리는 결혼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을거야"라고 말씀하시면서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제 삶인 것이지요.

 

 

  이제 두 달 후면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개최됩니다. 다음의 한국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을지와 차기 대통령에게 바라는 점이 있으신지요.

  저는 아직까지 국적이 미국으로 되어 있어 투표권은 없지만 40여 년 간을 한국에서 살아왔으므로 한국 사람과 똑같은 심정일겁니다.
  사실 한국의 대통령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재활과 특수교육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대통령이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문제에 좀 더 관심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난 40여 년 동안 한국은 정말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물론 장애우복지도 겉으로 보기에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법은 다 만들어졌지만 실현되지 않는 게 문제죠. 원인은 사람들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장애우를 2% 이상 고용하도록 하고 있지만 누구도 변호사나 의사 등 전문적인 분야에서의 장애우고용을 고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직업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의 일만을 장애우가 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무궁화전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시설이 잘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제가 둘러보다 거기 직원에게 "여기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삼성전자 본사에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니 가당치도 않는 일이라는 표정으로 놀라더군요. 왜 그래요? 무궁화전자와 같은 곳에서 일단 훈련을 받고 능숙해지면 본사에서 다른 일반 근로자와 같이 일하면 좋잖아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장애우직업훈련원도 많이 부족한데 왜 일반 직업훈련원에서 같이 하면 안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그렇게 따로 하는 시설이 없어요. 그리고 장애우를 고용하고 있는 직장에 가보니 월급이 너무 작아서 일반생활이 아주 힘든 상황입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도 특수학교가 있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장애우들은 일반학교에서 같이 교육받아야 합니다.

 

 

  올바른 지적이십니다. 선생님의 지적대로 차기 대통령은 장애우와 같은 소외된 사람들의 문제에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진 후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현재 가장 바라시는 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계속해서 한국에서 지내실 생각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퇴소한 우리 아이들이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고아와 장애우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 뜻 안에서 머물 수 있는 한 계속해서 이곳에 있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올해 93세신데 건강이 나빠지면 돌보러 가겠다고 약속했으니 조만간 어머니 곁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죽은 후 어느 곳에 묻힐지는 하나님만이 아시겠죠.

 

대담, 정리/박숙경 기자

사진/ 윤선애

 

  말리는 낮에 잠깐 집에 들렸다가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고아들 생각에 넋을 잃었다. "엄마! 제가 간호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말을 한 필 샀다가 판 일이 있잖아요. 왜, 울타리를 부수고 이웃집 정원에 뛰어 들어가 말썽을 부려서 즉시 팔아버린 말 말이예요? 그 때 그 말을 판 돈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아마 고아 한 명을 일년동안 부양하기에 충분할 거예요." 말리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한 명을 돕고 싶어요."

 

-버다홀트여사가 남편 해리홀트와 버려진 한국의 전쟁고아를 돕기 시작한 때의 이야기를 쓴 "동방의 자손들" 중에서-

 

 

[약력]
  1935년 12월 24일 미국 오래곤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해인 1956년 마을 인근에 있던 새크래드 허트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 자격증을 딴 말리 홀트는 한국의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입국한 후 오늘까지 42년 간을 이 땅의 고아들과 병든 이들을 위해 살아왔다. 부산의 이사벨영아원, 우애원의 보육간호사, 극동방송의 지역의료봉사, 그리고 전주와 군산 지역 등을 돌며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해온 그는 1964년 해리 홀트씨가 사망하자 1965년부터 1978년까지 이사로 재직하면서 아버지의 유업을 이었다. 특히 버려진 장애아동에 대한 사랑을 쏟아온 그이는 1981년 제1회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훈장과 1984년 월드비젼에서 수여하는 "밥 피어스(Bob Pierce)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때 받은 상금 전액을 한국의 장애청소년들을 위한 자립센터를 설립하는 기금으로 사용했다. 1975년 이후 현재까지 말리 홀트는 입양이 되지 않는 장애우를 위한 다양한 복지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일산홀트복지타운에서 중증장애아동을 돌봐오고 있다.

작성자박숙경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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