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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한 사람의 넝마주의로소이다"

마산을 지키는 허수아비, 이선관 시인

본문

[사람사는 이야기]

 

"한 사람의 넝마주의로소이다"

마산을 지키는 허수아비, 이선관 시인

 

이선관시인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렇다!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렇다니깐!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래……,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래.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허긴 그래.

 

 

 

 

 

  "허긴 제1조"라는 제목의 이 시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이유로 피식 웃음을 짓게 만든다. 그러나 이 시를 쓴 한 젊은이뿐만 아니라 이 시를 실은 잡지사 편집관계자들도 모 기관에 끌려가면 몇 시간 동안 갖은 고초를 당해야 했다. 시대는 바야흐로 박정희 유신정권 아래인 71년도의 일이었다면 그제서야 쉽게 짐작될 수 있는 상황일까. 더욱이 그 젊은이를 조사하던 기관 사람들은 나이와 주민등록증을 살펴보고 군필관련 내용이 없자 그 어머니를 불러 신체검사관련 서류를 동사무소에 가서 떼어 오라고 하는 등 수모를 주기도 했다.
  시인 이선관, 그 일을 당했을 당시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그가 언어장애가 있는 뇌성마비 장애우라는 사실은 누구도 한 눈에 알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볼 때 그 사건은 이제 그에겐 빛 바랜 앨범처럼 이제 희미해져 버렸다. 단지 "시국관련 시 때문에 기관에 끌려간 것은 김지하보다 내가 먼저"라는 술자리의 우tm개 중 하나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또 한 번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게 했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서도 새삼 죄송스럽고 분노스러울 따름이다.
  사십이 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서 그러니까 쉰여섯 해째를 그는 줄곧 마산에서 살고 있다. 그가 태어난 마산시 창동과 지금 살고 있는 추산동, 그리고 출근 도장을 찍듯 매일 드나드는 남성동의 서너 군데는 모두 반경 오백 미터를 중심으로 포진해 있다. 그곳의 거리 거리를 허위허위 걸어 다니는 그의 존재는 이제 마산을 소개하는 각종 기고문 뿐만 아니라 마산시의 공식적인 홍보물에도 마산의 명물로 기록되고 있을 정도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그를 가리켜 명동 백작이라 불렸던 박인환 시인의 칭호를 바꿔 "창동 백작"이라고들 부른다. 이선관씨 자신만이 그것을 "창동 허새비(허수아비)"라고 자랑스럽게 고쳐 부르고 있다.
  사실 오십 년이 넘게 한 지방도시에 산다는 것은 대도시 사람들이 보면 무료하기 짝이 없는 빤한 일상을 쉽게 예상할 수도 있다. 직업이, 그야말로 전업시인인 그의 하루하루는 더욱 그러하다. 아침 아홉 시쯤 집을 나서 문단 후배가 있는 도서출판 경남에 가서 신문을 보고 그가 발굴한 시인이라고 자부하는 이영자씨가 운영하는 성광집에 들러 점심을 먹은 후 사설 도서관인 "책사랑"에 가서 하루 종일 책과 잡지를 본다. 신문이나 책을 보며 세상사에 대한 촉수를 한껏 열어놓다가 답답하고 안타깝게 돌아가는 세상살이에 대해 욕지기처럼 해대고 싶은 말들이 솟아나면 시로 옮겨내는 일을 하는 것이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의 일과이다.
  그리고 그곳을 둘러둘러 돌아오는 그를 맞이하는 싸늘한 삯월세의 불꺼진 방, 이제 혼자 먹고 혼자 치우는 아침저녁의 밥상과 혼자 눈뜨는 아침은 이력이 붙어 아무렇지도 않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족의 살가운 정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도 잊은 듯 했던 그 그리움은 "작은 작품 한 편"이란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숟가락과 밥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에/ 간밤에 애써 잠든/ 그러나 / 내 새벽잠을 깨운다/ 점점 열심히 따스하게 들려오는/ 숟가락과 밥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옆집 어디선가……/ 아 그 소리가 좋아라"
  물론 그에게도 신의 선물인 듯한 믿음직한 두 아들이 있다. 이제 대학교 4학년과 1학년이 된 두 아들 완수와 경수, 끊임없이 괴롭혀온 장애우라는 열등감으로부터 그를 해방시켜 준 후 어떻게 키웠는지도 모르게 훌쩍 커버린 두 아들은 각자 자신의 갈 길을 찾아 그의 곁을 떠났다. 고등학교까지는 몰라도 대학 등록금만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형이 고학하는 것을 늘 봐왔기 때문에, 둘째 아들은 장학금을 받는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래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아버지를 찾아와 그나마 잔재미를 주고 있다.
  그들에게 좋은 아버지였던가. 어떻게 보면 아니었던 것도 같다. 경남대 국문과를 삼학년 일학기째에 때려치워 버린 이후 방황을 거듭하다 목로주점을 경영해 보기도 했지만 제대로 직장생활을 해본 것은 딱 한 번, 한 기업의 사보편집을 봐주는 일을 했던 게 전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했던 전업시인의 길. 그러나 시집 몇 권 낸 것 가지고, 그것도 서울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는 여러 문예잡지사와 연결되기 더욱 어려운 지방에 살며 전업시인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일은 과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시를 팔아 쌀을 마련해야 하는 그에게 시가 안 써질 때면 술에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다.

 


   "1년에 한 번인가/ 원고청탁을 받고/ 허둥대며 시를 쓰는/ 나는 시인인가?// 서푼어치도 안되는/ 원고료를 받고야/ 시를 쓰는/ 나는 시인인가// 시인이 아니라 하면서/ 시가 나오지 않는 날은/ 소주병만 비우는/ 나는 시인인가?"


  이렇게 자탄하며 술을 들이키는 날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술을 들이키게 하는 것은 시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어느 날 집을 나가버린 아내, 토끼같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어린 두 아들을 보면서 그는 서툰 몸짓으로 반찬을 만들고 빨래를 하며 의연하게 엄마 몫까지 해내려고 노력은 했다. 그러나 혼자 남겨지는 밤이면 그는 소주잔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처연하게만 느껴지는 자신의 삶이 그랬고, 시가 그에게 그렇게 술을 권했다.
  마셨다 하면 두 병씩 마셔대는 통에 그는 어느 날 허물어져 버렸다. 병명은 간경화, 의사는 죽음을 준비하라는 사망선고를 내렸다. 몸무게는 점점 줄어 뼈만 앙상하게 남았고 갑자기 생명마저 위독해져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이 몇 차례나 계속되기도 했다.
  그런데 힘겨운 투병생활을 2. 3년 하는 동안 그의 병세는 기적같이 점차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기적은 그를 아끼는 어떤 사람이 지어준 죽염과 마늘로 만든 민간처방의 알약 덕이라고 그는 지금도 생각하며 요즈음도 열심히 챙겨 먹는다. 의사조차 "살아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얼굴에 살집이 오르고 몸이 한결 좋아지게 된 것이다.
  몸을 아끼지 않은 벌을 그렇게 호되게 받은 후 그도 이제 건강을 조심하려고 애를 쓴다. 술은 물론 하루 몇 갑씩 피워대던 담배도 끊었다.
  죽을 고비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한 번 겪어낸 바 있다. 그 해 유행했던 백일해 치료를 위해 먹은 한약이 잘못 돼 숨이 넘어갈 듯 앓았던 것이다. 여러 의원들이 가망 없다고 고개를 저었고, 숨을 헐떡이는 아이를 안고 울다 지친 그의 어머니는 하루 꼬박 눕혀 놓았다가 마지막 묻기 전에 젖이나 먹이자고 젖꼭지를 물렸는데, 확 빨아대는 아이의 입심을 느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살아나게 된 기적은 일어났지만 그에게 평생 따라다닌 장애의 멍에까지 거둬가 주진 못했다.
  학교 갈 나이가 되자 그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등에 업혀 얼마 동안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학교에서 반 친구들의 놀잇감이 된 것은 싫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학교는 죽기보다 싫은 혐오의 대상이었고 자연, 공부도 뒷전이 돼 갔다. 그런 그에게 영화는 구원이었다. 극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덕분에 극장출입을 자유롭게 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기에 영화를 보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영화 자체가 구원이라기보다는 "몇 시간 동안 제 몸을 남에게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더 크기도 했다. 그가 즐겼던 서부영화에 나오는 강하고 날쌘 총잡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재미도 그에게는 더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대학에 가고 싶어 담임 선생님께 편지를 썼고 담임은 아버지를 만나 설득을 해서 반승낙을 얻어냈다. 그렇게 해서 61년 경남대 국문과에 들어가 새로운 지식과 삶의 공기를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심해지는 장애로 인한 열등감으로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는 나날이 계속 됐다. 유서를 써 놓고 집을 나간 적도 있었다. 삼학년 일학기 때 어려운 집안 형편에 등록금을 내지 못해 중간시험을 못 볼 상황이 되자 아버지가 어찌어찌 구해온 돈을 받아들긴 했는데 불현듯 "나 같은 놈이 대학을 나와 봐야 뭘 하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어 그 돈을 들고 나간 길로 책을 두 박스나 사버렸다. 역정을 내시는 아버지와 다투고 가출하면서 가방끈과의 인연을 그렇게 끝내버렸다.
  그 와중에 유신말기 한국 사회를 민주화 운동으로 들끓게 한 도화선이 됐던 3.15 의거의 발생지인 마산에서 연이어 4.19와 5.16을 겪으면서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은 것으로 혼돈을 정리해내고자 애썼다. 그 책들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려 가면서 신나는 서부 총잡이 영화를 만드는 나라 미국이 아름다울 미자를 쓰는 나라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나라의 비뚤어진 현대사와 근대화 정책의 수출기지로서 그리고 창원공단으로 지칭되는 임해공단으로 점점 흉칙하게 변해가는 마산의 앞바다를 보며 환경 문제가 자신과 거리가 먼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특히 자신이 태어난 마산의 산하를 지키는 허수아비임을 기꺼이 자임하고 있었던 그에게 몇 걸음만 달려가면 금방 자신을 품어주던 마산 앞바다가 고기조차 살 수 없는 독수대(毒水帶)가 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였을 것이다. 그런 그의 분노는 국내 환경시의 효시라고 불리는 "독수대"라는 제하의 연작시에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 시가 처음 쓰여진 75년부터 이십이 년이 지난 지금까지 환경에 대한 그의 고민은 "재생지로 만든 이선관 환경시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올해 신작시집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에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삼천리 금수강산이 "삼천리 공해강산"이 되어 가고 주위 사방을 둘러봐도 "지금 이 땅은 사면초가"라는 위기의식은 앞으로도 계속 그를 환경시인이게 할 것이다.
  그래도 왜 환경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됐느냐는 기자의 우문에 이 시인은 그의 독특한 필체로 미리 준비한 다음의 쪽지를 내밀었다. "민족문학 작가회의에서 이번에 초청한 프랑스의 저명한 시인 미셀 드기는 대중에게서 멀어지는 시가 대중의 관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생태(환경)문제와 같은 현실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면서 시가 대상으로 삼는 생태론이란 인간이 지상에 거주한다는 근본적이고도 심오한 형태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슴에 새기고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 한 마디도 그를 세상만사에 대한 관심의 촉수를 계속 더듬거리게 한다. "나라를 사랑하고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라면 그런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지 않으면 그런 시는 시가 될 수 없다"는 그 말.
그래서 더욱 개인 서재처럼 되어 버린 사설 도서관 "책사랑"에 앉아 책을 뒤적이다 눈을 들면 남도의 한 끝에서의 그의 시야는 거침없이 서울과 휴전선을 지나 지구촌 전체로 넘나든다.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고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없앴지만 친일파는 없애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는 현실과 이역만리 타국에서 조국을 그리다 죽어간 윤이상씨의 절망과 아픔까지도 그는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없는 청백리 시장 "짬렁"이 있는 태국이 부러울 뿐이다.
  내일 모레 이순을 맞는 그에게 그래도 아직 현실에는 "헷갈리는" 일이 많다. 경축일마다 만국기가 펄럭이는데, 실제 지구상 이백여 국가를 몇 천 배 부풀린 그 국기들 중에서도 왜 유엔에까지 가입한 북한 인공기는 없는지, 이십일 세기를 눈앞에 둔 구십 년의 한 군정청산 국민대회 집회에 참석한 시위자 수에 대한 기사가 왜 그렇게 신문마다 다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또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전시 군사 작전권을 되돌려 받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국군 핵심인사의 글을 읽으며 우리나라가 미국의 식민지인지 아닌지 헷갈려 한다. 그래서 그것을 끝내 정리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더 책과 신문을 읽게 되는 지도 모른다.
  87년 마산문화상과 93년 마창시민 불교문화상을 탔으니 주위의 인정을 전혀 받지 못한 불운한 시인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에 매달려 살아온 인생을 비춰 볼 때 "김지하보다 먼저 시국관련 시로 곤욕을 치뤘지만 그만큼 유명해지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 물었더니 이 시인은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요즈음 그에게 보람을 주고 있는 일 하나가 홍익재활원에 있는 한 젊은 뇌성마비 장애우의 시집 출간을 돕는 일이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 첫 시집을 자비로 출간했던 그였기에 자신만의 시집을 출판한다는 것이 그 젊은이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한 달 십만 원 남짓한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그 오묘한 생활의 조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생명까지도 주위 사람들의 애정으로 이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받았던 모든 애정을 더 널리 전파하기 위해 죽기 전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렇게 주위 사람을 도우면서 서로서로 살을 닿게 하며 살고 싶다.
  그러나 도저히 그냥 무덤까지 자신이 떠 안고만 갈 수 없는 회한이 아직 남아 있다. 19편에 이르는 연작시 "어머니"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자신이 삶에 대한 애증을 조금 담아내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이 당한 수난사를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당한 수난이 참 많아. 이제 그걸 쓸꺼야." 그는 중얼거리듯 말을 흐렸다.
  인터뷰 도중 이 시인은 "애국자"라고 하는 자신의 시를 지면에 소개해달라고 대여섯 번이나 요청해댔다. 행은 슬래시로 처리하면 적은 지면에도 시를 다 담을 수 있을 거라는 조언과 함께. 그 시가 자신이 제일 자신만만하게 소개할 수 있는 대표작이거나 해서가 아니다.
  "대선이다 뭐다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고 시끄러운 요즈음 정치판의 정치꾼들에게 다시 한 번 시를 빌어 욕해주고 싶어서"라는 것이다.

 


  "빛이/ 어둠을 사르는/ 새벽이었다.// 문틈에선가/ 창틈에선가/ 벽틈에선가/ 나의 침실 깊숙히 파고드는// 동포여!/ 하는 소리에 매력을 느끼다가/ 다시 한 번 귀기울여 들어 보니// 똥퍼여? 하는 소리라/ 나는 두번째 깊은 잠에 취해 버렸다."


  이 "애국자"라는 시는 71년도에 쓰여진 것이다. 환경이든 정치에 관한 것이든 이십여 년 전에 쓴 시들도 이렇게 모두 현재형이다. 그 또한 그 시들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다시 한 번 시어를 통해 외치듯 말한다. 그의 시작(詩作)이 조금 더디어졌다면 더 이상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기 싫을 정도로 이선관 시인이 지쳤기 때문일 것이라고 알아두자.

 

글/ 한혜영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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