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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영화로 맺어진 인연, 안요한·이영호의 인생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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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맺어진 인연, 안요한·이영호의 인생역경
글·고은경 / 사진·이정률

<아련한 추억의 명화>
 70년대와 80년대 초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영화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기억할 것이다. 영화 "별들의 고향"으로 당시 한창 주가를 올렸던 이장호씨가 감독한 작품으로 1981년에 개봉된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1982년 제 21회 대종상 문예부문 작품상과 감독상, 미술상, 주제가상을 수상하였고, 또 그해에 있었던 18외 한국연극 영화 예술상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최우수 신인남우상, 최우수 주제가 상을 수상하였다.
 "안요한"이라는 한 인물의 극적인 인생을 그린 이청준씨의 장편 소설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영화화한 이 작품에는 신성일, 박정자, 안성기, 나영희씨 등의 쟁쟁한 영화배우들이 출연, 영화를 더욱 빛내 주었다. 또 그 당시 중고생들의 문화영화로 또 기독교 선교영화로서도 한 몫을 거뜬히 담당하여 그 시대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의 명화로 남아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유학을 앞둔 "안요한"이라는 전도유망한 한 젊은 청년이 어느날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되면서 새로운 인생의 눈을 뜨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 큰 감동을 준 이 영화는 원작에 거의 충실하여 제작되었다. 원작 역시 문학계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작가 이청준씨의 유명세를 업고 1981년 출간 초반부터 베스트셀러 행진을 계속, 도서출판 "홍성사"의 "믿음의 글" 시리즈 첫 작품으로 그 몫을 단단히 내핸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그 해 영화와 소설로 문화계에 조용한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소설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지금도 매달 평균 1천부 정도 팔리고 있으며, 올해 9월 현재 총 24만부 정도의 판매 실적을 올렸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필연적인>
 영화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연을 맡은 배우는 바로 이영호씨(44), 이장호 감독의 동생이기도 한 이영호씨는 이 영화를 끝으로 오래지 않은 영화배우 생활을 끝내고 새로 영화학을 공부하여 영화인의 길을 걷고 있고, 실제 주인공인 안요한씨(56)는 그 이후 맹인교회를 창립하여 사람들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는 목회자의 길을 묵묵하게 걷고 있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와 상영할 때 또 그 이후까지도 많은 후문을 낳았다. 안요한 씨 역을 맡았던 주연배우 이영호씨가 시력이 몹시 나쁜 상태에 있어서 그 역할을 더욱 더 실감나게 연기했다는 이야기다.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이영호씨는 일명 "RP(Retinitis Pigmentosa)"라고도 일컬어지는 "망막색소변성증"을 갖고 있어서 어릴 때부터 시력이 점차 약화되어 그즈음 시력이 많이 떨어져 있을 때였다. 그래도 책을 보거나 밝은 조명 아래서 촬영을 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던 때였으므로 연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이영호씨는 컴퓨터에 연결된 약시용 확대 프로그램이 없이는 책도 볼 수 없고, 다닐 때 방향 표시를 거의 식별할 수 없을 만치 시력이 악화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고 보니 이 두 사람은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같은 처지의 두 사람이 영화 이후 12년만에 처음 만났다. 영화가 상영될 때 미처 하지 못했던 뒤늦은 후일담을 나누고 각자의 길을 향해 바쁘게 걸어왔던 지난 인생을 회고하며 감회에 젖었다.
 "안목사님이 37살부터 급격하게 시력이 떨어졌어요. 이상하게 안목사님이 걸었던 인생을 그대로 밟는 것 같아요."
 "이선생, 우리 만남을 우연이라고 그냥 넘기기엔 뭔가 있어요. 여기엔 필시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요."
 안씨의 교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영화 이후의 인생을 한번 추적해보자. 그 이후의 삶은 영화보다 더 비장하고 아름다울까. 이제 장애를 가졌다는 같은 처지의 인생이 각자의 몫일 수만은 없는, 어떤 운명의 끈이 두 사람을 새로이 엮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안씨의 말처럼 어떤 신의 섭리가 이 두 사람의 운명에 개입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50대 중반, 또 40대 중반의 인생에 접어든, 안요한씨와 이영호씨의 인생역정을 한번 들어보자.

<고독한 투쟁으로 점철된 실명 이 후>
 평양 순천이 고향인 안요한씨는 기독교에 대한 깊은 신앙과 남다른 소명을 갖고 있는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요한"이라는 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라면서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아버지의 신앙결단을 억지로 수용해야 했고, 이러한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부단히 싸웠다. 이때의 심경을 그는 책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라는 보호자 대신 눈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양자의 신세가 되어버렸고, 내가 지키고 누릴 몫의 재산권 대신 고난스럽고 남루한 가난만을 물려받게 되었다."
 아버지의 잦은 전직과 가난한 유랑생활로 이어진 어려운 목회생활을 지켜보며 인생에 대한 고뇌와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고, 대전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면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는 서울신학교 대학원 과정에 들어가지만 신에 대한 회의와 방황으로 1년도 못되어서 자퇴하고 만다. 1963년에 군에 입대를 하고 66년에 제대, 미 8군에서 한국어교관 겸 불어강사를 하며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 70년도에 결혼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주 소재의 군사도시 몬테리에 있는 미국방성산하 군사 외국어학교 한국어 교관으로 파견되어 나가려고 출국준비를 하던 즈음, 그의 눈에 이상이 생겼다. 신혼의 황홀하고 달콤한 꿈과 미래에 대한 눈부신 희망속에서 가슴이 벅찼던 그즈음, 시력을 잃고 만 것이다.
 그가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면서 알아낸 병명은 "포도막염." 당시로선 치료방법이 없는 병이고 증세가 시작되면 끝내는 시력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고를 받게 된다. 그는 미국출국을 포기하고 병원이니, 한방이니 치료에만 전념하지만 끝내 광명을 찾지 못하고, 1976년 4월, 그의 나이 37살에 실명하고 만다.
 "어두움은 나와 이 세상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와 사람들, 나와 사물들과의 결별을 가져왔다. 그 결별은 먼저 나와 아내와 아이들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고백하는 그의 실명 이후의 삶은 영화에서 잘 그려져 있듯이 철저한 고독과 자기와의 피나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 고독과 어둠 속에서 그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로부터 짐지워졌다고 여겼던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의지로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다.
 그는 스스로 집과 가족, 친구를 박차고 나와 서울역에서 껌팔이, 신문팔이, 하루 품팔이, 막일꾼, 구두닦이, 부랑인들을 만나 그들과 어울려 지낸다. 그는 자신의 실명으로 인해 오히려 "길고 긴 어둠속의 흐름이 끝났다. 비로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 소명의 빛을 찾았다. 그 소명으로 새로운 생명의 빛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빛은 오히려 그 낮은 곳에서 그것도 스스로 베풀고 비추려 하는 곳에서 그런 노력으로 자기 안에서 찾아지는 것이었다. 낮은 곳에서 스스로 찾아낸 소명의 불빛, 그것이야말로 참된 영혼의 눈뜸이었다."고 절절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는 비록 시력은 잃었지만 가난하고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그 아이들을 위해 그래도 조금은 배웠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나누어줄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배움에 굶주리고 정에 굶주린 아이들이었다. 그는 늦었지만 어느 외국 선교단체의 후원을 힘입어 한신대학교 신학과에 편입하여 그가 그토록 거부하려 했던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삼양동 산동네 작은 방 한 칸에서 시작한 교회가 바로 새빛 맹인교회다.
 얘기가 길어진 것 같지만,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책과 영화는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그리고 이후 12년, 이제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버젓한 건물까지 짓고 시각장애우 재활 공동체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는 새빛맹인교회 복사로서 그는 낙천적이고 적극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고 있다.

<중도실명자들의 보금자리, "새빛 공동체">
 보증금 30만원에 월세 2만원으로 시작한 작은 사무실에서 그는 서울역에서 만났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열어 검정고시를 치르게 하여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다. 78년부터 시작된 야학은 그 이후 몇 년동안 계속되어 8백여명의 졸업생을 배출,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제 몫을 다하며 살고 있다.
 새빛맹인교회에는 교통사고나, 의료사고, 질병 등으로 나중에 시력을 잃게 된 중도장애우 90여명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갈 곳이 없는 사람들로 이곳에서 재활교육을 받고 있다.
 "중도에 실명이 된 장애우들의 좌절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요. 다른 장애는 직업재활의 가능성이 그나마 있는데 중도실명자들의 경우 기회를 찾기가 매우 어려워요."
 안씨는 "점차 늘어나는 중도실명 장애우들의 직업재활 대책이 매우 심각함에도 이들을 위한 전문 교육·상담기관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그 무엇보다도 장애우에 대한 인식전환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새빛교회 맹인 재활원에는 중도에 실명한 시각장애우들을 위해 점자와 흰 지팡이 보행훈련 등의 생활적응훈련과 침술, 수지침, 컴퓨터 등의 직업훈련 그리고 맹학교나 대학교, 신학교에 진학하여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재활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또 시각장애우 부부 자녀들을 돌봐주는 탁아방, 월간 "점자새빛" 발행 등으로 시각장애우 복지에 힘을 쏟고 있다.
 앞으로 안씨는 점자도서실과 시각장애우 양로원을 만들어 시각장애우 복지에 관심을 쏟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연기생활 10년, 영화학도 생활 6년>
 앞에서 잠깐 말했지만 이영호씨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진행성 유전질환으로 아주 어릴 때부터 눈이 나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망막색소변성증"은 유전방식과 진행양상이 매우 다양하여 치료는커녕 발병 원인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질환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시력이 점차 약화되어 언젠가는 실명하고 ask다는 고약한 병으로 인구 1만명 당 1명꼴로 발생, 우리나라에도 약 4천명 정도 이 질환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기증세로는 시력 약화와 야맹증 증세가 일반적으며 처음에 약화된 시력은 어느 정도의 교정이 가능하지만, 점차 교정이 불가능해져 시야가 점점 좁아지다가 궁극에는 실명하게 된다.
 이영호씨 역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눈이 나쁜 현상에서 비롯되는 갖가지 일을 겪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고, 야맹증이 심했는가 하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는 안경을 써야했다.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 홍대 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하기까지 그는 책을 좋아하고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
 "군 입대를 앞두고 신체검사를 받을 때 처음으로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명을 정확하게 알았어요. 언젠가는 실명하고야 만다는 시실 역시 그때 처음 알았는데 무척 충격이 컸었지요. 그러나 그 때만 해도 지금처럼 책을 못 읽게 되고, 불과 일 미터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까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그때 당장 급격하게 악화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저 무감각할 뿐이었어요." 결국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사실만 받아들이고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지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의 작은형인 이장호씨가 마침 감독으로 데뷔하여 꽤 이름을 떨치고 있을 즈음, 그는 이장호 감독의 제안으로 영화 "어제 내린 비"에 출연하게 된다. 그 영화는 그래도 꽤 흥행했고 24살의 한 평범한 젊은이에게 연예계 생활의 환상과 배우로서의 꿈을 심어주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낮은 데로 임하소서"에 이르기까지 74년부터 83년까지 총 1작품에 출연하고선 배우 생활을 마감했다. 우리 역사에서 암흑기로 기억되는 격동의 시기에 그 역시 영화배우로서 순탄하지만은 않은 많은 굴곡을 겪게 된다. 대마초 사건으로 억울하게 걸려들어 배우활동을 중단했는가 하면 "낮은 데로 임하소서" 대종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시상 당일 성우의 목소리로 녹음됐다는 엉뚱한 이유로 탈락되는 등 많은 상처를 입고 배우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영화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찍을 당시는 그래도 영화를 찍을 수 있을 만큼 치명적으로 시력이 악화되지 않아서 연기에 몰두할 수 있었어요. 이 작품을 하면서야 비로서 연기가 뭔지 조금 맛을 알 수 있었는데, 그것으로 연기는 마지막이었지요."
 10여년 연기생활은 그에게 영화로서 인생의 승부를 걸겠다는 결심을 하게하고, 그는 배우의 길이 아닌 영화를 감독하고 제작하겠다는 더 큰 꿈을 갖고, 미련 없이 미국 유학길을 떠난다. 그가 유학을 떠난 데는 더 이상 눈이 나빠지기 전에 빨리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많이 존재했다.

<영화평론가, 극단 대표로서의 새로운 인생>
 1983년 9월 그는 뉴욕에 있는 시각예술학교인 "SVA(School of Visual Art)"와 뉴욕대학 (NYU : Newyook University)에서 각각 4년, 2년간 영화학을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오로지 아르바이트와 공부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시기였지만 나의 인생에서 가장 진지하고 후회 없이 살았던 시기"였노라고 회상하며 "영화이론과 영화역사 영화비평에 대해 공부하며 비로소 영화가 뭔지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공부하느라 눈을 무리하게 사용하였던지 대학원 시절에는 급격하게 시력이 나빠져 돋보기를 사용하여 책을 보고 논문을 써야했다.
 89년 7월, 박사코스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이제 영화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꿈에 부풀었다. "이렇게 하면 될 것"이라는 구상을 했지만 그건 구상으로 끝나고 이제는 장애로 남게 된 자신의 눈을 부여잡고 또 씨름을 해야 했다.
 "영화를 만들고 싶은 열정은 있었지만, 사실은 눈을 치료해야 한다는 데 더 심혈을 기울였어요. "RP협회"를 만들어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치료방법에 대한 정보를 얻고, 나와 같은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함께 힘을 합쳐서 고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고 했죠. 2년간 협회를 운영했지만 큰 효과를 없었어요. 나는 결국 내 눈 치료에 급급하다 몇 년을 허송세월한 셈이죠."

<나는 그래도 운 좋은 놈>
 귀국 후 몇 년간의 생활을 허송세월이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그는 요즘 인생의 새로운 맛에 흠뻑 취해 있다. 제작비나 인력 등 많은 투자가 필요한 영화 만들기가 아닌 연극 극단 대표로서의 사는 재미에 빠져 있다. 그가 대표로 있는 극단 "소리"는 시각장애우들로 구성된 "장애우 극단"으로 벌써 3번째 작품을 이번 가을에 선보였다. "헬렌 빛을 잡아라."라는 제목의 이번 가을 공연은 헬렌켈러를 가르친 설리반 선생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극단 "소리"와도 썩 어울리는 작품이다. 대부분 시각장애를 가진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로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극단 창단에 대해 "장애우의 능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모습이 아니겠느냐."며 "비장애인들이 장애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극단 "소리"가 소속되어 있는 "한울타리 선교회"는 시각장애인들에게 필요한 보장구와 장비를 수입 원가로 보급하는 일도 하고 있다. 아직은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소리"가 전문극단으로 자리 잡고, 또 종합예술공간으로서의 소극장이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래도 운이 좋은 놈이죠. 그나마 하고 싶은 공부도 실컷 했고, 더 이상 눈이 나빠져 보이지 않는다 해도 썩 나쁠 것이 없어요. 시각장애우용 음성인식 컴퓨터가 개발되어 글도 쓸 수 있고, 정보다 다 얻어낼 수 있으니 큰 걱정은 없어요."
 그는 매우 낙천적이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몸과 마음과 또 시간을 아끼지 않아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여기저기 매체에 영화평론도 게재하고 또 영화관련 세미나 등에 강사로도 참여하는 등 새로운 영화 인생을 준비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작성자고은경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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