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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저의 시련은 가치있는 시련입니다"

본문

[사람사는 이야기]

 

 


"저의 시련은 가치있는 시련입니다"
편마비 장애우 홍경호 씨의 장애 극복기

 

 

"사람은 한 번 추락도 해봐야 됩니다. 저에게 주어진 고통과 아픔은 그 당시에는 견딜 수 없어서 죽음까지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한편으로는 저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남들한테 겸손해야 한다는 걸 배웠고, 또 계단을 한계단 한계단 밟고 올라가야 한다는것도 배웠죠. 그리고 비장애우들이 느끼지 못하는 장애우의 아픔을 알게 됐습니다. 이만하면 저의 시련은 가치 있는 시련인 셈이죠."

 

 

"내 친구중에 교회 다니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전화를 걸어 하는 말이 경호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은 오른쪽 창문 하나를 닫으면 반드시 왼쪽 창문을 열어준다. 그 사실을 믿어야 돼 라고 위로 하더군요. 평범한 이야기였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많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올해 마흔세살인 홍경호 씨. 그는 장애를 극복하게 된 계기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친구의 말처럼 그는 무려 육년이라는 세월을 닫힌 창문 속에서 암담한 삶을 살아왔다. 어느날 불시에 그를 덮친 불행은 그에게 날개도 없는 추락을 선사했고, 그 추락의 무게에 짓눌려 그는 인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려야 했다. 그 참담했던 세월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이제 그는 좌절하고 있지만은 않다 어떻게든 그에게 남겨진 반대쪽 창문을 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반신불수의 장애 때문에 기동도 마음대로 못하지만 그의 전력은 무척이나 화려하다. 나이 삼십에 대기업 이사. 그 이년후인 서른두살에 건설회사 사장에 오른 이력에서 보듯 그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삶을 한때 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앞만 보고 출세의 길을 달려갔던 그 시절엔 수표로 고스톱도 쳐보고 룸싸롱이나 요정같은데 가서 한번에 일백사십만원짜리 접대로 받아보기도 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나이 육십 먹은 수위 아저씨가 깍듯이 경례하죠. 자가용으로 출퇴근하죠. 우리 회사가 있는 빌딩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면 밑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왜소해 보이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게 병이었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났다는 거, 그러다보니 성격이 급해지고, 다혈질이 돼서 남들보다 빨리 성공해야겠다는 조바심과 욕심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나도 고생을 좀 했어야 하는 데 너무 빨리 성공하니까 내게 이런 불행이 찾아온 것 같아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제목의 소설도 있듯이 추락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그가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와서 나이 스물일곱살에 취직한 곳은 정우개발이라는 건설회사였다. 이 회사는 지금은 부도가 나서 없어졌지만 팔십년대 초 한창 건설 경기가 좋았을 때는 신흥 제벌 회사로 이름을 떨치던 회사였다. 그는 이 회사에 몸담으면서 승진을 거듭해 정확하게 근무한 지 삼년만에 자력으로 이사직에 오른다. 그가 이렇게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던 것은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회사에 대한 기여도에서 그는 남들보다 월등히 앞섰다.
 "한 번은 울산 도로건설 현장에 기사로 내려 갔는데 길에 한국전력공사에서 설치한 철탑이 버티고 있어요. 도로를 만드는데 철탑이 있으면 안되니까 철탑을 철거해 달라고 한전에 공문을 두 번이나 보냈지요. 그런데 한전에서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일방적으로 철탑을 밀어 버렸죠. 그 정도로 내가 깡다구가 있었어요. 당시에는 겁이 없었어요. 무조건 밀어 붙이면 된다고 생각 했지요. 또 한 번은 도로 건설을 위해 발파하는데 화약을 많이 사용해서 야산을 무너뜨린 적도 있었죠. 그 바람에 전기가 끊겨 아이들이 학교를 못가는 사태도 일어났지만 덕분에 우리 회사는 공사기간을 단축해 돈을 엄청 많이 벌었어요. 이런 식으로 회사에 많은 기여를 했어요. 그리니까 당연히 나를 승진시켜 줘야죠."
 그의 출세는 이사에 그치지 않는다. 이사로 승진한지 이년만에 그는 셀러리맨들의 꿈인 사장이 되는 행운을 움켜쥐게 된다. 그가 나이 서른두살에 정우개발 계열 회사인 대성토건 주식회사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룹 회장이 그의 패기를 높게 샀기 때문이었다.
 젊은 나이에 종업원이 백 명이나 되는 회사 사장이 된 그. 이제 그에겐 세상에 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다. 거꾸로 세상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랬는데...
 그때 그에게 어려움이 찾아왔다. 모회사인 정우개발의 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이 그를 덮친 것이다. 정우개발 계열 회사로 주로 정우개발의 공사를 하청 받아 일을 하던 그의 입장에서 모기업의 부도는 큰 타격을 의미했다. 정우개발에서 받지 못한 공사 대금이 무려 십억원에 달하다보니 그도 덩달아 빚더미에 올라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어차피 집 팔고 회사 팔아봐야 빚을 갚지 못하니까 사업을 계속해서 갚겠다고 채권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서 그는 공사를 계속 진행해. 건축업계에 진출해 있던 대학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 모기업 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이 있은 지 오년만에 빛을 거진 갚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재기의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그 시기에, 만약 이라는 가정이 성립된다면 그쯤에서 그는 만족하고 자신을 돌봐야 했다. 하지만 그의 탐욕은 꺾이지 않고 이어진다. 회사가 재기의 틀을 마련하자 그것이 종착역이 아니라 시발역이라는 생각을 그는 했고 그래서 정신없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자신을 내몰았다. 그 끝은 이미 예견되었듯이 추락이었다.
 그가 뇌졸중으로 Tm러진 것은 89년 10월 18일이다. 당시 그는 새하토건이라는 회사에 공사 계약을 하러 갔다가 니스 타는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원인은 과로였다. 설상가상으로 피가 터지지 않고 뇌에서 웅고되는 바람에 그는 사선을 넘나들어야 했다. 경희대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의사는 살릴 수 없으니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고, 가족들은 젊은 사람 죽일 수 없다고 퇴원을 거부하고 병원에서 버텼다. 그렇게 한 달 반이 지나자 그는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처음에는 아무 의사표시도 하지 못하던 그가 응응응 거리면서 자기 의사를 표현하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만 확인됐을 뿐 더 이상의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을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지내야 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절망은 극에 달했다. 이제 포기해야 하나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죽음을 떠올려야 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그가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그건 쓰러진 지 사개월만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닌 움직이지 않는 몸을 추스리기 위해 본격적으로 치료에 매달렸다. 침을 맞고, 좋다는 민간요법은 모두 다 동원해서 오직 마비된 몸을 움직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의 치료는 곧 난관에 부딪쳐야 했다. 경제적인 곤란이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번 돈은 모두 빚 갚는데 들어가서 그의 수중엔 남은 돈이 없어Te. 그랬는데 병원비만 해도 한 달에 이백만원이라는 돈이 들어갔다.
여기에다 민간요법을 받는데 또 돈 몇백만원씩이 필요했다. 이런 저런 치료비로 돈을 지출하다보니 나중에는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는 집을 날리고 그것도 모자라 세간을 처분해야 했다. 결국 셋방살이를 전전하게 되면서 그는 몰락을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차라리 쓰러졌을 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허탈해서 하지 말아야 할 가정을 해야 했다.
 그의 고난은 계속 이어진다. 치료비도 문제였지만 정작 급한 것은 생활비였다. 그가 쓰러져서 치료에 매달리는 사이 이남일녀인 아이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는 전적으로 아내가 책임져야 했다. 아내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아내가 벌어오는 돈을 생활비로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계속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 되면서 아내와도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혼 얘기가 들먹여지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하면서 그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여기에다 아이들은 냄새가 난다고 아버지 곁에 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게 가족으로부터 무시당하는 거라고 했던가. 그는 그 지경에 이르자 정말 죽고 싶었다. 그렇지만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로서는 자살도 결행하기 힘들었다. 그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마음속으로 나는 이미 죽은 놈이다. 라는 말을 되뇌이며 그 힘든 세월을 지내야 했다.
 그 시기. 그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우선 자식으로서 부모한테 자식 노릇 못하고 애들한테 아버지 노릇 못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어요. 낮에는 그래도 괜찮아요. 그런데 밤만 되면 꼭 죽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장롱 꼭대기에 물건을 못 놓게 했어요. 그게 떨어져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머리맡에는 뭘 못 놓게 했죠. 그렇게 하고 나서도 안심이 안돼 올빼미처럼 밤을 꼬박 샜어요. 그리고 누워 있다보니 소화가 안돼요. 소화가 안되다 보니 몸이 여기저기 아파서 잠을 못자는 거예요. 그때는 꼭 내 자신이 무덤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해요. 그러면 문 다 열어놓게 하고 발광을 하죠.
그러다가 옛날 생각하면서 꺼이 꺼이 우는 거예요..
아마 그게 정신병인가 봐요. 밤에 한숨도 못자다가 창문에 해가 뜨면 아. 이제는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는 안심해서 잠이 와요. 그렇지만 마음은 항상 불안하죠. 문을 안잠그면 꼭 도둑이 들어올 것 같고, 내가 반항을 못하니까 큰일 날 것 같은 조바심 때문에 낮에는 곡 문을 잠그게 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지냈어요."
 그의 이어진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부모보다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 게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두 번재는 살았지만 사람 구실을 못한다는 게 가슴을 후벼파는 아픔이었고. "내 친구들은 좋은 회사에서 높은데 있는데 나만 경쟁에서 탈락돼 비참한 상태에 빠진 것은 별로 마음 아프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한테 주어진 삶이 너무 엉터리라는 데는 분노가 치밀었죠. 하지만 내가 분노해봐야 알아줄 사람도 없었지만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닥쳐야 하느냐고 신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은평구 노인회장으로 있던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 구원의 손길은 다름 아닌 그를 생활보호 대상자로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는 삼년전 생활보호 대상자가 됐다. 천정에서 바닥으로의 신분 전략을 그는 망설임 없이 고맙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만큼 그의 사정이 다급했다.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자 우선 치료비가 들지 않아 그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철저히 망해 셋방살이를 전전하던 그에게 정부는 보금자리도 마련해 줬다.
작년 칠월 그는 서울 월계동에 있는 영구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었다. 영구임대주택 입주와 동시에 그는 창피해서 미루던 장애우 등록도 마쳤다. 이급 장애우 수첩을 가지고 그는 장애우 계층에 편입됐다.
 이제 장애우라고 불리게 된 그. 그의 소감은 아직까지는 부정적이다. "장애우라고 사람들이 사람대접을 잘 안해줘요. 사실 나도 장애를 가지기 전에는 그랬으니까 남 탓할 수는 없지만 섭섭한 건 사실입니다."
 그는 요즈음 다시 한 번 비상을 꿈꾸며 자신을 추스르고 있다. 그의 하루 일과는 아파트 계단을 하나 하나 세며 삼십층을 오르내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운동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여기서 지면 끝장이라다 라는 생각으로 그는 젖먹던 힘을 다해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땀에 홍건이 젖어 집에 돌아오면 그는 방안에서 또 운동을 계속한다. 움직이지 않는 팔을 올렸다가 내리고, 인상을 찌푸리면서 다리도 들었다가 내린다. 그가 최근 들어 이렇게 운동에 열을 올리는 것은 가까운 시일 안에 취업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새해부터 안양에 있는 내외건설이라는 회사에 관리직 임원으로 출근하게 됐다. 대학 동기가 사장으로 있는 그 회사에서는 그의 장애를 문제 삼지 않고 경력과 기술을 샀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지내고 있다.
 이제 회사에 출근하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나갈 참이다. 그는 지금 친구 회사에 다니면서 따로 건설회사를 운영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비록 이름 뿐이지만 아직 대성토건이라는 회사를 가지고 있다. 이 회사를 세계 최초로 장애우들만으로 운영하는 건설화사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그의 꿈이다. 건설현장이 갖는 특성상 도무지 실현 불가능하게 보이는 이 꿈을 그러나 그는 자신있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요즘 건설 업계는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외국서는 못 하나 박는 것도 기계가 합니다. 때문에 장애우들도 충분히 건설업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 제 계획은 장애우들이 직접 건설 현장에서 일 하라는 게 아닙니다. 건설일은 확인이 제일 필요한데 제가 보기에 장애우들은 집중력이 강해 확인에 있어서 만큼은 비장애우들보다 훨씬 앞서기 때문에 그 능력으로 회사를 운영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들뜬 표정으로 계획을 설명하는 그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비단 그의 표정에서 읽지 않더라도 그에게서는 살아 꿈틀대는 생기가 느껴졌다. 그의 이런 자신감은 전적으로 회사 출근을 앞두고 생긴 기대감에서 비롯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회사를 다시 다닌다고 생각하니까 마음 편하고 행복해요." 그는 말 끝에 웃음보를 터트렸는데. 그의 행복해 하는 모습에서 사람에겐 무엇보다 일이 중요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사람은 한 번 추락도 해봐야 됩니다. 저에게 주어진 고통과 아픔은 그 당시에는 견딜 수 없어서 죽음까지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한편으로는 저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남들한테 겸손해야 한다는 걸 배웠고, 또 계단을 한계단 한계단 밟고 올라가야 한다는것도 배웠죠. 그리고 비장애우들이 느끼지 못하는 장애우의 아픔을 알게 됐습니다. 이만하면 저의 시련은 가치 있는 시련인 셈이죠."
 그는 마지막 말을 하고 나서도 연신 웃는다. 그때 그의 아내가 외출에서 돌아왔다. 그는 아내를 향해 대뜸 "어떻게 됐어?"라고 물었다. 아내는 수줍은 표정으로 "떨어졌어요."라고 대답했다. 내막인즉 그의 출근을 돕기 위해 아내가 운전면허 시험을 치르러 나갔다 오는 길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는 아내에게 면막을 주면서도 웃는다. 그만큼 그에겐 여유가 있다는 증거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였다.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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