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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사람]한겨레신문사 편집국 기획위원 홍세화씨

“나와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똘레랑스의 의미입니다”

본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의 저자.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를 유행시킨 홍세화씨를 만났다.
1979년 남민전(남조선 민족해방 전선)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의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가 23년 간의 파리에서의 망명생활을 벗어나 작년 1월 드디어 영구 귀국하였다. 그는 이번 만남에서 ‘똘레랑스는 나와 다른 남을 다른 그대로 용인하는 이성의 목소리’라 말하였다. 나와 다른 종교, 사상, 지역 등에서 다름을 인정치 않고 다르다는 이유로 억압하고 차별하는 좁은 의식에서 벗어나, 나와 다름을 그대로 존중하고 수용하는 사회의식이야말로 진정한 똘레랑스의 정신이자 실천적 삶이라 역설하였다. 현재 한겨레신문사 기획위원으로 있는 그를 만나 프랑스 망명생활에서 겪었던 일들과 한국 사회 교육의 문제점, 프랑스의 장애정책 등 그의 평소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들어보았다.

▲만난사람

[어둡고 긴 터널을 나오기까지의 힘겨운 여정]
― 프랑스로 망명을 하고 그동안 여러 삶의 변화도 겪으셨는데, 이제 귀국하신 지 얼마나 되신 건가요?
“한국에는 99년도 6월에 처음 들어왔으니까 20년 3개월 만에 들어왔죠. 그때는 일시귀국이었고, 그 후 일년에 한번 정도 오다가 작년 1월에 영구 귀국했습니다. 저는 이곳에 혼자 있는 상태이고 아내와 아이들은 그곳에 있고요.”

― 프랑스 망명의 직접 원인인 1979년 당시의‘남민전 사건’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제가 78년도 3월에 처음 주식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10달 지난 79년 1월 1일 유럽지사로 나가라는 발령을 받았어요. 그때는 여권 받기가 쉽지 않을 때였습니다. 또 예전의 운동경력이 있으니까 받기까지 2달 반 정도가 걸렸죠. 결국 여권을 받고 3월 하순에 유럽으로 떠나게 되어 일을 하다가 바로 10월 달에 남민전(남조선 민족해방 전선)사건이 터지면서 거기에 연루가 된 거죠. 그런 상황에서 82년도 3년짜리 여권이 만료가 되었습니다. 여권을 더 연장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또한 그 때는 전두환 탄압정권이었고요. 그 때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정치적 망명을 신청해서 그것이 프랑스 외무부에 받아들여 진 거죠. 그 자격으로 계속 체류를 하게 된 겁니다.”

― 프랑스에서의 망명생활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을 텐데요.
“예. 한국에서는 알아주는 대학을 나와서 주식회사의 해외지사장으로 나왔다가 졸지에 외국인 노동자가 된 셈이죠. 그 당시 기술도 없었고, 영어는 좀 했지만 불어는 잘 못했어요. 그리고 정신적으로 육체노동을 한다는 각오도 돼있지 않았고요. 참으로 생존에 대한 전망이나 한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등 아무런 전망이 없었죠. 또한 광주항쟁을 진압한 전두환 정권이 언제 끝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죠. 80년대 초반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래도 프랑스 사회에서 버틸 수 있었다면 제 아이들 때문이 아니었나 싶네요. 그 당시 세 살, 여섯 살이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에 취학 시 등록금 들지 않고 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위안이었죠. 그런 점에서 프랑스의 교육정책은 참으로 잘 되어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있다는 이유로 가족수당, 주거수당도 받고 사글세 내는 것도 국가에서 40%정도를 보조해 주었죠. 전체적으로 보면 국가에서 수당으로 보조받은 것이 생활비의 1/3정도는 된 것 같아요. 사회보장이나 서민들을 위한 교육, 의료, 주거 등 정부정책 만큼은 국가에서 보장을 철저하게 해주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자주적·합리적 교육이 사회인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 2002년 대선을 통해서 열려진 진보의 목소리도 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보는데요, 아직 우리 사회가 진보세력을 정치세력으로 실제화 하는데 인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결국 민노당에 투표한 유권자가 4%를 넘지 못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저희 시대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명확히 이분구도 상황이었고, 지금 이 구도가 약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잔재하고 있죠. 교육 현장이 그렇고 획일적인 군사문화가 보태지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이미 선악구도가 세뇌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방법이 없었던 거죠. 이는 소위 반공주의가 만들어낸 함정의 핵심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지고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지난 반세기동안 특히 교육을 통해서 관철되어 왔다고 봐요. 그게 저는 국가주의 교육의 폐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조금씩 탈냉전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제는 좀 합리성을 따지는 시기가 오지 않았나 하는 전망을 갖습니다. 노무현정부의 수립이 그런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사회적으로 보면 분단 이래에 극우 헤게모니가 작동을 해왔죠. 이것이 계속 관철되다가 97년 대선에서 김대중후보가 되면서 정치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극우세력이 헤게모니를 상실했죠. 김대중정부에서 그것이 정치부분에 머물러있었다면 이번의 노무현정부의 수립은 정치부분 뿐 아니라 모든 사회부분으로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은 거죠. 촛불시위가 보여주는 것이 탈냉전이라는 의미에서 바로 노무현정부로 연결되고 이제는 한국사회의 극우세력의 헤게모니는 이제 내리막길을 걸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탈냉전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는 미국의 이익과 우리의 이익이 같다고 강제되어 왔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거죠. 노무현정부가  들어서고 북한과 미국의 중재를 선언할 수 있을 만큼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탈냉전화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측면에서 보면 무역의존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미국에 대해서 자주적인 노선을 취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회구성원들이 얼마만큼 더 자주의식에 대한 생각을 갖느냐에 따른 것이죠. 사회인식을 바꿀 수 있는 교육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똘레랑스 - 나와 다른 남을 그대로 용인하라는 이성의 목소리]
―‘똘레랑스에서 배우자’우리 나라에서는 똘레랑스를 관용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요, 똘레랑스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똘레랑스는‘나와 다른 남을 다른 그대로 용인하라’는 이성의 소리입니다. 용서와는 다른 것이죠. 관용은 잘못하여 실수했지만 너그럽게 봐준다라는 이런 의미의 뉘앙스지만 똘레랑스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순전히 다만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똘레랑스를 관용이라고 사용하면 똘레랑스의 내용 자체를 아주 왜곡하는 것이죠. 그것은 우리가 다르다라는 표현을 틀리다라고 말하는 것하고 같은 맥락의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관용이라는 것이 잘못된 실수를 전제로 한다면, 똘레랑스는 순전히 다름을 전제할 뿐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죠.”

― 우리 연구소의 영문표기는 "장애인(Disabled)"대신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Differently Abled Persons)라고 하는데 이는 곧 장애우도 다만 다른 능력을 가진‘사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의미였습니다. 똘레랑스의 다름의 정신과 잘 부합이 되는지요.
“똘레랑스는 나와 다른 사상, 종교, 출신교, 성, 성징과 같은 조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요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다름을 만나게 됨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사회는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고 차별하죠. 다름을 용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우리사회는 다르다라는 차별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 또한 의식의 문제로서 이성의 성숙단계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에 눈뜨지 않았을 경우에는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직자적인 반응을 갖게 되죠. 장애라는 이유의 차별, 출생지가 다르다는 이유의 차별은 결국 그만큼 이성의 성숙도가 낮다는 것이죠.
똘레랑스의 사상은 16세기의 유럽에서 있었던 신구교간의 분쟁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산물이죠. 같은 하나님의 자손인데 신교도와 구교도가 갈라지면서 서로가 서로를 용인하지 않고 상대방을 서로 악이라 배타하고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 학살, 전쟁이 일어났죠. 이러한 종교분쟁 이후에 유럽인들은 많은 성찰을 통해 인간의 다름을 빌미로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느냐를 성찰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서로의 다름의 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17세기 인문주의나 18세기의 계몽사상들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펴보면 20세기에 같은 민족이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얼마나 잔인해졌습니까? 전쟁도 일어나고, 같은 마을에 살던 사람끼리도 학살하고. 다름을 빌미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경험을 했는데 이것에 대한 반성적 성찰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냉전상황에서 냉전논리만 적용했을 뿐 인간이 다름을 핑계로 잔인해 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성찰은 부족했다는 거죠. 장애에 관한 문제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장애우도 장애를 선택한 것이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이런 것들을 극복해야만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고 봅니다.”

―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을 통해 방화를 저지른 사람이 지체2급장애인이다라고 말하면서 마치 장애를 가진 사람들 모두가 불을 지를 만큼 위험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심어준 것은 언론의 소수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에서도 살인사건이 나게 되면 살해자가 흑인 일 때는 항상 흑인이라고 밝힙니다. 백인이면 그냥 이름만 나오고. 흑인이라는 성격 때문에 그 행동을 연결지어 생각하고 이런점이 선입관을 갖게 되는 것을 언론이 조심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런 식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거죠. 우리하고는 다르다는 선입관이 박혀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미관계는 자주적인 민족의식으로 해결해야]
― 얼마 전에 촛불시위도 있었지만 반미와 주권의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데요. 노무현대통령도 우리 나라 군대 작전권이 우리에게 없다는 자조를 했다고 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주권이 있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친미사대주의자에 의해 주권인식을 갖지 않는 것이 좋은 것처럼 만들어져 왔습니다. 우선 민족적 정체성을 교육과정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워낙 친미사대주의자들이 그 뿌리가 친일사대주의자였고 정통성이 없다보니까 미국의 힘이 필요했던거죠. 요는 남북관계에 있어서 미국의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동전의 양면으로 북한이 위험하다는 생각과 맞물려 있는데 촛불시위가 갖고 있는 것이 탈냉전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이제는 사회구성원들이 북한이 위험한 존재라기보다는 골치아픈 존재라는 인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력의 차이라든지 정도를 볼 때 북한이 과연 위협적인 존재인가라는 것이죠. 아니라고 봅니다. 그만큼 미국의 힘을 유지시키려고 하는 논리가 약해지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이제 겨우 미국이 우리의 맹방의 관계가 아니라 미국의 유익을 위해서 진주하고 있을 뿐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진보적 가치관은 생활정치에서 실천하고 녹여내야 합니다]
― 정치가 바뀌어야 된다는 차원에서 이제 진보정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인데요. 개인이 정책에 참여하여 사회를 변화하는, 직업적 정치가 아니라 생활 정치의 전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국 사회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하여 정치를 바꾸어야 되는데, 현재 진보정당과 개혁국민정당은 보완관계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공익이라는 기본 틀을 놓고 서로 용인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극우 헤게모니 집단의 존재가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뭉쳐왔다면, 이제는 공익이라는 목표 하에 서게 될 새로운 진보의 정당은 서로가 서로를 용인하며 경쟁하는 관계, 이것이 똘레랑스가 되는 것이죠.”

― 우리가 프랑스 진보주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진보정당은 이념적 동질성으로 만났고, 그래서 이념적 동질성을 계속 확인하면서 나갑니다. 극우세력은 이권집단이기 때문에 이념이고 뭐고 없거든요. 이권만 있으면 다 뭉치죠. 하지만 진보세력은 이념적 동질성을 통해서 만나기 때문에 자주 확인하면서 합리적인 대안을 찾기 위해 고민합니다. 조중동을 보는 사람들은 이념적 동질성이 같다고 구독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한겨레 보는 사람들은 일단 삶을 윤택하기 위해 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근접하다 보기 때문에 보는 거죠. 비판적이기 때문에 한겨레를 많이 봐주어야 합니다.”

― 이제 한국에서 사회구성원과 어떤 관계 속에서 만나고 싶으십니까?
“저는 두 가지로 만나려고 합니다. 하나는 말이고 하나는 정서죠. 저는 한국인의 말을 가지고 있고 한국인의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사회와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리고 제 아이들의 경우에는 언어와 정서가 프랑스에 가깝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땅이 더 맞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아이들이 한국에서 더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언어문제라든지 등의 한계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프랑스 장애정책이 우리사회에 귀감이 되길 바라며]
―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물리적 환경이 좋지 않습니다. 휠체어 타고 혼자 어디를 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파리에서 택시운전도 하셨는데요, 프랑스 환경은 어떻습니까?    “프랑스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동안 한국에서 오신 지체장애를 가지신 분을 태우고 함께 오로세 미술관을 간 적이 있습니다. 가니까 바로 미술관 측에서 이동을 위한 제반 서비스를 마련해 주었고, 당사자는 물론이고 저도 공짜로 들어갔어요.(웃음) 그리고 미술관을 휠체어로 다니는데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동에 대해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환경이고 나름대로 정부에서 무척 노력을 하고 있고요. 3년 전에 법안이 하나 제기 되었는데 그 때가 사회당 정권 때였죠. 장애우를 위해 휠체어는 물론이고, 집에 거주하는 장애우의 교육을 위한 통신기기나 비용 등도 국가에서 책임져 주어야 된다고 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수당도 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장애우가 있다고 부모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국가가 지원을 해주고 있죠.”

― 함께걸음 독자들은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마디 해 주시겠습니까?
“이 사회가 참으로 어렵다고 해도 사회에서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자신의 그림을 이 사회속에서 그려본다는 생각을 했으면 합니다. 결국 자신이 이 사회에 어떻게 표현되는지 스스로 한번 그려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서로 연대하고 여려움이 있어도 싸워서 이겨나가고 포기하지 않는 그런 믿음이 바탕이 되는 그림을 그려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대담 김정열 편집주간/ 정리 박광규 기자/ 사진 윤정은 사진기자

작성자박광규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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